두 도시의 이야기
프랑스 혁명 시기를 배경으로 삼은 '두 도시의 이야기'(A Tale of Two Cities)라는 소설이 있다. '크리스마스 캐롤', '올리버 트위스트' 등으로 유명한 영국의 챨스 디킨스의 소설이다. 런던과 파리를 오가며 벌어지는 사랑과 우정과 질투와 희생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내용이다. 마이에르베르의 생활도 어찌보면 두 도시의 이야기를 닮은 것 같다. 그가 오페라로서 성공을 거두어서 명성을 얻은 곳은 파리이지만 역시 고향은 베를린이었다. 마이에르베르는 파리에서 살았지만 베를린에는 가족들이 살고 있었다. 마이에르베르에게 있어서 베를린은 고향이전에 생활의 본거지였다. 마마이에르베르의 부인인 민나는 파리를 좋아하지 않아서 베를린에서 지냈다. 바그너의 첫번째 부인의 이름도 민나인데 마이에르베르의 부인의 이름도 민나이다. 마이에르베르의 자녀들도 베를린에서 학교를 다녔다. 마이에르베르가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도 베를린에서 살고 있었다. 마이에르베르는 1832년에 프러시아 궁정의 카펠마이스터(음악감독)로 임명된바 있다. 마이에르베르는 프러시아 궁정에서 왕실을 위해 이런저런 일들을 해야했다. 이런 이유로 1830년대 이후의 마이에르베르의 생활은 두 도시를 오가면서 지내는 매우 바쁘고 복잡한 것이었다. 하지만 소설에서 처럼 사랑과 질투와 시기 등이 점철되어 있는 생활이었다. 다시 파리로 돌아가서, 마이에르베르는 파리 오페라 극장의 루이 베롱(Louis Veron) 감독으로부터 새로운 그랜드 오페라를 작곡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런데 그때 마이에르베르는 다른 경로를 통해서 외진 스크리브가 대본을 쓴 오페라 코미크인 '짐꾼'(Le portefaix)의 작곡을 부탁받았었다. 마이에르베르는 파리 오페라 극장에게 '짐꾼'을 공연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러나 파리 오페라 극장측은 5막의 그랜드 오페라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마이에르베르로서는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그랜드 오페라를 공연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고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새로운 5막의 그랜드 오페라를 만들기로 계약을 맺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위그노'였다. '짐꾼'은 스페인의 호세 멜코르 고미스(Jose Melchor Gomis: 1791-1836)라는 작곡가가 대신 작곡했다. 마이에르베르는 외진 스크리브와 협의한 끝에 '위그노'를 오페라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파리 오페라 극장의 화려한 오디토러움
마이에르베르와 루이 베롱이 맺은 계약에 의하면 새로운 5막의 그랜드 오페라는 1833년 말까지 전달한다고 되어 있다. 만일 이 약속을 어긴다면 마이에르베르가 루이 베롱에게 3만 프랑의 배상을 해야한다는 조항도 있었다. 3만 프랑이 요즘 돈으로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막대한 금액이었을 것이다. 웬만한 작곡가라면 그만한 금액을 배상할 능력이 없어서 아예 계약을 포기할지 모르지만 마이에르베르는 그럴 능력이 충분하므로 별로 걱정을 하지 않았다. 마이에르베르는 지정된 기간에 '위그노'를 완성해서 제출하지 못했다. 루이 베롱은 당연히 마이에르베르에게 3만 프랑의 배상을 요구했다. 마이에르베르는 계약대로 3만 프랑의 손해배상금을 베롱에게 지불했다. 그렇지만 작곡가로부터 그만한 액수의 돈을 작곡이 늦어졌다고 해서 받아낸 경우는 전대미문이어서 잘못하면 파리 오페라 극장의 위신도 손상될 판이었다. 그래서 루이 베롱은 며칠 후에 마이에르베르와 다시 계약을 맺어서 그 돈을 돌려 주었다. 마이에르베르는 '위그노'의 스코어를 1834년 말에 파리 오페라에 제출했다. '위그노'는 그로부터 2년 후인 1836년 2월 29일에 파리 오페라에서 역사적인 초연을 가졌다. 그리고 문제의 루이 베롱은 그 전에 음악감독직을 사임하고 대신 앙리 위퐁셀이 부임하였다. 앙리 뒤퐁셀은 마이에르베르에게 대단히 협조적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위그노'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대성공이었다. 장엄하고 화려한 무대 장치와 특수 효과는 그 전해에 초연되었던 알레비의 '유태여인'(La Juive)보다 훨씬 두드러졌다. 베를리오즈는 '위그노'의 스코어를 보고서 '음악적 백과사전이다'라고 말했다. 그만큼 화려하다는 의미였다. 특히 아돌프 누리와 코르넬리 활콘의 노래는 더 할수 없는 찬사를 받아도 부족함이 있을 정도였다.
