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워킹 투어/제2일 투어

4. 돔가쎄 (Domgasse)

정준극 2007. 4. 11. 14:51

돔가쎄 (Domgasse)

 

(Dom)이란 말은 대성당을 뜻한다. 성슈테판대성당을 슈테판스돔(Stephansdom: Domkirche St Stephan)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때문이다. 독일의 쾰른에 있는 대성당도 쾰른돔(Kölndom)이라고 부른다. 잘츠부르크의 대성당도 돔키르헤(Domkirche St Rupert)라고 부른다. 돔이라고 하면 교회의 둥근 지붕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원래 돔(이탈리아어로는 Duomo)이라는 단어는 로마가톨릭에서 대주교가 관할하는 교구라는 의미이다. 슈테판성당은 대주교가 관할하는 성당이었다. 슈테판성당의 바로 뒤에 있는 조그만 골목길을 돔가쎄라고 이름 붙인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왜 성당의 앞길이 아니고 뒷길을 대성당의 길(돔가쎄)라고 했을까? 돔가쎄 5번지는 유명한 휘가로의 집(Figaro Haus)이다. 2006년부터는 모차르트하우스 비엔나라는 공식명칭을 가지게 되었다. 모차르트가 이곳에서 1784-1787년의 3년동안 살았다. 모차르트는 식구들과 함께 5번지의 1(우리의 경우 2) 전체를 전세내어 살았다. 하지만 워낙 집세가 비싸서 3년후에는 더 싼 집으로 이사가야 했다. 모차르트가 다음으로 이사간 곳은 란트슈트라쎄(Landstrasse)의 작은 집이었다.

 

슈테판스돔(성슈테판대성당)


돔가쎄 5번지를 휘가로의 집이라고 불렀던 것은 모차르트가 이곳에서 유명한 휘가로의 결혼을 작곡했기 때문이다. 모차르트가 이 집에 살 때에 그의 스승인 하이든이 찾아왔었고 베토벤이 모차르트로부터 가르침을 받고자 일부러 찾아왔었다고 한다. 모차르트는 이 곳에서 생계를 위해 여러명의 학생들에게 피아노 레슨을 해주었다. 베토벤이 찾아온 후 모차르트는 친구들에게 이 젊은이를 눈여겨 보아야 할것이야! 이 젊은이야 말로 언젠가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 테니까!라고 말했던 곳도 바로 이 집이었다.

 

돔가쎄 5번지의 구 휘가로하우스에서 필자. 형편없이 낡은 집이었으나 2006년에 '모차르트하우스 비엔나'로 이름을 바꾸고 새단장을 하였다.

 

휘가로하우스 2006년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여 모차르트하우스 비엔나’(Mozart House Vienna)라는 명칭으로 새로 태어났다. 거의 1년에 걸친 단장끝에 지하2, 지상4층의 방들을 모두 모차르트 기념관으로 만들었다. 지하2층은 이벤트 룸이다. 실내악이나 심포지엄, 또는 세미나가 열릴수 있는 시설이 마련되었다. 지하2층에는 학습장이라는 이름의 시설도 있다. 어린이들이 직접 작곡도 하고 연주도 할 수 있는 시설이다. 지하1층에는 화장실이 있다. 그라운드층에는 매표소, 옷 보관소, 모차르트 카페등이 있다. 현관의 멀티비전 전시는 모차르트 시대를 이해하는데 대단히 흥미있는 내용이다. 그라운드층과 1(우리식으로는 2)사이에는 기념품 상점등이 있다. 1층은 모차르트 아파트이다. 당시에 모차르트가 살았던 모습을 볼수 있도록 가구를 마련해 놓았다. 모차르트는 당시에 1층에 네개의 큰 방과 두개의 작은방, 그리고 주방을 가지고 살았다. 2층의 게임룸은 모차르트가 친구들과 어울려 게임에 몰두했던 방이다. 2층에는 돈 조반니 룸휘가로 룸이 마련되어있다. 이들 오페라에 대한 여러가지 역사적인 사항들이 전시되어있다. 3층에는 모차르트 당시의 비엔나를 소개하는 방이다. 입장료 어른 9유로. 비엔나 관광의 필수코스이다.

