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워킹 투어/제2일 투어

3. 블루트가쎄 (Blutgasse)

정준극 2007. 4. 11. 14:51

블루트가쎄 (Blutgasse)


 피의 거리라니! 이상한 이름의 거리이다. 그러면서 무언가 기괴한 느낌을 주는 거리이다. 1369년부터 1411년까지 이 거리는 코트게쓸(Khotgessl: 진흙 거리)라고 불렀다. 진흙과 피는 거리가 먼 것 같은데 그런 이름이 붙여졌던 것도 궁금한 일이다. 현재의 피의 거리 1542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전설에 따르면 템플기사단이 흘린 피와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1312년 당국의 압박에 의해 오스트리아에서 템플수도회가 무너지는 것과 함께 템플기사단의 핵심인물들도 본부에서 하루아침에 거의 모두 살륙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템플기사단의 본부는 바로 블루트가쎄에 있었다고 한다. 너무나 많은 템플기사들이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거리는 온통 피의 홍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블루트가쎄, 즉 피의 거리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최근의 다른 연구에 의하면 블루트(Blut)라는 말은 블라우트(Blout)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한다. 블라우트는 이교도들이 제사 지낼 때 산제물로 바치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기록에 따르면 그 옛날에 이 거리에 이교도의 사원이 있었다고 한다.


성전기사단(Knights Templar)의 23대 그랜드 마스터인 자크 드 몰레이가 프랑스당국에 의해 이단이라는 누명을 쓰고 화형을 당한 장면. 1307년 10월 13일 금요일. 비엔나에서도 성전기사단이 이단이라고 하여 기사들을 체포하여 화형에 처하였다. 아마도 성전기사단의 재물이 탐났던 모양이다.

 

거리에 있는 건물들은 대부분 근세에 이르러 재건축되거나 새롭게 단장한 것들이다. 그래서 아주 매력적으로 보인다. 한때 블루트가쎄에 있던 건물들은 모두 저주를 받은 듯 형편없는 모습이었다. 유물보존위원회는 물론 건물 소유주들 까지도 재건축 및 보수작업에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비엔나시의회가 나섰다. 시의회는 건물주들이 아파트 내부보수에 투자를 한다면 시당국이 각 건물의 현관에 대한 보수를 책임지겠다고 제안했다. 옛거리를 살리자는 운동의 일환이었다. 이 운동에는 유명인사들, 즉 오페라 성악가, 배우, 의사, 변호사들이 참여하여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하여 블루트가쎄의 건물들은 중세의 아름다움을 간직한채 다시 태어날수 있었다. 아파트의 내부는 모두 현대식으로 개조되었다. 하지만 안뜰의 정원은 비엔나 저택의 안뜰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훌륭하게 보여주도록 손질되었다. 

 

한적한 블루트가쎄의 옛 길

 

블루트가쎄 9번지의 집안을 들여다보자. 현관의 오른쪽으로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나선형 계단이 있다. 그리고 왼쪽으로는 둥근 아치형 천정이 있는 공간이 있다. 아마 가게나 작업실로 사용했던 방일 것이다. 위를 올려다보면 각층마다 발코니가 있는 것을 볼수있다. 파블라첸하우스(Pawlatschenhaus) 가옥의 전형이다. 파블라첸이란 단어는 체코어인 파브라츠(Pavlac)에서 나온 것으로 탁트인 복도 회랑이란 뜻이다. 지하 창고로 내려가는 계단도 볼수있다. 그 뒤로 새로 설치한 엘리베이터가 보인다. 왼쪽 뒷편으로는 안뜰로 통하는 작은 복도가 있다. 안뜰은 깃발의 뜰이라고 부른다. 비엔나시에 무슨 위험한 일이 생기면 동네 사람들이 깃발을 들고 모여 대책을 의논하던 뜰이었기 때문이다. 이 집의 안뜰은 한때 인근의 성니클라스수녀원의 한 부분이었다. 이 수녀원에 대하여는 현재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안뜰에 서있는 우람한 나무 한 그루만이 이 집의 오랜 연륜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이제 블루트가쎄를 나와 돔가쎄로 접어 들어보자.

 

건물의 안쪽에 있는 작은 공간을 호프라고 부른다. 2층이나 3층에 호프처럼 만든 작은 베란다는 자이테회페(Seitehoefe), 즉 사이드호프라고 부른다. 그렇게 만든 집을 파블라첸하우스라고 부른다. 블루트가쎄에 있는 집들의 특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