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시컬 뮤직 팟푸리/클래시컬 뮤직 팟푸리

위대한 작곡가들의 이색 재능, 이색 직업

정준극 2019. 3. 30. 15:10

위대한 작곡가들의 이색 재능, 이색 직업

프로코피에프는 뛰어난 체스 선수였고 멘델스존의 그림 솜씨는 프로급 이상이었다.

비발디는 가톨릭 신부였고 존 케이지는 그래픽 디자이너였다.


위대한 작곡가의 이름이 나오면 우선은 그의 음악을 생각하게 된다. 비발디라고 하면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를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가 가톨릭 신부였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중세 독일에 힐데가르트 폰 빙겐이라는 수녀가 있었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이름일지 모르지만 서양음악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이정표를 세운 작곡가였다. 더구나 그는 최초의 여성 작곡가였다. 그는 오페라의 형태를 가진 최초의 작품을 작곡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 그는 작곡을 하지 않을 때에는 맥주를 만드는 일에 몰두하였다. 누구도 그가 맥주재조의 전문가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벨칸토 오페라로서 유명한 로시니는 소년시절에 대장장이가 되기 위해 도제생활을 했다. 말하자면 대장간에서 견습공 일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마트면 오페라 작곡가 로시니가 아니라 대장장이 로시니가 될뻔 했다. 그보다도 로시니는 뛰어난 미식가였고 훌륭한 요리사였다. 프로코피에프는 작곡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체스를 연구하는데 몰두하였다. 그는 세상이 알아주는 뛰어난 체스 챔피언이었다. 우리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위대한 작곡가들의 별난 재능과 그들이 작곡가이면서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아는 것은 클래시컬 음악을 더 좋아하는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 맥주 과학자 힐데가르트 폰 빙겐(Hildegard von Bingen: 1098-1179)

힐데가르트는 독일의 마인츠와 만하임 중감 쯤에 있는 라인란트 지방의 베르메스하임 포어 데어 회에()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유한 상인이어서 어려서부터 어려움이 없이 지냈다. 힐데가르트의 유모인 유타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훗날 빙겐()의 루퍼스버그()에 수녀원을 설립할 정도였다. 유타가 세상을 떠나자 힐데가르트가 수녀원을 책임 맡게 되었다. 힐데가르트는 독실한 신앙생활로서 모든 수녀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후 그는 아이빙겐()에도 수녀원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그는 수녀원장이라는 직책을 사양하고 평수녀로서 평생을 지냈다. 폰 빙겐이라는 호칭은 그가 책임을 맡았던 빙겐과 아이빙겐의 수녀원을 기억하여서 붙인 것이다. 팔방미인이라는 말은 힐데가르트를 두고 부르는 명칭일 것이다. 수녀원을 운영하는 일 이외에도 작가, 철학자, 과학자, 그리고 작곡가로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중세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여성 작곡가로서 그는 미사를 위한 찬송가들을 작곡했고 또한 도덕을 주제로 삼은 음악극도 만들었다. '덕성 연극'(Ord Virtutum: The Play of Virtues)라는 것이었다. 이 작품은 오페라의 원형(프로토 오페라)라고 볼수 있다. 최초의 오페라는 자코포 페리 또는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의 작품이라고 간주되고 있지만 힐데가르트의 '덕성 연극'을 오페라의 원조로 간주한다면 페리나 몬테베르디보다 5백여년은 앞선 것이니 과연 오페라의 선구자라고 아니할수 없다.


힐데가르트 폰 빙겐. 나중에 성녀로 시성되었다.


힐데가르트는 과학적인 노우 하우에도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특히 맛의 비밀에 대하여 깊은 연구를 했다. 예를 들면 어떻게 하면 맥주의 맛이 오래 유지될수 있도록 하느냐는 연구를 했다. 힐데가르트는 맥주를 만들 때에 호프를 처음 사용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호프를 맥주에 넣으면 맥주 본연의 맛이 오래 간다는 사실을 알아냈던 것이다. 그는 또한 호프가 우울함을 증가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사실이 그러했다. 호프는 신경 시스템에 영향을 주어 나근하고 우울하게 만든다는 것이 훗날 학자들의 연구로 밝혀졌다. 힐데가르트는 자기의 연구결과들을 Physica Sacra에 기록하였다. 힐데가르트 폰 빙겐은 오늘날로 보면 뛰어난 농화학자였다.


