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합스부르크 사람들

사라예보에서 숨진 비운의 페르디난트 (Ferdinand)

정준극 2008. 1. 16. 09:25

사라예보에서 숨진 비운의 페르디난트 대공


근대 합스부르크 제국의 역사 속에서 두명의 황제 계승자가 비운의 최후를 맞이하였다. 한 사람은 노황제 프란츠 요셉(1848-1916)의 유일한 아들인 루돌프(Rudolf) 황태자로서 마리아(Maria Vetsera)라는 18세의 애인과 이루지 못할 사랑을 비관하여 비엔나 근교의 마이엘링(Meyerling)에서 동반자살하였다. 이로써 프란츠 요셉 황제의 조카인 페르디난트(Ferdinand) 대공이 다음 황제 계승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페르디난트는 불행하게도 부인인 조피(Sophie)와 함께 사라예보를 방문했다가 비명에 세상을 떠났다.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의 국수주의자가 총을 쏘아 암살했다. 권총으로 자살한 루돌프와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난 페르디난트는 사촌간이었다. 그보다도 루돌프의 어머니, 즉 프란츠 요셉 황제의 엘리자베트 왕비(일명 씨씨)도 이탈리아의 무정부주의자 손에 피살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다. 아무튼 자살한 루돌프 황태자 때문에 페르디난트가 다음 황제 계승자로 지명되었던 것이며 그런 관계로 제국의 영토인 세르비아를 방문하였다가 암살된 것이다.  페르디난트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그로 인하여 1차 세계대전이 촉발되었다는 것이다. 1914-18년의 4년동안 전세계를 전쟁의 회오리바람으로 몰아넣은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거의 1천만명에 이르는 병사들이 참혹하게 목숨을 잃었으며 부상자는 1천만명에 육박했다. 재산상의 피해는 말로 표현할 정도를 훨씬 넘었다. 페르디난트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어떤 삶을 살았는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 계승자였으니 황제에 오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페르디난트 대공.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영토인 오스트리아-에스테(Austria-Este: 동오스트리아라는 뜻)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오스트리아 대공, 오스트리아 제국 황태자, 헝가리 및 보헤미아의 황태자였으며 1896년부터 세상을 떠난 1914년까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 계승자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 페르디난트가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국수주의 단체인 검은손(Black Hand)의 멤버에 의해 피살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즉각 세르비아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였다. 선전포고서는 프란츠 요셉 황제가 바드 이슐의 황실 별장에서 서명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중심으로한 동맹국(Central Powers라고 불렀음)과 세르비아 편에 있던 동맹국(이를 Entente Powers라고 불렀음)간의 전쟁이 시작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전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끌어 들인 1차대전이 발발하게 되었다.

 

1차 대전에서의 전쟁 포로들. 1차대전으로 1천만명의 병사들이 전사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1863년 12월 18일 비엔나 남부 대학도시인 그라츠(Graz)에서 아버지 카를 루드비히(Karl Ludwig)와 어머니 마리아 아눈치아타(Maria Annunciata: 카를 루드비히 대공의 두 번째 부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별로 필요 없는 사항이지만 참고로 말하면 페르디난트의 풀 네임은 Franz Ferdinand Karl Belschwitz Ludwig Josef von Habsburg-Lothringen이다. 좋은 이름은 다 집어넣은 것 같다. 아버지 카를 루드비히의 형은 황제 프란츠 요셉과 멕시코 황제였던 막시밀리안이었다. 막시밀리안(Maximilian)은 한 때 멕시코가 오스트리아 제국의 식민지로 있을 때 멕시코 황제로 있었으나 멕시코 혁명중 체포되어 총살형을 당한 역시 비운의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프란츠 요셉 황제의 외아들 루돌프 황태자가 1889년 마이엘링에서 자살하자 다음번 황제 계승자로 프란츠 요셉 황제의 둘째 동생인 카를 루드비히가 지명될 입장이었으나 이미 나이 가 56세였기 때문에 ‘다 늙어서 황제인지 뭔지를 해야 뭐하나?’라는 생각에 황제 계승자의 지위를 사양했다. 게다가 카를 루드비히는 폐렴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카를 루드비히의 아들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다음 황제 계승자로 지명되었던 것이다. 루돌프 황태자가 자살할 당시에 아버지인 프란츠 요셉 황제는 이미 69세의 노인이었다. 노황제는 어서 속히 제국의 종사를 다져놓아야 했고 그래서 크게 내키지는 않았지만 동생의 아들, 즉 조카인 페르디난트를 다음 황제 계승자로 지명하였다.

