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사이유의 장미
[죽음 아니면 빵을 달라]
1789년 3월, 루이16세는 궁전의 지붕 한쪽이 무너져 떨어지는 바람에 거의 죽다가 살아난 일이 있었다. 사람들은 하늘이 루이 16세에게 백성들을 생각하라고 경고를 보낸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 달인 4월, 파리에서 소요가 일어났다. 배고프니 빵을 달라는 봉기였다. 그냥 놓아두면 대규모 폭동으로 발전한 기세였다. 5월에는 백성들의 식량문제를 다루기 위해 3부회의가 부활하여 개원하게 되었다. 마리 앙뚜아네트 왕비가 남편과 함께 행사에 참석하였다. 왕비는 모처럼 파리 시민들을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 젊고 건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한껏 치장하고 나타났다. 그런 왕비에 대하여 시민들은 '우리는 못 먹어서 굶어 죽을 판인데 왕비라는 사람은 사치나 일삼고 있다'면서 비난을 퍼부었다. 오를레앙공작(duc d'Orleans)이 3부회의에 참석하여 지난 겨울 백성들의 굶주림을 보다 못하여 자기의 재산을 털어서 백성들에게 빵과 돈을 나누어주었다고 과장되게 선전했다. 오를레앙공작은 루이16세에 대하여 거부감을 갖고 있다가 추방당한 인물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시민들은 오를레앙공작이 루이16세나 마리 앙뚜아네트 왕비보다 더 훌륭하다면서 환호를 보냈다. 왕비는 3부회의에는 관심이 없었고 병마와 싸우고 있는 큰아들 루이 조셉의 상태에만 신경이 곤두 서 있었다. 결국 루이 조셉 왕세자는 3부회의 가 있은지 두달 후인 1789년 6월 4일 세상을 떠났다. 겨우 8세였다. 왕세자의 죽음은 국가적으로 애도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백성들이 외면했다. 백성들은 3부회의에 더 관심을 두었고 당장의 빵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관심을 쏟았다. 그러한 때에 왕비가 백성들의 피로 목욕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는 악의에 넘친 괴소문이 나돌았다. 왕비가 루이 조셉 왕세자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그런 소원을 말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백성들의 마리 앙뚜아네트에 대한 인식은 날로 나빠 져 갔다.
마리 앙뚜아네트
여기에서 잠시 루이16세와 마리 앙뚜아네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의 현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첫째 딸 Marie-Therese-Charlotte (1778-1851) - 73세까지 생존.
- 첫째 아들 Louis-Joseph Xavier Francois (1781-1789) - 8세때 사망.
- 둘째 아들 Louis-Charles (1785-1795) - 10세때 사망.
- 둘째 딸 Sophie Helene Beatrix (1786-1787) - 2세때 사망.
[라 마르세이유: 프랑스 혁명]
7월에 들어와서 사정은 더 폭력적으로 진행되었다. 의회는 국왕의 권리보다 많은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고 국왕은 국왕대로 평민들이 주관하는 3부회의를 탄압하라는 귀족들의 요구에 장단을 맞추어야 했다. 7월 11일에는 시민편을 들어주었던 재무장관인 네커가 해임되었다. 이 뉴스를 들은 파리 시민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은 7월 14일의 바스티유감옥을 휩쓰는 것으로 절정을 이루었다. 그후 어깨에 힘깨나 주던 귀족들이 파리를 탈출하기 시작했다. 이제 파리는 시민들로 구성된 의회가 장악하게 되었다. 시민들은 너도나도 시민방위대에 합류하여 왕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마리 앙뚜아네트 왕비를 축출해야 한다고 소리쳤다. 