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마리 앙뚜아네트

마리아 안토니아의 결혼

정준극 2018. 4. 13. 11:04

마리아 안토니아의 결혼


[라인강변의 켈]

 

마리 앙뚜아네트는 1770 5 7, 공식적으로 프랑스의 루이 오귀스트(1754-1793) 왕세자에게 인계되었다. 루이는 마리 앙뚜아네트보다 한 살 위였다. 인계되었다고 하니까 마치 물건을 전달한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나 사실은 어머니의 의향에 순종하여 정략적으로 결혼하는 것이므로 사랑이니 애정이니 하는 것은 당장 생각할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인계 장소는 켈(Kehl)이었다. 독일과 프랑스의 접경지대인 라인강변의 작은 마을로서 현재는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의 바로 건너편에 있는 마을이다. 프랑스 왕실을 대표하여서 드 노아이유(de Noailles)백작 부부가 마중나왔다. 누가 마중나왔느냐는 것까지 설명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핀잔을 줄지 모르지만 영접대표단의 드 노아이유백작부인은 나중에 마리 앙뚜아네트의 남편인 루이 왕세자의 공식 정부(情婦)로서 임명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 왕실에서는 왕이나 왕세자등이 공식적으로 정부 겸 애인을 둘수 있는 이상한 관습이 있었다. 더구나 그런 정부나 애인을 부모가 공식적으로 임명까지 했으니 두말하면 잔소리일 뿐이다. 임자가 있으므로 다른 사람들은 얼씨거리지 말라는 의미에서 였을 것이다. 영접단원 중에는 마담 엘리자베스(Madame Elisabeth)도 있었다. 나중에 마리 앙뚜아네트와 대단히 단짝으로 지낸 여인이었다. 결혼후 마리 앙뚜아네트는 도팽느(Dauphine: 왕세자비)라고 불렸다.

 

프랑스쪽의 스트라스부르에서 바라본 켈. 현재는 독일 도시이다. 라인강을 사이에 두고 독일과 프랑스로 갈라져 있다.

                         

[초야에 대한 관심]

마리 앙뚜아네트와 왕세자 루이 오귀스트의 결혼식은 1770 5 16(훗날 우리나라에서 5.16군사혁명이 일어난 날),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거행되었다. 프랑스의 영화(榮華)를 보는 것과 같은 초호화 결혼식이었다. 프랑스에서의 결혼은 초야(初夜)를 잘 치루는 것으로 완성된다는 관습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신혼부부의 초야를 여러 사람들이 지켜보며 일이 잘 치루어졌는지를 확인하였다. 마리 앙뚜아네트와 루이 오귀스트의 첫날밤 베드 신도 여러 사람들이 지켜보았다. 후문에 의하면 두 사람은 별다른 일을 치루지 않고 멀뚱멀뚱 지내다가 겨우 잠들었다고 한다. 하기야 14살 어린 새댁이 알면 얼마나 알것인가? 하지만 두 사람이 초야에 아무 일도 치루지 않았다는 것은 왕국의 종사를 위해서 불충한 것이라는 구설수가 그후 7년동안 두 사람을 괴롭히며 맴돌았다.

 

베르사이유의 왕비의 침실

                                              

[왕세자비의 생활]

