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워킹 투어/제5일 투어

2. 슈토크 임 아이젠 플라츠 (Stock-im-Eisen-Platz)

정준극 2007. 4. 11. 15:15

슈토크 임 아이젠 플라츠 (Stock-im-Eisen-Platz)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쇠나무 그루터기 광장이다. 캐른트너 슈트라쎄와 그라벤이 만나는 모퉁이 건물에 원통형 유리로 된 벽감이 하나 있다. 이곳이 바로 유명한 쇠나무 그루터기가 보존되어있는 곳이다. 건물 벽의 모퉁이에 뻗어 있는 듯 부착되어있는 나무는 거꾸로 서있다. 실제로 윗부분에 나무의 가지처럼 보이는 것이 뿌리이다. 오랜 옛날, 이 곳에는 나무들이 숲을 이루듯 무성하게 있었다. 모퉁이에 남아있는 나무는 그중에서 유일하게 지금까지 보존되어있는 나무다. 나무들이 있던 지역은 신성한 곳으로 여겨졌다. 사람들은 나무들 중에서 가장 장대한 나무를 신으로 섬겼다. 마치 드루이드 교도들이 숲속에서 참나무를 숭배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다가 기독교가 들어오자 나무들은 미신의 상징으로 여겨져서 수난을 겪게 되었다. 권세있는 교회는 사람들이 우상으로 섬기던 제일 장대한 나무를 뿌리채 뽑아 거꾸로 세워 놓았다. 고대 미신과 잡신은 이제 멸망되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조치였다. 비엔나 연대기(年代記)에 따르면 1533년에 이 나무에 대한 기록이 비로소 처음 나온다. 그렇지만 그보다도 훨씬 오래된 나무였음에는 틀림없다. 아무튼 그 이후, 세월의 무상함과 함께 나무도 낡아지게되자 그 위에 덧붙여서 쇠로 나무를 만들어 벽에 붙여 놓았다. 영구보존 목적이었다. 

 

슈토크 임 아이젠. 그라벤으로 가는 코너에 있다.

 

예전에는 누구든지 비엔나에 여행온 사람은 이 나무 그루터기를 찾아와 못을 박았다. 집으로 무사히 돌아가는 것을 빌기 위해서였다. 언제부터 그런 습관이 생겼는지는 모른다. 다만, 1832년에 마지막 못이 박혔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9세기 초까지 그런 관습이 남아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비엔나 사람들은 거의 모두 이 전설적이면서도 기념비적인 상징물에 대하여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만 보아도 잘 알수있다. 나치독일군이 비엔나를 점거하고 있을 때 나치는 이 쇠로 만든 나무그루터기의 철책을 뜯어내어 프랑크푸르트의 자물쇠박물관에 보내려고 했다. 왜냐하면 이 쇠그루터기에 둘러친 철책에는 전설이 깃든 자물쇠가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독일군이 쇠그루터기의 자물쇠를 뜯어내려고 예정괸 날의 바로 전날밤 쇠그루터기의 자물쇠는 소식도 없이 사라졌다. 그로부터 자물쇠에 대한 소식은 감감이었다. 얼마후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어느날, 슈테판성당이 소련군의 포탄 때문에 불타고 있는 가운데 독일군은 밀려오는 소련군을 감당하지 못하고 퇴각하게 되었다. 바로 그날 밤, 어느틈인지 자물쇠가 슈토크--아이젠의 제자리에 돌아와 있었다.

 

건물의 모퉁이에 슈토크 임 아이젠이 있는 것을 볼수 있다. 슈토크 임 아이젠 플라츠.

                     