시민들은 마리 앙뚜아네트가 섭정에서 축출되려면 국왕이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8월 말에는 시민권리장전(La Declaration des driits de l'Homme et du cityoyen)이 채택되었다. 프랑스에 입헌군주정부가 공식적으로 들어서는 계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16세는 여전히 베르사이유를 지키며 국왕으로서 궁정행사를 주관하였다. 9월에 가서는 빵부족이 더욱 극심해졌다. 그런데도 궁전에서는 왕실근위병을 위한 성대한 만찬이 열렸다. 이 소식이 혁명파 신문에 게재되자 시민들은 더욱 술렁이기 시작했다. 10월 5일, 아직도 베르사이유에는 빵이 넉넉하다고 생각한 시민들, 특히 시장에서 하루하루를 장사하며 사는 부인네들이 파리로부터 베르사이유까지 걸어와서 빵을 달라고 고함쳤다. 다음날, 드디어 성난 시민들이 베르사이유 궁전 안으로 진입하여 들어왔다. 근위병 몇 명이 죽임을 당했다. 폭도로 변한 시민들은 ‘왕을 잡아 죽여라! 왕비를 잡아 죽여라!’라고 소리치며 왕궁 안을 휩쓸고 다녔다.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함락 장면
[라파이예트 후작]
급기야 폭도 시민들은 국왕과 왕비의 거처까지 쳐들어갔다. 시민들은 국왕과 왕비, 아이들, 그리고 함께 있던 왕의 여동생 마담 엘리사베스, 프로방스 백작 부부 등을 파리시에 있는 튈러리(Tuilleries)궁전으로 강제로 이송하였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친구들을 통해 자기는 최근에 프랑스의 정치에 관여한 일이 없으며 앞으로도 절대로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발표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시민들의 보복이 두려웠다. 국왕과 왕비는 튈러리 궁전에서 연금되다시피 하며 지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프랑스의 국왕이었고 왕비였다. 그러한 사태에서 마리 앙뚜아네트는 또 다른 잘못을 저질렀다. 드 라파이예트(Gilbert du Motier: Marquis de Lafayette: 1757-1834)후작과 스캔들을 일으킨 것이다. 드 라파이예트 후작은 미국에서 영-불 전쟁을 치루고 개선한 장군이었다. 아무튼 왕비와 드 라파이예트 후작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뉴스가 신문에 게재되자 왕비에 대한 시민들의 적개심은 한층 고조되었다. 마리 앙뚜아네트로서는 외롭고 힘든 마음을 드 라파이예트 후작과의 만남으로 달래려고 했을 뿐이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언젠가는 아들이 왕이 되어 사태가 안정될 것으로 믿었다.
마르키스 드 라파예트 장군. 마리 앙뚜아네트와의 스캔들이 있었다.
[튈러리 궁전에서의 생활]
튈러리궁전(La palais des Tuileries)에 연금되어 있는 국왕을 탈출시키려는 계획이 있었다. 튈러리궁전에 함께 있는 신하들과 시종들이 계획을 주도했다. 하지만 루이16세가 최종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우물쭈물 하는 바람에 계획은 무산되었다. 이 때 등장한 인물이 한때 마리 앙뚜아네트와 각별한 사이였던 스웨덴의 페르젠백작이었다. 페르젠백작은 원래 마리 앙뚜아네트와 아이들만을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몽메디(Montmedy)요새로 탈출시키는 계획을 주도면밀하게 세웠다. 왕비는 이 계획을 반대하였다. 왕비는 국왕을 비롯하여 다른 가족들도 함께 떠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위험했다. 이 계획도 계획대로 추진되지 못했다. 루이16세가 함께 갈 사람을 확실히 정하지 않고 이랬다저랬다 했으며 탈출 날짜에 대하여도 확실한 태도를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시 계획을 세워야 했다. 마침내 1791년 6월 21일 밤중에 국왕과 왕비를 포함한 일단의 사람들이 튈러리 궁전을 탈출을 감행하였다. 하지만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바른네(Varennes)에서 모두 붙잡혔다. 국왕과 왕비, 그리고 왕실 가족들은 파리로 끌려왔다.