'위그노'의 한 장면. 도이체 오퍼 베를른
'위그노'는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된 모든 오페라 중에서 초연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1천회의 공연을 기록한 유일한 오페라이다. 1906년 5월 16일의 공연으로 1천회를 기록하였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계속 공연되었다. 2017년 현재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만 몇회나 공연되었는지는 정확한 자료가 없어서 모르겠으나 아마도 1천 수십회를 기록하였을 것이다. 그런 작품은 파리 오페라의 역사상 처음이었다. 파리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공연되었다. 미안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공연되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아무튼 '위그노'는 19세기를 장식한 가장 성공적인 오페라였다. 그런데 베를린에서는 여러 난관을 겪어야 했다. 그중에서도 이탈리아 출신인 가스파레 스폰티니(Gaspare Spontini)의 질투와 반목은 참을수 없는 것이었다. 스폰티니는 1820년 이래 베를린 호프오퍼의 음악감독 겸 궁정카펠마이스터였다. 스폰티니는 그저 틈만 있으면 마이에르베르를 비난하고 중상모략하였다. 아마 젊은 마이에르베르가 자기의 자리를 빼앗으려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한편, 베를린의 신문들은 '악마 로베르'의 베를린 공연이 지연되고 있는 것과 관련해서 이는 마이에르베르가 베를린에 대하여 관심을 두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면서 비난했다. 말하자면 파리만 사람이고 베를린은 안중에도 없느냐는 식이었다. '악마 로베르'의 베를린 공연은 1832년 6월에야 이루어졌다. 여기에 평론가이며 시인인 루드비히 렐슈타브(Ludwig Rellstab)도 마이에르베르에 대하여 공공연한 비난을 서슴치 않았다. 렐슈타브는 마이에르베르의 첫 오페라인 '슐레지아 야영'의 대본을 쓰기까지 해서 마이에르베르와는 무관하지 않은 처지인데 무엇이 못마땅했는지 아무튼 마이에르베르를 비난하였다. 렐슈타브라는 이름은 아마 귀에 익을 것이다. 슈베르트는 연가곡 '백조의 노래'에 렐슈타브의 시를 몇 개 인용하여 가곡을 작곡했다. 또한 렐슈타브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4번의 1악장이 마치 스위스의 루체른 호수에 비치는 달빛과 같다고 말하는 바람에 '월광 소나타'라는 별명이 붙게된 바로 그 사람이다.
