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눈툼
오스트리아는 그 옛날에 상당 기간 동안 로마제국에 속한 땅이었다. 그 유적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는 중에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 카르눈툼 고고학 공원이다. 카르눈툼은 현재의 니더외스터라이히 주에 있는 지역이다. 비엔나와 브라티슬라바의 중간 쯤에 있는 로마제국의 유적지이다. 기원전에는 노리쿰(Noricum) 왕국에 속한 지역이었고 기원후 1세기 경 로마제국 시대에는 파노니아(Pannonia)라는 지역이었다. 로마시대 파노니아의 중심도시가 카르눈툼이었다. 카르눈툼은 처음에 로마제국의 외곽 수비진영이었으나 나중에는 번화한 도시가 되어 인구가 5만명을 넘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카르눈툼은 이른바 호박길(앰버 로우드)의 중심 선상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르눈툼은 오늘날 니더외스터라이히주의 페트로넬-카르눈툼(Petronell-Carnuntum)과 바드 도이치 알텐부르크(Bad Deutsch-Altenburg) 마을 근처에 있다. 카르눈툼 고고학 공원의 규모는 대략 10 평방 킬로미터에 이른다. 카르눈툼 고고학 공원은 크게 세 파트로 구성된다. 첫째는 페트로넬 인근에 있는 박물관, 이교도의 문(Heidentor), 야외극장을 묶은 것이다. 두번째는 페트로넬 성의 정원에 있는 유적지 발굴 장소이다. 세번째는 카르눈툼 로마유적 박물관이다.
현재의 페트로넬-카르눈툼에 있는 로마시대의 대중목욕탕 유적
사실 따지고 보면 이탈리아 이외의 지역에 있는 로마제국의 유적지는 별로 볼만한 것이 없다. 로마제국 시대의 주거지, 목욕탕, 수로, 야외극장 등의 유적들이 고작이다. 하지만 이탈리아 이외의 다른 나라에서 어쩌다가 로마제국 시대의 유적이 발굴되면 대단한 고고학적 발굴이라고 생각해서 난리도 아니다. 당국은 유적지를 보존하기 위해 예산을 투입하며 박물관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그러나 사실 실제로 가보면 별것도 아닌 유적들이어서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에도 곳곳에 로마 유적지가 발굴되었다. 비엔나만 하더라도 슈테판스돔 지하에서 비르길카펠레라고 하는 예배처가 발굴되어 유적지로 보존하고 있고 호프부르크 정문 앞의 미하엘러플라츠에서도 주거지 일부가 발굴되어 사람들이 기웃거리게 만들었으며 이밖에도 호에르마르크트에도 유적지가 발굴되어 박물관으로 만들어 놓았다. 카르눈툼의 로마 유적지가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이곳이 1세기경 로마제국이 켈트족이나 게르만족의 침범을 막기 위해 주둔군을 두었던 역사적인 요새였고 그후 동서무역의 길목에 있어서 상업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여 크게 발전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루시우스의 저택'을 복원하여 박물관처럼 만들었다.
옛날 파노니아 지역에서 로마 유적이 가장 많이 발굴된 곳이 현재의 페트로넬-카르눈툼 일대이다. 일반 주민들이 점차 늘어나서 대도시가 되었던 지역이다. 이곳에서 관심을 끄는 대상은 야외 박물관의 로마시대 주거지 유적과 궁전들의 유적, 그리고 야외극장과 이교도의 문이다. 로마시대 주거지에서 대표적인 것은 루시우스의 저택(House of Lucius)라고 불리는 건물유적으로 고대 로마시대의 전통적인 건축양식을 사용하여 지은 건물이다. 이 건물은 다시 복구되어 2006년 6월부터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도시의 중심지는 포럼(Forum)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포럼이라고 하면 단순히 무슨 학술행사를 생각할지 모르지만 로마시대에는 시내 중심지역을 포럼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중에 A Funny Thing Happened on The Way To The Forum이라는 것이 있다. '시내 중심가로 가는 길에 생긴 웃기는 일' 쯤으로 번역할수 있다. 아무튼 페트로넬-카르눈툼의 중심지역에는 로마시대의 궁전 유적도 있다. 그리고 대규모 공중목욕탕의 유적도 있어서 흥미를 끈다. 시내 중심지역에서 조금 벗어나면 대형 야외극장이 있다. 아마 1만 5천명 정도를 수용하였던 극장이라고 생각된다. 야외극장의 유적을 발굴할 때에 무슨 명판도 하나 발견하였다. 명판에는 카르눈툼의 야외극장이 전로마제국에서 네번째로 큰 야외극장이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야외극장은 로마제국 시대에 제국내의 야외극장 중에서 네번째로 규모가 큰 것이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검투사들의 경기가 벌어졌다.
