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에르베르, 그리고 바그너
마이에르베르의 도움을 많이 받은 바그너, 그러나 마이에르베르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비난공격
역대의 작곡가들 중에서 아마 마이에르베르만큼 부유했던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멘델스존도 부유한 집안 출신이어서 안락한 생활을 했지만 마이에르베르도 아버지로부터 많은 유산을 받아서 남부럽지가 않았다. 더구나 마이에르베르는 오페라 작곡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 그러나 마이에르베르는 천성이 검소해서 화려한 생활을 하지 않았다. 돈이 많으니까 친구들이 많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저 정말 가까운 친구는 몇명만 있었을 뿐이었다. 친구들이 많지 않았던 것은 그가 유태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이에르베르는 전통적인 유태교 신자였다. 그러므로 사치, 또는 환락은 그에게 거리가 먼 단어였다. 그러면서도 어려운 사정이 있는 지인들이면 아낌없이 도와주었다. 아무튼 그는 누구든지 도와 달라고 손을 벌리면 마다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런 마이에르베르인데 유태인이기 때문에 공연한 비난과 모함을 받은 일도 한두번이 아니었다.예를 들어서 스폰티니의 마이에르베르 비난은 지나친 것이었다. 심지어 마이에르베르가 활동했던 시기에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조차 마이에르베르가 오페라로 성공한 것은 음악 평론가들에게 뇌물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소문을 퍼트리면서 중상을 했다. 마이에르베르를 비난하는 사람들 중에서 노골적으로 비난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바그너였다. 유태인 혐오증이 있는 바그너는 마이에르베르에 대하여 '그 사람은 음악이 아니라 돈에 더 관심이 있다.'고 말하면서 근거도 없이 비난하였다. 마이에르베르는 작곡가로서 예민한 성격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대단히 신중한 사람이었다.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으면 굳이 대응하지 않고 인내로서 보냈다. 그리고 그는 누구에게 뇌물을 주거나 또는 돈으로 무엇이든지 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마이에르베르는 이런 생각도 했다. 자기야말로 성공으로 인한 희생자라는 생각이었다. 성공했기 때문에 비난을 받고 모함을 받는다는 생각이었다. 마이에르베르는 거의 날마다 일기를 쓰는 습관이 있었다. 혁명과 전쟁으로 혼란했던 사회였기에 더구나 빼놓지 않고 일기를 썼다. 아무튼 일기 쓴것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신중하고 예민한 사람인지 잘 알수 있다. 그의 일기와 서한들은 나중에 8권의 방대한 책으로 엮어져 출판되었다. 이 책들은 당시의 음악 역사와 극장 상황을 알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바그너는 마이에르베르와 멘델스존을 유태인이라고 해서 혐오했다.
유태인들 중에서 여러 사람들이 기독교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유태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경우가 있다. 멘델스존과 그랬고 말러도 그랬다. 그러나 마이에르베르는 처음부터 끝까지 유태교 신자로서 생활했다. 마이에르베르는 유태교인 외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저는 언제까지라도 외할아버지의 신앙을 본받아서 살고자 합니다'라고 말한 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마이에르베르는 일기에 가족들과 친척들의 생일과 주요 기념일을 꼼꼼하게 적어 놓는 습관이 있었다. 그런데 그레고리안 칼렌다에 의해서가 아니라 유태 칼렌다에 의한 날짜를 적어 놓았다. 그것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유태인으로 생활하려고 했는지 잘 알수 있다. 그러면서도 유태인이기 때문에 받아야 하는 비난과 핍박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였다. 그는 동생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가 사는 사회는 반유태적인 혐오와 증오에 가득찬 시선들이 많이 있으니 그런 것들에 대비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충고한 일도 있다. 그는 유태인으로 태어난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고 운명이기 때문에 이를 거스르기 보다는 오히려 순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자기에 대하여 어떤 논란이 생기면 대응하지 않고 묵묵부답으로 있는 것이 종국에는 더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마음 속의 증오까지도 감추려 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슈만이다. 슈만은 오랫동안 마이에르베르를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비난해 왔다. 마이에르베르는 그의 일기에서 '1850년에 슈만이 지휘하는 것을 보았다. 나를 12년 동안이나 증오로서 비판하고 박해했던 그 사람의 모습을 생전 처음으로 보았다.'라고 썼다. 미워하는 감정을 나타내 보이지는 않았지만 글로 표현하기는 했던 것이다.
