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욕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
20세기의 오스트리아 제국은 프란츠 요제프(또는 프란츠 요셉) 황제로 대표된다. 합스부르크의 프란츠 요셉 황제는 오스트리아제국(나중에는 오스트로-헝가리제국)을 무려 68년 동안이나 통치했다. 프란츠 요셉(프란츠 요셉 1세) 황제는 숱한 에피소드를 지니고 있다. 황제 계승권자인 그의 아버지가 황제의 자리를 자의반 타의반으로 포기하는 바람에 18세라는 젊은 나이에 대제국의 황제가 된 일, 아름다운 엘리자베트(씨씨)와 세기적인 결혼을 한 일, 하나뿐인 아들 루돌프 황태자가 젊은 애인과 함께 자살한 일, 헝가리 국수주의자가 암살하려 했으나 다행히 살아남은 일, 사랑하는 엘리자베트 왕비가 스위스에서 어떤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자에게 살해 당한 일, 그리고 다음 황제 계승자인 조카 페르디난트가 사라예보에서 피살된 일, 이로 인하여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제1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된 일....이 모든 것이 프란츠 요셉 황제가 운명적으로 맞부딪쳐야 했던 영욕(榮辱)의 파노라마였다. 프란츠 요셉 1세! 그는 거인이었다. 그는 지금도 수많은 오스트리아 국민들의 향수를 불러 일으켜 주는 K.u.K(Kaiser und König) 시대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젊은 시절의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엘리자베트 황비
러시아 북극해에 있는 프란츠 요셉 랜드(Franz Josef Land) 군도는 1873년 프란츠 요셉 황제를 기념하여 붙인 지명이다. 뉴질랜드 남섬에 있는 ‘프란츠 요셉 빙하지대’도 프란츠 요셉 황제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뉴질랜드에는 프란츠 요셉 마을과 프란츠 요셉 하이웨이도 있다. 1872년 프란츠 요셉 황제는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에 있던 클루즈-나포카(Cluj-Napoka)에 ‘프란츠 요셉 대학교’를 설립했다. 이 대학교는 현재 루마니아의 ‘체게드 대학교’(당시에는 Universitatea Francisc Iosif: University of Szeged)이다. 프란츠 요셉 황제의 호칭은 다음과 같다. 오스트리아 황제,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 롬바르디-베네치아(Lombardy-Venetia), 달마티아(Dalmatia), 크로아티아(Croatia), 슬라보니아(Slavonia), 갈리시아(Galicia), 로도메리아(Lodomeria), 일리리아(Illyria)의 왕; 예루살렘의 왕; 오스트리아 대공; 투스카니 및 크라코우 공작; 로렌인, 잘츠부르크, 스티리아(Syria), 카린티아(Carinthia), 카르니올라(Carniola), 부코비나(Bujhvina)의 공작; 트란실바니아(Transylvania) 대공; 모라비아(Moravia) 총독; 상하 실레지아(Silesia), 모데나(Modena), 파르마(Parma), 피아센짜(Piacenza) 및 구아스탈라(Guastalla), 아우슈비츠, 자토르(Zator) 및 테셴(Teschen), 프리울리(Friuli), 라구사(Ragusa) 및 자라(Zara: Zadar)의 공작; 합스부르크 및 티롤, 키부르크(Kyburg), 고리지아(Gorizia) 및 그라디스카(Fradisca)의 왕자 백작, 트렌트(Trent: Trento) 및 브릭센(Brixen) 공자, 상하 루사티아(Lusatia) 및 이스트리아(Istria) 총독; 호에넴스(Hohenems), 펠트키르흐(Feldkirch), 브레겐츠(Bregenz), 존넨베르크(Sonnenberg)의 백작; 트리에스테, 카타로(Cattaro: Kotor) 및 빈디츠 마르흐(Windic March)의 영주; 세르비아의 그랜드 보이보드(Voivode) 등이다. 그러나 통상적으로는 오스트리아 황제, 헝가리의 로마교황청 왕(Apostolic Kong), 보헤미아 왕이라는 세가지 타이틀을 사용하고 있다.