페트로넬-카르눈툼 유적지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아무래도 '이교도의 문'이라고 불리는 대형 건축물이다. 개선문으로 사용되었다는 주장이다. 기원후 354년에서 361년 사이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사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로마제국의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가 전쟁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카르눈툼의 로마 건축물들은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 시기에 거의 훼손되고 파괴되었지만 이교도의 문만큼은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다고 한다. 내막을 잘 모르는 중세 사람들은 이 건축물을 이교도 거인의 무덤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이 건축물은 '이교도의 문'이라고 불려지게 되었다.
'이교도의 문'이라고 불리는 개선문
카르눈툼은 원래 군대의 요새로부터 시작한 군사도시였다. 카르눈툼에서 군사도시를 기억나게 하는 유적으로서는 아마 원형경기장이 유일할 것이다. 검투사들이 죽음의 경기를 벌이던 곳이다. 현재 원형경기장의 유적에 연계되어서 작은 박물관이 하나 서 있다. 로마시대의 검투사에 대한 역사를 보여주는 곳이다. 또한 시간을 정해서 옛날 로마시대 병사들의 전투 장면을 시연해 주기도 한다. 이런 행사를 로마페스트라고 부른다.
카르눈툼에서의 2008년도 로마페스트 장면
카르눈툼이라는 말은 켈트어의 카른(Karn)에서 비롯했다는 주장이 있다. 카른은 영어의 Cairn(케른)과 같은 의미로서 이정표, 특히 원추형의 돌무덤처럼 만든 이정표를 말한다. 아마 카르눈툼이 북구로 뻗어가는 무역로에서 중요한 이정표의 역할을 했기 때문인것 같다. 카르눈툼이라는 용어가 처음 기록으로 남아 있던 것은 기원후 6년 경 아우구스투스 황제때였다. 그때 티베리우스가 북방의 게르만족과 켈트족의 침범을 방어하기 위해 군사기지를 설치하고 그 이름을 카르눈툼이라고 불렀던 것이 처음 기록이었다. 그후 로마제국은 카르눈툼의 중요성을 크게 인정하고 이곳을 15군단 아폴리나리스의 주둔지로 선정하자 이 지역은 크게 번창하기 시작했다. 얼마후에 카르눈툼은 빈도보나(현재의 비엔나)로부터 브리게티오(현재의 헝가리 오 초니)에 이르는 도나우 일대에 산재해 있는 여러 로마 요새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수행하게 됨으로서 점점 더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이어 하드리안 황제 시대에는 14군단 제미나의 영구 주둔지가 되었고 이와 관련하여 파노니아 수페리오 지방의 수도로서 행세하게 되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카르눈툼은 로마시대에 이미 호박길의 중요 거점으로서 각광을 받았다. 상인들은 북쪽 지방에서 호박을 가져와서 이탈리아에 팔아 이득을 챙겼다. 로마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172-175의 3년 동안 카르눈툼에서 살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유명한 명상록(Meditations)는 카르눈툼에서 저술되었다. 193년에는 파노니아 총독이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휘하 장병들이 그를 페르티낙스 황제를 대체하는 새로운 황제로 선포하기도 했다. 하지만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얼마후 암살당했다. 그러던 카르눈툼은 4세기에 게르만 민족의 침공으로 파괴될수 밖에 없었다. 그후 로마제국의 발렌티니안 1세가 다시 이 지역을 탈환하였으나 예전의 영광을 찾기는 어려웠다. 왜냐하면 빈도보나(현재의 비엔나)가 그 지역의 중심지로서 크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얼마후 바바리아가 침공하자 카르눈툼은 결국 폐허로 남게 되었다. 카르눈툼은 공동묘지의 장소로 사용되거나 또는 허물어진 건축 석재들을 발굴해 가는 곳으로 전락하였다.
바드 도이치 알텐부르크의 카르눈툼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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