프랑스의 왕세자(Dauphin)와 오스트리아 공주의 결혼은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문제는 그 반향이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이 강했다는데 있었다. 긍정적인 측면은 마리 앙뚜아네트가 일반 대중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는 것이다. 마리 앙뚜아네트가 백성들이 모인 첫 공개석상에 나타난 것은 결혼 3년후인 1773 6 8일이었다. 마리 앙뚜아네트를 보기 위해 파리의 튈러리 정원(오늘날의 튈러리 공원)에 운집한 시민들만 5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일부 시민들은 눈물까지 흘리며 열광하였다. 마리 앙뚜아네트가 오페라에 참석한 것도 대성공이었다. 극장에 모인 사람들은 무대는 보지 않고 로열박스에 앉아 있는 마리 앙뚜아네트만 열심히 쳐다보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가 오페라를 보던 마리 앙뚜아네트가 박수를 치면 관객들도 덩달아 열심히 박수를 쳤다. 마리 앙뚜아네트가 불쌍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활동에 참여하자 사람들은 ‘왕세자비 마마는 하늘이 보내신 분이야!’라면서 감격해 했다. 어느날 마리 앙뚜아네트는 어떤 가난한 사람의 임종을 직접 지켜보면서 가족들을 따듯하게 위로한 일이 있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유가족들이 정부로부터 생활보조비를 받도록 해주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은 그저 고맙고 황송해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베르사이유 궁전의 트리아농 정원을 두 자녀와 함께 산책하고 있는 마리 앙뚜아네트

                                

[화려한 베르시아유 궁전]

그러나 궁정(宮庭)에서는 인기를 끌지 못했다. 베르사이유의 잘난체 하는 귀부인들은 오스트리아의 공주인 마리 앙뚜아네트를 저 변방에서 온 촌사람으로 취급하였다. 더구나 당시만 해도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의 적대적인 감정이 누그러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마리 앙뚜아네트를 얕잡아 보고 무시하기가 일수였다. 당초에 프랑스의 왕족들은 왕세자 루이 오거스트의 배우자를 색손(영국을 말함)의 공주중에서 선택되기를 바랐다. 그랬는데 오스트리아의 공주가 선택되었다. 영국에 우호적인 사람들이 오스트리아에서 온 마리 앙뚜아네트에 대하여 호의적이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루이 오거스트의 고모 및 숙모가 되는 마담들은 마리 앙뚜아네트의 뒤에서 노골적으로 l'Autrichienne(로트리시엔느)라고 수군댔다. 글자그대로 본다면 ‘오스트리아 여인’이지만 실은 발음이 거의 같은 l'Autruchienne라고 빈정댄 말이었다. 이 말은 autruche chinne의 합성어로서 번역하면 ‘타조같이 못된 년(영어로 ostrich bitch)’이라는 욕이 된다. 어떤 귀부인들은 마리 앙뚜아네트가 위대하신 루이14세에게 꼬리를 쳐서 태양왕 루이14세를 오스트리아의 노예처럼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마리 앙뚜아네트 때문에 프랑스 궁정의 아름답고 우아한 전통이 무너지고 있다고 공격했다. 아무튼 프랑스의 귀부인 및 마담들이란 여자들은 참으로 못돼 먹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말에 순종하여 멀리 고향을 떠나 물설고 낯 설은 파리에 와서 시집살이 하는 마리 앙뚜아네트를 따스하게 보살펴 주지는 못할망정 온갖 비난과 험담을 퍼붓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14살 소녀가 알긴 뭘 안다고 첫날밤을 잘 치루지 못했다느니 하면서 구시렁대는가 말이다. 프랑스 여자들은 10대의 소녀시절에 이미 남녀간의 모든 일을 완전 경험하고 숙달했단 말인가? 불쌍한 마리 앙뚜아네트!

 

베르사이유 궁전과 호수

                             

[차가운 마담 뒤 바리]