18세기 당시의 튈러리 궁전(La palais des Tuileries)
[쟈코뱅당의 등장]
루이16세와 마리 앙뚜아네트의 파리 탈출은 참담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나마 남아 있던 국왕과 왕비에 대한 백성들의 지지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때를 같이하여 공포정치의 대명사라고 할수 있는 쟈코뱅(Jacobin)당이 프랑스 정치의 일선에 나서게 되었다. 막시밀리안느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Roberspiere: 1758-1794)가 주도하는 쟈코뱅당은 프랑스에서 더 이상 왕이 필요 없다고 하며 군주제도를 종식시키는 헌법을 통과시켰다. 그래도 마리 앙뚜아네트는 새로 채택된 헌법이 실효를 거두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으며 나아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겸 오스트리아 대공 겸 헝가리-보헤미아의 왕인 오빠 레오폴드가 프랑스에 압력을 넣어 자기를 도와줄 것으로 기대했었다. 당시 비엔나에서는 요셉 황제가 1790년 2월 20일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고 그의 동생, 즉 마리 앙뚜아네트의 둘째 오빠인 레오폴드가 요셉의 뒤를 이어 황제로 즉위하였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레오폴드는 누이동생인 마리 앙뚜아네트, 또는 그 가족을 돕기 보다는 프랑스의 혼란을 이용하여 그동안 눈치 보며 지내야했던 프랑스에게 한 방 먹이는 일에 더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레오폴드는 1992년 3월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프란시스 2세가 새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및 오스트리아 대공 및 헝가리-보헤미아의 왕으로 등극하였다.
막시밀리안 로베스피에르
[친정오빠들: 우리 오빠 맞아?]
레오폴드와 그의 뒤를 이은 프란시스의 프랑스에 대한 공격적인 정책은 급기야 1792년 4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간의 전쟁으로 발전되었다. 프랑스 사람들의 눈에 왕비 마리 앙뚜아네트는 적국 사람으로 비추어졌다. 마리 앙뚜아네트가 반(反)오스트리아적인 언행을 하며 자기도 프랑스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했지만 그런 것은 감성이 예민한 프랑스 사람들에게 해당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간에 전쟁이 일어난지 두어달후, 사정은 루이와 마리 앙뚜아네트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어찌된 일인지 프랑스군은 계속 패배만 했다. 의회는 국왕의 권한을 축소하고 전선의 장군들에게 권한을 주는 몇가지 제도를 건의했지만 국왕은 ‘옳다! 네 놈들이 나를 무시하더니 패배만하고! 이젠 군대 통솔권까지 내 놓으라고?’라면서 비토(Veto)했다. 그런 비토는 몇 번이나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마리 앙뚜아네트가 뒤에서 코치하여 국왕이 비토권을 행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리 앙뚜아네트에게는 또 하나의 별명이 붙었다. 이번에는 ‘마담 비토’(Madame Veto)였다.
마리 앙뚜아네트의 둘째 오빠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드 2세
7월 말이 되자 국왕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은 말할수 없이 높아졌다. 결국 의회는 8월 10일, ‘루이16세는 더 이상 프랑스의 국왕이 아니다’라고 발표하고 국왕의 권력을 공식적으로 중지하였다. 의회가 국왕을 폐하자 일부 왕당파들이 그래도 충성을 보이기 위해 소요를 일으켰다. 왕당파들은 국왕을 보호한다는 목적으로 스위스 용병들로 구성된 경비대를 튈러리 궁전에 배치하였다. 공화파들이 튈러리 궁전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왕당파가 고용한 스위스 경비대와 충돌하였다. 이때에 사태가 어떻게 진전되는지 궁금해서 지켜보던 수백명의 시민들이 마치 소가 뒷걸음질 치다가 개구리를 죽인다는 식으로 죽임을 당했다. 