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워킹 투어/제5일 투어

6. 콜마르크트 (Kohlmarkt)

정준극 2007. 4. 11. 15:17

콜마르크트 (Kohlmarkt)

 

콜마르크트 거리. 가운데 보이는 돔은 호프부르크 궁전의 미하엘러토르. 짧고 좁은 길이지만 비엔나의 역사를 읽을수 있는 거리이다.

 

콜마르크트라고 하니까 양배추음식인 콜슬러 또는 이 나라 사람들이 즐겨 먹는 자우어크라우트(양배추를 소금과 식초에 절인 것)를 연상하여 배추시장으로 생각할지 모르나 실은 예전에 장작과 숯을 팔던 시장거리였다. 미하엘플라츠로부터 콜마르크트에 들어서서 바로 오른편에 있는 집이 그로쎄 미하엘러하우스(Grosse Michaelerhaus)라고 하는 11번지이다. 이 집의 안뜰은 꼭 한번 보고 가는 것이 좋다. 천정이 아름다운 벽토(스투코)로 치장되어있다. 현관건물을 통과하여 들어가는 안뜰에서는 우선 여러 세월이 혼합되어 있다는 점을 느낄수있다. 안뜰 구내의 벽은 로마네스크양식이며 지붕은 르네상스양식이고 안뜰 옆에 있는 작은 성미하엘채플의 쿠폴라(돔과 같은 둥근지붕)는 바로크양식이다. 그리고 지붕의 곡선이 특이한 마구간들도 역시 바로크양식이다. 이 마구간은 아마 비엔나에서 가장 우아하고 예쁜 건축물일 것이다. 한편, 발코니 난간에 윈치 몇개가 있는 것을 볼수 있다. 무거운 물건을 윗층으로 옮길 때 계단을 거치지 않고 바로 옮기기 위한 장치로서 다른 집에서는 찾아 볼수 없는 그런 장치가 이 집에는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콜마르크트 11번지의 미하엘러하우스. 예전에 하이든이 소년시절에 살았던 방이 있는 건물이다. 원래는 마사로 사용되던 건물이라고 한다.

                     

이 집에서는 소년시절의 요세프 하이든이 1749년 살았었다. 헝가리와의 국경지대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고향 로라우(Rohrau)를 떠난 하이든은 슈테판성당의 어린이 성가대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변성기가 되어 더 이상 성가대원으로 있을 수 없게 되자 오갈데가 없는 신세가 되었다. 마침 미하엘교회에서 권표(權標)를 받드는 사람이 하이든을 콜마르크트 11번지의 그로쎄 미하엘러하우스에 살고 있는 어떤 사람을 찾아가면 거처를 주선해 줄것이라고 소개했다. 이로써 하이든은 형편없는 다락방이지만 숙소를 해결할수 있게 되었다. 다른것은 몰라도 겨울에 난로가 없기 때문에 무척 추운 방이었다. 하이든은 먹고 살기위해 피아노와 성악레슨을 했다. 오늘날 하이든이 고생하며 살았던 다락방의 모습은 찾아 볼수없다. 왜냐하면 그 뒤에 한층을 더 올렸기 때문이다. (비엔나의 음악가 파파 하이든 편에 더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니 참고 바람)

 

콜마르크트의 데멜의 케이크. 과연 황실에 케이크를 조달할 정도로 맛있고 화려한 케이크들이다. 카페 데멜은 사크레 토르테(Sacre Torte)를 자랑한다. 비엔나에서 토르테라고 하면 자허 토르테 다음으로 카페 데멜의 사크레 토르테라는 것이다. 여직원의 손에 들고 있는 케이크가 데멜 토르테이다.

 

바로 옆집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케이크 상점인 데멜(Demel)이다. 상점주인은 아직도 상점 이름을 제국과 황실의 제과점이라고 자랑스럽게 부르고있다. 상점의 역사는 178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해에 루드비히 데네(Ludwig Dehne)라는 케이크 견습공(도제)이 독일의 뷔르템버그에서 비엔나로 왔다. 그는 새로 오픈할 제과점의 가장 적당한 장소로서 미하엘러플라츠에 있는 궁전극장 건너편을 택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극장에 오는 사람들이 케이크를 열심히 사 먹는 바람에 장사가 잘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창업자인 루드비히 데네는 2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인이 상점을 떠 맡았다. 부인은 젊은 케이크견습공인 크리스토프 데멜과 재혼하고 상점을 이끌어 나갔다. 부인이 나이들어서 더 이상 상점을 이끌어 가기가 어렵게 되자 이들의 아들인 아우구스트 데멜(August Demel)이 상점을 책임맡게 되었다.

