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인들가쎄 (Steindlgasse)
이 거리는 상당히 깔끔하도록 예쁘다. 이런 곳도 있었나라며 놀랄 정도이다. 거리의 끝에는 유명한 암 호프성당이 당당하게 막고 있어서 고전적 위용을 더해 준다. 이 거리에서 가장 눈에 띠는 집은 ‘괴써 비어클리닉’(Gösser Bierklinik)이란 간판이 붙은 식당이다. 비엔나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중의 하나이다. 1566년부터 식당이었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여러 이름으로 불려져 왔다. 슈타인들뷔르트(Steindlwirt), 슈티들스(Schtiedl’s), 춤 골데넨 드라헨(Zum Goldenen Drachen: 황금 용의 집) 등이었다. 현재는 비어클리닉, 이른바 ‘맥주병원’이다. ‘황금 용의 집’이라고 불리었을 때의 간판은 아직도 출입문 위의 유리창안에 있고 그 옆으로는 haus zum gulden Dracheen 1566 이라는 글이 적혀 있다. 집안에 들어가면 왼편에 이 집의 내력이 적혀 있다. 비엔나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중 하나라고 적혀 있다. 비어클리닉(맥주병원)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하여는 여러 의견이 있다. 맥주를 마심으로서 맥주 때문에 생긴 병을 고칠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가 가장 지배적이다.
비어클리닉
거리이름은 요한 슈타인들(Johann Steindl)이란 사람의 이름에서 연유한 것이다. 터키 점령시기에 용감한 활동으로 이 식당을 상으로 받은 사람이다. 이 건물은 1945년 전쟁의 막바지에서 포격으로 크게 훼손되었다. 하지만 포격으로 파손된 비엔나의 수많은 건물중에서 가장 먼저 복구된 건물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비어클리닉 방에서의 필자 (2004. 7)
비어클리닉의 바로 옆집인 6번지는 ‘황금뱀의 집’(Zum Goldenen Schlank)이라고 불리던 건물이다. 이 집은 헬레네 코타네린(Helene Kottanerin)이라는 훌륭한 부인이 1451년에 사서 소유로 만든 집이다. 코타네린은 엘리자베트왕비의 시녀였다. 엘리자베트왕비는 알브레헤트5세 대공의 미망인이며 나중에 헝가리왕으로 즉위한 라디슬라우스 포스트무스(Ladislaus Postmus: 1440-1457)의 어머니였다. 엘리자베트는 부군인 알브레헤트대공이 서거할 당시에 만삭으로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엘리자베트는 아들을 낳게되면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이 아들이 왕위에 올라야 하며 왕의 권위를 만천하에 알릴수 있도록 대관식에서는 헝가리를 상징하는 성슈테판왕관(왕관 꼭대기의 십자가가 비뚤어진)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엘리자베트는 시녀인 코타네린에게 비밀스럽게 지시하여 플린텐부르크(Flintenburg)요새에 엄중히 보관되어 있는 왕관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훔쳐오라고 했다. 코타네린은 단 한 사람의 종자와 함께 플린텐부르크성에 가서 치밀한 지모와 임기응변으로 온갖 위기를 물리치고 성슈테판왕관을 교묘하게 가져오는데 성공했다. 사람들은 코타리넨의 용기와 지모를 기억하여 그가 살던 집을 ‘황금뱀의 집’이라고 불렀다. 성경에서 뱀은 지혜의 상징으로 인용되었기 때문이었다.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
그로부터 얼마후 엘리자베트는 아들을 낳았다. 라디슬라우스 포스트무스는 고작 생후 12주(3개월)되던 때에 헝가리왕으로 즉위했다. 대관식에서는 추기경들과 대주교들이 코타네린이 가져온 성슈테판왕관을 어린 왕의 머리에 올려 놓고 축복했다. 성슈테판왕관의 권위 때문에 어느 누구도 어린 왕의 즉위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헝가리가 나치독일에게 점령당하자 엘리자베트는 비엔나에 와서 살게 되었다. 이로부터 성슈테판왕관은 권위에 어울리지 않는 수난을 겪게 되었다. 엘리자베트는 생활비를 충당하기위해 왕관을 전당포에 맡겼다. 주로 하인과 하녀들의 급료를 지불하기 위해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 전당포는 전쟁중에 폭격을 맞아 부서지고 주인은 행방불명이 되었다. 1945년, 비엔나에 진주했던 어떤 미군병사가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이상하게 생긴 왕관을 발견하고 기이하게 여겨 미국으로 보냈다. 미국 정부는 이 왕관을 33년 동안 포트 녹스(Fort Knox)에 보관했다.
코타네린은 플린텐부르크요새로부터 왕관을 빼 돌렸던 내용을 참으로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마치 첩보 스릴러영화를 보는 듯하다. “우리가 플린텐부르크성에 도착하자 그곳 하녀중 중 몇명은 엘리자베트 마님이 자기들을 데려 오라고 우리를 보낸줄 알고 모두 기뻐하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우리는 하루 밤을 묵으면서 왕관이 있는 방을 탐색하고 빼 내기로 결심했다. 믿을만한 어떤 하녀를 통해 2층의 어느 방에 왕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에는 아무나 드나들수 없는 방들이 여럿 있었다. 그런 방들은 예외없이 자물쇠로 단단히 잠가 놓았으며 자물쇠마다 밀초로 봉인하고 왕의 인장을 쳐 놓았다. 마침 우리는 엘리자베트 마님으로부터 왕의 인장과 모양이 같은 인장을 받아 가지고 왔었다. 문제는 밀랍을 긁어내고 다시 봉인해 놓는 일이었다. 우리에게는 밀랍이 없었다. 나는 하녀들에게 성모님에게 기도해야 하므로 촛불을 달라고 했다. 하녀가 초 한자루를 가져왔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나는 밤새 기도해야 한다고 말해서 여러 자루의 초를 확보할수 있었다. 나는 함께 데리고 온 종자와 함께 한밤중에 몰래 왕관이 있는 방에 가서 자물쇠를 부수었다. 소리가 너무 커서 마음을 졸였으나 다행히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는 쿠션 하나를 발견하고 그 속을 빼버리고 그 안에 왕관을 숨겼다. 아침이 되어 우리는 마차를 재촉하여 바삐 떠났다. 얼어 붙은 도나우강을 건너야 하는데 어떤 곳은 살얼음이어서 혹시 빠지면 어찌하나라면서 걱정을 태산같이 했다. 아니다 다를까, 강을 중간쯤 건너는데 얼음이 깨져 마차가 강속으로 빠지게 되었다. 마차에 실었던 물건들이 강에 빠졌다.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왕관을 숨긴 쿠션은 빠지지 않았다. 멀리서 경비병들이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마차를 버리고 말에 올라타 겨우 강을 건넜다.” 대충 이런 얘기지만 실제로 적어 놓은 내용은 위기일발과 아슬아슬한 장면의 연속이었다. 위기가 닥칠 때마다 코타네린의 기지로서 위기를 넘겼다.
거리의 끝, 천사찬양교회(Choire d. Engel)의 성가대석 건물이 돌출해 있는 곳에서 교회건물을 따라 옆으로 돌아가는 좁은 골목길이 있다. 이 골목길을 지나면 슐호프에 이른다. 교회에 붙어 있는 작은 집은 아마 비엔나에서 가장 작은 상점일지 모른다. 시계수리점이며 중고 시계를 팔기도 하는 집이다.
슈타인들가쎄 끝에 자리잡고 있는 암 호프 교회의 뒤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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