 

프란츠 요셉 황제의 아들인 루돌프 황태자가 자살함으로서 프란츠 요셉 황제의 조카인 페르디난트가 다음 황제 계승자로 지명되었다. 루돌프만 자살하지 않았어도 1차대전은...

 

당시 페르디난트는 패기에 넘친 26세의 약관이었다. 페르디난트는 왕위 서열에 직접 포함되지 않는 합스부르크 황실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별로 하는 일 없이 여행이나 다니고 사냥이나 하면서 지냈으며 제국의 정치에 대하여는 애초부터 관심도 없었다. 그래서 노황제 프란츠 요셉은 다음 황제 계승자로 조카 페르디난트를 지명하기는 했지만 크게 호감을 갖지는 않았었다. 더구나 그러나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페르디난트가 별로 내세울 것이 없는 어떤 백작부인과 연애를 하고 있다고 하므로 그것도 마땅치 못했던 것이다. 페르디난트는 다음 황제 계승자로 지명된 이듬해인 1990년 마침내 조피(Sophie) 백작부인과 결혼하였다. 한편, 페르디난트가 겨우 12세 였을 때 사촌인 모데나(Modena)의 프란시스 5세(Francis V)가 세상을 떠나면서 페르디난트에게 모든 재산을 상속하였다. 다만 한가지 조건이 있다면 오스트리아-에스테(Austria-Este)라는 호칭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페르디난트는 황제 계승자로 지명되기 전부터 오스트리아-에스테 대공이라는 타이틀을 기졌던 것이다. 아무튼 페르디난트는 사촌 프란시스 1세의 재산을 모두 물려받았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재산이 많은 부자중의 한사람이었다.

 

세기의 로맨스로 맺어진 페르디난트와 조피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페르디난트는 태어난후 황제 계승 서열에서 멀리 있었기 때문에 장차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린 시절 제국의 통치에 대한 교육을 받지 않았으며 대신 황실의 일원으로서 역사와 도덕 정도를 배웠을 뿐이다. 페르디난트는 20세가 되던 해에 대개의 황실 남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군대에 들어갔다. 계급은 소위였다. 만일 황제 계승 서열의 우선순위에 있었다면 계급이 대령쯤은 되었을 것이다. 젊은 페르디난트는 두 가지 일에 대단히 열중했다. 사냥과 여행이었다. 어찌나 사냥을 좋아 했던지 생전에 5천마리의 사슴을 사냥했을 것이라고 한다. 여행을 좋아한 그는 무슨 계기를 만들어 외국을 여행가고 싶어서 안달하다가 한번은 마침 이탈리아의 모데나에 있는 자기 재산(실은 모데나 대공 프란시스 5세가 상속해 준것)을 살펴본다는 이유를 내걸어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난 일도 있다. 군대에 들어간 직후였으므로 20세 때였다. 해외여행에 맛을 들인 페르디난트는 2년후 이번에는 장거리 여행을 떠나 이집트, 팔레스타인, 시리아, 터키를 돌아 다녔다. 돈이 넉넉하였기에 여행은 재미있기만 했다. 그러다가 1889년 마침내 운명의 수레바퀴는 페르디난트의 앞에 멈추어 섰다. 루돌프 황태자의 죽음으로 다음번 황제 계승자로 지명되었던 것이다. 바로 그해에 페르디난트는 프라하에서의 무도회에서 조피 호테크(Sophie Chotek) 백작부인을 만났다. 조피는 17세의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페르디난트가 저격 당한 프란츠 요셉 슈트라쎄 길모퉁이. 하필이면 프란츠 요셉 거리! 페르디난트의 피살을 기념하는 명판이 붙어 이다.