프란츠 요제프와 어머니 조피 대공비
프란츠 요셉은 1830년 8월 18일 비엔나의 쇤브룬 궁전에서 아버지인 프란츠 카를(Franz Karl) 대공(1802-1878)과 어머니인 바바리아의 조피(Sophie) 공주(1805-1872)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프란츠 요셉은 가족들 사이에서 프란츨(Franzl)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후사가 없는 삼촌 페르디난트 황제가 심신이 약해져서 더 이상 황제 노릇을 못하겠다고 하며 다음번 황제 계승자로 동생인 프란츠 카를(프란츠 요셉의 아버지)에게 양위를 희망하였으나 프란츠 카를도 제국의 황제 자리에 아무런 욕심이 없어서 사양하였다. 이에 따라 프란츠 카를의 아들인 젊은 프란츠 요셉이 황제 계승자로 지명되었다. 프란츠 요셉의 어머니인 조피(Sophie)는 장래의 황제인 아들 프란츠 요셉이 책임 있고 헌신적이며 근면한 황제가 되도록 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기울여 양육하였다. 프란츠 요셉은 13세 때부터 오스트리아 육군 대령으로 제국 군대에 복무하였다. 군인으로서의 자세가 몸에 밴 그는 그로부터 거의 70년에 걸치는 통치 기간중 주로 군복을 입고 공사를 주관하였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대단히 검소하였다. 그래서 군복을 입어도 대장군의 화려한 군복이 아닌 하급 장교의 군복을 입었다. 그리고 호프부르크의 침실에서는 군대의 야전침대와 같은 소박한 침대를 사용했다. 아무튼 프란츠 요셉은 군대생활의 영향으로 매사에 근면과 성실 및 책임을 우선으로 하는 철저한 군인정신으로 일관하였다. 어쩌면 이런 군인 습성이 자유분방한 생활에 젖어있던 엘리자베트 왕비에게 실망을 안겨 주었는지도 모른다.
프란츠 요제프의 헝가리 국왕 대관식
프란츠 요셉에게는 세명의 남동생이 있었다. 바로 아래 동생은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Ferdinand Maximiliam: 1832-1867)으로 나중에 멕시코 황제가 되었으나 불행하게도 멕시코 혁명중에 ‘비바 멕시코’를 외치는 혁명도당들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막시밀리안은 비엔나에 있을 때 형인 프란츠 요셉을 가장 열심히 추종하고 도와주었다. 둘때 동생은 카를 루드비히(Karl Ludwig: 1933-1896)였다. 그의 아들이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한 유명한 페르디난트였다. 잘 아는 대로 프란츠 요셉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될 사람은 프란츠 요셉의 유일한 아들인 루돌프였다. 하지만 루돌프가 마이엘링에서 자살하는 바람에 다음 황제 계승권은 프란츠 요셉의 남동생들 중에서 후보자를 지명해야 했다. 바로 아래 동생인 막시밀리안이 당연히 영순위였으나 그럴 기회도 갖지 못하고 멕시코에서 반도들에게 총살당하여 세상을 떠났다. 그러므로 당연히 둘째 동생 카를 루드비히가 다음 황제 계승자가 되어야 할 입장이었다. 그러나 카를 루드비히는 황제에 오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간단히 말해서 ‘지금도 편한데 황제는 해서 뭐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황제 계승을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그 배경에는 여러 얘기가 있다. 카를 루드비히가 이지-고잉의 비교적 무능한 사람이기 때문에 황제가 될 자격이 안되어서 미리 포기했다는 얘기가 가장 신빙성이 있다. 그래서 카를 루드비히의 장남 페르디난트가 다음 황제 계승자로 지명되었다. 다만, 페르디난트는 이른바 사랑을 위해 평민과 결혼하는 바람에 그의 자녀들 중에 누구도 황태자가 될수 없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일이 이상한 방향으로 돌아가느라고 페르디난트가 부인과 함께 사라예보에서 보스니아 국수주의자가 쏜 총탄에 요단강을 건너게 되었다. 그리하여 프란츠 요셉의 셋째 동생인 루드비히 빅토르(Ludwig Viktor)에게 차례가 갔지만 이 양반 역시 나이도 상당히 많은 터에 황제를 맡아하기에는 자격미달이어서 자기가 무슨 양녕대군이라고 자진 사퇴하고 대신 그의 아들 카를이 황제 계승자로 지명되도록 했다. 아무튼 이름들도 서로 비슷하고 상당히 복잡한 관계들이라서 혼돈되겠지만 자꾸 읽다보면 서로의 관계를 슬며시 파악할수 있으므로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희망을 가지기 바란다. 사족: 프란츠 요셉에게는 여동생이 하나 더 있었다. 마리아 안나(Maria Anna)였다. 하지만 4살 때에 세상을 떠났다.
