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마리 앙뚜아네트

마리아 테레지아의 서거

정준극 2018. 4. 13. 11:06

마리아 테레지아의 서거와 마리 앙뚜아네트의 생활

 

[마리아 테레자의 서거]

파리에서 마리 앙뚜아네트의 입김이 커지고 있는 때에 비엔나에서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호흡곤란증과 몸이 붓는 부종(浮腫)이라는 병마들과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결국 마리아 테레지아는 1780 11 29, 63세를 일기로 비엔나에서 저 먼 요단강을 건너갔다. 유럽 전체가 애도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결혼정책으로 인하여 유럽의 거의 전역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사람들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유럽 전체가 애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죽음으로 프랑스-오스트리아의 관계가 악화되지 않을지, 나아가 자기에게 무슨 영향이 있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오빠 요셉 황제가 마리 앙뚜아네트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그런 일을 없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켰다. 신성로마제국 및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의 동맹을 깨트리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이 시대에 오스트리아는 가장 번영했다.

                          

[나의 아들 왕세자?]

마리아 테레지아가 세상을 떠난지 3개월쯤 지나서 마리 앙뚜아네트가 임신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곧 이어 베르사이유는 1781 3, 마리 앙뚜아네트가 임신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해 7, 오빠 요셉 황제가 다시 파리를 방문하였다. 무슨 큰 일이 있어서 방문한 것은 아니며 다만 프랑스-오스트리아의 동맹을 다시 한번 확인하러 간 것이었고 간 김에 마리 앙뚜아네트를 만나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마리 앙뚜아네트가 프랑스 왕실의 재화를 몰래 요셉에게 빼 돌렸다는 것이다. 나중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그만큼 프랑스 궁정에서는 오스트리아를 모함하는 부류들이 많았다. 프랑스 사람들이 왜 저렇게 죽어라고 오스트리아를 미워하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다. 그런 와중에 그렇게 바라던 왕자 아기씨가 1781 10 22일 태어났다. 루이 조셉 사비에르 프랑수아(Louis Joseph Xavier Francois)라는 긴 이름이 붙여졌으며 공식 타이틀은 드 브레타뉴 공작(Duc de Bretagne)이었다. 하지만 왕세자였기 때문에 모두들 도팽(Dauphin)이라고 불렀다. 그날 사냥을 하고 있던 루이16세는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상당히 기뻤는지 사냥일지에 ‘마담, 그대는 나와 프랑스의 소원을 들어주었소이다. 당신은 왕세자의 어머니요’라고 썼다. 그러나 나중에 궁정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루이16세는 ‘당신은 왕세자의 어머니요’라는 문구에 원래는 ‘당신은 나의 아들인 왕세자의 어머니요’라고 쓰려고 했다가 뺐다는 것이다. 아빠인 루이16세가 ‘나의 아들’이란 말을 주저주저하다가 삭제한데 대하여 시비가 많았다. 마침 왕세자가 태어나기 전날, 미국에서 프랑스군과 전쟁을 벌이던 영국군이 프랑스군에게 항복했다는 기쁜 소식이 들어왔다. 루이16세로서는 아무튼 기쁜 일이었다.

 

마리 앙뚜아네트의 큰 오빠인 요셉 2세 신성로마제국 황제

                         

[반오스트리아 정서]

그러나 왕세자 탄생으로 축하 무드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마리 앙뚜아네트의 영향력이 커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오스트리아로서는 섭섭한 입장이었다. 비엔나의 요셉 황제는 동생 마리 앙뚜아네트를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얼간이’라고 비난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오빠! 난 별로 힘이 없어요. 남편이란 사람은 어릴 때부터 반()오스트리아 교육을 받은 사람이어요. 장관들도 거의 모두 우리 오스트리아에 대하여 감정이 좋지 않아요. 제가 할수 있는 일이 없어요. 남편 루이는 제가 정치문제에 뭐라고 말하는 것을 아주 싫어해요. 그렇게 싫어하는데도 불구하고 장관들 회의에 나가서 우리 오스트리아를 위해 뭐라뭐라 말하면 남편이 좋아하겠어요? 나만 더 이상하게 되어요!’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아무튼 마리 앙뚜아네트는 조국 오스트리아를 위해 무언가 해야 했다. 그는 궁여지책으로 장관들에게 남편 루이 폐하의 말이라고 하면서 자료나 정보를 달라고 했다. 장관들이야 폐하의 양해사항이라고 하니 필요한 정보자료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그런 속임수도 한두번이지 만일 사실이 아닌 것으로 탄로가 나면 큰 일이 날것이므로 마리 앙뚜아네트는 그나마 그 일도 몇 번 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속성이 다 그렇지만 마리 앙뚜아네트가 아들 때문에 루이16세 폐하의 신임을 단단히 받아 권력이 대단히 높아진 것으로 생각하여 왕비의 말에 고분고분했다.