힐데가르트 폰 빙겐의 생애를 그린 2009년도 영화 '비전'. 폰 빙겐 역에 바바라 스코바.


○ 뛰어난 무용수 장 바티스트 륄리(Jean-Baptiste Lully: 1632-1687)

이탈리아 피렌체(플로렌스) 출신인 륄리는 프랑스 루이 14세 궁정의 발레 작곡가로 시작하여 오페라 작곡가로서 명성을 떨친 인물이다. 륄리는 궁정 작곡가로서 루이 14세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았고 그로 인하여 프랑스 오페라를 주도하는 지체 높은 작곡가가 되었지만 동시에 뛰어난 댄서(무용수)였다. 루이 14세는 다섯 살 때에 프랑스의 왕관을 썼다. 루이 14세는 소년 시절부터 공연예술에 대하여 깊은 관심이 있었다. 륄리는 그런 루이 14세의 예술욕구를 충족시켜주었으며 따라서 정신적인 스승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인지 루이 14세도 어려서부터 음악과 댄스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루이 14세와 륄리는 무대에서 함께 춤을 추는 공연을 하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사실 륄리가 작곡한 발레곡 중에서 대부분은 루이 14세와 륄리 자신을 주역으로 내 세운 것이었다. 예슬들면 1653년의 '밤의 발레'(Ballet de la nuit)가 그러했다. 륄리는 1672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왕립음악원(Academie Royale de Musique)의 원장을 지내면서 음악원의 부설인 무용학교의 업무도 총괄하였다. 이 무용학교는 오늘날 파리 오페라 발레의 전신이었다. 당시에는 발레를 하는 여자는 있을수가 없었는데 륄리는 이러한 관념을 과감히 타파하여 프랑스 최초의 발레리나로서 마드무아젤 드 라폰테인을 고용하였다. 마드무아젤 드 라폰테인은 륄리의 발레작품인 '사랑의 승리'(Le triomphe de l'amour)에서 프리마 발레리나로 처음 출연하였다. 


댄서로서도 유명했던 장 바티스트 륄리


○ 펜싱 챔피언 슈발리에 드 생 조르즈(Chevalier de Saint-Georges: 1745-1799)

18세기 프랑스의 비르투오소 바이올리니스트, 파리 교향악단의 지휘자, 오페라와 교향곡과 협주곡의 작곡가였던 슈발리에 드 생 조르즈는 음악가 이외에도 작가, 혁명가, 수영선수, 달리기 선수, 전쟁 영웅, 저격수...그가 하고 싶었던 것은 모든 분야에서 훌륭한 수준에 까지 오른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그러한 그는 실로 유럽에서도 알아주는 뛰어난 펜싱 챔피언, 즉 검객이었다. 펜싱의 대가가 바이올린을 뛰어나게 연주한다는 것은 마치 마이클 조단이나 스티픈 커리(Stephen Curry)가 덩크 슛을 하거나 3점 숫을 성공시킨후 곧바로 무대에 올라가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를 연주하는 것과 다를바가 없기 때문에 당시에 그의 피부색과는 관계없이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생 조르즈는 수많은 펜싱 대결에서 상대방을 제압한 실적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센세이셔널했던 것은 아직도 학생시절인 1765년에 루앙세서 프랑스 전국에서 펜싱 마스터로서 명성이 높은 가브리엘 바나(Gabriel Banat)와 겨루어 이긴 것이었다. 가브리엘 바나가 생 조르즈에게 인종차별적인 조롱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프랑스령 과델루프(Guadeloupe)에서 태어났다. 과델루프는 카리비아해에 있는 섬이다. 아버지는 대농장주였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부인의 흑인 노예였다.