당국은 왕실 사람들이 시내 한복판의 튈러리 궁전에 있으면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당국은 왕실 사람들을 마레(Marrais) 사원으로 옮기도록 했다. 튈러리에 비하여 형편없는 곳이었지만 어쩔수 없었다. 1주일후, 왕실 사람들이 파리 코뮌(Paris Commune: 프랑스 혁명 때의 파리의 혁명적 자치 단체: 1792-94)의 심문을 받기 위해 끌려 나왔다. 그 중에는 드 랑발(de Lamballe)공주도 포함되어 있었다. 랑발공주는 ‘9월 학살’의 희생자였다. 파리 코뮌은 9월 2일 일부 왕실 사람들을 포함하여 왕당파들을 대거 학살한 일이 있다. 이를 ‘9월 학살’(September massacres)이라고 부른다. 혁명파들은 랑발공주의 목을 장대에 꽂아 파리 시내를 마치 행진이나 하듯 돌아다녔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랑발공주의 목이 장대에 꽂힌 모습을 보지는 않았지만 그 소식을 듣고 기절하여 쓰러졌다. 9월 21일 프랑스 왕정은 공식적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국민회의(National Convention)가 프랑스의 정권을 장악했다. 사람들은 왕실 사람들을 캬페(Capets)라고 불렀다. 왕족을 경멸하여 부르는 호칭이었다. 국민회의는 국왕부터 심문키로 했다. 루이16세는 국가명예훼손이란 죄목으로 가족들과 떨어져 별도로 수감되었다. 재판은 12월부터 시작되었다. 쟈코뱅당이 주도하는 국민회의는 루이16세를 유죄로 인정했다. 일부에서는 루이16세를 인질로 잡고 있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았으나 쟈코뱅은 이를 거절하였다. 루이16세를 단두대(기요틴)에서 처형키로 결정했다. 이어 국왕의 가족들은 파리 시내에 있는 템플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랑발 공주 학살
[1793년: 비운의 종말]
루이16세는 1793년 1월 21일 처형되었다. 38세였다. 이제 마리 앙뚜아네트가 남았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왕조의 몰락후 왕비라고 부르지 않고 ‘캬페 미망인’(Widow Capets)이라고 불렀다. 캬페는 부르봉 왕조를 일컫는 명칭이다. 부르봉 왕조를 시작한 위고 캬페(Hugo Capet)의 이름에서 따온 말이지만 일반적으로 캬페라고 말하면 부르봉 왕조를 경멸하여 부르는 호칭이다. 마리앙뚜아네트는 남편 루이16세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에 빠졌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남편의 죽음 이후 일체의 음식을 거부하였다. 심지어는 최소한의 건강을 위한 산책도 거부하였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아들을 루이17세라고 부르는 것도 거부했다. 추방중인 프로방스백작이 자신을 신왕 루이17세의 섭정이라고 부른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마리 앙뚜아네트의 건강은 급속히 악화되었다. 폐렴에 걸렸으며 심지어 방광암에 걸렸다는 얘기도 있었다. 실제로 마리 앙뚜아네트는 치질로 심한 고통을 받았다. 루이16세의 죽음 이후 국민회의는 마리 앙뚜아네트의 처리 문제를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당장 처형하자는 주장이 있었는가 하면 오스트리아-프랑스 전쟁에서 신성로마제국에 붙잡혀 있는 프랑스 포로들과 교환용으로 이용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부터 몸값을 받고 돌려보내자는 아이디어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미국의 프랑스 식민지로 추방하자는 주장도 했다. 1793년 4월에는 ‘공공안전위원회’(Committee of Public Safety)라는 것이 구성되었다. 온건공화파인 지롱드(Girondins) 당원들은 체포되거나 추방되었고 과격 쟈코뱅당이 득세하였다. 쟈코뱅 당원들은 마리 앙뚜아네트의 재판을 서둘러 진행하자고 주장했다. 왕세자(Dauphin)에 대하여는 계속 잡아두고 새로운 공화국을 위해 이용하자는 주장이 있었다. 이에 따라 왕세자인 루이 샤를르는 7월초 감옥에서 엄마 마리 앙뚜아네트로부터 떼어내어 시몬이라는 술주정꾼 신발장이의 감독아래 두고 감시하였다.