슈토크--아이젠의 자물쇠에 대하여는 이런 전설이 있다. 어떤 자물쇠공의 도제(徒弟)에게 악마가 다가와서 계약을 맺자고 제안하였다. 악마는 소년을 부자로 만들고 유명해 지도록 해주는 대신 그의 영혼을 요구했다. 소년이 망설이자 악마는 좀 누그러져서 만일 소년이 단 한번이라도 주일미사에 빠지지 않으면 그것만으로도 부자로 만들어주고 유명해 지도록 해주겠다고 말했다. 성당에 충실히 다녔던 소년은 그 정도라면 별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하여 계약을 수락했다. 얼마후 악마가 다른 사람으로 변장하여 자물쇠공장에 나타나 주인에게 어떤 열쇠로도 열수 없는 복잡한 자물쇠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슈테판성당 앞에 있는 슈토크--아이젠에 철책을 두르고 아무도 열수 없도록 철책을 채울 자물쇠라는 것이었다. 모두 고개를 저으면서 세상에 한 사람만 열수 있고 다른 사람은 열수 없는 자물쇠를 만들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소년 도제가 과감하게 나서서 자기가 한번 만들어 보겠다고 자청했다. 과연, 소년 도제는 한사람만 열수있고 다른 어느 누구도 열수없는 훌륭한 자물쇠를 열쇠와 함께 만들었다. 악마는 만족하여 소년 도제가 만든 자물쇠와 열쇠를 가지고 쇠그루터기의 철책을 잠근후 한 개뿐인 열쇠를 가지고 사라졌다.

 

슈토크 임 아이젠. 아랫쪽에 나무 잎이 나온듯하게 보이는 것은 그렇게 만들어서 붙인 것이다.

 

대개의 도제들이 그렇듯이 소년 도제도 먼나라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이나라 저나라를 다니면서 많이 보고 많이 배우기 위해서였다. 소년 도제는 몇 년후 비엔나에 돌아왔다. 비엔나 시의회는 누구든지 슈토크--아이젠 그루터기에 둘러친 철책의 자물쇠를 연다면 큰 상을 주겠다고 벌써부터 내걸었으나 아무도 성공하지 못하고 있던 때였다. 청년이 된 도제는 자기가 열쇠를 만들어 보겠다고 장담하고 곧장 자물쇠공장으로 가서 열쇠를 만들기 시작했다. 악마가 여러 번 방해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 도제는 열쇠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단단히 잠궈놓은 슈토크--아이젠을 당당하게 열수 있었다. 청년 도제는 당장 유명해졌고 상도 받아서 부자가 되었다. 물론 청년 도제는 자기가 단 한번도 주일미사에 빠진적이 없기 때문에 악마가 약속한대로 유명해지고 부자가 되었다고 믿었다. 악마는 부자가 된 청년 자물쇠공이 실수만 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유명해지고 부자가 된 청년은 못된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고 이들과 함께 놀고 마시느라고 정신이 없게 되었다. 실은 악마가 그렇게 꾸민 것이었다. 그렇게 노름과 술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내던 어느날 청년은 갑자기 성당에서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를 듣게 되었다. 청년은 그날이 주일인 것을 깨닫고 놀란 나머지 술잔을 팽개치고 성당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슈테판성당에 도착하여 안으로 들어간 청년은 신부가 회중에게 이테, 미사 에스트(Ite, missa est. 이제 모두 돌아가십시오. 미사가 끝났습니다)라고 말하는 소리만 들었을 뿐이었다. 그러자 갑자기 하늘에서 커다란 날개를 퍼덕이는 듯한 굉음이 들리더니 곧이어 흉측하게 생긴 엄청나게 큰 악마가 내려와 청년을 덮쳐 낚아채고 멀리 사라졌다는 전설이다.

 

슈토크 임 아이젠이 설치되어 있는 공정궁

 

쇠나무그루터기가 설치되어 있는 건물은 슈토크 임 아이젠 플라츠 3-4번지로서 공정궁(Equitable Palais)이라고 불리는 건물이다. 전에 이 건물에 뉴욕공정보험회사(비엔나에는 국제적인 보험회사가 많다)가 있었기 때문이다. 안쪽문에는 슈토크--아이젠에 대한 전설을 그려 놓은 부조가 있다. 밖에서도 잠시 볼수 있지만 기왕이면 안으로 들어가 자세히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부조는 비엔나에 대한 역사중심주의의 가장 훌륭한 예이다. 뿐만 아니라 계단, 복도, 유리로 천정을 만들어 덮은 안뜰 모두 대단히 독특하여 볼만하다 (역사중심주의: Historicism. 모든 문화적, 사회적 사항을 역사적인 사실로 결론을 이끌어 내는 학문).