 

[모차르트와 비엔나]

- 모차르트가 처음 비엔나를 방문한 것은 6세때인 1762년이었다. 아버지 레오폴드, 누나 난네를과 함께 왔다. 쇤브룬궁전 등에서 신동으로서 연주회를 가져 마리아 테레제 여제와 부군인 샤를르 대공의 칭찬을 받았다. 그 때 머물렀던 곳은 1구 플라이슈마르크트(Fleischmarkt) 28번지였다. 당시에는 흰 황소(The White Ox) 여관이었다.

- 비엔나에 있으면서 두번째로 묵었던 집은 프라이융(Freyung) 3번지였다. 이 곳에는 단 며칠밖에 머물지 않았었다. 역시 왕족들과 귀족들을 위한 피아노 연주를 가졌다.

- 두번째 방문은 11세때인 1767년이었다. 9월부터 10월까지 두달 동안 머물렀다. 1구 봐이부르크가쎄(Weihburggasse) 3번지의 집에 머물렀다. 당시에는 가리볼디(Gariboldi)백작의 저택이었으며 현재는 카이저린 엘리자베트(Kaiserin Elisabeth)호텔이다. 엘리자베트 황비는 씨씨를 말한다.

 

봐이부르크가쎄. Hotel 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 건물이 카이저린 엘리자베트 호첼이다. 모차르트가 1767년에 비엔나를 방문했을 때 잠시 머물렀던 곳이다. 이를 기념하는 명판이 붙어 있다.

 

- 세번째 방문은 이듬해인 1768년 3월이었다. 1구 크루거슈트라쎄(Krugerstrasse) 10번지에 있는 러시아대사 갈리친(Gallitsin)공자의 초청으로 그 집에서 묵으며 연주회를 가졌다.

- 모차르트는 25세 때인 1781년 잘츠부르크를 작별하고 홀홀단신 비엔나로 왔다. 아버지로부터의 독립이었다. 마침 모차르트의 고용주인 잘츠부르크 대주교가 모차르트를 해고했기 때문에 더구나 독립을 주장하고 나올수 있었다. 그해 3월 비엔나에 도착한 모차르트는 우선 1구 징거슈트라쎄(Singerstrasse) 7번지에 있는 튜톤기사단 비엔나 본부인 Deutschordenshaus에서 두달 동안 지냈다. 그후 모차르트는 비엔나의 여러 곳을 전전하며 꼭 10년을 지낸후 세상을 떠났다.

- 성슈테판성당과의 인연: 성슈테판성당 편에서도 간략히 언급했지만 성슈테판성당과 모차르트는 인연이 많다. 1782년 8월 4일은 모차르트의 결혼기념일이다. 비엔나에 온 이듬해에 콘스탄체라는 아가씨와 결혼했다. 하숙집 딸이었다고 한다. 칼 마리아 폰 베버(Carl Maria von Weber)와는 먼 친척이 되는 집이었다. 하숙집에는 딸 둘이 있었다. 모차르트는 큰 딸과 결혼할 생각이었으나 여의치 않아 둘째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후문이다. 모차르트와 콘스탄체는 여섯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 중에서 두 아들만이 오래 살았다. 사람들은 아니, 그러면 모차르트의 후손이 지금도 어딘가에 있겠네!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기록상으로는 후손이 없다. 다시 두 아들의 얘기로 돌아오면 첫째 아들은 요한 토마스 레오폴드 모차르트(Johann Thomas Leopold Mozart)라는 긴 이름이며 둘째 아들은 프란츠 사버 모차르트(Franz Xaver Mozart)였다. 두 아들 모두 성슈테판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모차르트는 세상을 떠나기 몇 달전에 성슈테판성당의 보조음악감독으로 임명된바 있다. 무보수였지만 대성당의 음악감독 보조라는 것은 대단한 직책이었다. 죽기전 마지막 병자성사(病者聖事)를 한곳도 성슈테판성당이었다. 모차르트는 성슈테판성당 소속교구였으므로 장례미사도 이곳에서 가졌으며 나중에 이곳 지하 납골소에 유해의 일부를 안치하였다고 한다. 모차르트의 장례에 대하여 사람들은 그가 가난하여 묘지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재활용 관에 실려 생맑스 공동묘지에 아무렇게나 묻혔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좀 오해인 것 같다. 모차르트가 빈털터리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법에 의해 그렇게 장례를 치룰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 그라벤/도로테르가쎄(Graben/Dorotheergasse)는 모차르트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 이 거리의 어느 집이라고는 말할수 없지만 모차르트가 대본가 로렌조 다 폰테(Lorenzo Da Ponte)와 자주 만난 곳이 이 거리였다. 모차르트가 다 폰테를 처음 만난지 2년반후 휘가로의 결혼이 탄생하였다. 다 폰테가 모차르트의 오페라에 옷을 입히지 않았다면 역사에 남아 있기가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 모차르트가 1784년 9월부터 1787년 4월까지 비교적 오래 산 곳이 바로 돔가쎄 5번지, 지금의 모차르트 기념관이다. 트라트너호프(Trattnerhof)라는 곳에서 살다가 둘째 아들을 낳은 후 이곳으로 이사왔다. 모차르트는 1층과 2층의 방을 모두 썼다고 한다. 우리 식으로 보면 2층과 3층이다. 모차르트의 생애에서 가장 화려한 생활을 했던 시기였다. 다시 반복하지만 이 집에서 휘가로의 결혼을 완성했다.

