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총정리/6월의 성인과 축일

6월 5일: 성 보니파체(St Boniface)

정준극 2007. 8. 9. 11:28
 

마인츠의 주교. 독일의 사도. 상징: 지팡이.


8세기 독일의 성 보니파체는 교사로서, 수도사로서, 선교사로서 대단히 존경받은 인물이었다. 원래 보니파체는 영국 디본(Devon)에서 소작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윈프리드(Winfrid)였다. 가난한 윈프리드는 학교에 갈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집에서 혼자 공부하였다. 윈프리드는 누구보다도 학구열이 높았다. 학교에 가지 못한 그는 수도원에 들어가면 공부를 할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베네딕트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로서 공부를 할수 있었다. 윈프리드는 나중에 학교 선생님이 될 정도로 학문의 경지가 높았다. 윈프리드는 영국 최초의 라틴어 교본의 저자였다. 그만큼 학문의 경지가 높았다. 30세가 되던 해에 그는 신부로서 서품을 받았다. 윈프리드의 명망은 날로 높아졌다. 영국의 교회는 그에게 어떤 수도원의 원장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그는 선교의 사명을 중요시하여 수도원장직을 사양하고 선교를 위해 유럽대륙으로 향하였다. 당시 독일 중부지역의 프리스란트(Friesland), 현재의 헝가리인 튜링기아(Thuringia), 독일 남부의 바바리아 지방에는 기독교가 들어가지 못하고 이교와 미신이 횡행하고 있었다. 보니파체는 이들 지역에 대한 선교에 앞서 로마로 가서 교황을 만나 이들 지역에 대한 선교사역을 부여받았다. 이 때에 교황은 그에게 윈프리드라는 이름 대신에 보니파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었다.

 

 독일 Fulda 에 있는 성 보니파체 크립트(납골당)


프리스란트에서의 전도는 생각되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선교에 실패한 그는 영국으로 돌아왔다. 722년 그는 로마로 다시 가서 교황으로부터 새로운 선교 사역을 부여받았다. 이번에는 마인츠 교구의 주교로 임명을 받아 가게 된 것이었다. 부름받은 선교사로서 보니파체는 프랑스 북부, 독일 중부와 남부 지방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토록 했으며 수도원과 학교와 교회를 세웠다. 바바리아에서 선교할 때 그는 마을 사람들이 신성시하는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설교하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보니파체에게 먼저 상수리나무에 경배하고 설교토록 했다. 그러나 보니파체는 이를 당당히 거부하고 도끼를 들어 그 나무를 찍어냈다. 사람들은 천둥의 신인 토르(Thor)가 진노하여 보니파체를 징계할 것으로 믿었으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를 보고 그 자리에 모였던 모든 사람들이 기독교를 받아 들였다.

 

 성 보니파체의 순교


보니파체는 부패하였고 이교도와 결탁하는 프랑스의 교회들을 바로 잡도록 하는 사역을 부여받았다. 그는 프랑스의 각 지역을 교구로 나누고 각 교구에 주교를 두어 로마 교황청과 직접 연락토록 했다. 이렇게 하여 교황은 프랑크의 괴뢰 왕을 추방하고 기독교를 추종하는 새로운 왕을 세울수 있었다. 보니파체는 새로운 왕 페핀(Pepin)의 대관식을 주례하였다. 이로부터 프랑스 역대 왕의 대관식은 교회의 주교가 주례하는 전통이 생겼다. 보니파체는 어느덧 70 노령이 되었지만 젊은 날의 정열을 잃지 않았다. 그는 프리스란트를 복음화 시키는 일에 실패했던 것을 생각하고 이에 다시 도전하였다. 이번에는 대성공을 거두어 수많은 사람들을 기독교의 품으로 돌아오게 했다. 그러나 보니파체의 선교를 심히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원래 이교도의 잔당이 보니파체에게 덤벼들어 그를 죽이는 일이 일어났다. 보니파체는 새로운 신도들에게 세례를 주기 위해 강변에서 준비 중이었다. 보니파체는 죽기 전에 폭도들에게 자기의 머리를 성경에 올려 놓고 죽도록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폭도들은 그 간청을 받아들여 보니파체의 목을 자르기 전에 성경위에 얹어 놓도록 했다. 

 

 성 보니파체가 세례 받는 장면과 순교하는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