마리 앙뚜아네트의 남편인 루이 16세

                            

[가정교사 드 폴리냑 공작부인]

정치에서 손을 떼기로 한 마리 앙뚜아네트가 할 일은 그저 두 아이에게 전념하는 것이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아이들을 직접 교육하고 양육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것은 베르사이유의 규칙이 아니었다. 왕실의 아이들은 ‘프랑스의 아이들’이라고 불렀다. ‘프랑스의 아이들’은  여러 명의 궁정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교육을 받아야 했다. 궁정 사람들은 자기들의 장래 출세를 생각하여 ‘프랑스의 아이들’의 가정교사로 임명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로비를 했다. 그런 마당에 왕비마마께서 아이들의 교육을 직접 담당하시겠다고 하니 궁정의 가정교사 후보자들이 좋아할리 없었다. 마침 그때까지 가정교사로 있던 로안-게메느(Rohan-Guemene) 공주가 개인적으로 파산하여 왕실가정교사를 사임하게 되자 마리 앙뚜아네트는 ‘내 아이들을 가르칠 선생님을 선정하는데 왜 딴 사람들이 자꾸 이러라저러라 하며 나서는가?’라면서 드 폴리냑(de Polignac) 공작부인을 직접 신임 가정교사로 임명했다. 아름다운 드 폴리냑 공작부인은 마리 앙뚜아네트보다 6세 위로서(1749-1793) 베르사이유 궁전의 가수였다. 그리고 물론 마리 앙뚜아네트와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그러자 궁정의 일각에서 반대가 심하게 일어났다. 공작부인은 지위가 너무 높으므로 아무리 왕세자 및 공주라고 해도 어린이의 교사로서는 타당하지 않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루이와 마리 앙뚜아네트가 그대로 밀고 나가 드 폴리냑 공작부인이 왕세자 루이 조셉과 공주 마리 테레스의 가정교사로 임명되었다. 드 폴리냑 공작부인에게는 아이들이 있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그 아이들도 궁전에 들어와서 자기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도록 배려했다. 궁정의 다른 사람들은 마리 앙뚜아네트의 이같은 조치에 대단한 불쾌감을 가지게 되었다. * 마담 드 폴리냑의 원래 이름은 욜란드 가브리엘르 드 폴라스트롱(Yolande de Gabrielle de Polastron)으로 일본 만화인 '베르사이유 장미'에서는 레이디 오스카(Lady Oscar)라는 가명으로 등장한다. 만화에서 레이디 오스카의 이름은 오스카 프랑수아(Oscar Francois)이다.

 

음악적 재능이 많았던 아름다운 드 폴리냑 공작부인

                          

[마사모에 정부예산 집행]

