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제국 최후의 황제 카를 (샤를르 1세)
헝가리 왕으로서는 카를 4세
[복자 카를 1세]
합스부르크 왕조 최후의 황제, 즉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제는 카를 1세이다. 사실상으로는 오스트리아 제국 및 헝가리와 보헤미아 왕국의 마지막 군주이다. 카를 1세의 공식 타이틀은 오스트리아 황제 겸 로마 교황청 임명의 헝가리 왕이다. 이를 Apostolic King이라고 칭한다. '사도왕'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이지만 따로 오스트리아 대공(Archduke)이라고 부르며 여기에 덧 붙여서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왕이라고 부른다. 카를 1세의 별칭은 ‘복자 카를 1세’(Blessed Charles I)이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로마 가톨릭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신성로마제국의 여러 황제가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인 것을 보면 알수 있다. 그래서 여러 명의 합스부루크 출신 군주들이 복자의 반열에 올랐으나 카를의 경우는 좀 특이하다. 신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교회와 사회를 위해 많은 기여를 했기 때문에 200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복자(福者)에 시복되었으며 ‘복자 카를 1세’라고 불리게 되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카를 1세의 축일로서 10월 21일을 선포하였다. 카를의 결혼기념일이다. 카를 1세는 1887년 8월 17일 페르젠보이크(Persenbeug)에서 오토 프란츠(Otto Franz)대공과 작소니(Saxony) 왕가의 마리아 요제파(Maria Josepha)공주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1911년 부르봉-파르마 왕조의 지타(Zita) 공주와 결혼하였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마지막 황제 샤를르 1세(카를 1세) - 헝가리 국왕으로서는 샤를르(카를) 4세
[오스트로-헝가리 제국 마지막 황제]
카를 1세의 풀 네임은 대개의 황족들이 그렇듯 상당히 길다. 카를 프란츠 요셉 루드비히 후베르트 게오르그 마리아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Karl Franz Josef Ludwig Hubert Georg Maria von Habsburg-Lothringen)이다. 이렇듯 긴 이름을 다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족보용이라고 보면 된다. 이름의 말미에서 볼수 있듯 카를 1세는 합스부르크-로트링겐(로레인) 지파에 속한다. 합스부르크 가문에는 크게 네 개의 지파가 있다. 우리 식으로 전주 이씨 무슨 파에 속하여 있다고 하는 것과 같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군주들은 마리아 테레자 여제(女帝) 이래 합스부르크-로트링겐 분파에서 배출되었다. 마리아 테레자 여제의 남편이 로트링겐(로레인)의 프란시스였기 때문이다. 카를은 오스트리아 황제로서는 카를 1세이지만(또는 프랑스식으로 샤를르 1세) 헝가리 왕으로서는 카를(샤를르) 4세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오스트리아 황제 카를 1세와 헝가리 왕 카를 4세는 같은 사람이다. 아무튼 몇세 몇세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복잡하므로 여기에서는 그냥 카를이라고 표현한다. 독일어로는 Karl (또는 Carl)이지만 역사문서에의 기록은 보통 Charles(샤를르)라고 적는다. 프랑스 문화의 여파이다. 카를은 프란츠 요셉 황제가 세상을 떠난 1916년에 오스트리아 황제 겸 헝가리 왕으로 즉위하여 겨우 2년동안 재위하다가 1차대전후 오스트리아 제국이 혁명에 의해 공화국으로 탈바꿈하고 헝가리는 나름대로 독립왕국으로 갈길을 가는 바람에 1918년 왕좌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던 인물이었다. 카를은 나머지 생애를 외국에서 추방 생활을 하며 합스부르크 왕조의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22년, 왕좌에서 물러난지 4년만에 대서양의 고도 마데이라(Madeira)에서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68년이나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를 통치한 프란츠 요제프 황제
[난항의 카를 외교]
카를은 1887년 남부 오스트리아 페르젠보이크(Persenbeug) 성에서 태어났다. 중요한 것은 카를이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조카라는 것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뒤를 이어 다음 군주 계승자였던 삼촌 페르디난트 대공이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보스니아 세르브(Bosnia Serb) 학생이 쏜 한 발의 총탄에 비운의 최후를 맞이한 것은 카를의 운명을 크게 바꾼 사건이었다. 페르디난트 황제계승자의 피살로 유럽에서는 세계 제1차 대전이라는 전대미문의 역사적 사건이 촉발되었으며 당시 27세였던 카를이 제국의 다음 황위 계승자가 되는 변화가 되었다. 페르디난트 대공의 사후, 카를은 오스트로-헝가리 육군대원수(Generalfeldmarschall)가 되었으며 2년후에는 오스트로-헝가리 군의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이어 카를은 1916년 11월, 68년이나 오스트리아 제국을 통치한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서거와 함께 합스부르크 왕조를 이끌어가는 새로운 오스트리아 황제로 즉위하였고 그해 12월 30일에는 관례에 따라 헝가리 왕으로 즉위하였다.