로베르트 슈만. 그런 줄은 몰랐는데 , 그는 바그너와 마찬가지로 대단한 반유태주의자였다. 그는 10여년에 걸쳐 마이에르베르의 작품을 비판해 왔다. 마이에르베르가 유태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음악잡지의 편집장이었기 때문에 그의 비평은 영향력이 컸었다.
그나저나 마이에르베르의 대표적인 오페라들을 가만히 보면 주인공들이 대체로 따돌림을 당하거나 적대시 당한 사람들, 또는 핍박받는 환경 속에서 지낸 사람들이라는 특징이 있다. '악마 로베르'의 로베르가 그렇고 '위그노'의 라울이 그러하며 '예언자'의 장이 그러하다. '아프리카 여인'의 바스코 다 가마도 그러하다면 그러하다. 아무튼 모두 '아웃사이더'들이다. 방관자가 아니라 열외자라는 말이다. 마이에르베르가 역경 속에서 꿋꿋하게 버텨나간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것은 우연이 아니라 그 자신의 환경을 비추어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다는 설명이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마이에르베르를 뚜렷한 명분도 없이 비난한 사람들은 여러 명이 있지만 대표적인 인물은 바그너이다. 바그너라고 하면 그의 천재적인 뮤직 드라마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선망의 대상이 되어 있는 위대한 작곡가이다. 그런데 바그너를 개인적으로 보면 사람이 그러면 안되는데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었다. 애정행각만해도 그렇다. 불륜, 스캔들, 외도 등등 바람직하지 않은 용어들은 한결같이 바그너에게 해당되는 말들이니 더 말해야 입만 아플 지경이었다. 바그너의 애정행각에 대하여는 본 블로그의 '풍운아 바그너'편에 비교적 자세히 설명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다만, 그가 방탕한 생활 이외에도 사치를 좋아하는 바람에 빚이 많았다는 얘기는 해야겠다. 왜냐하면 바그너는 마이에르베르를 비난하고 공격하면서도 마이에르베르에게 돈 좀 빌려 달라고 몇 번이나 사정을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마이에르베르에 대한 바그너의 태도는 남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상한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바그너는 마이에르베르에 대한 인기를 깍아 내리기 위해 별별 노력을 다 기울였다는 것이다.
'위그노'의 무대. 부다페스트
돌이켜보건대, 바그너가 마이에르베르를 처음 만난 것은 1839년 파리에서였다. 바그너는 26세의 청년이었고 마이에르베르는 48세의 장년이었다. 바그너는 '리엔치'를 무대에 올려서 명성도 얻고 돈도 벌어야 했다. 그러나 '리엔치'를 공연하겠다는 마땅한 극장이 나서지 않고 있었다. 파리에서 마이에르베르를 처음 만난 바그너는 염치도 없이 마이에르베르에게 도움을 청했다. 바그너는 마이에르베르에게 '리엔치' 악보를 보여주면서 조언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만하면 훌륭한 오페라이니 공연할 극장을 좀 주선해 달라고 요청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이에르베르는 바그너를 위해서 드레스덴극장에 부탁했고 그리하여 '리엔치'는 드레스덴에서 초연될수 있었다. 지휘자인 한스 폰 뷜로브는 바그너의 '리엔치'가 마이에르베르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초연된 것을 보고 '리엔치'를 '마이에르베르의 최우수 오페라'라고 농담 삼아서 얘기하기까지 했다. 그후에 바그너의 '방랑하는 네덜란드인'도 역시 마이에르베르의 도움으로 드레스덴에서 초연을 가질수 있었다. 바그너에게 있어서 마이에르베르는 그야말로 '고마운 선배님'이었다. 그래서인지 아무튼 그후로 바그너는 마이에르베르에게 비굴할 정도로 존경하는 태도를 보였다.