당시 루이15세의 정부로서 베르사이유에서 무시못할 존재인 마담 뒤 바리조차도 마리 앙뚜아네에게 미지근하게 대하였다. 마담 뒤 바리는 오스트리아-프랑스의 관계개선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마리 앙뚜아네트와 루이 왕세자와의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힘쓴 에티안느-프랑수아(Etienne-Francois) 공작을 베르사이유에서 축출하는데 한 몫을 했다. 따라서 마리 앙뚜아네트는 자기를 싫어하는 마담 뒤 바리 등과 가깝게 지내지 못했으며 결국 마리 앙뚜아네트는 고립되지 않을수 없었다. 이처럼 마리 앙뚜아네트가 베르사이유에서 어색하게 지낸다는 소식을 들은 친정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자, 오스트리아 궁내부장관인 플로리몽 클로드(Florimond Claude) 등은 마리 앙뚜아네트에게 ‘제발 고개를 숙여라! 마담 뒤 바리와 가깝게 지내라! 너도 좋고 우리도 좋은 일이다!’라며 화해를 종용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꾹 참고 1772년 신년하례 모임에서 마담 뒤 바리에게 오랜만에 인사를 나누고 얘기를 건넸다. 마리 앙뚜아네트가 마담 뒤 바리에게 한 말은 ‘요즘 베르사이유에는 참 여러 사람들이 많이 있네요!’가 전부였다. 하지만 루이15세는 마리 앙뚜아네트가 마담 뒤 바리와 얘기를 나누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마담 뒤 바리

                               

여기서 잠시 루이 14세부터 16세까지의 세사람을 확실히 구별할 필요가 있어서 이들의 주민등록증을 살펴보면,

 

- 루이14 (1638-1715: 재직기간 1643-1715)

- 루이15 (1710-1774: 재직기간 1715-1774)

- 루이16 (1754-1793: 재직기간 1774-1792)이다.
                     

[바람 잘날 없는 친정어머니]

마리 앙뚜아네트(마리아 안토니아)는 친정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에 대하여 딸로서 갸륵한 감정이 없었다. 평소 비엔나에서 지낼때 자기에게는 관심도 보여주지 않고 다른 언니들, 특히 마리아 크리스티나만 유독 총애했기 때문에 섭섭했었다. 더구나 자기 생각과는 상관없이 어린 자기를 머나먼 타향 파리로 시집보내지 않았던가? 마리 앙뚜아네트는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가 너무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자기를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어머니이지 않는가? 마리 앙뚜아네트로서는 사방에서 자기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형편에 그래도 의지할 데라고는 친정어머니 밖에 없었다. 한편, 마리아 테레지아도 막내딸을 프랑스로 시집보내고 나서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걱정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마리 앙뚜아네트의 하기에 따라서 잘못하다가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간의 전쟁으로 번질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리아 테레지아는 거의 정기적으로 마리 앙뚜아네트에게 편지를 보내 이모저모로 코치를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가장 큰 관심사항은 마리 앙뚜아네트가 어서 아이를 낳은 일이었다. 시집간 딸에게 친정어머니가 바라는 것은 사실 그 것이 제일이었다. 그래서 마리아 테레지아는 마리 앙뚜아네트에게 어떻게 하면 남편의 사랑을 받아 성공적이고도 정열적인 잠자리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하여도 코치를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단기간내에 16명의 자녀를 출산했던 경험이 있는 잠자리의 베테란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만일 루이 왕세자가 마리 앙뚜아네트와의 잠자리에 흥미가 없다면 오스트리아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여 걱정했다. 심지어 마리아 테레지아는 마리 앙뚜아네트가 어릴 때 너무 승마를 많이 하여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고 걱정하며  ‘그 놈의 말만 많이 타지 않았어도!’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마리아 테레지아가 가장 아끼는 마리 앙뚜아네트의 초상화는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이었다.

 

승마복을 입고 있는 마리 앙뚜아네트. 16세 때.

                                

[프랑스 패션의 선두주자]

