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미와 이휘소
미국이라는 데를 1974년 초 처음 가 보게 되었다. 시카고 근교에 있는 알곤국립연구소(ANL)에서 연수받기 위해서였다. 그 때만 해도 미국 정부에 에이아이디 블록 그랜트(AID BLOCK GRANT)라는 프로그램이 있어서 6개월 연수기회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연수 내용은 주로 과학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것이었고, 참가자는 열 명 남짓이었다. 나는 유일한 외국인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미국의 각 대학이나 원자력 관련기관에서 온 우수 인력이었다. 알곤국립연구소는 시카고대학교가 운영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때문에 강사진도 대체로 시카고대학교 교수였다. 그런데 그 교수님들은 왜 그렇게도 말을 빨리들 하는지 모르겠다. 원래 영어 실력이 형편없는 터에 교수님들의 강의도 기관총 같아서 도무지 정신이 혼미하여 따라가기가 어려웠었다. 강의시간에 남들이 웃고 나면 한참 후에 겨우 눈치 채고 따라 웃어야 했다는 다른 유학생들 얘기는 많이 들었던 터였는데 바로 나의 경우가 그랬으니 실로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연수생활의 연속이었다. 어떤 경우엔 교수님이 웃기는 얘기를 했는지 안 했는지 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내 자신의 한심함을 탓하면서 쓴웃음을 짓는 일도 있었다. 더구나 매주마다 내야 하는 리포트에 있어서는 콩글리쉬의 표본이어서 교수님이 빨간 연필로 무던히도 고치다가 못내 나의 보고서를 아쉬운듯 휴지통으로 그냥 던져 버린 일도 더러 있었다.
매일매일 강의 듣고 리포트 써내는 것도 어려웠거니와 실은 생활도 말이 아니었다. 도대체 하루 체재비가 15불이었으니 기숙사비용 내고 밥 사먹고 나면 글자 그대로 빈털털이여서 집에서 약간 가져온 돈으로도 모자랐고 혹시 같은 연수생인 미국 친구들이 심심파적으로 영화를 보러 가자든지 부기우기를 가자느니 또는 그럴듯한 음식점이 있으니 외식이라도 하러 가자고 하면 주머니 사정을 고려하여 위기를 모면하느라고 여간 민망스러웠던 것이 아니었다.
To Fermi With Love
타향살이 시카고 생활 6개월에 그래도 뜻 깊었던 일은 두 사람의 잊을 수 없는 분을 만났던 일이었다. 그 중 한 분은 저 유명한 페르미(Fermi)박사의 미망인 라우라(Luara)여사였다. 로라 여사는 페르미박사가 일했던 시카고대학교 구내의 아파트에서 그 분의 추억을 되새기면서 조용히 살고 있었다. 젊은시절에는 퍽이나 미인이었을 라우라 여사는 연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우아한 기품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던 퍽이나 지성적이면서도 다정한 분이었다. 당시 나는 알곤국립연구소의 부소장이었던 애덤스박사의 친절한 배려로 시카고대학교 근처에 있는 그의 집에서 잠시 기숙했었다. 애덤스 박사 부부와 친분이 있었던 라우라 여사는 같은 구역에 살고 있기 때문에 간혹 애덤스 박사 부부의 집을 방문한 일이 있다. 그 연유로 인하여 나도 라우라 여사를 만나 대화를 나눌수 있었던 것이다. 귀국에 즈음하여 라우라 여사는 내게 To Fermi With Love(페르미에게 사랑을)라는 추모 레코드앨범을 주어 지금까지 잘 간직하고 있다. 이제 여사는 세상을 떠났지만 페르미라는 위대한 과학자를 도와 원자력역사에 빛나는 이정표를 세우도록 한 라우라 여사의 모습은 날이 갈수록 새삼스럽다.