프란츠 요제프의 동생인 막시밀리안. 막시밀리안 1세로서 멕시코 황제였다.
[엘리자베트 왕비]
프란츠 요셉은 약관인 18세에 제국의 황제로 등극했다. 어머니인 조피(Sophie)대공비가 정사에 이모저모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프란츠 요셉은 마치 마마보이와 같은 입장이었다. 어깨에 힘을 잔뜩 주는 어머니가 마치 조선말기의 조대비처럼 청년황제 프란츠 요셉 뒤에서 이래라 저래라 했다. 수렴청정하던 어머니는 아들에게 적당한 배필을 마련해주어 후사를 잇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누가 좋을까? 바바리아의 자기 친정 쪽에서 선택하면 안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동생인 루도비카(Ludovika)의 큰 딸 헬레네(Helene)를 마음에 두었다. 조피는 조카딸을 며느리로 들이면 무조건 고분고분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젊은 황제는 계획에도 없는 엘리자베트(씨씨)를 베터하프로 선정했다. 엘리자베트는 헬레네(네네)의 동생이었다. 이로써 대제국의 수레바퀴는 또 한번 커다란 선회를 하게 되었다. 젊은 황제 프란츠 요셉이 바바리아의 엘리자베트(씨씨)와 결혼하게 된 사연 등등에 대하여는 제발 바로 전편의 ‘비운의 왕비 엘리자베트’를 참고하기 바란다. 그보다도 프란츠 요셉이 황제가 되던 당시의 국제 정치 상황을 약간이나마 짚어 보는 것이 더 참고가 될것이라고 생각한다.
씨씨라는 애칭의 엘리자베트 황비
[메테르니히 재상]
프란츠 요셉이 황제로서 즉위하던 해인 1848년은 유럽에서 자유혁명의 불길에 치솟던 때였다. 프랑스에서 불씨를 지펴주었고시실리에서 촉발된 자유혁명은 영국과 러시아 등 몇나라만을 제외하고는 유럽의 많은 국가에 상륙하여 도처에서 ‘자유, 평등, 해방’을 외치는 혁명이 일어났다. 역사는 이를 ‘국가들의 봄’(Spring of Nations) 또는 ‘혁명의 해’(Year of Revolutions)라고 기록했다. 프랑스에서의 자유혁명이 대표적이었다. 1848년 프랑스혁명은 루이 필립의 왕정을 종식시키고 제2공화국의 기치를 들게 한 것이었다. 실상, 자유혁명의 뒤에는 ‘일자리를 달라! 빵을 달라!’는 민중들의 요구가 있었다. 민중들의 눈에는 왕족과 귀족들의 부귀사치가 죽도록 밉게 비쳤다. 그런데도 왕족이나 귀족들은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될 것 아닌가?'라면서 허튼소리만 내질렀다. 유럽의 자유혁명은 왕정에 반대하는 운동이었다. 프랑스혁명은 인접 오스트리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로 인하여 1848년 초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Klemens von Metternich: 1773-1859) 재상이 사임하였다. 다음 황제 계승자인 젊은 프란츠 요셉은 황제가 되기 전인 그해 4월 보헤미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보헤미아는 오스트리아제국의 영토였다. 프란츠 요셉은 보헤미아총독에 취임하기 전에 사르디니아와 오스트리아의 전투가 발발하여 전선으로 배속되었다. 젊은 프란츠 요셉은 5월 초 이탈리아에서의 산타 루치아 전투에 처음 참가하였다. 대단한 고전이었다. 프란츠 요셉으로서는 실전 참가가 처음이었지만 매우 침착하고 위엄 있게 전투를 이끌었다고 한다. 한편, 당시 비엔나의 상황도 자유주의 혁명 때문에 상당히 어수선했다. 페르디난트 1세 황제를 포함한 황실 사람들은 안전을 위해 비엔나를 떠나 티롤지방의 인스부르크로 도피하였다. 다음번 황제 계승자의 리스트에 들어 있던 프란츠 요셉도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안된다는 황실의 생각에 따라 인스부르크로 합류하였다. 사실상 프란츠 요셉은 이곳에서 장차 부인이 될 엘리자베트(씨씨)를 처음 만났다. 그 때 엘리자베트는 10세의 소녀였다. 엘리자베트는 이모의 딸, 즉 이종사촌이었다. 아직도 어린 두 사람의 만남은 그저 친척으로서의 만남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다가 6년후에 바드 이슐에서 다시 만나 약혼까지 하게 된 것이다.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수상
