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과 ‘핵’
원자력발전소를 핵발전소라고 하며 방사성폐기물을 핵폐기물, 심지어는 핵쓰레기라고 까지 부르는 사람이 아직도 우리 주위에 많다. 주로 반핵 단체들이 그렇게 쓰고 있으며 대부분 언론도 별로 예외가 아니다. 지난달 16일 서울 잠실 교통회관에서 과학기술처 주관으로 열렸던 이른바 방사성폐기물 공개토론 회장에는 현수막에 방사성폐기물이란 문구 다음에 친절하게도 괄호 안에 ‘핵폐기물’이란 말을 첨가하여 놓기까지 했다. 정부주관의 공식석상에서도 핵폐기물이란 용어가 공식 등장한 셈이다. ‘원자력’이든 ‘핵’이든 뜻은 비슷하겠지만 일반 대중에게 던져 주는 심리적 인식에는 천양의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원자력’이라는 말은 평화 이용의 뜻을 전제로 하고 있다. 원자력발전소, 원자력병원, 원자력전지, 원자력 선박 등등…반면 ‘핵’이란 단어는 대체로 부정적이고 군사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핵무기, 핵폭탄, 핵실험 등등…
우리나라 원자력 용어 사전에는 물론 민중서림 발간의 이희승편 국어대사전에도 ‘원자력발전소’는 있어도 ‘핵발전소’라는 단어는 나와 있지 않으며 ‘방사성폐기물’이란 단어는 기록되어 있어도 ‘핵폐기물’ 또는 ‘핵쓰레기’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원자력법에도 핵폐기물이란 용어는 일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핵폐기물’ ‘핵발전소’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핵’이라는 낱말이 함유하고 있는 어둡고 두려운 이미지를 일반 대중에게 심어 줌으로써 원자력에 대한 공포심과 불안감을 조장하여 반핵의 기치를 더욱 높이 들겠다는 의도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
‘핵폐기물’이라고 해도 일반 국민에게 던져 주는 이미지가 무섭고 두려운 판에 하물며 ‘핵빨갱이’라는 신조어의 출현에는 다만 경악을 금치 못할 뿐이다. 얼마 전 경북 포항지역에서 실제로 나붙었던 용어이다. 그 지역 주민중 어떤 분이 국가 방사성폐기물관리사업에 대하여 협력의사를 갖고 있었는데 이른바 ‘반투위’는 그 주민을 공산주의반동으로 낙인찍고 그 주민의 집에 붉은 페인트로 ‘핵빨갱이’라고 대문짝만하게 써 놓았던 것이다. 도대체 원자력과 악랄한 공산당인 빨갱이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으며 더구나 같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원자력 사업을 지지했다고 해서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그런 상식이하의 행위가 요즘과 같은 대명정대한 민주사회에서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 지 도무지 모를 일이다.
각설하고, 차제에 원자력용어가 일반대중에게 주는 이미지 및 파급 영향을 고려하여 비록 만시지탄의 감은 있으나 이제라도 다수의 용어를 교체, 정화하는 일이 절실히 필요할 것 같다. 다시 말하여 부정적이고 어두운 용어는 모조리 긍정적이고 밝은 용어로 고쳐 쓰는 용단이 필요할 것 같다.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원자력용어의 거의 대부분은 영어를 번역한 것이다. 미국이 원자력이용확대의 산파 역할을 했기 때문에 자연히 영어용어가 많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원자력이용의 첫 제품인 원자폭탄을 비밀리에 개발할 때에 그 내용을 일반인이 알면 곤란하므로 상당수 용어를 위장 사용했던 것도 지금 우리 원자력계가 겪고 있는 괴로운 입장의 한 원인으로 분석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한번 정해 놓은 용어는 고치지 않고 그대로 쓰려는 과학자들의 고집스러운 기본적 심성에서도 그동안 용어 순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오늘에 이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Skeleton이란 단어는 해골을 뜻한다. 그러나 원자력용어로는 해체해 놓은 우라늄 연료 집합체를 말한다. 연료집합체를 해체한다고 할 때에 dismember라는 단어를 쓴다. 그러나 이 단어는 원래 팔, 다리 등 사지를 절단한다는 뜻이다. coffin이란 단어는 시체를 넣는 관을 말한다. 