 

슈토크 임 아이젠 플라츠

                     

그라벤으로 향한 큰길의 한쪽에는 공정궁이 있고 마주 바라보이는 건너편에는 새로 지은 하스(Haas)하우스가 있다. 1985-90년의 5년에 걸쳐 건설된 현대식 건물이다. 비엔나의 유명한 건축가 한스 홀라인(Hans Hollein)이 설계한 건물이다. 네오바로크양식의 건물들 사이를 비집고 의연하게 서 있는 현대식 건물이다. 밤이 지긋한 때에 하스하우스의 5층에 있는 DO&CO의 카페에서 괴기스럽게 보이는 고틱 성슈테판성당을 건너다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다.

 

그라벤의 강림절(아드벤트) 장식. 페스트조일레. 쇼핑마일레

 

이제 슈토크--아이젠에서 그라벤쪽으로 향하다가 잠시 방향을 성아우구스틴교회가 있는 쪽으로 돌려 도로테어가쎄(Dorotheergasse)로 가보자. 도로테어가쎄는 자일러가쎄, 슈피겔가쎄 다음번에 있는 긴 거리이다. 비엔나에서도 상당히 오래된 거리인 도로테어가쎄의 이름은 한때 이곳에 있었던 수도원과 교회의 이름에서 연유한 것이다. 이 거리에 있었던 집들은 다른 어느 곳보다 우아한 건물이었다. 거의 모든 집들이 행세하는 귀족들의 소유였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당시의 건물중 일부가 자취를 감추었지만 아직도 여러 채의 아름다운 저택이 남아있어서 즐거움을 준다.

 

그라벤 호텔. 도로테어가쎄 3번지

 

그라벤에서 도로테어가쎄로 접어들자마자 자리잡고있는 3번지는 그라벤호텔이다. 호텔 현관에 붙어있는 설명판에서 볼수 있듯이 프란츠 카프카와 같은 저명인사들이 자주 묵었던 곳이다. 슈니츨러/호프만스탈(Schnitzler/Hofmannsthal)시대에 비엔나를 풍미했던 작가 페터 알텐베르크(Peter Alterberg)는 아예 이 호텔에 장기투숙했었다. 건너편인 6번지에는 하벨카(Hawelka)라는 커피하우스가 있다. 당대의 천재 예술가들, 또는 우수한 예술가 지망생들이 만남의 장소로 이용했던 곳이었다. 이 커피하우스에서 조금 올라가면 유명한 도블링거(Doblinger)악보사(樂譜社)가 있다. 악보뿐만 아니라 음반도 파는 집이다. 음악애호가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들려보는 귀중한 음악자료의 보물창고이다. 왼편의 9번지는 슈타렘베르크 팔레(Starhemberg Palais)이다. 18세기 초에 건설된 전통있는 건물이다. 이 궁전건물은 1683년 터키의 비엔나 점거때 비엔나를 방어했던 용감한 지휘관 에른스트 슈타렘베르크(Ernst Starhemberg)장군이 소유했던 땅위에 지은 것이다. 궁전은 슈타렘베르크장군이 세상을 떠난후에 건설되었다.

 

세계적인 도블링거 음악사 

                                       

11번지의 웅장한 집은 19세기에 지은 것이다. 1820년에 이르러 이 집은 은행가인 프라이헤르 베른하르트 폰 에스켈레스(Freiherr Bernhard von Eskeles)의 소유가 되었다. 그의 아내인 세실리(Cecily)는 여동생 화니(Fanny)와 함께 비엔나 사교계의 최고 여류였다. 세실리와 화니 자매는 이 웅장한 팔레 에스켈레스(Palais Eskeles)에서 예술가, 과학자등 각계 명사들을 자주 초청하여 파티를 자주 열었다나중에 이 궁전은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쉴레, 반 고흐, 파블로 피카소 등의 작품을 전시하는 화랑으로 사용되었다. 이 집은 현재 유태박물관(Jüdisches Museum)이다. 팔레 에스켈레스는 유태계 예술가들을 위한 전통을 간직한 것 같다.

 

도로테어가쎄의 유태박물관. 팔레 에스켈레스였다.