바그너의 '방랑하는 네덜란드인'의 드레스덴 초연도 마이에르베르의 도움이 컸었다. 사진은 사라소타 오페라 무대
바그너가 마이에르베르와 친분을 맺은 후부터 1846년까지 마이에르베르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솔직히 너무나 굽실거리고 아첨하는 듯한 내용이어서 '원 별 사람이 다 있네. 속도 없나?'라는 생각을 갖게 해 준다. 실제로 바그너는 오페라를 작곡함에 있어서 마이에르베르의 스타일로 만들고자 했고 처음엔 그런 노력도 기울였었다. 그러다가 1840년대에 이르러 자기의 명성도 높아지고 추종하는 사람들도 많아지자 마이에르베르의 스타일은 무슨 얼어 죽은 스타일이냐면서 자기 나름의 독자적인 스타일을 추구하였다. 1840년대 초반에 완성한 '탄호이저'와 '로엔그린'은 마이에르베르 스탠다드에서 한참 벗어난 것이었다. 그러면서 마이에르베르를 서서히 비난하기 시작했다. 아마 속으로 마이에르베르를 깍아 내려야 자기가 올라 갈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예를 들어서 바그너는 슈만에게 보낸 서한에서 마이에르베르의 오페라는 표면상의 인기만을 얻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맹비난하였다. 하지만 마이에르베르는 바그너가 무어라고 지꺼리던 대응하지 말자는 주의였기에 침묵하였다. 그러는 중에 어느때는 바그너가 마이에르베르에게 염치도 없이 돈을 빌려달라고 요청한 일도 있다. 무려 1만 2천 탈러를 꾸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 돈이 현재 돈으로 얼마나 되는지는 몰라도 상당한 액수임에는 틀림없다. 마이에르베르는 '언제는 나를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더니, 이번에는 돈을 빌려 달라고? 말이 빌려 달라는 것이지 그냥 달라는 것이 아닌가? 내 원 참!'이라면서 바그너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아무튼 마이에르베르로부터 돈 빌리는 일이 거절 당하자 바그너는 기다렸다는 듯이 마이에르베르에 대한 비난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러다보니 바그너와 마이에르베르의 사이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따지고 보면 마이에르베르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바그너가 그런 상황을 만들었던 것이다. 바그너의 마이에르베르 증오는 1849년 이래 더욱 두드러졌다. 마이에르베르의 오페라는 대성공을 거두고 있는 반면에 자기의 독일 오페라는 그렇지 못해서 그랬다.
마이에르베르의 오페라 주인공들에 둘러싸인 마이에르베르. '위그노', '예언자', '악마 로베르', '아프리카 여인' 등
바그너는 1849년 5월 드레스덴 봉기 이후에 정치적으로 곤경에 처해서 드레스덴을 떠나 도피생활을 했다. 만일 바그너가 작소니에 돌아온다면 최소한 감옥생활을 피하지 못할 형편이었다. 바그너는 이러한 도피 시기에 생활비도 부족해서 궁핍한 생활을 해야 했고 더구나 오페라도 제대로 공연되지 못하였다. 그러는 참에 마이에르베르의 '예언자'가 대성공을 거두고 따라서 돈도 많이 벌자 속이 상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바그너는 '음악에 있어서 유태주의'(Jewishness in Music)이라는 저서를 익명으로 내고 유태인들 때문에 독일의 음악이 제대로 발전하지 못한다는 주장을 폈다. 바그너는 그의 책에서 마이에르베르라는 이름을 직접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오페라로 성공했다는 사람이 실은 유태인의 치사한 처세 방법인 돈으로 매수하여 인기를 얻었다고 말하고 그것은 독일의 순수한 음악을 음험한 수단으로 폄하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렇기 때문에 유태인들의 작품은 저속한 것이라고 내세웠다. 바그너의 마이에르베르 비난은 바그너의 또 다른 저서인 '오페라와 드라마'(1852)에서 가중되었다. 바그너는 이 책에서 마이에르베르의 음악을 타겟 삼아서 표면적이며 모순된 생각으로 작곡된 것이라고 비난했다. 표면적이라는 것은 듣는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지 못하고 순간적인 감성만을 건드린다는 의미이다. 모순된 생각이라는 것은 독일의 작곡가이면 독일적인 아름다운 이상을 추구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인기영합주의 및 돈벌이 욕심으로 작곡했다는 의미이다. 바그너는 마이에르베르의 오페라를 '동기가 없고 효과만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바그너의 오페라를 유태인들이 싫어한다고 선전한 캐리캐추어. Das Judenthum in der Musik has uber Wagner's neustes Werk folgendes Urtheil gefallt라고 적혀 있다.