마리 앙뚜아네트는 남편 루이의 관심을 끌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루이의 관심을 끌게 되면 어머니 마리아 테레자의 계속되는 잔소리로부터 벗어날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화려한 드레스, 신발, 가발, 화장품 등에 빠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촌사람’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드레스 만드는 사람, 머리 손질하는 사람, 구두 만드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불러들이고 돈을 썼다. 그것도 모자라 새로 무슨 물건이 나왔다고 하면 베르사이유에서 파리 시내로 나가 쇼핑을 하기 시작했다. 필리핀의 이멜다(Imelda)는 저리가라였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베르사이유 패션의 선두주자였다. 화려하게 치장하고 보니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할 필요가 있었다. 몇몇 짝꿍들과 모여 수다를 떠는 일에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고 그것도 심심해지자 카드놀이와 경마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원래 할 일없는 몇 사람들이 모이면 노름을 하기 마련이며 노름을 하면 돈을 잃기 마련이다. 마리 앙뚜아네트의 씀씀이는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왕세자비로서의 임무는 거의 거들떠보지 않게 되었다. 예를 들면 왕세자비는 지급받는 생활비 중에서 일정액을 자선을 위해 써야 하는데 돈이 모자라다보니 자선은커녕 빚만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되었다.

                                    

[마사모의 등장]

마리 앙뚜아네트는 자기 주위에 모여드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개인적인 서클을 만들어 밤낮으로 함께 지내며 먹고 노는 일에 치중했다. 가장 주목할 만한 멤버는 드 랑발(de Lamballe)공주였다. 예민하지만 순수한 마음을 지닌 청상과부였는데 외로운 입장에서 서로 가까워 졌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드 랑발 공주를 왕세자비의 가사(家事)를 돌보는 책임자로 임명했다. 유흥전문가인 폴리냑(Polignac) 백작부인 가브리엘르(Gabrielle)는 마리 앙뚜아네트 서클의 핵심멤버로서 나중에 마리 앙뚜아네트가 왕비가 되자 ‘왕비폐하 사조직’(Societe Particuiere de la Reine: 일명 마사모) 구성의 책임자 역할을 했다. 가브리엘르는 한때 마리 앙뚜아네트 아이들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마리 앙뚜아네트의 남편 루이도 가브리엘르를 친구로서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마사모’(마리 앙뚜아네트를 사랑하는 모임)의 또 다른 멤버로서는 루이의 누이동생인 마담 엘리사베스(Madame Elisabeth), 그리고 유일하게 남성으로서는 루이의 남동생격인 다르투아(d'Artois)백작이 있다. 다르투아백작은 마리 앙뚜아네트를 좋아하여 파리의 마리 앙뚜아네트와 비엔나의 마리아 테레자 사이의 편지 연락책으로 자원봉사했다. ‘마사모’의 핵심멤버는 아니지만 존경받는 멤버로서는 유명한 작곡가 글룩(Christoph Willbald Gluck)이 있다. 글룩은 마리 앙뚜아네트가 비엔나에 있을 때 음악선생이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파리에 오자마자 글룩의 후원자가 되었다. 음악사에서 유명한 사건인 ‘부퐁전쟁’(2)은 글룩을 후원하는 마리 앙뚜아네트와 글룩을 반대하는 마담 뽕빠두(Madame Pompadou)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다. 어쨌든 ‘마사모’는 당시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쳐 귀족사회에서도 서로 ‘마사모’ 스타일의 모임을 구성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주로 여자들이 모여 먹고 마시고 재잘대다보니 나중에 ‘마사모’는 동성연애자(레스비안)들의 모임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건 그렇고, 마리 앙뚜아네트는 파리에서 글룩의 ‘얼리드의 이피게니’(Iphegenie en Aulide) 초연을 보고나서 옛 스승님의 뛰어난 재능에 감동하여 글룩의 공식 후원자가 되겠다고 선언하였다. 글룩은 독일 사람이다. 그러니 반오스트리아주의자들이 입방아를 찧지 않을수 없었다. 글룩대 피치니의 전쟁이 일어난 것도 그 때였다. 이 전쟁에 대하여 설명하자면 한참 걸리므로 여기서는 생략!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백남옥 교수가 쓴 ‘오페라 로만티카’라는 책을 보면 좋겠다. 글룩대 피치니의 전쟁과 연계하여 불붙은 마리 앙뚜아네트와 마담 뽕빠두와의 부퐁논쟁 때문에 시끄러워서 그랬는지 아무튼 루이15세가 곧이어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1774 5 10, 64세의 늙은 나이에 때아닌 천연두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이어 마리 앙뚜아네트의 남편 루이 오거스트가 새로운 프랑스 왕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렝스대성당에서의 대관식]