[올로무츠의 선포]
1848년 7월 오스트리아는 쿠스토짜(Custoza)에서 있었던 이탈리아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페르디난트 1세 황제(사라예보에서 피살된 페르디난트가 아니고 프란츠 요셉의 삼촌)를 포함한 황실 사람들은 이제는 안전하다고 생각하여 인스부르크에서 비엔나로 돌아왔다. 그러나 비엔나에서는 자유혁명 시위가 시들지 않고 있었다. 두달후인 9월, 황제를 비롯한 황실 사람들은 다시 비엔나를 떠나야 했다. 이번에는 모라비아(현재 체코공화국 동부지)의 올뮈츠(Olmuetz: Olomouc)로 갔다. 당시 모라비아도 오스트리아 제국의 통지배아래 있었다. 이때쯤해서 합스부르크 황실에 영향력이 큰 빈디슈그래츠(Windischgraetz) 장군은 제국을 위하여 어서 속히 일 잘하는 새로운 황제가 등극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프란츠 요셉의 황제 등극을 적극 추진하였다. 당시 거의 모든 사람들은 금상(今上)인 페르디난트 1세 황제가 고집만 세고 정신적으로도 문제가 있어서 위대한 제국의 번영을 위해 부적당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황제, 즉 모든 일에 열성적인 젊은 프란츠 요셉이 속히 황제의 위에 올라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1848년 12월 2일 피난지인 올뮈츠에서 프란츠 요셉이 무능한 삼촌인 페르디난트 1세의 뒤를 이어 황제의 위에 오른다고 선포되었다.
올로무츠. 체코의 모라바 강안에 위치한 고도이다.
[노바라 전투]
젊은 황제가 처음 한 일은 새로 임명된 재상 펠릭스 슈봐르첸버그(Felix Schwarzenberg: 1800-1852)공자의 자문을 받아 새로운 헌법을 공포한 것이었다. 그때까지의 헌법은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헌법에 의해 구성된 정부의 조치를 존중하고 따라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프란츠 요셉은 이것 가지고는 강력한 제국을 통치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헌법은 제국의 앞날을 위해 전제정치를 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었다. 이와 함께 프란츠 요셉은 헝가리와의 일전을 감수하지 않을수 없다고 생각했다. 헝가리가 계속하여 제국에 반기를 들고 합스부르크의 권위에 도전하였기 때문이었다. 한편, 사르디니아의 샤를르 알베르(Charles Albert) 왕은 지난해에(1848) 사르디니아를 지원하던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것을 설욕하고 나아가 오스트리아 제국을 위협하기 위해 헝가리에서 대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때 등장한 인물이 보헤미아 출신의 요셉 라데츠키(Joseph Radetzky: 1766-1858) 장군이었다. 라데츠키 장군은 노바라(Novara)전투에서 샤를르 알베르 왕이 이끄는 사르디니아 군을 거의 완전히 섬멸했다. 이때의 승리를 기념한 것이 요한 슈트라우스1세가 작곡한 유명한 ‘라데츠키 행진곡’이다. 황제로 등극한지 얼마 안되는 프란츠 요셉으로서는 라데츠키 장군이야말로 구국의 영웅이었다. 이로써 샤를르 알베르 왕은 왕위에서 물러나고 오스트리아와 평화조약을 체결해야 했다.
