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총정리/3월의 성인과 축일

3월 28일: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정준극 2007. 8. 9. 11:17
 

교회의 스승. 서적상의 수호성인. 상징: 태양.


13세기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나폴리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나폴리대학교에서 높은 학문을 쌓은 인물이다. 친구들 사이에서 ‘몸집만 큰 얼간이’라는 별명으로 놀림을 받은 토마스 아퀴나스는 유망한 전도를 물리치고 빈곤을 방편으로 삼는 어떤 수도원에 몸을 기탁기로 결심하였다. 가족들과 친구들의 실망은 이루 말할수 없이 컸었다. 가족들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가업을 이어 귀족으로서 행세하기를 원했다. 가족들은 토마스 아퀴나스를 방에 가두고 마음을 돌리도록 했다. 그의 남동생들은 형인 토마스의 마음을 붙잡기 위해 아퀴나스의 방에 요염한 창녀를 들여보내 유혹토록 했다. 토마스는 벽난로에 벌겋게 달군 인두를 집어 들어 십자가를 그어 창녀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렇듯 유혹을 이겨내자 천사가 나타나 토마스의 허리에 밧줄을 둘러 주었다. 이로부터 토마스는 어떠한 육적인 유혹으로부터도 자유로웠다. 토마스의 가족들은 토마스를 그렇게 2년동안 가두었으나 토마스의 마음을 돌이킬수 없다고 판단하여 그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자유롭게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근대 기독교 사상의 기초를 놓은 인물로 존경을 받았다. 그는 아리스토렐레스 스타일이라고 할수 있는 철학원칙을 통해 신학의 이론을 쌓았다. 그는 이성과 신앙은 양분되는 것이지만 신앙의 진리가 이성으로 보완되어 서로 조화 있는 공존을 할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마음 무장으로서 그는 사상에 대한 두 개 학파의 공격에서 승리할수 있었다. 두 개의 반대 학파는 진리와 신앙은 단연 별개의 존재라고 주장하는 애버로이스트(Averroist)와 진리를 신앙문제로 삼는 오거스틴주의자였다. 따라서 토마스는 이단으로 간주되었던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에게도 사상의 문호를 개방하였다.


고도로 성숙한 지성인인 토마스는 노동을 하면서도 사색을 하고 글을 썼으며 철학과 신학에 대하여 설교하였다. 그의 저서인 Summa Theologica는 가톨릭 교리의 초석이 될 정도로 중요한 것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한창 때인 49세에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세상을 떠났다. 그림에서는 보통 하늘에서 한줄기 광채가 비치는 책을 들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또 다른 성 토마스(도마)가 있다. 축일은 12월 21일이다. 잘 아는대로 열두제자 중의 하나인 ‘의심 많은 도마’이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그는 예수께서 그에게 나타나 손과 허리의 못 자국을 직접 만져 보게 함으로서 비로소 믿었다는 그 토마스(도마)이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동방으로 전도의 길을 떠나 주로 인도에서 활동을 했다. 그림에서는 T자 형태의 물건을 들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가 인도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전 재산을 희사하여 지은 궁전을 뜻한다. 어떤 그림에서는 창을 들고 있기도 하다. 순교자의 상징이다. 소경된 자들이 성 도마에게 간구하면 응답을 받는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상처를 직접 목격한 사도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성 토마스는 캔터베리 대주교를 지냈던 베키트의 토마스(Thomas a Becket)이다. 정치력이 대단했던 토마스는 헨리2세가 2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영국 수상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이후 토마스는 헨리2세로부터 많은 신임을 얻어 그의 오른팔 겸 가장 가까운 친구로서 영국의 제2인자가 되었다. 토마스는 이에 보답이나 하듯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헨리2세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는 설교를 하고 비록 과다한 세금이지만 나라를 위해 협조하라고 종용하였다. 토마스가 영국 교회의 대주교가 된 것도 헨리2세의는 강력한 주장 때문이었다. 헨리2세가 토마스를 대주교로 임명할 때 토마스는 처음에 완강히 사양하였으나 헨리2세의 주장을 꺾을수 없어 대주교에의 지위를 수락하였다.