마리 앙뚜아네트의 아들. 루이 17세
[죄수번호 280]
8월 1일, 혁명당국은 마리 앙뚜아네트를 그때까지 머물렀던 마레(Marrais) 타워로부터 끌어내어 파리 감옥(Conciergerie)에 죄수번호 280번으로 수감하였다. 이후 몇차례에 걸쳐 마리 앙뚜아네트를 감옥으로부터 구출하려는 계획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그런 계획을 일체 거절하였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혁명재판소의 최종 재판은 10월 14일에 열렸다. 루이16세를 재판할 때에는 본인에게 변호할 기회를 주었으나 마리 앙뚜아네트의 재판은 완전히 형식적이어서 자신을 변호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더구나 쟈코뱅당원들로 구성된 혁명재판관들은 대부분 여성혐오자들이어서 재판을 빨리 끝내고 싶어 했다. 마리 앙뚜아네트에 대한 죄목은 여러가지였다. 하지만 거의 모두 사실과는 다른 것이었고 심지어 시중의 소문을 근거로 죄목을 만든 것이 많았다. 예를 들면 베르사이유에서 난잡한 섹스파티를 열었다는 것, 수백만 리브르의 돈을 오스트리아로 빼돌렸다는 것, 루이16세의 정책을 반대해온 오를레앙 공작(duc d'Orleans)을 암살하려고 했다는 것, 어린 루이17세를 프랑스의 새로운 왕으로 선포했다는 것, 1792년 튈러리궁전 소요당시 스위스 수비대원들을 대량 학살토록 지시했다는 것 등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죄목은 아들을 성적으로 학대했다는 것이었다.
기요틴에 끌려간 마리 앙뚜아네트. 1793년 10월 16일
아들인 루이 샤를르는 감옥에서 보호감시자의 협박성 코치를 받아 엄마 마리 앙뚜아네트가 자기를 성적으로 학대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어린 아들을 성적으로 학대했다는 기소가 있자 그때까지 침묵으로 일관하던 마리 앙뚜아네트는 분연히 일어나 사실이 아니라고 항변하였다. 방청석에 있던 어떤 여인이 증인으로 나와 마리 앙뚜아네트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옹호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여인은 1789년 베르사이유에 난입하여 ‘왕비를 죽여라!’고 소리쳤던 여인이었다. 재판은 형식적이었다. 혁명당국은 마리 앙뚜아네트에 대한 판결을 이미 며칠전에 결정해 놓았었다. 재판이 시작된지 이틀후인 10월 16일, 마리 앙뚜아네트는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날 오후 12시 15분, 마리 앙뚜아네트는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었다. 38세 생일을 며칠 남겨놓지 않은 날이었다. 마리 앙뚜아네트의 시신은 라 마델레느(La Madelene) 공동묘지의 이름 모를 장소에 던져졌다. 라 마델레느 공동묘지는 이듬해인 1794년 문을 닿았다. 그로부터 22년후인 1815년 1월, 정부가 마리 앙뚜아네트와 루이 16세의 시신을 찾아내어 프랑스 역대 왕들을 안치한 생드니(St Denis)성당에 이장하였다. 나중에 나폴레옹은 마리 앙뚜아네트가 처음 연금되어 있던 마레의 타워를 부수어버렸다. 민중들에게 나쁜 인상을 줄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루이17세는 아버지 루이16세와 어머니 마리 앙뚜아네트가 모두 처형 당한후에도 여전히 감금되어 있었다. 일부 왕당파들은 루이17세를 프랑스의 새로운 국왕으로 받들었지만 루이17세가 실제로 국가를 통치한 일은 없었다.