마리 앙뚜아네트의 남편 루이 오귀스트는 1774 6 11일 렝(Rheims)의 대성당에서 루이16세로서 대관식을 가졌다. 파리에서 서쪽에 있는 고도(古都) 렝스는 전통적으로 프랑스 왕의 대관식이 거행되는 곳이다. 그런데 당시 20세의 마리 앙뚜아네트는 왕비로서 관을 쓰지 못했다. 과거에는 남편이 프랑스 왕으로 대관식을 가질 경우, 부인도 왕비로서 대관(戴冠)으 의식을 가졌다. 그러나 마리 앙뚜아네트는 대관식에서 다만 남편 루이16세를 수행하였을 뿐이다. 이런 것을 보면 프랑스 왕실이 오스트리아를 얼마나 우습게보았는지 알수 있다. 따지고 보면 마리 앙뚜아네트의 남편 루이 오귀스트는 어린 시절부터 반()오스트리아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그런데 운명의 수레바퀴가 돌고 돌아 부인을 오스트리아 여자로 맞게 되었던 것이다. 루이 오귀스트는 프랑스 왕으로서 루이16세가 되자 노골적으로 반오스트리아 감정을 들어내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두 사람의 유공자가 있다. 재상 장-프레데릭 펠리포(Jean-Frederic Phelypeaux)백작과 외무장관인 샤를르 그라비에(Charles Gravier)백작이다. 루이16세를 포함한 3인방은 반오스트리아 정책의 권위자들이었다. 그런 와중에서 마리 앙뚜아네트는 조국 오스트리아와의 협력을 추진할수 있는 드 수아슬(de Choiseul) 공작을 새 정부에서 중용해 달라고 남편 루이16세에게 부탁했다. 당연히 3인방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반오스트리아 운동의 기수들인 3인방은 마리 앙뚜아네트가 오스트리아에 유리하도록 프랑스 정책에 간섭할 것 같아 노심초사하였다. 프랑스 정책에 대한 마리 앙뚜아네트의 영향력은 곧 비엔나의 마리아 테레자에게 영향력을 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매사에 조심해야 했다.


오늘날의 렝스대성당

                               

[선동적인 언론]

그러던중 마리 앙뚜아네트가 더 조심해야할 일이 생겼다. 남편 루이가 루이16세로 대관식을 가진지 약 한달후, 루이16세의 동생으로 마리 앙뚜아네트의 편인 아르투아 백작의 부인 마리 테레스(Marie Therese)가 아들을 낳았다. 아기의 이름은 루이 앙뚜안(Louis Antoine)이라고 붙였다. 만일 마리 앙뚜아네트와 루이16세 사이에 아들이 있다면 7세에 프랑스의 차기 왕위계승자가 된다. 그러나 루이16세와 마리 앙뚜아네트 사이에는 아들은 커녕 딸도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문제는 리벨르(Libelles)라는 선동적인 신문이 루이 앙뚜안의 탄생 기사를 다루면서 마치 작심이라도 한듯 루이16세는 임포텐스(성기능불능자)이어서 자녀가 없으며 반면 왕비 마리 앙뚜아네트는 남편으로부터 만족을 얻지 못한 나머지 섹스의 화신이 되어 남녀 불문하고 은밀한 성생활을 하고 있다고 과장보도를 하였다. 그러면서 리벨르지는 마리 앙뚜아네트의 동성연애 대상자가 남편 루이16세의 여동생인 드 랑발 공주이며 남자 연애대상자는 루이16세의 동생격인 다르투아 백작이라고 썼다. 속이 상할 대로 상한 20세의 마리 앙뚜아네트가 할 일은 무엇인가? 더 화려한 드레스를 사고 더 많은 돈내기 노름을 하여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었다. 어느때는 파리에서 도박꾼들을 불러다가 3일을 연속해서 카드놀이를 한 일도 있다. 드레스로 말하자면 파리의 로즈 베르탕(Rose Bertin)의상실이 단골이었다. 당대의 로즈 배르탕은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의상 디자이너로 알려진 인물이다. 이와 함께 마리 앙뚜아네트는 자기의 사조직인 ‘마사모’에 여자들 뿐만 아니라 마음에 드는 남자들도 끌어 들이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드 베센발(de Besenval)남작, 드 수아니(de Choigny)공작, 발렌탱 에스터하지(Valentin Esterhazy)백작 등이다.

