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워킹 투어/제5일 투어

4. 미하엘러플라츠(Michaelrplatz)

정준극 2007. 4. 11. 15:16

미하엘러플라츠(Michaelrplatz)

 

슈탈부르크가쎄의 좁은 통로를 빠져 나오면 넓직한 미하엘러플라츠(천사장 미가엘광장)로 나온다. 미하엘교회의 앞광장이다. 1990년대에 광장앞길을 대대적으로 보수하는 중에 놀라운 유물들이 햇빛을 보게 되었다. 로마시대에 큰 길이 현재의 광장 앞에 있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지만 당시 건축물의 잔해가 지하에 남아 있으리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1990/91년에 미하엘러광장 지하를 파내려가다가 우연히 로마시대 주거지역 건물의 일부를 발견하게 되었다. 놀랍게도 난방시스템까지 구비되어 있는 집이었다. 심지어 어떤 벽에는 로마시대의 그림이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 있기까지 했다. 비엔나시민들은 과거의 부활이라고 하며 놀라워했다. 발굴된 유적은 덮개를 만들어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다행히 노천 박물관으로 조성하여 언제나 볼수 있게 했다. 다만, 위에서 겉으로만 볼수 있지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한다. 발굴 장소에서는 로마시대의 유적과 함께 중세의 우물, 그리고 파라다이즈 가든이라고 불리는 르네상스양식의 정원터까지 한눈에 볼수 있다는 것이다. 비엔나의 살아있는 역사현장이다.

 

미하엘러플라츠의 로마시대 유적지 발굴 현장. 앞의 교회는 미하엘교회(미하엘러키르헤)이며 그 옆의 건물들은 로스하우스, 팔레 허버슈타인(카페 그리엔슈타이들)이다.

 

미하엘러광장은 호프부르크궁전의 정문앞 광장이다. 호프부르크궁전의 정문은 미하엘러토르라고 부른다. 웅장하고 화려한 합스부르크제국의 영화를 한눈에 볼수있는 정문이다. 호프부르크는 구궁전과 신궁전(노이에 호프부르크)으로 구분된다. 미하엘러토르는 노이에 호프부르크의 정문이다. 유명한 건축가 피셔 폰 에어라흐(Fischer von Erlach)가 설계했으며 또 다른 유명한 건축가인 페르디난트 키르슈터(Ferdinand Kirschner)가 이 설계를 기본으로하여 1889-1993년 사이에 건설하였다. 정문은 3개의 돔형 둥근 지붕과 화려한 철책 장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작품이다.

 

 

미하엘러플라츠에서 비엔나의 모차르트/요한 슈트라우스 음악회 티켓을 팔고 있는 사람들

 

첫번째 쿠폴라(돔형 지붕)의 꼭대기에 장식되어있는 두개의 조각상, 입구 양편에 있는 헤라큐레스 스타일의 두 조각상과 화려한 분수, 바다와 땅의 최고 통치자임을 의미하는 합스부르크왕가의 쌍두 독수리 문장 조각들은 상상을 초월한 대단한 품들이다. 19세기까지 유럽을 주관하였던 합스부르크제국의 권세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궁전정문이다. 정문의 왼편으로 궁전의 벽으로부터 불쑥 튀어나온 듯한 건물 부분이 있다. 중앙 통로와 분수사이에 있다. 옛날 궁정극장(Burgtheater)이 있던 곳이다. 이 사실을 기념하는 명판이 아직도 붙어있다. 미하엘러플라츠에 있던 부르크테아터에서는 글룩의 오르페오와 유리디체를 비롯한 여러 오페라가 초연되었으며 모차르트의 오페라도 3편도이나 초연되었다. 원래 성미하엘교회의 주변은 공동묘지였다. 그러다가 시내에 매장하는 것을 금지하자 광장으로 만들었다.

 

호프부르크의 미하엘러토르와 그 앞의 미하엘러플라츠

 

광장에서 헤렌가쎄(Herrengasse)쪽으로 들어가보자. 모퉁이 집인 1번지는 한때 명문 헤르버슈타인(Herberstein)가의 저택이었으나 그후 비엔나에서 가장 유명한 커피하우스중의 하나인 카페 그리엔슈타이들(Cafe Griensteidl)이 되어 사랑을 받게 되었다. 이 집의 비너슈니츨는 맛이 좋기로 정평이 나있다. 비엔나의 커피하우스에 대한 유래는 이미 돔가쎄(Domgasse)에서 설명했지만 이번에는 비엔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커피하우스가 어떠했는지에 대하여 설명코자 한다. 슈테판 츠봐이그(Stefan Zweig)라는 사람이 적어 놓은 것을 보자. 커피하우스는 사실상 일종의 민주적 클럽이다. 누구든지 들어와서 별로 비싼 값을 치루지 않고서 커피 한잔을 마실수 있는 곳이다. 손님들은 가게에 조금이라도 금전적으로 기여했기 때문에 몇시간이라도 앉아서 토론도 하고 혼자서 글을 쓰기도 하며 몇몇이서 카드놀이도 할수 있다. 그런가하면 커피하우스를 통해 우편물을 받아 볼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소득이 되는 것은 무척 많은 각종 신문과 잡지들을 마음대로 읽을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하루종일 앉아 신문과 잡지를 읽는 것이 습관인 사람이 많아졌다. 아무도 그만 자리를 내어달라고 하는 사람도 없으며 성가시게 구는 사람도 없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웨이터들뿐일 것이다. 커피하우스에서는 웨이터를 존경하는 의미에서 헤르 오버(Herr Ober)라고 부른다. 오버라는 말은 독일식 트럼프에서 왕의 다음번인 장군을 말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왕(King)의 다음번이 여왕(Queen)이고 그 다음이 기사(Jack)이지만 독일에서는 쾨니히(König) 다음이 장군을 의미하는 오버(Ober)이다. 그러므로 헤르 오버라고 부르는 것은 원래 의미로 볼 때 상당한 존칭이다. 커피하우스에서 웨이터들은 손님이 청하지도 않았지만 마치 자기의 의무를 다하듯 수시로 마시는 물을 가져다 준다. 그러므로 그런 훌륭한 웨이터들에게 존칭을 붙여도 상관없을 것이다. 이 같은 커피하우스 관습은 지금도 몇몇 비엔나 전통의 커피하우스에서 그대로 볼수 있다.