한편, '음악에서의 유태주의'는 1869년에 재간되었다. 마이에르베르가 세상을 떠난 후였다. 하지만 책의 내용은 마이에르베르를 더 비난하는 것으로 확장되었다. 첫 발간은 저자를 익명으로 했지만 재간에서는 바그너의 이름을 사용하였다. 아마 이제는 바그너라는 이름이 상당히 알려져 있기 때문에 실명을 사용했던 것 같다. 그보다도 아마 '유태인들이 전통적인 음악을 훼손하고 있다'는 바그너의 견해가 더 많은 층의 호응을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음악학자인 폴 로렌스 로우스(Paul Lawrence Rose)는 바그너의 마이에르베르와 멘델스존 공격은 사실상 독일의 반유태주의 사상을 자극하여 더욱 확대시킨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바그너와 그의 추종자들의 마이에르베르에 대한 명예훼손 작전이 효과를 보아서 바그너의 인기는 높아지고 반면에 마이에르베르는 무시당하기 시작했다. 간단히 예를 들어보면 1890년에 파리 오페라에서는 마이에르베르의 그랜드 오페라 4편이 모두 32회나 공연되었으나 바그너의 오페라는 단 한편도 공연되지 않았다. 1890년이라면 바그너의 '로엔그린'이 파리에서 초연되기 1년 전이었다. 그러했는데 1909년에는 파리에서 바그너의 오페라가 60회나 공연되었는데 마이에르베르의 오페라는 단 세번만 공연되었다. 그것도 '위그노' 한편이 3회 공연된 것이었다.
'로엔그린'은 파리에서 바그너의 명성을 올려주기 시작한 오페라였다. 사진은 마리인스키 무대
바그너의 오페라는 20세기를 거쳐 오늘날에도 계속 공연되고 있는데 마이에르베르의 오페라는 그렇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마이에르베르의 오페라가 그랜드 오페라이기 때문에 제작비가 많이 들고 여러 명의 정상급 성악가들이 출연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바그너 오페라도 제작비가 많이 들고 여러 정상급 성악가들을 필요로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치의 정책 때문이 아닌가 싶다. 마이에르베르의 오페라는 1933년부터 독일에서 공연금지되었다. 마이에르베르가 유태인이기 때문이었다. 이어 나치 독일의 세력 안에 들어 있던 나라들에서도 공연금지되었다. 오스트리아는 물론이고 체코,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덴마크, 노르웨이, 스페인, 이탈리아 등등에서 공연이 금지되었다. 대신에 바그너의 오페라는 크게 도약하였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최근에 이르러서는 마이에르베르에 대한 재평가와 함께 그의 오페라를 리바이발하는 움직임이 두드러지고 있다. 미국의 윌리엄 크로스텐(William Crosten)은 1948년에 '그랜드 오페라: 예술과 비즈니스'라는 저서를 통해서 마이에르베르의 오페라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보여주었다. 마이에르베르의 일기와 서한들도 새롭게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마이에르베르의 오페라와 당시의 오페라 상황, 그리고 극장에 대한 폭넓은 연구를 제시해 주는 출판물이었다. 여러 나라에서 마이에르베르 팬 클럽이 생겼다. 미국의 팬 클럽이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마이에르베르의 오페라가 리바이발되거나 음반으로 취입되고 있는 것이 두드러지고 있다. 존 서덜랜드의 '위그노' 공연과 음반 취입은 마이에르베르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갖도록 해주는 것이었다. 마이에르베르의 오페라는 세계 각지에서 생기를 가지고 공연되기 시작했다. 2004년에는 스트라스부르에서 '아프리카 여인'이, 역시 2004년에는 메츠에서 '위그노'가 공연되었다. '위그노'는 프랑스, 벨기에, 독일에서도 공연되었다. 2012년에는 런던의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악마 로베르'가 120년만에 처음 무대에 올려졌다. 2013년에는 독일의 헴니츠에서 '아프리카 여인'이 마이에르베르의 오리지널인 '바스코 다 가마'로서 공연되었다. 2015년에는 '예언자'가 유럽의 몇몇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되었다.
'위그노'의 한 장면.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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