노바라 전투의 라데츠키 장군
[재상 슈봐르첸베르크 공자]
사르디니아는 그렇다고 치고 헝가리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못했다. 실로 헝가리 혁명주의자들의 세력은 기세등등하였다. 오스트리아로서는 이들과 접전을 벌여도 승산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프란츠 요셉은 러시아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결국 헝가리의 혁명적 저항은 1849년 여름, 러시아의 지원으로 평정되었다. 외부로부터의 걱정이 사라지자 프란츠 요셉은 헌법 개정 문제를 속히 타결하고 싶었다. 그러나 의회는 요지부동이었다. 의회는 국민의 자유를 더욱 보장하는 헌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1849년 헌법은 통과되지 않았다. 대신, 젊은 황제 프란츠 요셉은 내무장관 알렉산더 바흐(Alexander Bach)의 가이드를 받아 절대 중앙집권적 전제주의 정치에 대한 기초를 닦기 시작했다. 한편 프란츠 요셉 황제의 재상인 펠릭스 슈봐르첸버그 공자는 당시 프러시아가 오스트리아만 제외하고 독일연합을 만들어 유럽에서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음모를 저지하는 큰 역할을 맡아 오스트리아 제국의 위상을 한층 높였다. 그러나 슈봐르첸버그 재상은 안타깝게도 프란츠 요셉이 황제에 오른지 4년후인 1852년 세상을 떠났다. 황제는 슈봐르첸베르크를 대신할 만한 후임수상을 찾기 어려워 재상의 업무까지 맡아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오스트리아제국에서의 전제주의 체제가 더욱 다져졌다.
펠릭스 슈봐르첸버그 수상
[보티프 교회]
1853년 2월 18일, 프란츠 요셉이 헝가리 국수주의자인 야노스 리베니이(Janos Lybenyi)의 암살기도로부터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사건이 일어났다. 이날 프란츠 요셉은 경호 장교인 오도넬(O'Donnell) 백작등과 함께 비엔나성곽에 연결되는 캐른트너문의 건축현장을 시찰하고 있었다. 현재의 비엔나대학교 인근이었다. 그때 갑자기 야노스 리베니이라는 청년이 황제의 뒤로부터 달려들어 나이프로 황제의 목을 내려치려했다. 이날도 프란츠 요셉은 군복을 입고 있었다. 황제가 입고 있던 군복의 컬러는 다른 사람들의 것 보다 조금 높고 단단했다. 그래서 칼로 내려 찔렀지만 컬러를 뚫지 못했다. 하지만 뒷덜미에 상처를 입고 피를 흘렸다. 옆에서 수행하던 오도넬 백작이 범인을 덮쳐 쓰러트려 다시는 칼을 쓰지 못하도록 제압했다. 범인은 곧 체포되었다. 아일랜드 출신의 오도넬은 그때까지만해도 명목상의 아일랜드 백작이었으나 합스부르크 제국의 백작이라는 작위를 정식으로 받았고 제국의 최고 훈장과 함께 새로운 문장(紋章)을 받았다. 오도넬 백작이 받은 문장은 황공스럽게도 합스부르크를 상징하는 쌍두 독수리를 넣은 것으로 나중에 오도넬 백작이 살았던 잘츠부르크의 미라벨공원 일각의 저택현관에 높이 걸어놓았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 암살시도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근처에 있던 푸줏간 주인 요셉 에텐라이히(Joseph Ettenreich)도 범인을 제압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로써 그의 신분은 프란츠 요셉으로부터 귀족으로 격상되어 이름도 요셉 폰 에텐라이히(Joseph von Ettenreich)으로 바뀌었다. 현재 비엔나 11구의 에텐라이히가쎄(Etteneirchgasse)는 황제를 구한 푸줏간 주인을 기념하여 붙인 거리이름이다. 범인 리베니이는 사형선고를 받고 짐머링 하이데(Simmering Haide)라는 곳에서 처형되었다. 