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시컬 뮤직 팟푸리/클래시컬 뮤직 팟푸리

위대한 작곡가의 이색 직업

정준극 2019. 4. 2. 16:43

위대한 작곡가의 이색 직업


작곡가이기도 했지만 생계를 위해서 또는 음악 이외의 분야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다른 직업을 가지고 상당기간을 생활했던 사람들이 있다. 하기야 전문 음악교육기관이 없던 시절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작곡활동을 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은 결국 음악가로서 생애를 보냈기 때문에 별도의 직업을 가지고 생활했던 경우와는 차이가 있다. 위대한 작곡가들이 어떤 별도의 직업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아는 것도 클래시컬 음악을 좀 더 이해하는 하나의 구실이 될 것이다.


○ 필립 글라스(Philip Glass: 1937-): 택시 운전사, 가구 운송자, 배관공

현대음악에 있어서 병렬주의(미니멀리즘)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필립 글라스는 43세가 되기까지 생계를 위해 택시 운전사, 가구 운반자, 배관공의 일을 하였다. 그렇게 일하면서서도 그는 음악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하여 아방 갸르드 작품들을 생산하였다. 그의 '해변의 아인슈타인', '열두 파트의 음악'(Music in Twelve Pats) 등은 그런 일들을 하면서 작곡한 것들이다.


필립 글라스는 택시 운전사, 가구 운반자, 배관공이었다.


○ 챨스 아이브스(Charles Ives: 1874-1954): 보험설계사, 부동산 중개사

미국에도 이런 훌륭한 작곡가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세계에 알린 케이스가 챨스 아이브스이다. 미국은 그를 '어메리칸 오리지널' 작곡가라고 부르며 존경하고 있다. 다만, 그의 미국적인 교향곡들은 그의 생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사후에야 재조명되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 챨스 아이브스인데 본 블로그의 다른 파트에서도 설명했지만 어릴 때부터 스포츠에 유달리 관심이 깊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야구부 주장이었고 대학교에 다닐 때에는 축구팀의 중심 선수였다. 그리고 그는 육상에서도 남다른 실력을 보였다. 그래서 예일대학교 육상 코치는 챨스 아이브스를 아예 프로 육상선수가 되도록 코치하였으나 결국은 음악에 대한 열정을 떠나지 못하고 작곡가의 길을 걸었다. 챨스 아이브스가 작곡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73세 때에 퓰리처 음악상을 받고 부터였다. 그러나 그 전에는 상호생명보험회사의 보험설계사였으며 그와 동시에 실력을 인정받는 부동산 중개사였다. 그러다가 아무래도 안정된 직업을 가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였으며 작곡가가 되면 멋있는 부인과 귀여운 자녀들과 함께 여유있는 생활을 할수 있을 것으로 믿어서 보험이니 부동산이니 하는 것을 집어 치우고 작곡의 길로 접어 들었다.


챨스 아이브스는 보험설계사 겸 부동산 중개사였다.


○ 알렉산더 보로딘(Alexander Borodin: 1833-1887): 유기화학자

러시아의 알렉산더 보로딘은 작곡가로서도 유명하지만 실은 화학자, 그중에서도 유기화학자로서 유명했다. 유기화학이란 유기물직, 구체적으로는 탄소를 주성분으로 하는 화합물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보로딘의 연구결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알돌 반응(Aldol reaction)을 발견한 것이다. Aldol 이란 단어는 Aldehyde(알데하이드)와 Alcohol(알코홀)에서 따온 것이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보로딘을 '알데하이드 교수'라고 부르기도 했다. 알돌 반응으로 얻을수 있는 가장 중요한 화학물질은 펜티리스리톨(Pentaerythritol)이란 것으로 이 물질은 플라스틱, 폭발물, 페인트, 화장품, 비누, 접착제, 와니스, 의약품 등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것이다. 아무튼 이처럼 보로딘은 뛰어난 화학자였다. 그는 국립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초청을 받았으며 여러 대학에서도 화학교수로 초빙을 받았지만 모두 사절하고 작곡가로서의 길을 걸었다. 오페라 '이고르 공'으로 유명한 보로딘은 1863년부터 몇년 동안 키로프의 군사의과대학에서 화학교수로 재직했었다. 그는 작곡을 위해 군사의과대학을 떠나면서 후임으로 동료 화학자이며 사위인 알렉산더 다이닌을 후임으로 정하였다. 