'악마 로베르' 그림. 악마 로베르는 실은 노르망디 공작이다. 알리스는 로베르의 이복 동생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마이에르베르로서 독일어 오페라, 또는 독일 스타일의 오페라를 작곡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우선은 '위그노'의 베를린 공연을 추진하는데 신경을 썼다. 그런데 프러시아의 검열 때문에 '위그노'의 베를린 공연은 허락이 나지 않았다. '위그노'는 이룰수 없는 사랑이야기인데 당국은 왕정에 대한 반대의견이 들어 있다고 해서 허락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위그노'는 베를린에서 뿐만 아니라 독일의 다른 도시에서도 공연허락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이에르에게는 하나의 철학이 있었다. '나의 작품에 대하여 어떠한 비난이 있더라고 반응하지 않는다'는 원칙이었다. 그리고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개인대 개인으로 논쟁을 벌이지 않겠다는 다짐도 했다. 그래서 스폰티니가 어쨋든, 렐슈타브가 어쨋든, 그리고 당국이 검열을 앞에서워서 무어라고 하든 일체 대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은 파리에 더 신경을 쓰기로 했다. 마이에르베르는 두 편의 오페라를 새로 구상하고 있었다. 하나는 '예언자'(Le prohete)이며 다른 하나는 '생 마르'(Le cinq mars)였다. '생 마르'는 미루어 두고 대신 '아프리카 여인'을 추진키로 했다. '생 마르'는 나중에 구노가 작곡하였다. 마이에르베르는 '아프리카 여인'을 1840년까지 완성하는 것으로 계약했다. 마이에르베르는 '아프리카 여인'의 타이틀 롤을 '악마 로베르'에서 찬란한 갈채를 받았던 소프라노 코르넬리 활콘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그런데 활콘의 음성은 정말로 뜻밖에도 1837년에 대실패를 보았다. 마이에르베르는 어쩔수 없이 다른 사람을 구해야 했다. 한편, 마이에르베르는 1839년 8월에 파리의 볼로뉴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중에 바그너를 처음으로 대면하였다. 마이에르베르보다 22년이나 아래인 바그너는 마이에르베르에게 '리엔치'의 스코어를 한번 보아 달라고 요청했다. 마이에르베르는 '리엔치'를 드레스덴에서 공연될수 있도록 지원해 주었다. 결국 '리엔치'는 1842년 10월 드레스덴에서 초연되었다.
현대적 연출의 '리엔치'. 이 오페라의 드레스덴 초연은 마이에르베르의 도움이 컸다.
마이에르베르는 1841년 말에 드디어 '예언자'를 완성했다. 그러나 파리 오페라가 공연을 서두르자고 하자 이를 거절했다. 파리 오페라의 음악감독인 레옹 피예(Leon Pillet)가 '예언자'의 여주인공인 피데(Fidés)를 자기의 정부인 로지느 슈톨츠가 맡도록 해 달라고 요청하는 바람에 기분이 상해서 거절했던 것이다. 마이에르베르는 로지느 슈톨츠를 '음악감독의 음악감독'이라면서 비난했다. 원래 마이에르베르는 피데의 역할을 당대의 소프라노인 폴랭 비아르도(Pauline Viardot)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마이에르베르는 레옹 피예의 소행이 못마땅해서 누가 무어라고 해도 당분간은 '예언자'를 절대로 무대에 올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에 따라 '예언자'의 스코어를 파리의 어떤 변호사에게 맡기고 자기의 주장이 관철될 때까지 절대로 스코어를 오픈하지 않도록 했다. 마이에르베르는 돈이 궁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고 싶은 대로 주장을 펼수가 있었다. 아무튼 그러기를 8년이나 끌었다. 마침내 1849년에 파리 오페라 측이 마이에르배르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합의했다. 그에 앞서서 프러시아에서는 큰 변화가 있었다. 프레데릭 빌헬름 3세가 서거하고 프레데릭 빌헬음 4세가 프러시아의 새로운 군주가 되었다. 프레데릭 빌헬름 4세는 상당히 진보적이었다. 스폰티니는 해고되었고 '위그노'의 베를린 공연이 1842년에 실시되었다. 마이에르베르는 프러시아 음악총감독이 되었고 이러 궁정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었다. 마이에르베르는 궁정 행사를 위해 여러 곡들을 작곡했다. 이어 1856년에는 프레데릭 빌헬름 왕의 요청에 의해 미하엘 베르의 희곡인 '슈트루엔제'(Struensee)의 극음악을 작곡했다. 미하엘 베르는 마이에르베르의 동생이었다. 연극 '슈트루엔제'는 종전의 정권에서는 공연금지가 되었던 것이다. 연극 '슈트루엔제'는 독일의 의사인 요한 프리드리히 슈트루엔제(Johann Friedrich Struensee: 1737-1772)의 행각을 다룬 내용이다. 요한 프리드리히 슈트루엔제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7세의 주치의로 활동했다. 그러나 권력에 눈을 돌려서 덴마크 정부의 장관이 되었다. 얼마후 그는 정신질환인 왕을 등에 엎고서 실제의 섭정이 되어 여러가지 자의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다가 끝내는 카롤리네 마틸다 왕비와 스캔달을 일으켰고 마침내 딸 까지 두게 되었다. 슈트루엔제는 높은 권세를 누리다가 결국은 화무십일홍이란 말과 같이 몰락하였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였다.