짐머링 하이데는 나중에 제국의 비행장으로 사용된 넓은 터전이다. 황제에 대한 암살미수가 있은후 황제의 동생인 막시밀리안 대공은 황제의 무사함을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 그 장소에 교회를 지어 봉헌키로 했다. 막시밀리안은 유럽의 여러 국가에 있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사람들에게 지원하여 줄것을 요청하였다. 이렇게하여 비엔나대학교 옆 알저그룬트(Alsergrund) 구에 현재의 보티프키르헤(Votifkirche)가 완공되었다. 보티프라는 단어는 ‘봉헌’이라는 뜻이다. 보티프키르헤(봉헌교회)는 26년의 건설기간을 거쳐 1879년에 봉헌되었다.
보티프키르헤
[씨씨에 대한 회상]
젊은 프란츠 요셉 황제의 권위는 날로 확고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아직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어머니 조피(Sophie)대공비가 있었다. 조피는 아들 프란츠 요셉이 어서 결혼하여 후사를 잇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프란츠 요셉이 바바리아의 엘리자베트(씨씨)와 결혼하게된 내용은 재미가 있으므로 설명코자 한다. 조피는 자기의 여동생인 루도비카(Ludovika)의 큰딸 헬레네(애칭으로 Nene라고 함)가 황제의 배필로서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헬레네는 프란츠 요셉보다 네 살 아래였다. 그러나 황제는 헬레네의 동생인 엘리자베트(씨씨)와 결혼하겠다고 나섰다. 그때 씨씨는 16세였다. 어머니 조피는 못마땅했지만 어쩔수 없었다. 그리하여 1854년 프란츠 요셉과 씨씨는 비엔나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생활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 결혼 이후 씨씨의 생애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17세의 어린 나이로 제국의 왕비가 된 씨씨는 엄격하고 완고한 궁중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여 황실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지 못했다. 시어머니 겸 이모인 조피의 못마땅한 간섭이 제일 괴로웠다. 첫 딸인 조피(Sophie: 할머니의 이름을 따서 조피라고 하였음)는 아주 어릴때에 세상을 떠났다. 외아들인 루돌프는 마이엘링에서 마리아라는 젊은 애인과 동반자살을 하였다. 그리고 씨씨 자신은 스위스에서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자의 칼에 찔려 죽임을 당했다. 겉으로는 엄격하고 완고했던 프란츠 요셉은 실상 이런 여러 사건으로 인하여 회복하기 힘든 깊은 상처를 입었다. 노년의 프란츠 요셉은 장래 황제 계승자인 카를의 부인 지타(Zita)에게 ‘내 인생에 있어서 씨씨가 얼마나 중요하였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프란츠 요셉은 ‘내가 얼마나 씨씨를 사랑하였는지는 씨씨도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고 말하기도 했다.
영화 '씨씨'. 씨씨에게 청혼하는 프란츠 요제프 황제. 씨씨 역에 로미 슈나이더, 프란츠 요제프에 칼 하인츠 뵘.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왼쪽에 있는 바바리아의 헬렌(네네) 공주와 결혼할 예정이었으나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헬렌의 동생인 엘리자베트(씨씨) 공주에게 청혼하였다.