뛰어난 화학자였던 보로딘


○ 야니스 크세나키스(Iannis Xenakis: 1922-2001): 건축가

야니스 크세나키스라고 하면 우리에게는 낯선 이름이겠지만 전후 프랑스에서는 그의 음악 작품이 상당한 관심을 끌었었다. 루마니아에서 태어나서 그리스에서 학교를 다녔고 2차 대전 후에 그리스를 떠나 파리로 정치적 망명을 했던 세나키스는 작곡가이기 전에 건축가였다. 그는 아테네대학교에서 간축공학을 전공하였고 파리에서는 저명한 건축가인 르 꼬르뷔지에(Le Corbusier)와 함께 일하면서 몇면 중요한 건물들의 설계를 맡았었다. 예를 들면 엑스포 58의 필립스 파빌리온, 낭트의 아파트 유치원, 리옹 인근의 도미니카 수도회 건물, 인도 찬디가르 정부청사 등이다. 그중에서 엑스포 58의 파빌리온은 독자적으로 설계하여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음악에 있어서 수학적 모델을 사용하는 선구자였다. 또한 전자 및 컴퓨터 음악의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음악과 건축 공학을 통합하는 아이디어를 실현코자 했다. 이미 존재하는 공간에 음악을 설계하는 일이었다. 아울러 설계 공간에 특별한 음악 작곡과 공연을 통합하는 일도 추진하였다.


뛰어난 건축공학자였던 야니스 크세나키스


○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 1678-1741): 가톨릭 사제

비발디라고 하면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하나이지만 원래 그의 직업은 가톨릭 사제였다. 비발디는 25세 때에 베니스에서 가톨릭 사제로서 서품을 받았다. 비발디는 빨간 머리였고 여기에 사제의 빨간 옷을 입고 다녔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빨간 사제'(Il prete rosso)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는 천식이 심해서 사제로 서품된지 1년 후에 교회의 사제직에서 사임할수 밖에 없었다. 교회는 그에게 수녀원이 운영하는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Ospedale della Pieta: 자혜병원)의 고아원에서 고아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일을 맡겼다. 이 고아원은 베니스의 Consorelle di Santa Maria dell'Umilta라고하는 수녀회가 고아와 버림받은 아이들을 위해 설립한 자선기관이었다. 처음에는 고아원으로 시작하였으니 비발디가 온 이후로는 음악학교로 발돋음하였다. 세월이 흘러 17-18세기에는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 음악학교의 여학생 앙상블이 국제적으로도 유명해져서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파트롱들이나 관광객들이 이들의 연주를 듣기 위해 일부러 찾아 왔었다. 비발디는 이 곳에 있으면서 참으로 많은 작곡을 하였다.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도 이 때에 작곡한 것이다.


비발디는 원래 빨간 머리였다. 그림에서는 가발을 썼다. 그는 비르투오소 바이올리니스이기도 했다.


○ 구스타브 홀스트(Gustav Holst: 1874-1934): 학교 교사

오케스트라 모음곡인 '행성'()으로 유명한 영국의 구스타브 홀스트는 작곡가이기 전에 교사였다. 그는 실은 작곡가이기 전에 연주자였다. 주로 오케스트라와 밴드에서 트럼본을 불었다. 그러다가 작곡에 대한 열정을 살리기 위해 독일로 갔다. 그러나 당장 먹고 살기 위해서는 오케스트라에서 악기라도 연주해야 했다. 그러다가 작곡을 하면 좀 더 많은 수입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1903년에 오케스트라 멤버를 사직하고 작곡에만 전념하였다. 홀스는 바그너 숭배자였다. 바그너처럼 위대한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독일에서 작곡가로 생활한다는 것은 부유한 파트롱이 없는 한 어려운 것이었다. 홀스트는 2년을 그렇게 보내다가 마침 영국 덜위치의 알렌여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와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그는 알렌여학교에서 1921년까지 교사생활을 하다가 1921년부터 세상 떠날 때까지는 런던에 있는 성바오로여학교(St Paul's Girls' School)의 음악교사를 지냈다. 그러는 중에 1907년부터 1924년까지는 몰리(Morley) 칼리지의 음악담당 교사를 지내기도 했다. 교사생활을 이런 저런 학교 일도 해야 하기 때문에 평일에는 작곡을 위한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다. 홀스트는 주말에 작곡에 전념하였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행성'이며 '성바오로 모음곡'. '브루크 그린 모음곡' 등이었다.


