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위대한 발자취

비엔나와 안톤 베베른

정준극 2018. 2. 23. 16:16

비엔나와 안톤 베베른


안톤 베베른(Anton Webern: 1883-1945)은 스승인 아놀트 쇤베르크, 동료인 알반 베르크와 함께 비엔나 제2학파의 중심인물이었다. 안톤 베베른은 1883년 12월 3일 비엔나의 3구 뢰벤가쎄(Löwengasse) 53번지에서 태어났다. 오늘날 훈데르트바써하우스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집이다. 안톤 베베른의 아버지 칼은 공직자였고 어머니 아멜리는 재능있는 피아니스트 겸 소프라노였다. 안톤 베베른의 음악적 재능은 어머니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안톤 베베른은 청소년 시절은 주로 그라츠와 클라겐푸르트에서 보냈다. 카린티아의 클라겐푸르트 남동쪽 국경지대에 있는 오버도르프(Oberdorf)라는 작은 마을에는 안톤의 아버지 칼이 유산으로 상속받은 별장이 있었다. 프레글호프(Preglhof)라는 이름의 저택이다. 안톤은 이곳에서도 많은 시간을 보냈다. 오버도르프는 오늘날의 노이하우스(Neuhaus)이다. 안톤 베베른의 풀 네임은 안톤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베베른(Anton Friedrich Wilhelm von Webern)이지만 그는 중간 이름들을 한번도 공식적으로 사용한 일이 없다. 그리고 귀족을 뜻하는 von이라는 단어도 1918년 오스트리아 새정부의 개혁조치에 따라 삭제했다. 그러나 훗날 오스트리아 음악협회는 기념명판을 만들면서 그를 존경하는 의미에서 이름에 von을 넣었다.


3구 뢰벤가쎄 53번지 건물에 부착되어 있는 안톤 베베른 기념명판. 1883년 12월 3일 안톤 폰 베베른이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내용이다. 오스트리아음악협회가 설치했다.

3구 뢰벤가쎄 53번지. 훈데르트바써 하우스 방향. 붉은 원으로 표시된 곳에 안톤 베베른의 생가라는 명판이 붙어 있다.


카린티아주 클라겐푸르트 동남쪽 국경지애의 작은 마을인 노이하우스에 있는 베베른 가족의 별장 프레글호프


안톤 베베른은 2차 대전이 끝나자 잘츠부르크의 첼 암 제(Zell am See)구에 있는 딸의 집에서 잠시 지내고 있었다. 안톤은 부인 민나와의 사이에 세 딸을 두었다. 큰 딸이 첼 암 제에 살았다. 당시 잘츠부르크 지역은 미군의 통제 아래에 있었다. 안톤의 사위는 미군물자를 밀수했다는 죄명으로 체포되어 있었다. 1945년 9월 15일 밤 안톤은 잠들어 있는 손녀들을 깨우기 싫어서 밖에 나와 잠시 담배나 한대 피고자 했다. 그때 순찰을 돌던 미군 병사가 주민이 통금을 어겼다고 생각해서 총을 쏘았다. 실은 통금시간이 되려면 15분이 더 있어야 했지만 미군은 통금시간을 어긴 것으로 보고 총을 쏜 것이다. 안톤은 그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안톤의 장례식은 첼 암 제의 미터질(Mittersill) 교회에서 거행되었고 교회묘지에 안장되었다. 후기이지만 그 미군 병사는 실상 요리병으로 그날따라 순찰의 임무를 맡았다. 그는 자기가 안톤 베베른을 죽였다는 최책감으로 괴로워하다가 결국은 고향 노스 캐롤라이나에서 1955년에 알콜중독으로 사망하였다.


미터질 교회묘지에 있는 안톤 베베른의 묘. 1949년에 세상을 떠난 부인 민나와 합장되어 있다.



세계적인 명문인 비엔나음악-공연예술대학교(Universität für Musik und Darstellende Kunst) 본관 앞의 광장이 안톤 베베른 플라츠(Anton-Webern-Platz)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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