 

카페 그리엔슈타이들

 

얘기를 카페 그리엔슈타이들로 되돌아가자. 이 카페를 처음 문을 연 하인리히 그리엔슈타이들은 원래 약사로서 여관집도 운영했다. 그는 1847년 이 카페를 열면서 건너편의 호프부르크궁전 사람들이 자기 집의 단골이 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호프부르크 사람들은 오지 않고 대신 지식인, 정치인, 그리고 길건너 궁정극장(부르크테아터)의 배우들이 드나들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더 유명해졌다. 특히 젊고 유망한 작가들이 많이 찾아왔다. 슈니츨러(Schnitzler), 잘텐(Salten), 베르-호프만(Beer-Hofmann), 호프만슈탈(Hofmannsthal), 헤르만 바르(Hermann Bahr)등이었다. 언제나 사회를 조롱과 비판으로 일관한 카를 크라우스(Karl Kraus)도 잊지 못할 단골중의 하나였다. 그는 1897년 카페 그리엔슈타이들이 철거될수 밖에 없게 되자 직접 조문(弔文)을 써서 옛것을 존중하지 않는 현세태를 혹독하게 비난했다. 당시 카페 그리엔슈타이들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은 비엔나 사람들에게 충격을 줄 정도의 대사건이었다. 그러나 보라, 다행스럽게도 1990년 카페 그리엔슈타이들은 다시 문을 열게 되었다.

 

카페 그리엔슈타이들

 

길건너 미하엘교회쪽으로 콜마르크트(Kohnmarkt)와 헤렌가쎄가 만나는 모퉁이에 있는 집은 주변의 다른 집들에 비해 전혀 다른 시기에 세워진 것이다. 1911년에 건축가 아돌프 루스(Adolf Loos)가 지은 유명한 루스하우스(Looshaus)이다. 이 집이 건설되자 논난이 거세기 일어났다.  얼굴로 치면 눈섶이 없는 것과 같은 집이라는 핀잔을 받았다. 이 집은 수세기동안 유지되어 오던 스타일인 박공으로 창문을 장식하는 것을 전혀 적용하지 않았다. 이 이상한 집이 생기기전 이 장소에는 다른 이유로 유명했던 집이었다. 드라이라우퍼하우스(Dreilauferhaus)라고 불렸던 집이었다. 세사람의 뛰는 사람 집이라는 뜻이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전설이 있다. 오래전인 15세기에 에셸바흐(Eschelback)라는 갑옷장이가 부인이 마르가레트(Margaret)와 함께 이곳에서 살았다. 에셸바흐는 그륀슈펨라인(Gruenspömlein)이라는 젊은이를 견습공(徒弟)으로 고용했다. 문제는 이 젊은이가 아주 잘생겼다는데 있었다. 주인의 젊은 부인인 마르가레트는 이 잘 생긴 젊은이에게 은근히 눈길을 주었으며 젊은이도 그런 유혹이 싫지만은 않았다.

 

로스하우스. 왕궁의 하엘러토르에서 바라보는 정면쪽에 있다. 옆집은 유서깊은 리엔슈타이들 카페가 있는 팔레 허버슈타인이다. 이 건물이 들어서기 전에 있던 집은 드라이라우퍼하우스라고 불리는 이상한 집이었다.

 

얼마후, 마르가레트는 젊은이에게 멍청이 부자 남편을 없애는 길은 우리 두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길이라고 설득했고 결국 두 못된 남녀는 의기투합하여 서서히 죽도록하는 비밀 가루약을 음식에 타서 주인에게 주기 시작했다. 실제로 약은 효력을 발생했다. 에셸바흐는 당장 죽지는 않았으나 원인 모를 병에 걸려 고통을 받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마침내 미치게 되었다. 그러자 두 년놈은 주인을 쇠사슬에 묶어 놓겠다고 위협했다. 당시에는 정신병자, 즉 미친사람들을 날뛰지 못하게 하느라고 쇠사슬로 묶어 놓는 것이 일반이었다. 쇠사슬로 묶어 놓을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그는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 울부짖다가 갑자기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아마 에셸바흐는 실제로 자기 마누라와 젊은 견습공이 공모하여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는 정신이상이 되어 자살한 형식이 되었다. 마르가레트는 젊은 견습공과 결혼했다. 아무도 이들을 의심치 않았다. 견습공 그륀슈펨라인은 결혼후 주인이었던 에셸바흐의 재산을 활용하여 나중에는 상당히 높은 지위의 정치가가 되었다. 그는 정치가로서 출세하기 위해 정적이 있으면 비밀가루약을 몰래 먹여 제거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하지만 아무런 증거가 없어서 법정에 세우지 못했다. 아무튼 드라이라우퍼하우스는 불쌍하게 자살한 남편, 남편을 독살한 부인, 부인의 정부인 견습공, 이 세사람이 살았다는 집을 말한다.

 

미하엘러플라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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