1783 6, 마리 앙뚜아네트는 또 다시 임신하였다. 마리 앙뚜아네트가 28세 때였다. 같은 달에 스웨덴 출신의 레이디 킬러 페르젠(Fersen)백작이 미국으로부터 돌아왔다. 페르젠은 1778, 베르사이유에서 마리 앙뚜아네트를 처음 만나 레이디 킬러로서의 재능을 선보였던 일종의 고급제비였다. 돌이켜 보면, 마리 앙뚜아네트는 남들이 페르젠을 레이디 킬러라고 하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고 미남 백작인 페르젠과 가까우면서도 뜨겁게 지냈던 것은 첫째 딸을 임신하고 있는 때였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첫 딸을 낳은후 이듬해에 다시 임신하였다. 임신소식이 알려지고 나서 얼마후 페르젠백작은 영국군과 식민지 전쟁을 벌이고 있는 프랑스군을 지원하겠다고 하며 홀연히 미국으로 떠났다. 얼마후 마리 앙뚜아네트는 임신중인 아이를 유산했다. 그리고 4년이란 세월이 흘러 1783년이 되었다. 때를 맞추어 미국에 갔던 페르젠백작이 베르사이유로 돌아 왔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반가운 마음에 페르젠을 ‘마사모’에 참여토록 했다. 두 사람은 옛날 기분이 되살아났는지 서로 떨어지지 않고 지냈다. 그러기를 두달! 페르젠백작은 마침 유럽을 순방중인 스웨덴 구스타브왕의 경호장교로서 임명되어 베르사이유를 떠나게 되었다. 두달후 마리 앙뚜아네트는 또 다시 유산하였다. 그리고 정말 전보다 더 건강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페르젠백작을 처음 만난 직후, 베르사이유의 프티 트리아농에 아모(Hameau)라고 하는 농촌 마을을 만든 것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농가 11채와 물레방아가 있는 작은 마을이다. 그림과 조각으로 꾸며진 초호화 궁전에서 사는 것이 싫증 날 때도 있으므로 조용한 시골에서 지내는 기분을 갖기 위해 농가를 지었던 것이다. 농가 주변의 터에는 잡초가 우거지게 하여 자연적인 기분을 내도록 했다. 작은 농가를 10여채나 지었기 때문에 마리 앙뚜아네트가 농촌마을인 아모에 있다고 해도 어느 집에 있는지 모른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베르사이유 안에 만들어진 이 농촌마을에서 마사모 멤버들을 만났다. 페르젠백작과 자주 만나던 곳도 이곳이었다. 그건 그렇고, 베르사이유 궁전내의 농촌마을에 투입된 공사비가 얼마인지 알게된 국민들은 다시한번 기가차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 왕실을 더 증오하게 되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열기구(熱氣球)에도 관심이 많았다. 열기구를 타고 지겨운 베르사이유를 떠나 멀리 알프스를 넘어 비엔나로 가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직접 열기구 비행을 하지는 않았지만 열기구 제조 및 운행을 지원했다. 이 또한 많은 돈이 들어가는 취미였다.

 

베르사이유의 한 구석에 지은 시골집인 물레방아가 있는 아모(Le Hameau)

                                

[도팽의 건강]

마리 앙뚜아네트가 파티, 유행, 도박, 초콜릿 따위에 관심이 많았다고 하지만 실제로 가장 관심을 두었던 일은 아들 왕세자(루이 조셉)의 건강문제였다. 1784년 페르젠이 베르사이유로 돌아오자 마리 앙뚜아네트는 마사모 및 페르젠에만 신경을 썼었으나 도팽(왕세가)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얘기를 듣자 그제서야 엄마로서 모성애가 발동했던 것이다. 주위에서는 왕세자가 얼마 살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심지어 루이 왕과 마리 앙뚜아네트 왕비가 지금의 왕세자가 죽을 것에 대비해 다시 아들을 낳으려고 한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왕세자에 대한 불확실한 괴소문이 나돌고 있는 참에 파리에서는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이 공연되었다. 마리 앙뚜아네트로서는 어린 시절 비엔나의 쇤브룬 궁전에서 가족들과 함께 만났던 모르차르에 대하여 애착의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처음에 ‘피가로의 결혼’이 공연되자 당국은 당장 공연을 중지시켰다. 귀족 알기를 우습게 아는 내용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얼마후 공연허가가 나왔다. 실제로 보마르셰의 2부작 소설은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으며 마리 앙뚜아네트와 마사모 사람들도 재미나게 읽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다 알고 있는 내용인데 오페라라고 해서 금지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후문에 따르면 마리 앙뚜아네트가 ‘피가로의 결혼’을 한번 보고 싶어서 공연허가를 주었다고 한다. 그나저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도 루이와 마리 앙뚜아네트를 몰아내는 프랑스혁명에 기여한바가 컸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였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베르사이유에서 음악 모임을 자주 가졌다. 자신은 직접 하프를 연주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어린 시절에 비엔나에서 글룩으로부터 음악공부를 했다.