슈발리에 드 생 조르즈 . 당대의 펜싱 챔피언이었다. 아버지는 프랑스인이었으며 어머니는 아버지의 부인의 흑인 노예였다.


○ 풍경화가 펠릭스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 1809-1847)

멘델스존은 어릴 때부터 '음악의 신동' 또는 '음악의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만큼 그의 음악적 재능은 어려서부터 뛰어났다. 멘델스존의 아들 칼(Karl)은 역사학자인데 그가 전하는 얘기에 의하면 괴테는 당시 12세였던 멘델스존의 즉흥곡 연주를 듣고는 '모차르트보다 더 신동'이라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괴테는 모차르트가 9세 때인 1765년에 만나서 연주를 들은 일이 있기 때문에 그의 멘델스존 찬사는 지나친 것이 아니라고 할수 있다. 멘델스존은 시인이었으며 또한 3개국어(독일어, 불어, 영어)를 능숙하게 말할수 있으며 라틴어와 그리스어는 책을 읽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런데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멘델스존이 뛰어난 화가였다는 것이다. 그는 여러 그림을 그렸지만 특히 풍경화에서 놀라운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는 여행을 다니면서 곳곳의 풍광을 스케치 북에 담아 오기를 즐겨했다. 스위스와 스코틀랜드에서의 그림 작품들은 오늘날에도 찬사를 받는 것들이다. 물론 여행에서 받은 영감을 작곡에 반영한 경우도 많았다. 스코틀랜드에서의 영감으로 저 유명한 '핑갈의 동굴' 서곡과 교향곡 3번 '스코틀랜드'를 작곡한 것은 좋은 예이다.


멘델스존의 작품 중 하나인 '루체른 호수'


○ 식도락가 겸 아마추어 요리사 조아키노 로시니(Gioachino Rossini: 1792-1868)

미식가 또는 식도락가가 직업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로시니는 미식가 겸 식도락가였고 아울러 요리하기를 즐겨했던 아마추어 요리사였다. 로시니는 파리에서 지낼 때에 파리의 한다하는 유명 레스토랑들을 찾아 다니기를 즐겨했다. 그래서 그런 레스토랑들의 주방장들은 로시니를 위대한 작곡가로서도 존경하였지만 훌륭한 식도락가로서도 그를 존경하였으며 그를 위해 특별 메뉴를 개발하여 서브하는 것을 영광으로 알았다. 파리의 이름난 주방장들은 로시니를 위해 만든 요리에 로시니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서 '투르네도스 로시니'(Tournedos Rossini)라는 음식이다. 로시니가 대단히 좋아했다는 두터운 두께의 비프 스테이크이다. 그런데 로시니는 유명 레스토랑의 요리장들에게 귀찮은 존재이기도 했다. 아카데미아 이탈리아나 가스트로노미나(Academia Italiana Gastronomia)에 의하면 로시니는 파리의 요리장들에게도 마에스트로의 기질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번번히 요리장이 요리하는 곳에 가서 이러니 저러니 참견하였고 더러는 '왜 맛이 이러냐?'면서 불평을 말하기 때문에 어떤 요리장들은 로시니를 기피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요리장이 참지 못하고 '꺼지시요. 제발'이라고 말하면 로시니는 Et alors, tournez le dos라고 대꾸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당신이 등을 돌리면 되지 않소'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이로부터 Tournedos라는 이름의 요리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하기야 로시니는 한창 인기 절정일 때인 1829년에 '귀욤 텔'을 마지막으로 오페라 작곡에서 손을 떼고 남은 생애 동안 유유자적하며 집에서 요리나 만들어 먹으면서 엔조이하는 생활을 했다. 로시니가 더 이상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은 그가 불과 37세 때였다.