 

조피 백작부인은 테셴(Teschen)의 대공비인 이사벨라(Isbella)의 시녀였다. 테셴은 현재의 폴란드와 체코 공화국 접경지대에 있던 상부 실레지아(Silesia)의 작은 공국으로서 합스부르크 제국의 우산 아래 있던 지역이었다. 아무튼 페르디난트는 조피를 만난 이후 마음에 쏙 들어서 계속 이런 저런 구실을 만들어 데이트를 하였다. 특히 이사벨라 대공비가 살고 있던 프레쓰부르크(Pressburg: 현재의 브라티스라바)를 자주 찾아갔다. 그런 비밀 데이트가 2년이나 계속되었다. 페르디난트는 한때 폐렴에 걸려 아드리아해에 있는 로신즈(Losinj)라는 섬에서 요양을 했던 일이 있다. 이 기간중에 페르디난트와 조피는 편지를 주고 받으며 서로의 사랑을 다짐하였다. 한편, 이사벨라 대공비는 젊은 페르디난트가 자꾸 자기 집을 찾아오니까 혹시 자기 딸들 중에서 한 명에게 마음이 있어서 그러는 줄 알고 내심 무척 기뻐했다. 그러다가 1898년(황제 계승자로 지명되기 전해) 어느날 이사벨라 대공비는 자기집에 놀러 와서 테니스를 친후 코트에 놓아둔 페르디난트의 펜단트(목걸이)를 우연히 열어 보니 조피의 사진이 들어있음을 발견하였다. 이사벨라 대공비는 페르디난트의 펜단트에 자기 딸들중 한 명의 사진이 들어 있을 것으로 기대했었는데 딸은 커녕 시녀의 사진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날로 조피는 대공비의 시녀에서 해임되었다. 이사벨라 대공비는 시녀인 조피가 나중에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황제 계승자의 부인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페르디난트의 아버지 카를 루드비히 대공과 어머니 마리아 아눈치아타 대공비

 

페르디난트에게는 중매가 여러 곳에서 들어왔지만 도무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페르디난트의 마음은 이미 조피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페르디난트가 조피라는 아가씨와 사랑한다는 사실을 안 노황제 프란츠 요셉은 기분이 무척 좋지 않았다. 페르디난트는 비록 조카이지만 자기의 뒤를 이어 제국의 황제가 될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조피라는 여자는 왕족이 아니었다. 합스부르크의 사람들은 지금까지 유럽의 여러 왕족들과 결혼을 맺어왔다. 외교적으로 필수불가결의 사항이었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페르디난트에게 조피와의 인연을 끊으라고 말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황제 계승자의 배우자는 유럽의 왕실중 현재 군주로서 통치하고 있는 가문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지난날 군주로서 통치를 했던 가문의 여식과 결혼해야 한다는 점을 내세웠다. 조피 호테크의 가문은 그런 범주에 들지 않았다. 노황제 프란츠 요셉의 간섭 및 잔소리가 심하면 심할수록 페르디난트는 ‘삼촌도 참! 내가 내 와이프를 택하는데 웬 참견이십니까?’라면서 듣는 체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었다. 주위 사람들은 ‘저러다가 루돌프 황태자 꼴이 나지!’라면서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마침내 교황 레오13세와 러시아의 니콜라스 2세 황제(짜르), 그리도 독일의 빌헬름 2세 황제가 두 사람의 불화를 누그려 뜨려야 겠다고 생각하여 프란츠 요셉 황제에게 이구동성으로 ‘페르디난트가 하고 싶은 대로 놓아두세요!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잖습니까?’라고 진언했다. 마침내 루돌프 황태자가 죽은 이후 페르디난트가 정식으로 황제 계승자로 지명되자 노황제 프란츠 요셉의 기세가 꺾이었다. 프란츠 요셉은 페르디난트가 조피와 결혼은 하되 대신 그의 자녀들은 어느 누구도 다음번 황제 계승 서열에 들어갈수 없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또한 조피는 황제 계승자의 부인으로서 남편 페르디난트의 지위, 타이틀, 특권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예를 들면 페르디난트가 사람들을 접견하거나 무슨 모임에 참석할 경우, 조피는 페르디난트의 옆에 나란히 서있지 못하도록 했으며 황실의 마차도 타지 못하고 오페라극장이나 무도회에서 황실 좌석에 앉지도 못하게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셉 황제