  

[프티 트리아농]

베르사이유 궁전의 한쪽에는 프티 트리아농(Petit Trianon)이라는 별채궁전이 있다. 원래 루이15세가 지은 건물이다. 그 건물을 루이16세가 마리 앙뚜아네트에게 대관식 기념선물로 주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이 건물과 정원을 자기 취향에 맞게 고쳤다. 어린 시절 비엔나에서 친구들과 함께 정원에서 뛰어 놀던 것을 생각하여 정원을 자연스러운 영국 스타일로 개조하였다. 소박한 시골풍경의 정원이 되었다. 그러나 프티 트리아농의 내부는 얘기가 달랐다. 어느 곳보다도 화려하게 꾸며 놓았다. 황금과 다이아몬드로 벽을 치장해 놓았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당시 프랑스정부는 재정에 허덕이고 있었다. 프랑스는 ‘7년 전쟁’에서 패배하고 전쟁배상금을 갚어야 하기 때문에 허리가 휘어질 지경이었다. 게다가 신대륙의 식민지인 미국에서 오랜 원수인 영국과 전쟁을 치러야 하므로 재정부담이 말도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한 때에 마리 앙뚜아네트가 외상이라면 황소도 잡아먹는다는 말과 같이 그저 죽어라고 돈을 쓰고 빚을 졌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마리 앙뚜아네트는 친정에 SOS를 치게 되었고 친정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자는 큰 아들 요셉(당시는 이미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파리에 가서 도와주어야 할 상황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라고 당부했다. 마리 앙뚜아네트의 큰 오빠인 요셉은 볼테르의 영향을 받아 평소 자유주의 계몽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아무리 시집간 막내 여동생이지만 허랑방탕하게 돈을 쓰고 빚을 갚지 못해 쩔쩔매는 모습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다.

 

베르사이유의 트리아농 정원과 아모

                        

[큰오빠 요셉의 자문]