 

카페 데멜의 간판과 미하엘러쿠폴라

 

아우구스트 데멜은 사람이 진실되기도 했지만 장사머리가 비상했다. 상점은 날로 번창하여 돈을 많이 벌었다. 데멜의 제과점은 프란츠 요셉 황제와 엘리자베트 왕비를 위한 케이크 공급업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데멜은 일약 사회명사가 되었다. 아우구스트는 나중에 정치가가 되었으며 군인으로서도 1848년 혁명기간중에 크게 활약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트의 아들은 제과 비즈니스에 흥미가 없었다. 얼마후 이 상점에서 일하던 크리스토프 데멜(Christoph Demel)이라는 견습공이 유명한 이 제과점을 매입했다. 1888년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궁정극장(부르그테아터)이 허물리게 되자 새 주인인 데멜은 가게를 현재의 콜마르크트 14번지로 옮겼다. 데멜카페의 건너편에 있는 9번지는 프레데릭 쇼팽에 대한 자취가 남아있는 집이다. 쇼팽은 1829 11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이 집에서 지냈다. 그러나 그 당시 이 집은 1901년 막스 화비아니(Max Fabiani)에 의해 현재의 아트 누보 양식의 집으로 개조되기 전이었다.

 

 

카페 데멜

 

콜마르크트 거리는 다양성이 있어서 흥미를 준다. 10번지는 레티(Retti)양초점이다. 이 상점의 현관은 유명한 건축가인 한스 홀라인(Hans Hollein)이 비엔나에서는 처음으로 설계한 작품이다. 한스 홀라인은 슈테판스플라츠의 하스하우스를 설계한 건축가이다. 7번지 역시 한스 홀라인의 설계이다. 거리의 전통에 맞지않는 이단적인 설계라고 논난이 많았던 건물이다. 사람들은 루스하우스와 마찬가지로 눈썹없는 눈이라는 표현으로 현관설계를 핀잔했다. 현재는 보석상점이다.

 

봘러슈트라쎄 4번지의 팔레 에스터하치

 

콜마르크트에서 봘너슈트라쎄(Wallnerstrasse)로 가기 전에 모퉁이에 있는 가구상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고전과 현대가 조화를 이루는 훌륭한 가구들을 팔고 있다. 굽은 나무로 만든 의자는 고전미의 극치이지만 15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기최고이다. 원래 이 곳에는 1770년 문을 연 유명한 밀라니(Milani)의 커피하우스가 있었다. 비엔나 커피하우스의 원조라고 할수 있는 곳이었다. 커피하우스에 수많은 종류의 신문과 잡지를 구비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밀라니의 커피하우스부터였다. 그로부터 커피하우스에 신문과, 잡지를 구비하는 것이 비엔나 커피하우스의 전통이 되었다.

 

비엔나의 전형적인 카페. 카페에 잡지들과 신문철들을 두는 것은 지금은 문을 닿은 콜마르크트의 밀라니 카페에서부터였다고 한다.

 

다른 모퉁이인 콜마르크트 8-10번지는 푸른 통이라고 부르는 한때 아주 유명한 제과점이 있었다. 주인인 슈푀틀(Spoettl)의 부인은 대단한 미인이었다. 미모이면서도 날씬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부인을 멸치여왕이라고 불렀다. 미인이어서 그런지 스캔들도 많았다. 그 중 하나는 오스트리아의 위대한 정치가인 메테르니히(Metternich)수상이었다. 부인은 메테르니히 가족에 대하여 특별한 애착심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메테르니히 수상의 아들과도 염문을 뿌렸기 때문이었다. 독일의 비평가이며 극작가인 코체부(Kotzebue)는 이런 우습지도 않은 스캔들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어 1801두명의 클링스버그라는 코미디를 발표했다. 

 

콜마르크트

 

[회의는 춤춘다] (Die Kongress tanzt) - 1814년 가을,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대패한후, 유럽의 제왕과 수상들은 프란츠1세 황제의 주선으로 비엔나의 호프부르크에 모여 나폴레옹 이후의 유럽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에 대하여 논의했다. 워낙 정치적으로 이해가 걸린 문제였으므로 오스트리아의 수상인 메테르니히백작은 호프부르크의 대연회장에서 거의 매일 무도회와 파티를 열어 유럽의 제왕들이나 수상들과 막후 교섭을 통해 유럽에 새 질서를 이끌려 했다. 이처럼 본래의 회의는 하지 않고 거의 매일 무도회와 파티를 통해 막후 교섭을 하는 것을 빗대어 회의는 춤춘다’(디 콩그레쓰 탄츠트)는 말이 유래되었다.

 

'회의는 춤춘다' 영화. 1955년. 루돌프 프라크, 요한나 마츠 주연. 1814-1815년에 비엔나에서 열렸던 각국 군주들의 모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