또 한 분은 이휘소 박사였다. 알곤국립연구소에서 서쪽으로 한 시간도 못되는 일리노이주의 바타비아라는 곳에 바로 그 세계적 물리학자 페르미 박사를 기념하는 페르미국립연구소가 있다. 이휘소 박사는 그 연구소 직원이었다. 연구소 이름이 페르미이기 때문에 원자로 개발 같은 것을 연구하는 곳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엄청난 규모의 입자가속기가 광활한 지하에 설치되어 있는 소립자 연구소이다. 어느날 알곤국립연구소에 근무하고 있는 조대현박사가 내가 페르미국립연구소를 견학 간다고 하니까 그 곳에 미국 물리학계에서는 전도가 유망하다고 알려진 이휘소라는 분이 있으니 한 번 만나서 인사나 나누는 것도 괜찮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래서 페르미국립연구소에 가서 우정 점심시간을 이용해 안내한테 물어서 이휘소 박사와 연락이 닿아 구내식당에서 만나게 되었다. 이휘소 박사는 그저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누가 찾아왔다고 하니까 어떻게 생긴 친구가 귀찮게 만나자고 하는지 궁금해서 구내식당으로 내려 온것 같았다. 왜냐하면 딴 사람들은 ‘서울이 어떻게 변했느냐?’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무개는 내가 잘 아는 사람인데 그 양반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 ‘만일 한국에 돌아간다면 무슨 일을 할 수 있고 어떤 대우를 받을수 있느냐?’ 등등 한도 끝도 없는 얘기를 나누기가 왕왕인데 이휘소 박사는 그런 통상적 문의는 없었고 오히려 문외한인 나에게 가속기가 어쩌고 챰이나 쿼크가 저쩌고 하는 전문적 설명을 많이 해주었다.
그러나 어쨌든 이휘소 박사는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알곤국립연구소로 연수를 왔다는 웬 청년이 찾아와 공손히 인사를 드리고 얘기를 나누게 되니 상당히 감개무량한 듯 구내식당의 점심값 몇불을 지갑에서 꺼내어 치러주었으며 나중에 다시 만나 저녁이나 같이 하자면서 집 전화번호까지 적어주었으나 다시 만날 기회를 갖지는 못했다. 크지 않은 키에 안경 쓴 둥그스름한 얼굴, 말솜씨가 독특하면서도 웃을 때는 활짝 웃던 모습, 구내식당 음식이 형편없다고 하면서 물리학자답지 않게 식당 아줌마들을 미워하듯 노려보던 모습, 그것이 이휘소 박사에 대한 인상이었다. 그러다가 몇년 후 서울에서 신문에 이휘소라는 재미과학자가 자동차사고로 사망했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아, 이 양반이 돌아가시다니, 참 안됐구나. 페르미국립연구소에 유일하게 취직했던 자랑스런 한국 분이셨는데….’ 라고 솔직히 그저 그런 생각을 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근자에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제법 긴 제목의 책자가 화제가 되면서 매스컴을 타더니 웬걸 그 후 ‘픽션이냐, 넌픽션이냐?’ ‘터무니 없는 추측이다. 터무니 있는 얘기다.’ ‘잘못 알고 있어도 한참 잘못 알고 있다. 잘못 알고 있는 건 하나도 없다.’ 등등 의견이 백출하고 있으며 더구나 도하 일간지에 독후감을 비롯한 이의제기 기사가 연속 특필된 바 있다. 내가 그 때 일리노이주 페르미국립연구소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대접받았으며 대화를 나누었던 그 양반이 과연 ‘그렇게 깊은 뜻을’ 지니고 있었던 분이며, 한국의 핵무기 개발계획의 주역이라는 등 ‘그렇게 심한 말을’ 듣는 인물이었는지 도무지 추측조차 못할 지경이다. 내가 만난 이휘소 박사는 핵무기 개발하고는 거리가 먼 그저 열심으로 연구하는 물리학자 겸 소박한 직장인 같았을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무궁화꽃…’때문에 혹시라도 일반국민들 사이에 우리나라도 재미과학자를 동원하여 핵무기개발을 시도했지 않았었느냐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면 그건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해 매진하고 있는 우리 연구소로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993년 11월)
시카고대학교에 있는 페르미박사의 핵분열의 자기제어 성공 기념 조형물 (1993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