페르디난트와 조피의 결혼식은 1900년 7월 1일 보헤미아의 라이히슈타트(Reichstadt: 현재의 Zakupy)에서 거행되었다. 관례로 보아서는 비엔나의 아우구스틴교회(Augustinerkirche)에서 거행되었어야 했다. 아우구스틴 교회는 과거 루돌프 황태자가 벨기에 공주 스테파니와 결혼했던 곳이며 그 이전에는 노황제 프란츠 요셉과 바바리아의 엘리자베트(씨씨)의 세기의 결혼식을 거행되었던 곳이다. 라이히슈타트의 결혼식에는 프란츠 요셉 황제가 참석하지 않았다. 페르디난트의 아버지와 형제들도 참석하지 않았다. 황실 사람으로서 유일하게 참석한 사람은 페르디난트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와 두 여동생이었다. 조피는 결혼후 호엔베르크의 공주(Fürstin von Hohenberg)라는 타이틀을 받았으며 호칭은 Ihre Durchlaucht라고 하여 영어로는 Her Majesty 보다 한 단계 낮은 것이었다. 그러다가 결혼하지 9년후 비로서 호엔베르크 대공비(Herzogin von Hohenberg)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호칭도 Ihre Hoheit(Your Highness)로 격상되었다. 이로써 조피의 지위는 상당히 높아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실에서는 대공비(공주들에 대한 호칭)의 뒤에 머물러야 했다. 그래서 만찬과 같은 황실 가족들의 모임이 있으면 조피는 남편 페르디난트로부터 멀리 떨어져 저 아래에 앉아 있어야 했다. 페르디난트와 조피는 4자녀를 두었다. 첫째는 조피와 같은 이름인 '호엔베르크의 조피(Sophie von Hohenberg: 1901-1973)공주였고 둘째는 ‘호엔베르크 공작 막시밀리안’(Maximilian von Hohenberg: 1902-1962)였으며 셋째는 ‘호엔베르크의 에른스트 공자’(Prinz Ernst von Hohenberg: 1904-1954)였고 넷째는 1908년 사산되었다. 아마 스트레쓰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추측이다.

 

페르디난트 대공의 부인 조피와 자녀들 (큰딸 조피, 큰 아들 막시밀리안)

 

1914년 다음번 황제 계승자인 페르디난트와 조피 부부는 제국의 영토인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Bosnia and Herzegovina)의 수도인 사라예보를 순방하였다.1914년 6월 28일 오전 11시경, 페르디난트와 조피는 사라예보의 총독관저에서 나와 전용차(1911년도 그래프-슈티프트 승용차)를 타고 오전의 수류탄 사고로 부상당한 사람들이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막 떠나려던 때에 젊은 보스니아인인 가브릴로 프린시프(Gavriloo Princip)가 쏜 총탄에 암살되었다. 가브릴로 프린시프는 보스니아의 극단적인 독립주의자들의 모임인 ‘검은 손’(The Black Hand: Tsrna Ruka)의 멤버였다. 실제로 이날 아침 네드옐코 카브리노비치(Nedjelko Cabrinovic)라는 청년이 페르디난트가 타고 다니는 승용차를 중앙경찰서 앞에서 목격하고 그 안에 페르디난트가 타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여 수류탄을 던진 일이 있다. 이 사고로 여러 명의 시민들이 부상을 당했다. 페르디난트와 조피는 오전 11시쯤 부상당한 시민들을 위문하기 위해 병원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가브릴로의 총은 먼저 조피의 복부를 맞추었다. 옆자리의 조피가 총소리와 함께 쓰러지자 페르디난트가 일어나 조피를 부축하려 할때 또 한발의 총알이 날아와 페르디난트의 목을 맞추었다. 사람들이 페르디난트에게 달려갔을 때에도 그는 숨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보좌관들은 페르디난트의 단추를 풀고 외투를 벗기려 했으나 상의는 단추가 단단히 채워져 있어서 당장 벗기지 못했다고 한다. 더구나 누가 가위를 가지고 다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상의를 가위로 절단할 수도 없었다. 더구나 페르디난트는 비대하지 않게 보이기 위해 상의 단추 속의 옷깃을 단단히 꿰매 놓았다고 한다. 범인 가블릴로 프린시프가 사용한 총은 브라우닝 380구경으로 실제로는 화력이 그다지 강하지 않은 것이지만 이날 페르디난트는 목의 동맥을 맞아 손을 쓸수가 없었다.