로시니가 즐겨 먹었기 때문에 '투르네도스 로시니'란 이름이 붙은 비프 스테이크


○ 정치가 이그나시 얀 파데레브스키(Ignacy Jan Paderewski: 1860-1941)

음악가로서 정치에 입문하지 말하는 법은 없다. 많은 음악가들이 이런 저런 형태로 정치에 참여하였고 더러는 공직자 생활도 하였다. 예를 들어 베르디는 통일 이탈리아의 상원의원으로 활동했고 푸치니도 무솔리니 시대에 상원의원에 임명된바 있다. 그리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나치 독일 시대에 제3제국의 음악가연맹 회장을 지낸 일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본업이 작곡가였고 정치는 잠시 맡아서 했을 뿐이다. 하지만 폴란드의 이그나시 얀 파데레브스키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파데레브스키라고 하면 저명한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였다. 그는 폴란드의 음악을 세계에 알리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폴란드 국민들은 그를 음악가라기 보다는 정치가로서 더 기억하고 있다. 파데레브스키는 약 1년동안 폴란드의 수상직에 있었다. 그가 51세 때였다. 그리고 외무장관도 겸한 일이 있었다. 비록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그가 수상직에 있을 때는1차 대전 이후 폴란드가 독립국으로서 존립하느냐하는 중요한 시기였다. 파데레브스키는 1차 대전을 마무리하는 베르사이유 조약에 폴란드를 대표하여서 서명하였다. 그리고 폴란드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적인 의회 구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또한 폴란드의 의무교육 제도를 수립하는 일을 했다. 파데레브스키는 1922년에 모든 공직에서 떠났지만 그 이후에도 국제무대에서 폴란드를 대표하는 외교특사로서 활동했다. 그는 7개국어에 능통했다. 그래서 국제연맹 대표단 중에서 통역이 필요없는 유일한 대표로서 활약했다. 오늘날 이그나시 얀 파데레브스키는 폴란드 독립의 상징인물로서 존경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는 공직에서 떠난 후에 다시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음악에만 전념하겠다고 서약하였다.

 

바르샤바의 아야즈도브스키 공원에 있는 파데레브스키 기념상. 나치는 폴란드를 점령하고 나서 파데레브스키가 폴란드 독립의 주역이었기 때문에 기념상을 철거토록 했다. 그러나 바르샤바 유지들이 땅을 파고 묻어서 감추었다. 현재의 위치에 다시 자리를 잡은 것은 1985년이었다.


○ 화가 아놀드 쇤버그(Arnold Schoenberg: 1874-1951)

아놀드 쇤버그(또는 아르놀트 쇤베르크)는 비엔나 출신의 미국 작곡가 및 음악이론가로서 그의 12음 기법은 현대음악의 기반이 되는 뛰어난 개발이다. 12음 기법을 사용한 작품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오페라 '모세와 아론'(Moses und Aron)일 것이다. 쇤버그는 작곡에 전념하지 않을 때에는 그림을 그렸다. 실제로 그는 비엔나에서 활동할 당시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래서는 비엔나 화가 서클에서 상당한 인정과 함께 존경을 받을 정도였다. 쇤버그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오스카 코코슈카(Oscar Kokoschka), 칼 몰)Karl Moll),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i) 등은 모두 쇤버그의 작품성을 높이 평가하였다. 쇤버그는 한동안 칸딘스키가 주도하는 '푸른 기사'(Der blauer Ritter)의 모임에도 참여하였다. '푸른 기사'는 아방 갸르드 화가들의 모임으로서 급격히 발전해 가는 표현주의 운동을 주도한 그룹이었다. 오늘날 쇤버그의 작품은 세기말(fin-de-siecle)을 장식한 뛰어난 화가들인 구스타브 클림트나 에곤 쉴레의 전시회와 비견될 만큼 비중있는 전시회로서 각광을 받고 있다. 쇤버그는 음악사에 길이 남는 위대한 현대음악 작곡가이지만 그와 함께 뛰어난 재능의 화가였다.