한편, 요셉은 명색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데 쪽팔리게 기껏 한다는 일이 누이동생 빚이 얼마인지 알아보고 갚아줄수 있으면 갚는 그런 임무여서 파리 방문을 무척 내켜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 마리아 테레자의 간곡한 부탁이니 듣지 않을수 없었다. 어머니 마리아 테레자의 부탁사항은 한가지 더 있었다. 마리 앙뚜아네트와 루이16세 사이에 왜 아직도 아이가 없는지 속사정을 알아보라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요셉이 파리 방문을 수락한 것은 계몽주의 사상이 무르익고 있던 당시의 파리 사정을 살펴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러므로 어머니가 부탁한 임무가 마땅치 못했지만 파리행을 수락한 것이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요셉은 1777 4 18, 팔켄슈타인(Falkenstein)이라는 가명으로 파리의 막내 누이동생을 만나러 갔다. 요셉은 비엔나에서 할 일도 많지만 파리에 무려 6주동안 머물렀다. 요셉은 기왕 파리에 머무르는 기회를 이용하여 누이동생 부부에게 무슨 문제가 있기에 아직 아이가 없는지 알아보아야 했다. 당시 소문으로는 루이16세의 물건이 포경이어서 발기가 되지 않으므로 수술을 받아야 하지만 수술을 받지 않아 부부생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요셉은 이 개인적 및 신체적 문제를 가지고 루이16세와 단독회담을 했다. 요셉이 내린 결론은 루이16세의 물건이 만족스러울 정도로 발기는 되지만 문제는 상대방의 해당 장소에 들어가서 오래 머물지 못하며 따라서 사정(射精)도 하지 못한채 그냥 나온다는 것이다. 요셉으로서는 처남 루이16세의 사정(事情)이 딱했지만 어떻게 해줄 방안이 없었다. 그저 ‘마음을 집중하라’ 등등 몇가지 자문만 했다. 요셉은 ‘만일 루이16세가 자기의 물건을 일찍만 고쳤더라면 지금은 당나귀처럼 펑펑일 터인데 그렇지 못해서 걱정이다. 하지만 정성으로 힘쓰면 안될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아무튼 루이16세는 처형인 요셉에게 열심히 노력하여 처가 식구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일이 잘되느라고 그랬는지 어땠는지, 또는 요셉이 루이16세에게 코치 및 자문을 잘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요셉이 비엔나로 돌아간지 얼마후인 그해 8 30, 마리 앙뚜아네트와 루이16세는 처음으로 만족스러울만한 잠자리를 함께 했다. 그로부터 두 사람의 잠자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루어졌다. 이듬해 4월에는 마리 앙뚜아네트가 임신한 것같다는 얘기가 나돌았고 다음달인 5 16일에는 임신이 확실하다는 베르사이유의 발표가 있었다.

  

[엄마가 된 마리 앙뚜아네트]

마리 앙뚜아네트가 임신하고 있는 기간중에 두가지 사건이 발생했다. 모두 나중에 마리 앙뚜아네트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이었다. 첫째는 스웨덴 출신의 미남 레이디 킬러인 악셀 폰 페르젠(Axel von Fersen)백작이 프랑스에서의 군대생활 경험을 위해 파리에 온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웬만큼 나이든 사람으로서 페르젠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70년대 초반, ‘베르사이유의 장미’라는 만화가 대단히 유행했었다. 마리 앙뚜아네트와 페르젠에 대한 연애를 다룬 만화였다. 그 페르젠이 스웨덴에서 파리로 온 것이다. 얼마후 페르젠은 프랑스와 영국간의 식민지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나 4년동안 있었다. 하지만 베르사이유에 머무는 동안 마리 앙뚜아네트와 뜨거운 사이였다고 한다. 또 하나 사건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친정 오빠 요셉(요셉 2세)이 바바리아의 왕위 계승권을 찾는데 프랑스가 지원해 줄것을 요청했지만 프랑스 정부가 거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된 밥에 재를 뿌린다는 말처럼 아예 바바리아의 왕위는 생각치도 못하게 만들은 것이다. 이는 프랑스 정부 내에서 마리 앙뚜아네트의 정치적 영향력이 아주 미약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첫딸 마리 테레스]