 

길을 따라 더 올라가면 17번지인 도로테움(Dorotheum)이 나온다. 도로테움은 비엔나시의 공인경매장이기도 하지만 비엔나전당포협회 사무실이 있는 건물이다. 도로테움이란 명칭은 옛날 이곳에 있었던 성도로티(St Dorothy)수도원에서 연유한 것이다. 도로테움의 정문으로 들어가서 왼쪽에 있는 안뜰에 수도원에 대한 흔적이 남아있다. 옛날에 수도원과 교회를 허물게 되었을 때 어떤 사람이 교회주변에 있던 묘비들을 모아 지금의 집의 벽을 세우는데 썼다. 도로테움 안에서 그 때의 잔해를 발견할수 있다. 길의 다른쪽 건너편에는 개신교회인 루터교회가 있다. 한편, 1581년경, 막시밀리안2세 황제의 딸이며 프랑스왕 샤를르9세의 미망인인 엘리자베트 왕비가 이곳에 수녀원을 만들고 은거하였다. 그로부터 비엔나 사람들은 도로테움을 탄테 도로티(Tante Dorothy. 도로시 아줌마)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엘리자베트 왕비는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16세 때에 샤를르9세와 결혼한 엘리자베트가 파리에서 지낼 때 저 끔찍한 성바르톨로뮤(St Bartholomew)학살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엘리자베트는 남편 샤를르9세와 어린 딸을 잃었다. 스무살에 과부가 된 엘리자베트는 고향 비엔나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2년후에는 친정아버지인 막시밀리안 2세가 세상을 떠나는 슬픈 일이 있었다. 오빠인 저 유명한 루돌프2세가 그의 거처를 프라하로 옮기자 엘리자베트는 굳이 프라하로 따라갈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비엔나의 성도로티 수녀원에 몸을 의탁했다. 나중에 사람들은 이 수녀원에 엘리자베트 왕비가 살았으며 또한 이 수녀원이 천사들의 여왕인 마리아에게 봉헌된 것을 생각하여 '왕비의 수녀원'(Königinkloster)이라고 불렀다. 이 수녀원은 1782년 요제프2세 황제의 비엔나 도시계획때에 우선적으로 헐렸다. 건물이 낡아서 더 이상 보존할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비엔나 루터교(Lutherishcen Stadtkirche). 도로테어가쎄 18번지

 

요세프2세 황제는 오스트리아제국에서 누구나 어떤 종교를 믿어도 좋다는 신앙의 자유 칙령을 내린바 있다. 이러한 혜택을 제일 먼저 누리게 된 교파가 루터교였다. 루터교단은 지금의 18번지인 옛날 수녀원 자리를 매입하여 대대적인 공사끝에 아름다운 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교회를 지을 때 당국과 맺은 계약 때문에 정문을 길 뒤쪽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도로테어가쎄(Dorotheergasse)에서는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가톨릭국가에서 신교의 교회를 세우는 데에 따르는 제약의 일환이었다. 그러한 제약의 한가지 예를 들어보면 신교의 교회는 종탑을 세우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바로 옆 건물인 16번지를 보면 안뜰이 아주 예쁘다. 노란색 벽은 담장이넝쿨으로 덮혀있다. 반쯤 원형으로 생긴 두개의 창문 사이에 요세프2세황제를 기념하는 명판이 붙어있다. 요세프2세의 신앙자유 칙령으로 덕을 본 또 다른 교파는 장로교였다. 장로교단은 도로테어가쎄와 슈탈부르크가쎄(Stalburggasse)가 만나는 모퉁이에 교회를 세울수 있었다. 요세프2세는 모차르트의 대단한 찬미자였으며 후원자였다. 모차르트가 요세프2세 황제 시기에 작곡한 오페라는 후궁에서의 도피’, 피가로의 결혼’, 여자는 다 그래 등이다.

 

'후궁에서의 도주' 초연을 직접 지휘하는 모차르트.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도로테움]Dorotheum. 도로토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교성이 많았던 요세프1세황제가 일찍이 1707년 전당포연합회관으로 건설한 것이 오늘의 도로테움이다. 그래서 아직도 환들라이에(Pfandleihe. 소규모전당포란 뜻. 비엔나 사람들은 도로테움을 Pfandl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고 있다)라고 부른다. 도로테움은 이제 유럽에서 가장 큰 경매장중의 하나가 되었다. 매년 24백건의 경매가 이루어진다. 경매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매일 오후 2시에, 토요일에는 오전 10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경매품을 감정한다면 하루종일 방문할수 있다.

                                             

도로테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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