'예언자'의 무대 스케치. 대단하다.
1843년에는 베를린 오페라 하우스가 화재로 잿더미가 되었다. 밥은 못 먹어도 오페라는 보아야 하기 때문에 즉각 새로운 오페라 극장의 건축공사가 시작되었다. 마이에르베르는 새로운 오페라 극장의 개관에 공연할 독일어 오페라를 작곡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래서 만들기로 한 것이 '슐레지아 야영'(Ein Feldlager in Schlesien)이었다. 프레데릭 대왕의 생애를 다룬 작품이었다. 대본은 프랑스의 외진 스크리브가 맡았지만 내용이 프러시아의 애국적인 면을 그린 것이므로 독일인에 의한 독일어 대본이 필요했다. 그래서 시인 루드비히 렐슈타브가 스크리브의 대본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책임을 맡았다. 렐슈타브가 '슐레지아 야영' 제작에 참여하게 되어 종전에 호의적이지 않았던 두 사람의 관계는 현저하게 개선되었다. 마이에르베르는 여주인공 비엘카를 당대의 소프라노로서 스웨덴의 나이팅게일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제니 린드(Jenny Lind)에게 맡길 것을 염두에 두고 작곡했다. 그러나 1844년 12월 7일의 '슐레지아 야영' 초연은 제니 린드가 사정이 있어서 출연하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다행하게도 초연 이후의 몇몇 공연에는 제니 린드가 직접 출연했다. 1847년에는 '슐레지아 야영'이 비엔나에서 공연되었다. 당시 비엔나는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였다. 마이에르베르는 이 오페라의배경을 프러시아가 아닌 보헤미아로 바꾸었다. 보헤미아는 신성로마제국에 속한 지역이었다. 대본도 물론 배경이 변경됨으로서 따라서 수정되었다. 얼마후 마이에르베르는 피터 대제가 등장하는 '북부의 별'(L'etoile du nord)에 '슐레지아 야영'의 음악을 상당부분 인용하였다. '북부의 별'은 1854년에 파리의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의 공연되었다.
스웨덴의 나이팅게일이라고 불린 제니 린드. 마이에르베르는 제니 린드를 '슐레지아 야영'의 히로인으로 등장시킬 생각이었다.
파리에서는 '예언자'와 '아프리카 여인'의 제작이 자꾸만 지연되고 있었다. 마이에르베르가 스코어를 주지 않아서였다. 마이에르베르는 극장측의 성화에 못이겨서 숨어서 지내야 했다. 물론 지연의 이면에는 파리 오페라의 음악감독인 피예와 캐스팅을 두고 의견이 맞지 않아서 그런 점도 있었다. 그러는 중에 마이에르베르는 1846년에 스크리브와 생 조르즈와 함께 새로운 프로젝트를 추진코자했다. '노에마'(Noema)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파리 오페라의 음악감독인 피예가 물러나고 새로 뒤퐁셀이 취임하였다. 마이에르베르는 새로 부임한 음악감독과의 협의를 통해서 '예언자'를 자기 주장대로 공연하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합의는 피데 역을 비아르도가 맡도록 한 것이다. 그리하여 '예언자'는 1849년 4월 16일 파리 오페라에서 초연되었다. 마이에르베르의 이 새로운 오페라는 말할 나위도 없이 대성공을 거두었다. 비아르도의 출연도 성공이었다. 피데의 역할은 비아르도의 출연으로 본래의 여주인공보다 더 인기를 끌었다. '예언자'는 파리 시민들의 열화와 같은 요청에 의해 해를 거듭하며 계속 공연되었다. 1850년의 공연에는 바그너도 관람하였다. 바그너는 그때 드레스덴으로부터 추방 당해서 파리에 잠시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쯤해서 바그너는 마이에르베르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아마도 마이에르베르가 유태인이기 때문에 반유태인 감정이 발동하여서 비판을 서슴치 않았던 것 같았다. 실제로 바그너는 그의 저서 Das Judenthum in der Musik(음악에 있어서 유태주의)에서 마이에르베르 뿐만 아니라 멘델스존도 심각히 비난하였다. 유태인들의 독일의 음악을 망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1849년 '예언자' 초연의 무대 스케치.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이다.
