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워킹 투어/제4일 투어

11. 유덴플라츠 (Judenplatz)

정준극 2007. 4. 11. 15:10

유덴플라츠 (Judenplatz)

 

유태인들이 비엔나에 정착하여 본격적으로 생활하기 시작한 것은 기록상 1195년으로 되어있다. 유덴플라츠는 이미 그 시기에 조성된 비엔나 최초의 유태인구역이었다. 이 구역에는 유태교 회당, 캔터(Cantor: 유태교 회당에서 성서를 낭독하거나 찬송을 부르는 사람. 기독교의 신부 또는 목사와 같음)관저, 그리고 유태인병원과 학교도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유덴플라츠광장의 옛날 이름은 슐호프(Schulhof)였으나 지금은 그냥 유덴플라츠라고 부른다. 오늘날 슐호프는 암 호프(Am Hof)교회의 옆길에있는 작은 공터만 말한다. 슐호프는 유태인의 토라학교가 있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유덴플라츠. 레싱 기념상과 홀로코스트(쇼와) 기념조형물

 

초기에 비엔나 사람들은 유태인의 정착을 환영했다. 유태인들은 군주들의 직접적인 보호를 받았다. 왜냐하면 유태인들은 궁정재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왕실은 물론, 귀족이나 상류사회 사람들이 유태인으로부터 돈을 빌리고는 갚지 못하는 사례가 늘어나자 유태인들은 점차 미움의 대상이 되었다. 1420년에 발생한 첫 포그롬(Pogrom. 유태인 학살)도 아마 이 때문인 것 같았다. 수많은 유태인들이 학살을 당했다. 유덴가쎄의 피해가 가장 컷다. 상점은 불타고 집들은 약탈당했다.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오스트리아 전역에서 반유태인 운동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유태인들은 온갖 이유로 박해를 받았다. 예를 들면 우물에 독을 넣어 시민들을 죽이려 했다든지 역병을 퍼트렸다든지 가톨릭을 반대하는 후쓰파(15세기의 종교 개혁자 John Huss의 신봉자)와 결탁했다든지 하는 것이었다. 아무튼 사람들은 생각해 낼수있는 모든 이유를 붙여서 유태인들을 박해했다.

       

유덴플라츠의 한쪽. 쿠렌트가쎄 12번지

 

마침내 유태인들이 기독교 어린아이들을 죽여서 제물로 삼았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당시 군주였던 알브레헤트대공은 이런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오스트리아에 사는 모든 유태인을 체포하여 집단수용토록 하며 이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은 몰수하라는 법령을 공포했다. 운좋은 일부 유태인들은 도나우강에서 보트를 얻어 타고 몰래 항가리로 흘러 들어갔다. 다행히 헝가리의 지그문트(Siegmund)왕은 이들이 와서 사는 것을 막지 않았다. 하지만 비엔나에 남아 있던 다른 수많은 유태인들은 참혹하게도 화형당하기가 일수였다. 비엔나에서만해도 80대의 마차에 가득 태운 유태인들이 화형장에서 불에 태워졌다. 어떤 유태인들은 유태교를 버리고 기독교세례를 받아 목숨을 건졌다이와 관련하여 유덴플라츠에 있는 유태회당의 사건은 마사다를 연상케 하는 비참한 것이었다. 도망가는 것도 거부하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도 거부하는 독실한 유태교인들은 회당에 모여 끝내는 모두 자결하였다. 마사다(이스라엘 사해 남서쪽 벼랑 위에 있는 요새. B.C. 2세기 후반 마카바이오스조()에 유대인 열심당원들이 로마군에 대항하다가 최후에는 모두 자결한 역사적 장소)에서처럼 어떤 한 사람을 선출하여 그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죽이고 마지막에는 그 자신이 자결하는 형태였다. 이후 알브레헤트대공은 게토의 담장을 허물도록 했고 유태인들의 집들을 기독교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유태인들이 자기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유덴플라츠로 돌아올수 있었던 것은 그로부터 40여년후 프레데릭3세 치하에서였다.