 

돔가쎄 5번지의 '휘가로 하우스. 지금은 '모차르트 하우스 비엔나'이다.

                                   

- 모차르트는 돔가쎄에 살면서 노이에 마르크트(Neue Markt) 5번지에 집을 빌려서 음악회를 가졌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바이올린 소나타 등은 대부분 이 집에서 역사적인 초연을 가졌다. 그러므로 노이에 마르크트 5번지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돔가쎄 이후에는 란트슈트라쎄의 두어 집에서 지냈다.

- 1788-89년에는 유럽에서 복권의 열풍이 불었다. 나도 나도 복권에 매달려 일확천금을 노리는 시대였다. 평소 게임을 즐겨했던 모차르트는 복권에도 무척 관심이 있었을 것이다. 돔가쎄에서 나온 모차르트는 슈테판스플라츠(Stephansplatz) 3번지에 살았다. 이 집에서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나중에 주소가 바뀌어 라우엔슈타인가쎄 8번지가 된 집이다.

- 미하엘러키르헤(Michaelerkirche)도 모차르트와 인연이 있다. 1791년 12월 10일,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지 며칠후 이곳에서 추도의 미사가 열렸다. 친구인 엠마누엘 쉬카네더(Emmanuel Schikaneder)가 마련한 추도 모임이었다. 이 날 모차르트의 유작인 레퀴렘(鎭魂曲)이 역사적인 초연을 가졌다. 쉬카네더는 오페라 마적의 초연에서 파카게노를 맡았던 오페라 바리톤 겸 배우 겸 대본가 겸 흥행가였다.

- 마지막으로 소개하고 싶은 곳이 있다. 알베르티나플라츠(Albertinaplatz) 1번지이다. 저명한 음악사학자인루드비히 리터 폰 쾨헬(Ludwig Ritter von Köchel)이 살면서 모차르트의 모든 작품을 정리한 곳이다. 이 집은 원래 알브레헤트 대공의 저택이었으며 현재는 알베르티나 미술관이다. 알브레헤트 대공은 쾨헬의 제자였으므로 저택의 몇 방을 쾨헬이 사용토록 한 것이다. 음악사적으로 중요한 K작업을 완성한 쾨헬은 이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집이다. 현재의 주소는 라우엔슈타인가쎄 8번지이다. 슈테플 백화점의 뒤편과 연결되어 있다. 원래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집은 없어지고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다.

                                      

모차르트하우스 비엔나의 건너편은 헝가리왕 여관(Hotel K?nig von Ungarn)으로 현재는 호텔 겸 식당이다. 1746년부터 문을 연 이 호텔의 현관은 슐러슈트라쎄(Schulerstrasse)를 향해 열려있다. 비엔나의 전통호텔로 등록된 헝가리왕 여관은 슐러슈트라쎄 10번지이다. 호텔안의 카페분위기가 헝가리를 느낄수 있게 해준다.

