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덕봉 메아리/보덕봉 메아리

치자

정준극 2007. 5. 22. 14:55
 

치자


모처럼 양재동 꽃시장엘 갔다가 우연히 치자(梔子)꽃을 발견하고는 사게 됐다. 응접실 한쪽에 놓았더니 꽃향기가 온 집안을 감싸는 듯했다.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향기가 좋았다. 쟈스민보다 더 향기가 좋은 것 같았다. 향기 못지않게 꽃 모양도 아름다웠다. 장미 같기도 하고 쟈스민 같기도 했다. 꽃잎은 약간 핑크 빛을 띤 백색이다. 시간이 지나면 황백색으로 된다. 치자꽃 향기에 취해 있으려니 어렴풋이 어릴 적 생각이 났다. 40년 훨씬 넘은 오래 전 일이다. 그때 치자라는 열매를 처음 보았다. 신작로에 면하여 있는 어떤 허술한 가게의 문설주에 무슨 열매같은 것이 주렁주렁 실에 꿰어 있는 것을 본적이 있었다. 흙먼지가 풀풀 일어나는 그런 신작로였고 가게라고 해도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유리창 문짝들이 항상 닫혀 있는 그런 가게였다. 처음에는 실에 꿰어 매달려 있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었다. 쪼글쪼글해진 꽈리 같기도 했고 오래 묵은 대추 같기도 했다. 가게 아줌마가 설명해주는 덕분에 그게 치자라는 것을 알았다. 아, 이게 바로 치자였구나!


치자열매를 물에 담가 두면 노란 물감이 번진다. 정말 그렇게 노릇노릇한 색깔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며칠동안 울궈 낸 치자 물은 장판 칠할 때 썼다. 반질반질한 장판에 노란 물을 입히면 그렇게도 좋아 보일수가 없었다. 겨울에는 더 따뜻하게 보이고 여름에는 더 시원하게 느껴지는 그런 장판이었다. 치자 물은 빈대떡 만들 때도 어김없이 썼다. 녹두를 갈아서 치자 물을 풀은 후 솥뚜껑을 뒤집어 놓고 들기름을 둘둘 두르면서 빈대떡을 부치면 색깔이 노릿노릿한 것이 정말 보기에도 좋았다. 치자열매는 시골의 가정상비약으로도 많이 애용되었다. 염증이 생기면 소염제로 썼고 열이 높으면 해열제로 썼다. 또 코피 흘리는 데에도 치자를 달여 먹여 멎게 했다. 한방에서는 불면증과 황달 치료용으로도 썼다. 그런가하면 이뇨 작용이 뛰어나서 콩팥에 이상이 있을 때 치자열매를 달여 먹으면 효능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치자열매에 들어 있는 색소는 인체에 전혀 해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래서인지 식료품의 착색용으로 집집마다 많이들 썼다고 한다. 옛날에는 군량미를 간수할 때에 치자물을 들여 쌀을 노르스름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면 아주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치자물은 방부제 역할도 했기 때문에 쌀뿐만아니라 다른 곡식의 장기 보관에도 이용했다고 한다. 단무지(다꾸앙)를 만들때도 치자물을 들였던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치자 꽃으로 담근 술은 향기가 뛰어났고 치자열매로 담근 술은 빛깔이 무척 아름답다. 때문에 치자 술이라고 하면 특상품 건강주로 알려져 왔던 것도 사실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쪼글쪼글하게 못생긴 치자.... 신작로 가게의 문설주에 매달려 하루종일 먼지나 풀풀 뒤집어 쓰고 있는 치자.... 이렇듯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 없이 천덕꾸러기가 되어 구박받고 있는 치자가 우리 생활에는 무척 유익하게 쓸 수 있는 존재라니 신기롭기까지 하다. 어디 치자뿐인가? 우리 사람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이 사회에는 돈도 빽도 없고 정치력이나 로비력도 없어서 구박받고 천대받는 입장이지만 국민과 사회를 위해서는 남이야 알아주던 말던 그야말로 묵묵히 헌신적으로 기여하고 있는 사람이나 기관이 있기 마련이다. 나라는 그런 사람, 그런 기관, 그런 연구소를 푸대접할 것이 아니라 만사 제쳐놓고 지원 육성해야 한다. 우리 연구소를 보자. ‘연구만 하면 됐지 사업(기술자립)은 뭐하러 하냐?’ 따위는 모두 겉만 보고 속은 안보는 원자력 이해부족 사고방식 때문에 야기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어째서 공연히 치자 생각이 나는 것일까? 치자! 뭘 치겠다는 말인가? 요즘 같아서는 만사가 그저 답답하고 속상해서 공연히 책상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다.  (199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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