파리 생 드니 성당에 있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뚜아네트 묘소
[마리 앙뚜아네트 진실공방]
마리 앙뚜아네트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어떤 성격의 사람이었으며 실제로는 어떻게 생겼는가? 미인이었는가? 아니면 평범하게 생겼는가? 사람들은 그를 정말로 싫어했는가, 아니면 좋아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마리 앙뚜아네트를 선의 상징으로 여겼다. 남들에게 친절하고 따듯하게 대했으며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걱정해주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반면, 마리 앙뚜아네트를 모든 악의 대명사로 말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데 문제는 마리 앙뚜아네트를 나쁜 여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마리 앙뚜아네트라고 하면 무조건 사치, 허영, 질투, 낭비, 스캔들의 상징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날 역사학자들은 마리 앙뚜아네트를 프랑스혁명의 희생자이며 순교자라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어떻게 생겼는가? 지금까지 남아있는 초상화들을 살펴보면 별로 뛰어난 미인이라고 할수없는 모습이다. 합스부르크의 전형적인 모습을 닮아 얼굴은 갸름한 계란형이 아니라 둥근 찐빵 같으며 눈은 바세도씨병을 앓았던 사람처럼 튀어나오고 키도 크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마리 앙뚜아네트의 옆에서 함께 지냈던 몇몇 사람들이 남긴 설명을 보면 하얀 피부, 가즈런한 치아, 붉은 입술, 사슴처럼 순진한 눈망울, 키는 중키에 아담한 편으로 결론적으로 대단히 교양 있는 귀부인의 전형으로 생겼다는 것이었다. 당시 일반적인 프랑스 사람들은 오스트리아에 대하여 감정이 좋지 않았다. 프랑스의 초상화가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때문에 마리 앙뚜아네트의 모습을 그릴 때 되도록이면 좋지 않은 인상을 심어주도록 그렸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페르젠과의 러브 스토리]
마리 앙뚜아네트가 비참하게 세상을 떠난지 약 1백년후부터 그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여러 방면에서 솟아나왔다. 마리 앙뚜아네트와 스웨덴 출신의 젊은 장교인 악셀 폰 페르젠(Axel von Fersen: 1755-1810)백작과의 러브 스토리는 마리 앙뚜아네트를 새로 평가하는 토픽 중의 하나였다. 마침 19세기 말에 페르젠백작의 후손중 한 사람이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를 저널 인타임(Journal Intime)이라는 잡지에 기고한 일이 있다. 논란의 핵심은 나중에 루이17세로 불러진 마리 앙뚜아네트의 둘째 아들 루이 샤를르가 실제로는 페르젠의 아이였다는 것이며 루이16세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묵인했다는 것이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했던 것일까? 마리 앙뚜아네트와 페르젠백작이 주고 받은 서한이나 메모를 보면 루이 샤를르가 분명히 페르젠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라는 주장이었다. 특히 어린 루이 샤를르가 감옥에서 비참하게 죽었을 때 페르젠이 남긴 애달픈 글은 루이 샤를르가 자기 아들이 아니면 그렇게까지 애통하게 표현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비록 마리 앙뚜아네트와 페르젠이 몇 년에 걸쳐 사랑을 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 아이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만일 그렇다면 루이16세는 물론, 말 많기가 이를데 없는 왕실 사람들이 루이 샤를르를 왕세자로 고분고분 인정하고 나중에는 루이17세라고 부르도록 했겠느냐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또 다른 사람들은 두 사람 사이에 우정은 있었지만 육체적인 사랑은 절대로 없었다고 주장했다.
악셀 폰 페르젠 백작
[모차르트의 프로포즈]
모차르트는 마리 앙뚜아네트보다 한 살 어리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1755년에 태어났으며 모차르트는 1756년에 태어났다. 모차르트는 7살때에 비엔나의 쇤브룬 궁전에서 마리아 테레지아를 비롯한 왕실가족들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한 일이 있다. 피아노 연주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던 모차르트는 유리같이 반질반질한 쇤브룬 궁전의 마루바닥 때문에 넘어졌다. 이때 앞줄에 앉아있던 마리아 안토니아(마리 앙뚜아네트)가 직접 나와 모차르트를 일으켜 세우며 ‘어디 다치치는 않았니?’라고 물어보았다. 모차르트는 이 친절하고 예쁜 공주에게 반하여 ‘난 나중에 당신과 결혼할 거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만장한 사람들은 ‘고놈 참 당돌하고 귀여운 놈이네!’라면서 웃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당시 마리 앙뚜아네트는 8살이었다. 모차르트는 마리 앙뚜아네트를 비엔나 근교의 락센부르크(Laxenburg)성에서도 잠깐 만난 일이 있다. 어떤 설명에 따르면 쇤브룬궁전에서는 마리 앙뚜아네트가 넘어진 모차르트를 일으켜 세운 일이 없으며 모차르트가 대뜸 ‘당신과 결혼하겠다!’고 선언한 일도 없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모차르트는 피아노 연주를 마치고 마리아 테레지아의 무릎에 뛰어 올라 앉아 ‘키스해 주세요!’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며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런 모차르트를 귀엽게 여겨 뺨에 키스를 해주었다는 것이다. 모차르트는 35세로 1791년 세상을 떠났고 마리 앙뚜아네트는 38세가 되는 1793년에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 모두 젊은 나이에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다.
