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 마리 앙뚜아네트(Marie Antoinette: 1755-1793)
프랑스의 루이 16세와 정략결혼...혁명의 와중에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다.
마리 앙뚜아네트(마리아 안토니아).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망내딸이다.
[비운의 왕비]
마리 앙뚜아네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특히 옛날에 '베르사이유의 장미'라는 만화를 열심히 보았던 현재 40대 또는 50대에 있는 사람들은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주인공이 마리 앙뚜아네트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마리 앙뚜아네트라고 하면 사치와 방탕을 일삼았던 프랑스의 왕비라고 알고 있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일반 백성들의 혁명이 일어났을 때 잡혀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여인으로 알고 있다. 그렇지만 마리 앙뚜아네트의 어머니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라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다. 마이 앙뚜아네트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막내딸이다. 그러므로 마리 앙뚜아네트도 당연히 합스부르크의 일원이다. 마리 앙뚜아네트(Marie Antoinette)는 프랑스식 이름이며 원래 이름은 마리아 안토니아(Maria Antonia)이다. 그리고 진짜 호적상의 이름은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한나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Maria Antonia Josepha Johanna von Habsburg-Lothringen)이라는 상당히 긴 것이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로부터 합스부르크-로트링겐으로 갈라졌기 때문에 그런 호칭이 붙었다. 아무튼 태어난 후의 이름은 마리아 안토니아이지만 역사에서는 그를 일반적으로 마리 앙뚜아네트라고 부른다. 마리 앙뚜아네트의 아버지는 로트링겐(로레인)의 프란시스 스테픈이다. 신성로마제국의 프란시스 1세 황제가 바로 마리 앙뚜아네트의 아버지이다. 로트링겐은 프랑스 북부의 지역으로 독일과의 국경지대에 있는 지역이다.
마리 앙뚜아네트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시스1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모두 16명이다. 대단하다. 그중 마리 앙뚜아네트는 열다섯번째 자녀이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14세에 프랑스의 루이16세와 결혼하여 프랑스 및 나바르(Navarre)의 왕비라는 타이틀을 가졌다. 나바르는 지금의 피레네 산맥의 프랑스와 스페인 접경지역에 있는 공국으로서 보통 프랑스 왕의 타이틀에는 나바르의 왕이라는 표현을 포함한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프랑스 혁명의 와중에서 남편 루이16세와 함께 기요틴(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비운의 인물이다. 남편 루이16세의 죄명은 반역죄, 마리 앙뚜아네트의 죄목은 미풍양속 위반, 국가 재정 파탄 등 여러가지. 하지만 마리 앙뚜아네트에 대한 죄목은 어느것 하나 증거를 가지고 입증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의 둘째 아들 루이17세(루이 샤를르)도 열 살의 어린 나이로 감옥에서 죽었다. 그러나 일설에는 루이17세가 교묘하게 감옥에서 탈출하여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래서 루이17세를 ‘잃어버린 왕세자’(Lost Dauphin)라고 부른다.
마리 앙뚜아네트의 아버지 프란시스 1세 신성로마제국 황제
[비엔나에서의 어린 시절]
마리 앙뚜아네트는 비엔나 시내에 있는 호프부르크(Hofburg)에서 1755년에 태어났다.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가 38세 때였다. 마리 앙뚜아네트가 죽은 것은 38세 때였다. 단두대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어린 마리 앙뚜아네트는 ‘키가 큰 편은 아니었지만 아주 건강한 아이’였다고 한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들 중에서는 제일 예쁘다는 소리를 들었다. 사실상 별로 미인도 아니었지만! 마리 앙뚜아네트는 태어난후 대공녀(Archduchess)라는 타이틀을 받았다. 황실의 공주에게는 대공녀라는 호칭을 주었다. 나중에 비엔나 궁정에서는 마리아 안토니아가 프랑스의 루이16세와 결혼이 확정되자 ‘마담 앙뚜안’(Madame Antoine)이라고 불렀다. 마리 앙뚜아네트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대단히 진보적인 생각은 가진 여성으로 궁정 생활의 여러 예절과 관습을 현실에 맞게 편한 방향으로 바꾸었다. 예를 들면 궁정 출입에 제한을 두지 않은 것이다. 그전까지는 궁정출입을 하려면 일정한 신분의 사람이거나 또는 국가에 대한 공로가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일반 백성들도 필요하면 언제라도 궁정에 출입할수 있게 했다. 구경하러 오든지 또는 쉬러 오든지 상관이 없었다. 드레스 에티케트도 완화하였다. 특히 여자들 경우에는 완전무장이나 하듯 정장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궁정의 의전절차, 또는 예법도 이상한 것은 폐지하거나 간소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왕비가 출산할 때에는 의전상 열명이 넘는 귀부인들이 왕비의 침실에 빼곡히 들어와서 출산 장면을 지켜보는 관습이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 관습을 아주 싫어하여 출산할 때에는 방에서 모두 나가 있도록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가족의 개인생활을 중시했다. 아무리 딱딱한 궁중이라고 해도 가족들의 생활은 자유스러워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가족들이 먹고 잠자는 공간에는 외부 사람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했다. 아이들은 궁전에서 일반 백성들이 입는 간편하고 평범한 옷을 입도록 했다. 아이들이 놀 때에도 평민의 아이들을 불러다가 함께 놀도록 했다. 자기 형제자매들 끼리만 놀도록 하는 것은 폐쇄적이라는 생각 때문에서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기의 15명 자녀들이(1명은 사산하였음) ‘보통 인간’으로 자라기를 바랐다. 이 영향을 받아서인지 마리 앙뚜아네트는 나중에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지낼때 일부러 소박한 농촌 스타일의 거처를 만들어 지냈다. 프티 트리아농(Petit Trianon)이라는 별채였다.