                             

[사랑의 페르젠백작]

미국에서 돌아온 페르젠이 6주동안 베르사이유에 머물다가 돌아간 후 마리 앙뚜아네트가 임신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이제 식구들이 늘어나게 되자 아이들의 장래를 생각하여 별도의 부동산을 마련하고 싶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생 클루(St Cloud) ()을 사서 나중에 아이들에게 물려줄 생각을 했다. 복덕방이 협상을 추진했다. 집값은 6백만 리브르(livres)였다. 집단장과 가구 비용까지 합한다면 1천만 리브르가 넘는 거액이었다. 왕실 재무담당은 외채도 갚지 못해 걱정이라면서 난색을 표명했지만 결국 개인용도의 부동산을 사려던 계획은 원래대로 추진되었다. 1785 3 27, 마리 앙뚜아네트가 25세 때에 둘째 아들이 탄생했다. 루이 샤를르(Louis Charles)였다. 태어나자마자 노르망디 공작이라는 타이틀을 받았다. 루이 샤를르는 병약한 큰 아들 루이 조셉과는 달리 골격도 튼튼하고 키도 컸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둘째를 너무 사랑하여 ‘수 다무프’(chou d'amour)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말하자면 ‘아이구, 내 강아지’였다. 둘째의 생긴 모습이나 체격이 첫째와 비슷하지 않자 자연히 ‘아빠가 누구냐?’는 궁금증이 나돌았다. 혹시 페르젠의 아이가 아니냐는 뒷소문이 있었다. 그러나 감히 루이16세의 아들을 보고 무슨 이득을 보겠다고 ‘친자확인이나 하자!’고 나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둘째 아들에 대한 괴소문은 더 이상 구설수에 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둘째에 대한 루머는 마리 앙뚜아네트에 대한 증오심을 한겹 더해주는 것이었다. 왕비에 대한 백성들의 이미지는 방탕, 음란, 낭비, 탐욕 등 이었다. 게다가 생 클루(St Cloud)성의 매입과 친정 오빠 요셉에게 프랑스 왕실의 보화를 빼돌렸다는 소문까지 있어서 마리 앙뚜아네트에 대한 인식은 점점 악화일로로 치닫게 되었다. 궁정 사람들은 물론, 백성들은 마리 앙뚜아네트를 ‘합스부르크의 꼴통’이라고 부르며 깔보고 무시했다. 이러한 때에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이 터졌다.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

왕세자 루이 조셉이 태어나고 나서 몇 달후, 왕비는 유명한 보석상인 뵈메르(Boehmer)로부터 편지 한통을 받았다. 로한(Rohan)의 추기경인 루이(Louise) 공자가 주문한 다이아몬드 목걸이에 관한 내용이었다. 로한의 추기경이 마리 앙뚜아네트 왕비를 위해 산다고 했으나 값을 치루지 않고 있으니 최종 소유자가 값을 지불하고 물건을 받으라는 내용이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오래전부터 로한의 추기경을 경멸해 왔다. 왜냐하면 마리 앙뚜아네트가 파리로 시집 온 후 로한의 추기경이 비엔나주재 프랑스 대사로 있었는데 그 때 마리 앙뚜아네트에 대하여 좀 못마땅하게 과장하여 얘기한 일이 있었다. 그 얘기가 프랑스 신문에 실리자 마리 앙뚜아네트로서는 입장이 난처했던 일이 있었다. 그래서 마리 앙뚜아네트는 추기경이 비엔나에서 파리로 돌아오자 여러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추기경을 힐책한 일이 있다. 실은 그 목거리는 마리 앙뚜아네트와는 사이가 좋지 않은 마담 뒤 바리가 주문한 것인데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아 사지 않겠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밝혀졌지만 실은 마담 뒤 바리가 사지 않은 그 목걸이를 로한의 추기경이 왕비에게 잘 보이려고 선물로 샀다는 것이다. 추기경은 나중에 자기의 정부가 된 드 라 모트-발루아(de La Motte-Valois)백작부인인 잔느(Jeanne)를 통해 그 목걸이를 샀다. 잔느는 왕비가 자기를 거들떠보지 않는다고 하여 왕비를 싫어한 여인이다. 그러나 영악한 잔느는 추기경에게 가짜 편지를 만들어 보여주며 왕비가 자기를 신임하여 목걸이를 받아오도록 했다고 말했다. 아무튼 목걸이와 관련된 백그라운드 스토리는 마치 미스터리 소설을 읽는 것처럼 복잡하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자세히 설명할수는 없다. 결론적으로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과연 누구의 수중에 들어갔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괴도 루팡이 가져갔는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보석상이 어느 누구로부터도 대금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파급 영향은? 몇가지 괴소문이 퍼진 것이다. 예를 들면 왕비 마리 앙뚜아네트가 목걸이를 손에 넣기 위해 로한의 추기경과 베르사이유의 어떤 으슥한 곳에서 만나 섹스상대를 해주었다는 소문, 중간에서 누군가 협잡을 부려 목걸이 대금을 가로채고 그걸 마치 왕비가 돈을 지불하지 않은 것처럼 했다느니 하는 소문 등이 주인 없이 나돌아 다녔다. 결국 보석상 뵈머의 청원에 의해 의회에서 이 문제를 조사하게 되었다. 당시 의회는 루이16세에 대하여 호의적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확실한 근거도 없이 왕비 마리 앙뚜아네트를 간통죄, 사기죄, 횡령죄 등으로 엮어 넣을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잔느 드 라 모트 발루아 백작부인.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의 주역