2005년 5월에 뮌헨에서 열린 쇤버그 작품전시회


○ 체스 챔피언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Serei Prokofiev: 1891-1953)

음악가 중에서 체스에 몰두한 사람이 한두명이 아닌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기야 작곡가를 위시하여 연주자, 지휘자 등은 보통 사람들보다는 머리가 뛰어나게 비상한 사람들이니 머리를 많이 쓰는 체스야말로 궁합이 맞는 게임이라고 할수 있다. 체스 애호가의 경지를 넘어서서 열광적인 체스 팬이라고 불릴만한 음악가로서는 지휘자 겸 작곡가인 레너드 번슈타인, 바이올리니스트인 치노 프란체스카티, 작곡가인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피아니스트인 에밀 실렐스(Emil Cilels), 첼리스트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 바이올리니스트 데이빗 오이스트라크, 영화음악 작곡가로 유명한 에니오 모리코네, 그리고 20세기를 장식한 위대한 작곡가 중의 하나인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를 들수 있다. 그런 중에도 프로코피에프는 체스 열성가(aficionado)의 정도를 뛰어 넘어서 두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뛰어난 체스 열광자(fanatic)였다. 프로코피에프는 다섯 살 때에 첫 작품을 작곡했다. 그로부터 작곡가로서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던 것 같다. 2년 후인 일곱살 때에는 체스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아마 작곡가가 되지 않았더라면 체스로 일생을 보냈을 것이다. 


프로코피에프는 작곡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체스에 몰두하였다. 그 결과 1914년에는 세계 챔피언이 호세 라울 카파블란카를 물리쳤다.


프로코피에프가 얼마나 체스의 대가였느냐하면 1914년에 당시 체스의 세계 챔피언이었던 쿠바 출신의 호세 라울 카파블랑카(Jose Raul Capablanca)와 대국을 하여 그를 이겼을 정도였다. 그때 프로코피에프는 또 다른 체스 챔피언인 소련 출신의 미하일 보트비니크(Mikhail Botvnnik)와도 동시 대국을 하였으니 카파블랑카에는 이겼지만 보트비니크에게는 아깝게도 졌다. 프로코피에프는 체스 뿐만이 아니라 카드 게임의 대가이기도 했다. 음악가 중에는 체스 열성가들이 많이 있다고 했지만 프로코피에프는 그중에서 뛰어난 체스 선수인 모리스 라벨 및 데이빗 오이스트라크와 몇번에 걸친 매치를 하여 대단한 관심을 불러 일으킨 일이 있다. 프로코피에프와 라벨 및 오이스트라크의 체스 대결은 1937년 소련 체스 잡지에도 자세하게 대서특필될 정도로 유명한 사건이었다. 오이스트라크는 당시 프로코피에프와의 대국을 회상하면서 '프로코피에프는 매번 말을 움직일 때마다 철저하게 기록을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다음 대국을 준비하는 치밀함을 보여주었지요. 보통 열성가가 아니면 그렇게 치밀할 수가 없답니다'라고 말했다. 프로코피에프는 체스에서 이겼을 때에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가도 지면 대단히 상심하였다고 한다.


프로코피에프와 오이스트라크의 체스 대결. 1937년. 소련 체스전문잡지에는 말을 쓰는 움직임을 처음부터 끝까지 특집으로 소개하였다.


○ 만능 스포츠맨 챨스 아이브스(Charles Ives: 1874-1954)