그러나 원자력용어로는 사용한 원자력연료를 원자로에서 꺼내어 임시로 담아 두는 용기를 말한다. poison이란 단어는 독극물 또는 독성 물질이란 뜻이지만 원자력용어로는 원자로의 반응도를 떨어뜨리는 물질. 예컨대 크세논-135같은 것을 말한다. 사용한 원자력연료를 풀(수조)에 옮겨 넣기 전 잠시 놓아두는 곳인 morgue라는 단어에 이르러서는 아연실색 할 수밖에 없다. 일반인들이 이해하는 morgue라는 단어는 변사한 사체를 연고자가 나타날 때까지 임시 보관하는 이른바 시체공시소를 말한다. 이렇듯 원자력 용어의 상당수가 일반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것과는 무척 동떨어진 것이기 때문에 원자력에 대한 이미지를 더욱 부정적인 것으로 몰고 가고 있음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미국 아이다호주에 있는 아이다호국립엔지니어링연구소(INEL)소속의 저명한 원자력 전문가가 근자에 신문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원자로와 원전연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었다. 과연 그 신문기자가 받은 원자력에 대한 이미지는 어떤 것이었을까? 기자가 이해 못하는 내용이면 일반 국민도 당연히 이해 못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원자로는 off-normal event(비정상적인 사고)가 일어나더라도 자동적으로 shut down(폐쇄)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원자로는 수동으로도 정지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을 scram(비상 탈출)이라고 합니다. 어떤 경우이든 poison(독성 물질)을 함유한 제어봉이 원자로심으로 삽입되어 연쇄 반응을 abort(낙태)시키며 이와 함께 criticality(위기)를 arrest(체포)하게 됩니다. 사용한 핵연료는 cask(시체를 넣는 임시관)에 담아 crypt(납골당)에 옮깁니다. 여기서 연료를 cask에서 다시 꺼내 coffin(관)에 옮긴 후 morgue(시체공치소)에 하치하게 됩니다. 어떤 때는 연료집합체를 dismember(팔, 다리를 절단)합니다. 이 과정에서 생기는 waste(쓰레기)와 skeleton(해골)은 한데 모아 burial site(매장지)로 보내 pit(웅덩이)에 dump(버리게)됩니다. short-lived(단명의) radioactive waste (방사능 쓰레기)는 decay(부패)되며 long-lived(장수명의)방사능 쓰레기는 일단 임시로 bury(매장)한 후 나중에 entomb(매장한 시체를 다시 파냄)하게 됩니다.」
그 전문가로서는 일상적인 원자력용어를 써 가면서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느라고 노력했겠지만 듣는 기자의 입장에서는 마치 드라큘라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 소름끼쳤을 것이다.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설 원자력환경관리센터는 ‘방사성폐기물’이란 용어가 일반 국민에게 주는 부정적 이미지를 대신키 위해 수년 전 각계 전문가의 자문을 얻어 이를 ‘원자력부산물’로 고쳐 부르는 것이 우선 매우 바람직하다는 제의를 한 바 있다. 그러나 그 제의는 법적인 뒷받침을 얻지 못하여 아직까지 유야무야의 형편에 처해 있을 뿐 진척이 없다. IAEA도 Radioactive waste(방사성폐기물)라는 용어가 주는 부정적 이미지를 변화시켜 보려고 Nuclear arisings(원자력 부산물)이라는 표현을 시도해 보기도 했지만 정확한 의사전달이 안 된다는 이유 때문에 역시 각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일본은 ‘핵’이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감안하여 몇 해전부터 ‘핵연료’라는 말 대신에 ‘원자연료’또는 줄여서 원연(原燃: 겐넨)이란 단어를 쓰고 있다. 로카쇼무라의 재처리, 농축, 저준위 방사성폐기물처분 등 3개시설의 운영을 책임 맡고 있는 회사의 명칭은 일본원자연료주식회사이다.
한국핵연료주식회사도 얼마전 회사이름을 한국원전연료주식회사로 고쳤고 우리 연구소도 브로슈어나 소개용슬라이드에 「핵연료」란 말 대신「원전연료」또는「원자로연료」란 말을 쓰고 있다. 원자력의 국민이해 증진을 위한 노력의 일환이 아닐 수 없다. (1993년 10월)
일본 로카쇼무라의 원자력시설을 시찰하고 있는 중앙언론사 과학기자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