                     

[자업자득?]

의회는 왕과 왕비를 죄인으로 몰아 붙일수 없다. 하지만 왕의 권위에는 도전할수 있다. 의회는 왕비의 죄행(罪行)과 낭비를 비난함으로서 결과적으로 왕을 공격하는 형태를 취하였다. 이래저래 마리 앙뚜아네트만이 동네북이 되었다. 자업자득! 1786, 의회는 조사결과 로한의 추기경이 무죄임이 밝혀졌지만 도의적 책임을 물어 직위해제하고 궁정에서 추방하였다. 라모트-발루아 백작부부는 절도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 이외의 사건 관련자들은 견책과 함께 재산을 몰수당했다. 그리고 왕비에 대하여는 비난의 화살을 쏘아댔다. 다이아몬드 사건이 왕비의 사치 때문에 야기되었다는 이유에서였다. 의회의 재판이 진행되는 중인 1785 11 2, 마리 앙뚜아네트는 어느덧 30세 생일을 맞이하였다. 여자 나이 30! 마리 앙뚜아네트는 지난 날의 모든 허영과 사치가 아침 안개와 같다는 사실을 느끼기 시작했다. 화려한 드레스가 무슨 소용이 있으며 구두와 모자와 가발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살이 찌기 시작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또 다시 임신하였다. 출산에 따른 고통 때문에 심히 걱정이었지만 어쩔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조산(早産)을 했다. 다이아몬드 사건으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이었다고 한다. 소피 엘레네 베아트릭스(Sophie Helene Beatrix)는 이듬해인 1786 7 9일 태어났다. 예정보다 몇주 일찍 태어났다. 마리 앙뚜아네트 자신이 걱정한대로 임신으로 건강이 많이 쇠약해졌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출산후 숨 가쁜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프랑스 왕세자와 결혼하기 직전의 마리아 안토니아. 13세.

                              

[명사회의 활동]

프랑스의 재정은 계속 기울고 있었다. 특히 왕실 부대인력들에 대한 경비지출이 너무 많았다. 웬만한 왕실 사람들은 보통 한사람이 수십명의 시종과 종자들, 그리고 이른바 식객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 부대인력들에 대한 경비가 장난이 아니었다. 정부는 우선 부대인력의 수를 줄여 예산절감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도 낭비적인 요소는 많이 남아 있었다. 의회는 대대적인 예산 삭감을 요구하고 나섰다. 왕실의 재무장관 샤를르론느(Charles Calonne)로서는 남감했다. 결국 왕의 요청으로 이른바 명사회(名士會: Assembly of Notables)가 소집되어 왕실 예산 삭감에 대한 사항을 맡기로 했다. 명사회 첫 의원회의가 1787 2 22일 열렸다. 왕은 참석하지 않아도 되지만 왕비인 마리 앙뚜아네트는 참석해야 했다. 하지만 참석하지 않았다. 명사회는 왕비가 명사회의 업무를 가볍게 여기고 의원들을 무시한다고 생각하여 왕비를 비난했다. 왕비가 참석하지 않은 명사회는 실패였다. 예산 절감을 위한 어떠한 구체적인 개혁안도 통과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왕의 권위에 대항했다는 의미에서는 그나마 소득이 있었다. 이 기간에 마리 앙뚜아네트는 정치문제에 참여하는 일이 늘어났다. 이번에는 오스트리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Children of France)을위해서 그렇게 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다이아몬드 사건’이후 사방이 적들로 둘러싸여 있는 것을 인식하고 훗날 아이들을 위한 보장을 마련해주고 싶었다. 당시 마리 앙뚜아네트를 그린 그림만 보더라도 혼자 있는 것 보다는 아이들과 함께 있는 그림이 많은 것은 아이들의 앞날을 보장해야 한다는 일종의 시위용이었다