마리 앙뚜아네트가 태어난 비엔나의 호프부르크 궁전 정문
위대한 외교관이기도 한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기 자녀들을 제국의 외교정책에 십분 활용코자했다. 유럽의 한다하는 왕실과 서로 혼인관계를 맺어 사돈관계를 만들어 서로 전쟁이 하지 않도록 하는 한편, 사돈의 나라가 침략을 받으면 동맹국으로서 도와준다는 생각에서였다. 말하자면 국가안보를 기하고자 했던 것이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막내딸이기 때문에 너무 어려서 어머니의 결혼외교 관심대상에서 제외되기가 일수였다. 자연히 어머니의 관심을 많이 받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마리 앙뚜아네트와 어머니와의 관계는 그다지 명랑한 것이 아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여러 딸들 중에서 마리아 크리스티나를 제일 좋아했다. 착하고 교양 있는 딸이었다. 더구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와 딸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생일이 5월 13일로서 같았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어머니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져 있었기 때문에 교육도 다른 형제자매들에 비하여 표준이하로 받았다. 그래서 마리 앙뚜아네트는 12살이 될 때까지 모국어인 독일어조차 정확히 읽고 쓸줄을 몰랐다고 한다.
[프-오 친선 목적]
마리 앙뚜아네트를 프랑스의 왕세자(Dauphin)와 결혼시키려하는 움직임은 마리 앙뚜아네트가 10살 때인 1765년부터 추진되었다. 그해 8월, 마리 앙뚜아네트의 아버지인 프란시스1세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자 홀로 남은 마리아 테레지아는 합스부르크의 딸들을 외교적 목적으로 출가시키려는 계획을 구체적으로 추진하였다. 우선 마리 앙뚜아네트의 언니인 마리아 요제파(Maria Josepha)는 나폴리의 페르디난드 왕과 결혼토록 하였다. 한편, 파르마 대공인 돈 페르디난드(Don Ferdinand)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들 중에서 한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 했다. 당시 파르마는 합스부르크의 우산 아래 있었으므로 합스부르크의 리더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과 결혼한다면 신상에 좋을것 같아서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175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른바 7년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평화를 위한 제스추어로서 여러 나라들의 왕실과 혼인에 의한 인척을 맺는 노력에 박차를 가했다. 대상국은 합스부르크의 영향아래에 있는 파르마, 나폴리를 비롯하여 러시아, 그리고 특히 오랜 적대국인 프랑스였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들은 그저 어머니의 하명에 따라 신랑감을 만나고 식을 올려야 했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가장 총애하는 딸 마리아 크리스티나(Maria Christina)는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눈물로 간청하여 전부터 사모해오던 작소니(Saxony)의 알베르트(Albert)왕자와 결혼할수 있었다. 가장 큰 딸인 마리아 안나(Maria Anna)는 장애자였기 때문에 결혼외교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천연두와이 싸움]
그러던중 1767년, 천연두가 창궐하여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녀들을 공격했다. 당시 천연두는 불치의 병이었다. 이때의 천연두로 큰 아들 요셉 황제의 부인인 요제파(Josepha)가 우선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다음으로 마리아 테레지아 자신도 천연두에 걸렸으나 철의 여인, 의지의 여인답게 병마와의 싸움에서 이겨 죽음의 사자를 멀리 쫓아 버리고 살아남았다. 나폴리 왕과 결혼한 아홉째 딸 마리아 요제파(Maria Josepha)는 큰오빠의 부인 요제파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관 앞에서 울다가 관이 제대로 밀봉되어 있지 않는 바람에 병균에 감염되어 세상을 떠났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다행히 아주 어릴 때 천연두에 걸려 면역이 생겼기 때문에 큰 걱정을 하지 않아도 좋았다. 다섯째 딸인 마리아 엘리자베트(Maria Elisabeth)도 천연두에 걸렸으나 천우신조로 죽지는 않았다. 그러나 얼굴 모습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그래서 결혼 대상자 리스트에서 빠지게 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나폴리의 왕과 정혼한 마리아 요제파가 결혼생활도 하지 못하고 죽자 보상차원에서 그 아래 딸인 마리 카롤린(Marie Caroline)을 나폴리 왕과 결혼토록 했다. 딸들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마리아 아말리아(Maria Amalia)는 전부터 합스부르크의 딸과 결혼하고 싶어한 파르마의 돈 페르디난드와 결혼시켰다. 이제 남은 숙제는 몇 년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프랑스의 왕세자와 혼인관계를 맺는 일이었다. 해답은 당시 12살인 마리 앙뚜아네트였다. 당시 프랑스의 왕세자 루이 오귀스트는 13세였다. 그만하면 서로 나이도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지참금 20만 크라운]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정부는 마리 앙뚜아네트와 루이 오귀스트의 결혼협상을 서로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진척시켰다. 마침내 결말이 났다. 신부측의 지참금은 20만 크라운으로 결정했다. 양국 대표단은 관례대로 서로의 초상화와 반지를 교환했다. 양국 대표는 결혼식 날짜를 협의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두 사람의 결혼이 확정되자 마리 앙뚜아네트는 당시의 관례대로 우선 비엔나에서 대리결혼식을 치루었다. 대리결혼식이란 신부가 다른 나라로 시집갈 때 자기 나라에서 먼저 하나님 앞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일이다. 마리 앙뚜아네트의 대리결혼식은 1770년 4월 19일 비엔나의 호프부르크에 연계되어 있는 아우구스틴 교회에서 치러졌다. 대리신랑은 오빠중 한사람인 페르디난트였다. 그로부터 마리아 안토니아는 프랑스 스타일로 마리 앙뚜아네트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베르사이유 궁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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