구스타브 홀스트. 사실상 평생을 학교 교사로 봉직했다.


○ 니콜라이 림스키 코르사코프(Nicolai Rimsky-Korsakov: 1844-1908). 해군 장교

러시아의 민속적인 색채가 짙은 오페라들을 작곡했고 또한 오케스트레이션의 거장인 니콜라이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작곡가이면서 또한 국가에 헌신한 해군장교였다.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12세 때에 뜻한바 있어서 제정러시아 해군이 운영하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수학-항해과학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가 해군에 발을 들여 놓게 된 주된 이유는 사회생활에 적응하는 것을 배우며 또한 수줍은 성격을 개선하기 위해서였다. 아무튼 그때부터 그는 해군사관생도와 같은 생활을 하였다. 18세에 이 학교를 졸업한 그는 곧이어 제정러시아 해군의 장교로서 함선에 배속되었다. 장교로서의 계급은 우리식으로 보면 대위 정도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는 사관학교에 다닐 때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았고 나중에는 작곡 공부도 했다. 사관학교의 교장은 그의 그런 공부를 금지하였으나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막지 못했다.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3년 동안 대양에서 함선 생활을 하였다. 그 기간 중에 그는 교향곡 1번을 작곡하였다. 그는 해군을 떠나 상트페테르부르크음악원의 교수로서 작곡과 오케스트레이션을 가르쳤다. 그는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고 레슨을 할 때에는 언제나 해군장교의 제복을 입었다. 제정러시아 해군은 림스키 코르사코프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를 해군군악대 감독관이라는 명예직을 주고 일정한 경비를 지원해 주었다. 감독관이라는 직책은 림스키 코르사코프만을 위해서 설정한 것이었다.


니콜라이 림스키 코르사코프


 

제정러시아 해군에서 운영하는 수학-항해과학학교 학생 시절의 림스키 코르사코프와 해군 장교시절


○ 에릭 위태커(Eric Whitacre: 1970-): 모델

미국 네바다주 르노 출신인 에릭 워태커는 줄리아드를 나온 작곡가이다. 그는 주로 합창곡과 오케스트라곡과 목관 앙상블 음악을 작곡하였다. 그리고 뛰어난 합창 지휘자였다. 그는 뮤지컬(음악극장)도 작곡했다. '실낙원: 그림자와 날개'(Paradise Lost: Shadows and Wings)라는 작품이다. 그는 어릴때부터 음악적 재능이 있어서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그리고 중학교부터는 학교 밴드부에서 활동했다. 그후에는 테크노 팝 밴드에서 신테사이저를 연주하기도 했다. 당시에 그는 락 스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다가 음악을 본격적으로 공부해야 겠다고 생각하여서 라스 베가스에 있는 네바다대학교에 들어가서 작곡을 공부했다. 그러한 그는 한마디로 잘생긴 남자였다. 턱은 마치 대리석을 깍아 놓은 것과 같고 머리칼은 눈부신 금빛이었다. 그는 2011년에 이름있는 스톰 모델링 에이젠시(Storm Modelling Agency)와 계약을 맺고 작곡가이면서도 직업 모델로서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 모델소속사를 통해 활동한 유명 모델로는 카라 델러빈(Cara Delevingne)과 신디 크러포드(Cindy Crawford) 등이 있다. 에릭 위태커는 모델로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플랫폼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기뻐하였다. 이로서 세계 정상급 작곡가가 이제는 모델로서도 활동하는 시기가 도래하였다.


작곡가, 지휘자이며 모델인 에릭 위태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