1850년대에 들어서서 마이에르베르는 여러 질병으로 심신이 고단해 있었다. 아마도 우울증(히포콘드리)이 심해 진 것으로 보였다. 그로 인하여 그는 더 이상 작곡에 집중하지 못하였다. 그러는데 1854년에 그가 가장 사랑하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마이에르베르에게는 말할수 없은 충격이었다. 사람들은 혹시 어머니의 죽음이 작품활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1854년에 발표한 '북부의 별'(L'etoile du nord)가 대성공을 거두는 바람에 사람들의 기우는 사라졌다. 마이에르베르는 '북부의 별' 이후 두개의 새로운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성서에 나오는 유딧(Judith)에 대한 이야기를 스크리브의 대본으로 만드는 것, 그리고 '디노라'(Dinorah)라고 알려진 Le pardon de Ploëmel를 쥘르 바르비에의 대본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디노라'는 1859년 파리의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그러나 '유딧'은 완성하지 못하고 스케치로만 남아 있었다. 마이에르베르가 오페라 작곡을 스무스하게 추진하지 못한 이유 중에서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그동안 콤피로 일했던 대본가 스크리브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라고 본다. 외진 스크리브는 1861년에 세상을 떠났다. 마이에르베르는 1862년에 비록 '유딧'의 대본은 완성하지 못했지만 스크리브의 미망인에게 대본료를 충분히 지불하였다.
'디노라'에서 그림자 춤. 스케치
마이에르베르는 말년은 오페라보다는 다른 음악들을 더 집중하여 작곡한 기간이었다. 예를 들면 1861년에는 프러시아의 빌헬름 1세의 대관식을 위한 행진곡을 작곡했으며 1862년에는 런던에서 열린 만국박람회를 위해 서곡을 작곡했고 그보다 앞서서 1860년에는 헨리 블레이즈 드 버리(Henry Blaze de Bury)의 연극인 La jeunesse de Goethe(젋은 시절의 괴테)의 극음악을 작곡했다. 또한 1863년에는 시편 93편을 비롯해서 여러 제례음악을 작곡했다. 그리고 파리의 유태교 회당을 위한 합창곡들도 작곡했다. 마이에르베르는 1864년 5월 2일에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다음날, 로시니는 마이에르베르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모르고 그를 만나기 위해 아파트를 찾아왔다고 마이에르베르가 세상을 떠난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아서 잠시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잠시후 정신을 차린 로시니는 그 자리에서 마이에르베르를 추모하는 합창곡을 작곡했다. Pleure, pleure, muse sublime 이라는 타이틀의 합창곡이었다. 5월 6일에는 파리의 갸레 뒤 노르드(북부역)에서 마이에르베르의 시신을 운구하여 베를린으로 갈 특별 기차가 마련되었다. 베를린에 도착한 마이에르베르의 시신은 쇤하우저 알레(Schönhauser Allee)에 있는 유태인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아프리카 여인'(L'Africaine)은 마이에르베르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인 1865년 4월 28일에 파리의 살르 르 플르티에(Salle le Peletier)에서 초연되었다.
베를린의 쇤하우저 알리에 있는 유태인 공동묘지. 오른쪽이 마이에르베르의 묘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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