 

헝가리왕 호텔(쾨니히 폰 운가른)의 밤

 

돔가쎄 6번지는 주교의 작은 안뜰이라고 불리는 집이다. 한때 이 집은 적십자 사무실로 사용된 일이 있다. 그보다도 이 집은 비엔나 최초의 커피하우스를 열었던 사람이 살았던 집으로 기억되고 있다. 1683, 터키가 두번째로 비엔나를 점령코자 하던 기간중에 콜쉬츠키(Kolschitzky: 또는 쿨치키)라는 젊은이가 터키군 진영에 들어가 상황을 정찰하고 오겠다고 자청하였다. 그의 임무는 터키군의 정세를 살피는 것이기도 했지만 비엔나를 구원하러 올 조비에스키(Sobieski) 폴란드왕이 이끄는 군대와 로트링겐의 카를(Charles) 대공이 이끄는 구원군이 언제쯤 도착할지를 탐지하는 것이었다. 콜쉬츠키는 그런 정찰임무에 최적이었다. 왜냐하면 전쟁전에 그는 터키를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여 터키말을 유창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콜쉬츠키는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했다. 조비에스키 폴란드왕의 군대가 며칠후면 비엔나에 당도한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돌아왔다. 그래서 비엔나 시민들은 조비에스키왕의 폴란드군대가 도착할때까지 며칠을 더 버티며 비엔나를 사수할수 있었다. 폴란드군대를 비롯한 기독교 연합군이 비엔나 근교에 도착하여 세길로 나누어 터키군을 공격하자 카라 무스타파(Kara Mustafa)의 터키군은 퇴각하기 시작했다.  당시 터키군의 총사령부는 현재의 19구인 되블링에 있었다.  콜쉬츠키는 터키군에게 기독교 연합군이 되블링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공격할 것이라는 거짓 정보를 제공하여 되블링의 터키군 총사령부가 기습을 당하도록 했다. 터키군 총사령관인 무스타파는 다른 곳에서 독일 바바리아와 작소니 등에서 온 연합군을 막고 있었다. 아무튼 터키군 본영이 함락되지 이에 당황한 터키군은 거의 모든 군수품을 남겨 놓은채 황급히 퇴각했다. 콜쉬츠키의  역할이 컸다.

 

돔가쎄. 깃발이 걸린 집이 6번지이다. 그륀앙거가쎄에서 본 거리모습이다. 돔가쎄 6번지는 클라이너 비쇼프스호프(Kleiner Boschofshof)라고 하는 집이다. 그 전에는 콜쉬츠키가 오픈한 비엔나 최초의 커피숍이 있었다고 한다. 돔가쎄 6번지 외벽에 그런 내용의 명판이 붙어 있다.

 

황제는 이 용감한 시민에게 보상을 하기로 했다. 콜쉬츠키가 원한 것은 터키군이 남기고 간 푸대자루들이었다. 자루 속에는 커피라고 하는 열매가 잔뜩 들어있었다. 콜쉬츠키는 터키사람들의 커피에 대하여 잘알고 있었다. 콜쉬츠키는 원하는대로 커피자루를 상으로 받았다. 부상(副償)도 있었다. 당시 어떤 주교의 소유였던 자그마한 건물을 부상으로 받았던 것이다. 이제 콜쉬츠키가 할 일은 간단했다. 커피콩을 가루로 만들어 물에 넣고 끓이는 일이었다. 이것이 처음으로 비엔나에 커피가 소개된 경로였다. 그는 이 커피를 돔가쎄 6번지에서 사람들에게 팔기 시작했다. 나중에 모차르트가 '피가로의 결혼'을 작곡했던 피가로 하우스의 바로 옆집이다. 처음에는 밀크나 설탕을 넣지 않았다. 사람들은 특이한 맛의 커피를 점차 즐겨 찾게 되었다. 콜쉬츠키는 좀 더 큰 가게로 옮겼다. 푸른 병이라는 상점이었다. 콜쉬츠키의 사업은 순풍에 돛을 단듯 확대되어 갔다. 비엔나 시내 여러곳에 커피하우스가 생기게 되었다. 이상의 얘기는 커피에 대한 에피소드를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 약간 과장한 것이며 실제로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콜쉬츠키가 비엔나의 커피역사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요한 디오다테(Johann Diodate)라는 아르메니아 사람이 동양으로부터 전래한 특이한 맛의 커피를 비엔나에 가져와 최초로 팔았다는 것이다.

 

콜쉬츠키가쎄와 화보리텐슈트라쎄가 만나는 모퉁이 집에 게오르그 프란츠 콜쉬츠키의 기념상이 있다. 콜쉬츠키가 커피를 따르고 있는 모습이다.

게오르그 프란츠 콜쉬츠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