스웨덴 출신의 레이디 킬러(Lady killer) 페르젠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루고 마리 앙뚜아네트의 첫 아이에 대한 사항을 언급하지 않을수 없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그렇게도 고대하던 아이를 1778 12 19일 낳았다. 아들이 아니라 딸이었다. 베르사이유에서였다. 마리 앙뚜아네트가 23세 때였다. 대단한 난산이었다고 한다. 관례에 따라 방안에 빽빽이 들어선 많은 궁중 여인들이 출산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이것도 마리 앙뚜아네트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비엔나에서는 그런 관습이 이미 폐지되었는데 베르사이유에서는 아직도 왕비가 출산하는 모습을 귀족부인들이라는 여인들이 바라보고 있으니 속이 상했다. 그나저나 의사가 산후처리를 잘못하는 바람에 마리 앙뚜아네트는 많은 출혈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마리 앙뚜아네트는 아이를 낳은후 기절하여 쓰러졌으며 그 후에는 산후증세로 대단히 고통스러워했다고 한다. 태어난 아이는 마담 공주(Madame Fille du Roi)라는 타이틀을 받았으며 이름은 마리 앙뚜아네트의 요청에 의해 외할머니의 이름인 마리아 테레지아(프랑스어로 마리 테레스)라고 붙였다. 그러나 궁정 사람들은 그 아이를 마리 테레스라고 부르는 대신에 마담 로얄(Madame Royale)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솔직히 말해서 오스트리아에 대하여 감정이 좋지 않은 궁정 사람들은 ‘아니, 우리의 공주인데 마리아 테레지아가 뭐 말라 죽은 귀신이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편, 마리 앙뚜아네트의 첫아기 출산에 대하여 왕실에 우호적이 아닌 리벨르(Libelles)지는 아이의 아빠가 정말 누구인지 검사해 봐야 한다면서 왕비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이 주장에 앞장 선 사람은 프로방스 백작(Comte de Provence)이었다. 이 양반이 누구냐 하면 기회만 있으면 무능한 루이16세를 물러나게 하고 자기가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사람이었다. 아이의 아빠가 누구인지 확인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아이 아빠인 루이16세가 '말도 안되는 소리 작작 좀 하라'면서 듣지 않아 친권 테스트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얼마후 이번에는 아들을 생산해야 한다는 압력이 거세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실로 마리 앙뚜아네트는 너무나 힘든 초산(初産)을 경험했기 때문에 정말로 임신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친정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보낸 편지에 ‘건강이 너무 허약해져서 또 다시 아이를 갖게 되어도 출산하기 힘들것 같다’고 쓴 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그러나 아무튼 어찌어찌하여 마리 앙뚜아네트는 곧 또 임신하였다. 그러나 1779에 유산했다. 첫 딸 마리아 테레스를 낳은 다음해였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마리 앙뚜아네트는 남편 루이16세의 승인을 받아 궁중의 몇가지 규범을 과감히 개혁하였다. 예를 들면 마치 나귀의 양 옆에 짐을 실은 것처럼 부풀린 치마(Panniers라고 부름)를 입지 않도록 하고 화장도 지나치게 짙게 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마리 앙뚜아네트는 모든 여인들이 옷을 편하게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무슬린(모슬린: 옥양목) 드레스를 솔선하여 입었다. 르브렁(Lebrun)이 그린 마리 앙뚜아네트의 1783년 초상화를 보면 무슬린 드레스가 어떤 것인지 이해가 될 것이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의상 및 화장 등에 대한 개혁과 함께 아마추어 연극을 장려하였다누구든지 연극에 참여하고 싶으면 무대에 올라가서 연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도록 한 것이다. 이를 위해 마리 앙뚜아네트를 위한 별도의 극장을 지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가끔씩 이 극장에 가서 다른 부인들과 함께 직접 무대에 올라가 연극에 참여하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며 즐거워했다. 프랑스 정부에 대한 마리 앙뚜아네트의 영향력은 첫아이를 낳은 이후 차츰 커지기 시작했다. 역시 여자는 아이를 낳아야 큰소리를 치는 것 같다. 1780년에는 기분 좋은 일이 있었다. 1780, 마리 앙뚜아네트가 후원한 사람이 재무장관(Jacques Necker)이 되었으며 그 재무장관의 추천한 두 사람, 즉 드 캬스트리(de Castries)후작은 해군장관이 되었고 드 세구르(de Segur)백작은 전쟁장관에 임명된 것이다. 하지만 이로써 마리 앙뚜아네트를 은근히 경계하는 무리들이 생긴 것도 숨길수 없는 사실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 1779년. 판니에르 치마를 입었다. 저런 괴상한 치마도 보기에 좋다고 한때 유행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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