 

 말씀과 교회의 수호성인으로서

성경과 교회를 들고 있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는 대주교가 된 이후 평소 실천코자 했던 금욕과 고행의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왕이 하사하는 고액의 급여, 화려한 가구, 연회 따위를 모두 접어 두고 수용하지 않았다. 토마스는 점점 검소하고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 나아가 그는 왕에게 국가의 재정, 사상, 정치 문제에 대하여 검소할 것을 서슴없이 충고하였다. 두 사람의 갈등은 점차 심화되었다. 이와함께 교회와 정부간의 갈등도 골이 깊어졌다. 토마스는 헨리2세가 나라의 재정을 탕진하고 정치적 야망을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핍박한다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1146년, 더 이상 참을수 없다고 생각한 토마스는 교황에게 이 사실을 고하고 바로 잡기 위해 은밀한 중에 프랑스로 건너갔다. 토마스는 6년간이나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마침내 1170년 헨리2세와 토마스는 휴전하였다. 그후 토마스는 곧바로 영국으로 돌아갔다.

 

 16세기에 만들어진 성 토마스 아퀴나스 기념상.


하지만 곧바로 문제가 일어났다. 돌이켜보아 헨리2세는 교회의 법과 절차를 따르지 않고 요크 주교의 주선에 의해 대관식을 가졌었다. 영국에 도착한 토마스는 이 사실을 새롭게 제기하고 당시 대관식을 주관했던 요크 주교의 사임을 주장하였다. 헨리2세의 불쾌감은 극도에 달했다. 그는 만조백관들 앞에서 ‘누가 이 골치 아픈 대주교(토마스)를 나에게서 쫓아버려 주겠는가?’라면서 분노를 터트렸다. 그해도 다 저물어 가던 12월 29일, 왕의 은밀한 지시를 받은 네명의 무사들이 토마스가 머물고 있는 교회로 잠입하였다. 토마스는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었다. 토마스의 목은 무사들의 칼날에 낙엽처럼 떨어졌다. 그의 죽음 이후 수많은 기적들이 일어났다. 그의 무덤은 수많은 신자들이 숭배하는 장소가 되었다. 토마스가 세상 떠난 날은 가톨릭교회의 기념일이 되었으며 해마다 토마스 축일이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런던으로부터 캔터베리까지 순례의 행렬을 지어 와서 토마스의 묘소에 예배하였다. 이로부터 런던으로부터 캔터베리까지의 길을 순례자의 길(Piligrim's Way)라고 불렀다. 대문호 초서(Chaucer)는 이 순례자의 길에 대한 얘기를 그의 ‘캔터베리 이야기’에 기록하여 잊혀지지 않도록 했으며 후대의 T.S. 엘리엇은 ‘대성당에서의 살인’(Murder in the Cathedral)이라는 제목의 소설에서 토마스의 죽음을 다루었다.   


그건 그렇고 토마스가 세상을 떠난지 몇 년후 백성들과 교회는 헨리2세에게 토마스 살해의 죄를 참회토록 강요했다. 헨리2세는 어쩔수 없이 자기의 죄과를 그리스도와 교회 앞에 참회하고 백성들에게 사죄했다. 헨리2세의 정치력은 힘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거의 1백년이 지나서 저 유명한 헨리8세가 영국 왕에 오르자 그는 토마스에 대한 교회의 축일을 금지하였으며 토마스의 초상화를 모두 철거토록 했고 교회의 칼렌다에서 토마스의 이름을 삭제토록 했다. 나아가 1538년에는 토마스의 묘소를 철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캔터베리 대주교인 토마스의 이름은 영국의 성자 반열에서 사라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토마스는 1173년 로마 교황에 의해 성자로 시성되었다.

 

 책을 들고 헨리2세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