 

 페르디난트 대공과 조피 대공비를 암살한 가브릴로 프린스프

 

이날의 상황에 대하여 사라예보 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총알 한방이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목을 관통했고 다른 한 방은 조피의 복부를 관통했다...수행원들은 제국의 부부(페르디난트와 조피를 말함)가 총상을 입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승용차를 총독관저로 급히 후진하여 들어가려 했다. 대공(페르디난트를 말함)의 목으로부터 피가 가늘게 뿜어 나오더니 승용차의 발판에 올라타고 가던 하라흐(Harrach)백작의 뺨을 적셨다. 하라흐는 얼른 손수건을 꺼내 대공의 목에서 뿜어 나오는 피를 막으려 했다. 이 모습을 본 대공비(조피를 말함)가 복부에서 피가 흘러나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맙소사! 어찌된 일입니까?’라고 소리쳤다. 이 마지막 소리와 함께 대공비는 풀썩 의자에서 주저앉았다. 대공비의 얼굴은 남편의 무릎 사이에 파묻혔다..."

 

 페르디난트 대공과 조피 대공비가 암살당한 장소에 설치되어 있는 명판

 

당시의 순간을 다시 한번 목격자의 말에 의해 설명하면, 하라흐백작과 총독 포토리에크(Potoriek)는 대공비가 잠시 정신을 잃고 기절한줄 알았다고 한다. 다만 남편인 페르디난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린것 같았다고 한다. 페르디난트는 아직도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페르디난트는 꺼져가는 목소리로 조피를 보고 애타게 부르짖었다. ‘조페를! 조페를! 죽지 말아요! 아이들을 위해 살아야 하오!’(Sopherl! Sopherl! Sterbe nicht! Bleibe am Leben fur unsere Kinder!)였다. 조페를은 조피의 애칭이었다. 이말을 마친후 대공 자신도 푹 쓰러졌다. 쓰고 있던 둥근 모자가 벗겨져 떨어졌다. 모자에 달렸던 푸른 깃털을 승용차 안의 이곳저곳에 흩어졌다. 하라흐 백작이 대공의 상의 칼라는 움켜잡고 대공을 일으켜 세우려했다. 백작은 ‘저하! 많이 다치셨습니까?(Leinden Eure Kaiserliche Hoheit sehr?’라고 물어보았다. 대공은 분명하게 그러나 약한 소리로 '아무것도 아니야!(Es ist nichts)'라고 대답했다. 대공은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목소리는 점점 쇠약해졌다. 대공은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말을 대여섯번은 더 반복하여 말했다. 잠시후 대공은 의식을 잃고 목을 떨구었다. 승용차는 시청(Konak)을 향하여 급히 움직였다. 몇 명의 의사들이 달려 나와 대공에게 어떻게 손을 쓰려고 했지만 대공은 이미 시청에 도착하기 전에 숨을 거둔 상태였다. 대공비는 복무의 출혈로 총에 맞은지 얼마후 숨을 거둔 것으로 보였다..... 


 페르디난트 대공과 조피 대공비가 탔던 승용차. 비엔나의 군사박물관에 전시.


이 사건을 ‘사라예보의 암살’(Assassination in Sarajevo)이라고 부르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대하여 전쟁을 선포함으로서 1차 세계대전의 직접적인 화약이 된 사건이었다. 페르디난트와 조피의 시신은 남부오스트리아 봐하우(Wachau) 인근의 아르트슈테덴성(Schloss Artstetten)에 안치되었다. 아르트슈테텐성은 합스부르크의 여름 별장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한편 사라예보의 참사 장소에는 기념 명판이 붙어 있었으나 보스니아 전쟁때 파손되어 사라예보 시당국이 새로 만들어 설치했다. 명판에는 “FROM THIS PLACE on 28 JUNE 1914 GAVRILO PRINCIP ASSASSINATED THE HEIR TO THE AUSTRO-HUNGARIAN THRONE FRANZ FERDINAND AND HIS WIFE SOFIA"라고 적혀있다. 번역하면 ‘이 장소에서 1914년 6월 28일 가브릴로 프린시프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왕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그의 부인 소피아를 암살했다’이다. 이로써 페르디난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지 못하고 5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16년 프란츠 요셉 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셋째 동생의 장남인 카를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남부 오스트리아 봐하우 지역에 있는 아르트슈테텐성. 성안에 마련되어 있는 페르디난트 대공와 조피의 석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