비엔나의 쇤브룬 궁전에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와 그의 자녀들 앞에서 연주를 한후 인사하는 어린 모차르트. 마리아 안토니아(마리 앙뚜아네트)도 참석했다고 한다. 마리아 안토니아는 모차르트보다 한살 위였다. 모차르트는 1791년에 세상을 떠났고 마리 앙뚜아네트는 1793년에 단두대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베르사이유의 장미]
마리 앙뚜아네트에 대한 스토리는 소설, 영화, 연극, 뮤지컬 등으로 많이 만들어졌다. 소설로는 ‘몬테크리스토 백작’으로 유명한 알렉산더 뒤마(Alexander Dumas)가 쓴 ‘빨간 집의 기사(騎士)’(Le Chevalier de Maison-Rouge)가 단연 유명하다. 감옥에 갇혀있는 마리 앙뚜아네트를 구출하려는 이른바 ‘카네이션 작전’(Carnation Plot)에 대한 이야기이다. 페르젠백작이 주도한 작전이었다. 원래 ‘빨간 집의 기사’는 마리 앙뚜아네트에 대한 뒤마의 6부작중 제5부에 해당한다.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도 6부작중의 한편이다. 뒤마는 소설에서 마리 앙뚜아네트를 동정적으로 그렸다. 영화로는 1938년 오스카상 후보에 오른 ‘마리 앙뚜아네트’라는 타이틀의 작품으로서 노르마 쉬어러(Norma Shearer)가 타이틀 롤을 맡은 것이 있다. 이외에도 여러 영화가 만들어졌으며 최근에는 한나 카리나(Hanna Karina)가 주연한 ‘마리 앙뚜아네트’가 화려함으로 각광을 받았다. 특히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실제로 촬영한 가면무도회 장면은 압권이라는 평이었다. 역사물로서는 1998년 엘레나 마리아 비달(Elena Maria Vidal)이 쓴 트리아농(Trianon), 2005년 캐롤리 에릭슨(Carrolly Erickson)의 ‘마리 앙뚜아네트의 숨겨진 일기’(The Hidden Diary of Marie Antoinette)가 유명하다. 1970년대 초반, 일본 리요코 이케다(Riyoko Ikeda)가 제작한 장편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The Rose of Versailles)는 대단한 인기를 끈 것이었다. 만화에는 페르젠백작도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마리 앙뚜아네트의 친구인 오스카 프랑수아(Oscar Francois)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케이크를 먹도록 하라!]
Qu'ls mangent de la brioche!(케이크를 먹도록 하라: Let them eat cake!)라는 말은 마리 앙뚜아네트가 한 말이라고 알려져 있다. 마리 앙뚜아네트가 마차를 타고 베르사이유에서 파리 시내로 갈 때에 궁전 문 앞에 몰려 있던 농민들이 ‘배고파서 못살겠으니 빵을 주시오, 빵을!’이라고 외치자 왕비는 ‘아니,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않는가? 케이크를 먹도록 하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이며 실제로는 장-자크 루쏘(Jean-Jacques Rousseau)가 인용한 말이라는 것이다. 루쏘에 따르면 루이14세의 왕비가 될뻔했던 스페인의 공주 마리아 테레사(Maria Theresa: 마리 앙뚜아네트의 어머니가 아님)가 농민들이 먹을 빵이 없다고 소리치자 내뱉었던 말이라고 한다.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 공주는 S'il ait aucun pain, donnez-leur la croute au loin du pate라고 말했다는데 번역하면 ‘만일 빵이 없다면 그들에게 고기파이의 부스러기를 주어라’이다.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 공주가 농민들에게 이 말을 했다는 것도 확실한 근거가 없다. 당시 궁정에서 영향력이 있었던 프로방스(Provence)백작이 마리아 테레사 공주가 그렇게 말했다고 전했기 때문이다.
