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덕봉 메아리/보덕봉 메아리

일본은 있다

정준극 2007. 5. 22. 10:15
 

일본은 있다


다치사키 준코(立崎順子)양은 관광버스 안내원이다. 일본 아오모리껜(靑森縣)의 미사와(三澤)시와 하치노헤(入戶)시를 중심으로 영업하고 있는 미야고(三八五)버스회사 소속이다. 우리가 다치사키 양을 만난 것은 얼마전 로카쇼무라(六個所村)에 있는 방사성폐기물 처분시설을 시찰키 위해 서울의 방송취재팀과 함께 미사와에 갔을 때였다. 비행기로 도쿄에서 로카쇼무라 시설을 찾아가려면 아오모리(靑森)시로 가는 것 보다는 미사와시로 가는 것이 더 편하다. 마사와 공항에 도착하니 도쿄에서 미리 연락했던 미야고회사의 쟘보택시(16인승)가 나와 있었다. 그때 안내원으로 나온 사람이 다치사키양이다.


다치사키양은 태평양에 면한 하치노헤시에 살고 있으며 학교도 그곳에서 다녔다고 한다. 작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고 하니 나이는 얼핏 열아홉이 될 것 같다. 동그스름한 귀여운 얼굴에 볼우물이 살짝 드러나는 예쁜 얼굴이다. 사과처럼 풋풋하고 싱그럽게 생겼다. 아마 아오모리의 특산물인 사과를 많이 먹어서 예쁜 모양이다. 우리 일행이 쟘보택시(우리 같으면 콤비)에 오르자 다치사키양은 상냥 똑똑하게 자기소개 겸 모쪼록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공손히 하면서 머리를 두세번이나 조아렸다. 그리고는 아오모리껜에 대하여 이것저것 설명하기 시작했다. 인구, 특산품, 기온, 관광 명소, 축제 등등-.설명이 깔끔했다. 미리 많이도 공부했다. 아 참! 다치사키양이 영어나 한국어로 설명한 것이 아니라 일본말로 하면 동행했던 한국인 통역사가 한국말로 통역해 주었다.


우리 일행은 다치사키양이 훌륭한 백성이라고 생각하면서 약간의 찬사를 보냈다. 노래도 썩 불렀다. 도호쿠(東北)지방의 민요를 한 곡조 부탁했더니 선뜻 마이크를 잡고 눈을 곱게 뜨며 앵앵 노래를 불렀다. 박수를 보내자 계속 하라는 뜻인 줄 알고 또 다른 노래를 불러 댔다. 두세곡 듣고 나니 듣기에 그게 그것 같고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겠고 또 너무 단조로운 것 같아서 조용히 있었더니 그만 하라고 뜻인줄 알고 그만 불렀다. 모두들 참 괜찮은 안내양이라고 생각하면서 내심 기분이 좋았다. 잠보택시는 태평양을 옆에 안고 지쳐 달리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가 참으로 어이없는 대화로 앙앙불락해졌다. 우리 일행 중 어떤 양반이 다치사키양에게 별 뜻도 없이 파적으로 ‘혹시 한국에 와 본 적 있어요?’라고 물어 보았다. 다치사키양은 ‘한국에 가 본 적은 없습니다. 들어 본 적은 있어요. 손님 여러분이 한국에서 오신분들인 줄은 몰랐어요. 한국 사람은 처음 만나 본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국이 어디 있는지는 모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일본 땅이었다는데…’라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놀래서 ‘아니, 한국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다니? 바로 이웃인데…그리고 올림픽! 서울 올림픽도 몰라요?’라고 되물었다. 대답은 역시 답답한 것이었다. ‘올림픽에 대하여는 압니다. 그런데 서울 올림픽에 대해선…한국이란 나라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라면서 계면쩍은 듯 웃음 꼬리를 감추었다. 도대체 아무리 시골 관광버스회사 안내원이라고 해도 분명히 고등학교까지 다녔다고 하는데 한국에 대하여 그렇게도 모르다니? 일본의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한국에 대한 내용이 나오지도 않는단 말인가? 그렇지 않으면 아예 한국이란 나라에 대하여 가르치지도 않는 것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와 동행했던 통역이 한마디 거들었다. ‘사실 일본 고등학생들, 한국에 대해서 잘 몰라요! 몰라도 너무 몰라요! 아직도 자기네 식민지인줄 아는 학생들도 있어요! 학교에서 자세히 가르쳐주지 않는 것 같아요!’


우리 다치사키양과의 대화에서 일본 사회, 그리고 일본이란 나라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았다. 최근 KBS의 전여옥기자가 ‘일본은 없다’라는 책을 펴낸 바 있다. 도쿄 특파원 생활 2년 반 동안 실제로 느끼고 경험했던 일들을 나름대로의 꿋꿋한 신념으로 차분하게 써 놓은 책이다. 나는 그 책을 몇 번이나 읽고 나서 ‘일본은 없다’라는 주장에 감히 동감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득 다치사키양이 ‘한국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말한 것을 상기하고는 새삼 ‘일본은 있다’라고 생각을 다져 먹게 되었다. 아직도 한국 알기를 우습게 아는 일본이 있으며, 한국에 대하여 올바르게 교육하지 않는 일본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3월은 특히 일본을 생각하는 달이다.  (1994년 3월)            


 일본 미사와시의 미야꼬관광회사 안내양과 함께 (199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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