 

유덴플라츠의 보헤미안 챈슬러 건물과 레싱 기념상

 

첫번째 집인 2번지는 이 구역에서 가장 오래된 위대한 요단강 집(Zum grossen Jordan)이라는 이름의 건물이다. 벽에는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받는 장면이 부조(浮彫)로 만들어져있다. 유태인 학살사건의 산물이다. 세례받는 장면의 그림 아래에는 라틴어로 당시 비엔나에 팽배하였던 유태인 적대감정을 적어 놓았다. 번역하면 요단강을 통하여 인류의 몸은 질병과 마귀로부터 깨끗함을 얻었다. 이로서 숨어있는 모든 죄악이 떠나갔다. 그러므로 1421년 온 도성에 몰아친 화염은 히브리 개의 무서운 죄악을 깨끗이 씻어준 것이었다. 이전에 이 세상은 듀칼리온의 대홍수로 깨끗해 졌으나 이번에는 격노한 불로서 정죄(淨罪)하였다라는 내용이다. 듀칼리온은 희랍신화에서 불의 신 프로메테우스의 아들로서 아내 피라(Pyrrha)와 함께 홍수에서 살아남아 인류의 조상이 되었다고 하는 인물이다. 구약시대의 노아를 대홍수에서 살아남은 예로 들지 않고 희랍신화의 듀칼리온을 예로 든 것은 노아도 유태인들이 숭배하는 인물이기 때문인 것 같다.

 

유덴플라츠의 아름답고 유서 깊은 건물들

  

번지와 4번지가 연결된 집터에는 모차르트가 처음으로 비엔나를 방문했을 때인 1762년 10월 2일부터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그의 가족들이 기거했었다. 건너편의 11번지는 보헤미아 궁정챈슬러청사의 뒤편이다. 이 건물의 현관은 뷔플링거슈트라쎄(Wipplingerstrasse)에 면하여 있다. 그러나 현관 쪽이 크게 파손되었기 때문에 유덴플라츠를 향하여 있는 면이 보기에 더 웅대하다.

 

유덴플라츠 3-4번지는 모차르트가 처음 비엔나를 방문했을때 묵었던 곳이다. 1762년. 빨간 원이 기념명판이다.

                                                 

광장의 가운데에는 독일의 사상가, 비평가, 극작가인 레씽(Gotthold Lessing)의 웅대한 기념상이 서있다. 레씽은 그의 저서 현자 나탄(Nathan the Wise)을 통하여 독일의 지성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유태인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이다. 광장을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아 나가는 길이 요르단가쎄(Jordangasse)이며 그 곳에서 슈테판성당 방향으로 연결되어있는 길이 슐터가쎄(Schultergasse)이다. 위대한 건축가인 피셔 폰 에아라흐(Fischer von Erlach) 5번지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보헤미아 궁정챈슬러청사는 에어라흐의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다. 챈슬러청사로 들어가면 아름다운 나선형 계단이 보는 사람들을 압도한다. 위를 올려다 보면 여러 시대가 섞여 있는 듯한 이상한 감정을 갖게 된다. 오르비엔토(Orvieto)의 우물이 연상되기도 하며 뉴욕에 있는 구겐하임(Guggenheim)박물관의 내부를 보는 것과 같은 느낌도 갖게 해준다.

 

유덴플라츠의 홀로코스트(쇼와) 기념물

 

유덴플라츠광장에 대하여 한마디 더 하자면,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이 광장은 순회연극인, 줄타기 기예인, 불 먹는 요술쟁이, 또는 다른 오락꺼리가 흥청이던 곳이었다. 슐터가쎄는 상당히 짧은 골목길이다. 이 길을 빠져 나오면 큰 길을 만난다. 한쪽은 투후라우벤 길이 시작되는 지점이고 다른 한쪽은 마르크-아우렐 슈트라쎄(Marc-Aurel Strasse)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이 건물에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의 조각이 있다.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장면 부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