챨스 아이브스라고 하면 유럽의 고전 음악가들의 이름들에 익숙해진 우리로서는 낮선 이름일지 모르지만 그는 미국 작곡가로서는 처음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작곡가이다. 다만, 그의 음악은 그의 생전에 사람들의 관심을 별로 끌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음악은 크게 재인식되었고 '어메리칸 오리지널'이라는 평을 들었다. 아이브스는 유럽의 전통적인 고전 음악을 바탕으로 삼고 여기에 미국의 대중적인 음악과 교회음악을 복합하는 특별함을 보여주었다. 구체적으로는 찬송가, 전통 민요, 마을 축제 때의 퍼레이드 음악, 토요일 밤 댄스 파티에서의 바이올린 선율, 애국적인 노래, 센티멘탈한 살롱 음악, 그리고 스테픈 포스터의 선율과 같은 음악을 만들었다. 아이브스는 어릴 때부터 여러 분야에서 다재다능함을 보여주었다. 그는 뛰어난 키보드 연주자로서 이미 14세 때에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봉사했다. 하지만 소년시절부터 스포츠라고 하면 먹던 밥도 놓아 두고 나가서 운동하기를 좋아했다. 코네티커트 출신인 그는 뉴 헤이븐에 있는 명문 홉킨스 학교에 다녔다. 그는 학교축구팀의 주장이었다. 아이브스는 작곡가인 파워 빅스(Power Biggs)에게 보낸 편지에서 '선생님의 그 어려운 '어메리카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연주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야구를 하는 것도 무척 재미가 있습니다'라고 쓴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운동에 취미가 많았는지 알수 있다. 예일 대학에서는 축구팀의 중심선수로 활동했다. 그는 한때 직업 축구선수로서 스카웃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은 음악에 남아 있었다. 예일대학의 육상코치인 마이크 머피는 아이브스가 음악으로부터 떠나지 못하는 것은 '말할수 없는 수치이'라고 까지 말한 바 있다. 그 코치는 아이브스가 단거리 육상선수로서 유망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챨스 아이브스.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 버섯 전문가 존 케이지(John Cage: 1912-199)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작곡가이며 음악이론가이고 또한 철학자인 존 케이지가 버섯 전문가라는 사실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존 케이지는 1962년에 뉴욕진균(眞菌)학회를 설립하였다. 진균이라는 말은 곰팡이를 말한다. 예전에 슈베르트는 친구들로부터 '꼬마 버섯'(Schwammerl: Little Mushroom)이란 별명을 들었지만 현대의 존 케이지야 말로 진짜 '버섯 친구'(Fungi guy)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버섯 전문가였다. 존 케이지가 버섯을 캐러 들로 산으로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일이 많자 친구들은 Fungi guy라는 별병 대신에 Fun guy(웃기는 친구)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우연성 음악 및 전자음향 음악의 개척자인 존 케이지


로스안젤레스에서 태어난 그는 청년 시절에 캘리포니아주 카멜이란 곳에서 지낸 일이 있다. 그 때에는 전미국의 대공황으로 고생하고 있던 때였다. 존 케이지의 집도 먹을 것이 없어서 힘든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집 근처에서 버섯들이 자라는 것을 보고 저것을 식용으로 사용할수 있을지 궁금해 했다. 그는 마을 도서관을 찾아가서 버섯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그는 버섯 전문가가 되었다. 존 케이지는 산으로 들로 다니면서 버섯을 채취하여 먹을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파악했고 아울러 사람들에게 버섯의 영양에 대하여 소개하기 시작했다. 존 케이지가 지금까지 연구를 위해 수집한 각종 버섯들은 현재 산타 크루스의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보관하고 있다. 존 케이지가 버섯 전문가라는 것을 두말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지만 그가 또한 동성애자였다는 것도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는 댄스를 위한 작품도 다수 작곡하였다. 그는 현대무용의 발전에 견인차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가 작곡한 댄스 음악은 주로 댄서이며 안무가인 머스 커닝엄(Merce Cunningham: 1919-2009)을 위해 작곡한 것이다. 머스 커닝엄은 마치 벤자민 브리튼과 피터 피어스의 관계처럼 존 케이지의 평생 파트너였다.


버섯을 수집하고 있는 존 케이지


존 케이지는 한동안 뉴욕에 있는 유수의 광고회사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했다. 그는 광고회사에서 비즈니스 카드, 사무실 문구, 광고지, 회사의 크리스마스 카드 등을 디자인했다. 그는 또한 출판부서의 예술감독 및 조판인쇄 디자이너로도 일했다. 그가 광고계에서 일했던 경험은 그의 말기 작품들에 많은 영감을 준 것이었다. 특히 그의 그래픽 기보법은 그래픽 디자이너로서의 재능을 살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