                                   

[마담 데페시트]

마리 앙뚜아네트를 지지하던 재무장관, 예를 들어 캬론느 백작과 같은 사람이 왕실의 재정회복에 성공하지 못하고 물러난 것은 마리 앙뚜아네트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비록 명사회가 노력은 하였지만 왕실 가족들에 대한 천문학적인 재정 지원은 별로 줄이지 못했다왕실의 재정은 적자의 길로 달렸다. 실제로 왕실 가족인 프로방스 백작, 마담 탕트 등이 쓰는 돈은 마리 앙뚜아네트가 썼던 돈 보다도 더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비난은 왕비에게 향해졌다. 왕비에게는 ‘마담 데피시트’(Madame Deficit: 적자 마마)라는 유명한 별명이 붙었다. 이와 함께 일각에서는 마리 앙뚜아네트가 프랑스 정부를 무너트리려고 일부러 적자재정을 야기했다는 주장도 일어났다. 그럴때에 막내딸인 소피(Sophie)가 유치통(乳齒痛)이 악화되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이번에도 왕비에 대한 비난이 퍼부어졌다. 왕실 사람들은 왕비가 왕실 관습을 물리치고 그렇게도 아이들 교육과 양육에 매달렸는데 결과는 이렇듯 비참한 것이 아니냐면서 화살을 돌렸다. 설상가상으로 ‘다이아몬드 사건’으로 종신형을 살고 있는 잔느 드 라모트(Jeanne de Lamotte)가 감방에서 탈출하여 영국으로 도망간 사건이 일어났다. 잔느 드 라모트는 영국으로 도망가서 조용히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왕비를 ‘다이아몬드 사건’의 주범으로 모는 책을 발간하여 결과적으로 왕비의 얼굴에 심하게 먹칠을 해주었다.

 

[병약한 도팽]

1787 11, 루이 왕은 측근들의 말만 듣고 의회를 해산하였다. 루이왕은 이른바 통치권(lit de justice)을 행사하여 의회를 추방하고 왕실의 권한을 높이는 새로운 법을 통과시키려 했다. 뜻밖에도 당시 영향력이 있는 오를레앙 공작(duc d'Orleans) 루이 필립 조셉(Louis Philippe Joseph)이 루이16세의 정치를 비난하며 새로운 법을 반대했다. 오를레앙공작은 프리메이슨 멤버로서 프랑스의 계몽주의를 주창한 사람이었다루이16세는 오를레앙 공작을 추방했다. 이듬해 5, 이른바 ‘5월 칙령’(May Edict)이 공포되었다. 루이16세는 이번에도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백성들이 반대했다. 마침내 루이16세는 의회 없이 ‘3부회의’(Estates General)를 소집하여 운영코자 했다. 이렇듯 루이16세는 정치적으로 악수(惡手)만을 계속해서 두었다. 왕비는 얼마동안 정치문제에 관여했으나 3부회의 소집등 정치상황이 급격하게 변하자 관심을 접어두고 오로지 자녀들의 일에 더 신경을 썼다. 더구나 1787-88년에 큰아들 루이 조셉이 폐렴으로 고통을 당하자 병간호에 여념이 없었다. 루이 조셉은 폐렴을 앓고 나서 척추가 심하게 구부러졌다. 마침 전에 재무장관을 지냈던 자크 네커(Jacques Necker)가 마리 앙뚜아네트의 추천으로 신임 재무장관으로 다시 기용되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만일 네커장관이 재정정책에서 실패하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생길 것으로 예견했다. 마리 앙뚜아네트의 예언대로 국가 재정상황은 악화되었다. 더구나 1788-89년 겨울에 동장군이 극성을 떠는 바람에 봄농사가 큰 타격을 입었다. 그로 인하여 빵값이 폭등하게 되었다. 그런 판에 왕세자 루이 조셉의 병은 악화일로였다 

 

마리 앙뚜아네트와 루이 16세 사이에서 태어난 루이 조셉(루이 1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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