[황제의 애인 카타리나 슈라트]
1850년대는 프란츠 요셉에게 여러 시련을 안겨준 시기였다. 어떻게 보면 오스트리아 제국의 외교 정책이 실패를 거듭한 시기였다고 할수 있다. 1854-56년에 크리미아 전쟁이 일어났고 러시아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859년에는 오스트리아-사르디니아 전쟁이 일어났다. 1860년대는 더 어려웠다. 1866년에 오스트리아-프러시아 전쟁이 일어났고 이로써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라는 2중 체제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왕비 엘리자베트(씨씨)는 비엔나를 떠나 영국과 아일랜드 등을 여행하기만 했다. 황제는 외로웠다. 마침 인기 여배우 카트리나 슈라트(Katharina Schratt)를 알게 되어 황제는 왕비의 공백을 메꾸었다. 씨씨는 두 사람의 관계를 묵인하였다고 한다. 황제는 카타리나 슈라트를 위해 바드 이슐(Bad Ischl)에 빌라를 건축하고 빌라 슈라트(Villa Schratt)라고 이름 붙였다.
바드 이슐의 빌라 슈라트
[노황제의 죽음]
프란츠 요셉은 1916년 11월 21일, 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향년 86세로 세상을 떠났다. 황제로서의 통치기간은 68년이었다. 그로부터 2년후 1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제국은 소멸되었다. 당시 프란츠 요셉의 재임기간은 프랑스의 루이 14세, 리히텐슈타인의 요한네스 2세에 이어 유럽에서 세 번째로 오랜 것이었다. 프란츠 요셉의 장례식은 11월 30일 쇤브룬궁전을 출발하여 호프부르크를 거쳐 슈테판스돔에서 거행되었다. 그의 시신은 관례에 따라 카푸친교회의 지하에 있는 카이저그루프트(Kaisergruft)에 안치되었다. 그의 관 양 옆에는 엘리자베트 황비, 그리고 일찍 세상을 떠난 루돌프 황태자의 관이 놓여 있다.
카이저그루프트의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의 관, 왼쪽은 엘리자베트 황비, 오른쪽은 루돌프 황태자의 관
[음악] 요한 슈트라우스의 '황제 왈츠'(Kaiserwalz)는 프란츠 요셉 황제가 요한 슈트라우스에게 오스트리아제국 훈장을 수여한 기념으로 프란츠 요셉 황제에게 헌정한 곡이다.
[영화] Meyerling이라는 영화에서 명우 제임스 메이슨이 프란츠 요셉 황제 역을 맡아했다. 1956년 작품인 Die junge Kaiserin(젊은 왕비)과 1957년 작품인 Schicksalsjahre einer Kaiserin(왕비의 운명)에서는 로미 슈나이더(Romy Schneiner)의 상대역으로 칼하인츠 뵘(Karlheinz Boehm)이 젊은 프란츠 요셉 황제 역을 맡았다.
쇤브룬궁전을 떠나는 프란츠 요셉 황제의 운구행렬
슈테판성당에서의 영결미사를 마치고 퇴장하는 운구행렬
슈테판성당을 떠나서 카푸치너키르헤로 향하는 조문 행렬. 맨 앞에 칼 황제, 오토 황태자, 치타 황비, 그 뒤로 바이에른의 루드비히 3세 국왕, 불가리아의 페르디난트 국왕, 독일 황태자, 작센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국왕, 터키 왕위계승자, 스웨덴 왕 등
'합스부르크 > 합스부르크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 프란시스 2세(Francis II) (0) | 2008.01.23 |
---|---|
조카에게 양위한 페르디난트 1세 (Ferdinand I) (0) | 2008.01.23 |
루돌프 황태자의 부인 스테파니(Stephanie) (0) | 2008.01.16 |
사라예보에서 숨진 비운의 페르디난트 (Ferdinand) (0) | 2008.01.16 |
페르디난트와 함께 숨진 비운의 조피 (Sophie) (0) | 2008.0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