팍스 로마나
한해가 저문다. 크리스마스의 계절이다. 구세주의 탄생에 대한 기록은 신약성경 누가복음이 그래도 자세하다. 역사적 배경이 한 구절 들어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느니…’라는 기록이 있다. 로마제국의 가이사(원래 케사르를 말하며 황제라는 의미도 있음) 아구스도(정확히는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가 제국에 속해 있는 모든 지역 백성의 호적을 일제히 정리하라고 지시를 내린 것이다.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던 유대 왕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대 땅 나사렛 마을에 살고 있었던 목수 요셉도 이같은 아우구스투스황제의 영에 따라 정혼한 여인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가게 되었고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함께 세상 역사가 온전히 새로운 변화를 입게 되었다는 얘기는 누구나 대개 다 아는 줄거리다.
이 가이사 아우구스투스란 인물은 과연 누구인가? 로마제국의 절대 권력자 케사르(씨저)가 부르투스의 칼에 찔려 사망한 후 로마는 권력을 잡으려는 세 사람이 자웅을 겨루었던 이른바 트로이카 시대를 겪게 된다. 부르투스를 세치 혀로 몰아내고 순식간에 시민의 영웅으로 부상한 집정관 안토니우스, 케사르의 부관으로 당대의 재력가였던 레피투스, 그리고 케사르의 양아들로서 전도가 촉망한 청년 옥타비안, 이 세사람이 로마제국의 대권을 손에 넣으려고 다툼을 거듭했던 것이다. 절대 권력이란 언제나 한 사람의 것…. 안토니우스는 아내(옥타비안의 여동생)를 버리고 케사르의 애인이었던 저 유명한 클레파트라와 결혼한 대가를 치루니 옥타비안의 군대에게 크게 패하여 도망치게 되었고 얼마후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역사의 한 장면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레피투스 역시 옥타비안과 무모한 대결을 하다가 이름 모를 전투에서 화살을 맞고 죽었다. 이렇게 되니 결국 그 누구도 옥타비안에게 대항할 세력을 가진 사람은 하나도 없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감히 그럴 생각조차 품지 못했다. 그렇게하여 옥타비안이 로마제국의 새로운 지배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러한 옥타비안에게 원로원은 디비파트리(Divi Patri), 곧 ‘존귀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바쳤다. 그로부터 옥타비안은 아우구스투스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 로마는 왕정이 아니라 공화정을 펴는 나라였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도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제 1시민. 즉 시민의 대표자란 의미의 프린켑스(Princeps, 영어의 President와 같은 뜻)라고 불렀다. 아우구스투스 집권이후 로마는 차츰 안정과 번영의 길로 달리기 시작했다. 아우구스투스가 능동적이면서도 기술적인 정치를 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케사르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의 기틀을 단단히 할 수 있었던 것은 뭐니 뭐니 해도 그의 훌륭한 인품, 그리고 남의 모범이 되는 도덕 때문이었다.
백성은 몸소 실천하는 지도자를 존경하게 마련이다. 백성들의 믿음과 존경. 이것을 얻지 못하면 제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 즉 제 1시민(President)이라고 해도 오래가지 못하는 법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언제나 검소했다. 결코 사치하는 일이 없었다. 호화로운 궁전을 짓지 못하게 했다. 대신 신전(神殿)을 많이 지어 백성들의 정신적 믿음을 다지는데 애썼다. 낭비와 사치 생활을 일삼는 자를 엄하게 처벌하며 무사안일을 추방하는 법도 만들었다. 품행이 단정치 못하거나 윗사람에게 아첨만 하며 권력으로 힘없는 사람을 억누르는 자가 있으면 가차 없이 처벌토록 했다. 실로 아우구스투스는 옳은 일은 솔선수범하고 그른 일은 공명정대하게 벌주는 그런 정치를 했다. 아우구스투스의 올바른 통치와 원로원의 두드러진 국가관, 그리고 시민들의 협조 정신이 바탕이 되어 로마는 점점 발전하고 부강하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이후의 로마는 서쪽으로 영국과 스페인과 포르투갈까지 통치하게 되었고, 북쪽으로는 라인강과 다뉴브강까지를 지배 아래 두었으며 동쪽으로는 소아시아까지, 그리고 남쪽으로는 이집트와 북아프리카 일대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국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큰 영토를 통치하려니 변방을 지키는 군대가 더욱 많이 필요했다. 따라서 어느 지역에 군인으로 징발할 수 있는 장정이 얼마나 있는지를 자세히 파악할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 하라’고 했던 것이다. 아우구스투스 제 1시민 통치 이후로 약 3백년간 로마는 그야말로 태평성대를 누리게 되었다. 후세의 사학자들은 이 기간을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고 불렀다. 로마식 평화라는 뜻이다.
35년전 원자력원이 처음 출범하였을 때에 비하여 오늘의 우리 연구소는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을 이룩하였다. 인력 면이나 예산 면에 있어서도 그렇고 시설 면에 있어서도 그러하며 또 연구개발사업의 규모 면에 있어서도 그렇다. 굳이 한가지 민망스런 일을 내세우자면 그 당시에는 원(院)이라는 괜찮은 칭호를 가졌었는데, 지금은 소(所)가 되어 호칭 면에 있어서 정신적으로 격하되었다는 점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오늘날 전반적으로 보아 우리만큼 안정되게 팍스 로마나를 구가하는 연구소도 별로 없을 것이다. 물론 폐기물 문제 등등 걱정꺼리도 산적해 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에 만족하여 안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그 어느때 보다도 능동적으로 현실을 주도해 나가야 하며, 또한 미래를 개척해 나가기 위해 과감히 도전할 때임을 우리 모두가 재인식해야 할 것이다. 적극적 사고방식과 개척자적 정신 자세가 없다면 그거야 나머지는 퇴보밖에 할 것이 없지 않은가? 세계를 주름잡던 대 로마도 결국은 팍스 로마나 때문에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서는 운명을 맞이하지 않았던가? 다가오는 새해부터는 매사에 새롭고 능동적인 자세로 임해야겠다. (1993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