[아들을 독살?]
마리 앙뚜아네트가 첫 아들을 독살했다는 괴소문이 나돈 일이 있다. 어떤 버전에는 페르젠백작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 루이 샤를르를 다음 왕위에 오르도록 하기 위해 첫째 아들을 독살했다는 얘기까지 있었다. 이것은 아마 마리 앙뚜아네트가 페르젠백작과 너무 가깝게 지내고 있을 때에 둘째 아들을 낳자 이에 대한 친권문제가 논란이 되었던 것과 연관이 있는 소문이었다. 마리 앙뚜아네트가 둘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페르젠백작과 성관계를 맺었다는 가정아래 그런 소문이 나돈 것이다. 하지만 루이16세는 한번도 아들 루이 샤를르에 대한 친권문제를 거론한바 없다.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과 진실공방]
마리 앙뚜아네트가 개인적으로 ‘다이아몬도 목걸이 사건’을 부추겼다는 주장이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거추장스러운 로한의 추기경을 궁정에서 축출하려 했고 이를 위해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을 조작했고 결과적으로 로한의 추기경을 궁정에서 몰아냈다는 것이다. 이것도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마리 앙뚜아네트가 이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로한의 추기경을 궁정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추기경은 마리 앙뚜아네트의 환심을 다시 사기 위해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구입해서 바치려고 했다는 얘기가 사실이라고 한다. 루이16세도 추기경을 개인적으로 싫어했기 때문에 왕비를 통해 사태를 호전시키려 했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이미 추방당한 추기경을 또 다시 몰아내기 위해 왕비가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을 조작할 이유는 없었다. 마리 앙뚜아네트가 추기경을 증오했던 것은 추기경이 비엔나주재 프랑스 대사로 있을 때 마리 앙뚜아네트를 모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목장의 소녀 마리 앙뚜아네트?]
마리 앙뚜아네트는 베르시이유 궁전의 한쪽에 하모(Hameau)라는 이름의 농촌 마을을 재현해 놓았다. 이곳에 오두막집 10여채를 지었고 물레방아도 만들어 놓아 전원 분위기를 만끽하도록 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이곳에서 목장의 소녀로 분장하여 젖소의 우유를 짜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연극일뿐 실제로 우유를 짜지 않았으며 통에 담은 우유는 인근 목장에서 배달해 온 것이었다고 한다.
[술꾼 마리 앙뚜아네트?]
마리 앙뚜아네트가 남편 루이16세 처럼 술을 좋아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신문에서는 루이16세가 대단한 술꾼이어서 거의 매일 술에 젖어 있다고 보도했지만 사실 루이16세도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았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술을 마실 경우에는 다브레이(d'Avray)마을에서 특별히 주문한 생수를 대신 마셨다는 것이 측근들의 얘기였다.
[왕비의 사람들]
리벨르지는 마리 앙뚜아네트가 여자들과는 동성연애를 했고 남자들과는 이성연애를 했다고 주장하며 대상자는 여성의 경우 랑발(Lamballe)공주와 폴리냑(Polignac)공작부인, 남자로는 다르투아(d'Artois)백작, 드 라파이예트(de Lafayette)후작, 루존(Luzon)남작 등이 상대역이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진짜 육체적인 관계를 맺었다고 생각되는 페르젠(Fersen)백작의 이름은 이상하게도 한번도 거론되지 않았다.
베르사이유 궁전의 거울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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