지타 황비
오토가 제국의 황제로 즉위할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차 대전의 험난한 와중에 휩싸여있었다. 1차 대전의 중심축(Central Powers)에 있던 오스트리아 제국은 패전의 기색이 짙어지자 연합국들과 평화협상을 제의하지 않을수 없는 처지였다. 카를은 최대 상대국인 프랑스와의 평화협정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비밀리에 프랑스와의 평화협상을 추진하였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외무상인 오토카르 체르닌(Ottokar Czernin)조차 모르게 진행하였다. 체르닌은 유일한 동맹국인 독일과 협력하여 대전국인 프랑스, 영국, 미국, 이탈리아 등과 일반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데에만 마음을 쏟고 있었다. 그러한 때에 카를이 체르닌과는 별도로 프랑스와 단독 평화협상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카를은 벨기에에 있는 처형(妻兄) 식스투스(Sixtus)를 프랑스와의 평화협상 밀사로 활용하였다. 그러나 세상에 비밀은 없었다. 1918년 4월에 오토가 프랑스와 비밀 평화협상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이 흘러나오자 당황한 카를은 일단 그런 일이 없다고 부인하였다. 다른 나라들은 제켜두고 프랑스만 대상으로 평화협정을 체결한다는 것은 그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편에 서서 전쟁을 수행하던 독일제국과 오토만 제국에게 큰 낭패를 던져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얼마후 프랑스의 조르즈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 수상이 그런 평화협정이 진행되고 있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카를의 밀서를 발표함으로서 카를의 입장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유럽은 또 다시 혼돈 속에 빠져 들게 되었다. 얼마후에는 오스트리아 외무상인 체르닌이 사임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전보다 더 독일과의 연합에 의존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앞날은 점점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끌려 들어가게 되었다.
1916년 샤를르(카를)이 헝가리 왕국의 국왕으로서 헝가리의 부다에서 대관식을 갖는 장면
[제1차 대전에는 Entente Powers라고 하여 프랑스, 영국(1915년부터), 이탈리아(1915년부터), 미국(1917년부터), 러시아(1914년부터 참전하였으나 1917년 혁명으로 탈퇴)의 5대 강국이 버티고 있었으며 당사국 측은 Central Powers라고 하여 오스트로-헝가리아 제국, 독일 제국, 오토만 제국의 3개 제국이 주축을 이루었다. 4년동안 계속된 1차 대전으로 4천만명이 피해를 입었으며 그중 사망자는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하여 2천만명에 이른다. 1차대전의 결과로 오스트로-헝가리제국, 독일제국, 오토만 제국, 제정러시아가 붕괴되었다.]
1차 대전을 상징하는 포스터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1차 대전도 어느덧 4년째로 접어들었다. 거의 1천만명에 이르는 병사들이 전쟁터에서 쓰러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운명은 거친 파도 속의 난파선과 같았다. 그러한 때에 미국 대통령 우드로우 윌슨(Woodrow Wilson)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였다. 세계 어느 민족이든지 민족의 생존을 위해 독립하여 살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윌슨 대통령은 카를에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하여 있는 여러 다른 민족들이 자치(自治)토록 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카를로서 이같은 요구를 수락하지 않을수 없었다. 카를은 제국의회를 소집하고 제국내의 각각 다른 민족들이 별도의 자치권을 갖는 연맹을 수립토록 허용하였다. 다만, 자치를 하더라도 오스트리아 제국이라는 커다란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전제였다. 그러나 이같은 조치는 카를로서는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진전되었다. 제국내의 별개 민족들은 하루 속히 비엔나로부터 독립코자 원했다. 체코, 슬로박, 남부 슬라브 등이 즉각적으로 자치권을 요청하였다. 이어 세르비아를 비롯하여 다른 민족들도 독립을 선포하였다. 이제 제국은 더 이상 존재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1918년 10월 31일 마침내 헝가리마저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한 것이었다. 헝가리의 독립 선언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종말을 고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카를의 통치가 미치는 지역은 다뉴브 연안 지방과 알프스 지역만이 남게 되었다. 독일-오스트리아 의회도 카를에게 등을 돌렸다. 민중들은 밤낮으로 공화국으로의 전환을 요구하였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마지막 수상인 하인리히 람마슈(Heinrich Lammasch)는 카를에게 이제 결단을 내릴 때라고 권고하였다.
오스트리아제국 마지막 수상인 하인리히 람마슈. 샤를르(카를) 황제의 폐위를 권고해야 했다.
1918년 11월 11일, 이날은 1차 대전이 종전된 날이었다. 카를은 대단히 고심하여 작성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성명서의 골자는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국가의 형태가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지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는 것이었다. 이어 카를은 ‘앞으로 모든 국가 행정에 참여함을 포기하겠다.’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모든 공직자들은 자기에 대한 충성 서약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밝혔다. 카를이 성명서를 발표한 다음날 오스트리아 임시정부는 독립 공화국임을 선포하였다. 며칠후인 11월 13일에는 헝가리에 대하여도 같은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카를의 성명서의 골자는 왕위를 물러난다는 것에 대한 것이었지만 성명서에는 퇴위(Abdikation: Abdication)라는 단어는 하나도 없었다.
샤를르(카를)의 아버지와 어머니. 아버지는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조카인 오토 프란츠이며 어머니는 작소니의 마리아 요제파 공주이다.
[헝가리의 불발탄]
오스트리아에 공화 정부가 수립되고 헝가리에는 임시 왕정이 구성되자 카를은 더 이상 호프부르크와 쇤브룬의 주인으로 행세할수 없게 되었다. 카를은 가족을 이끌고 스위스로 망명의 길을 떠나야 했다. 카를은 추방생활을 하면서도 언젠가 독립된 오스트리아의 왕관을 다시 찾겠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1919년 오스트리아 의회는 합스부르크의 멤버들이 왕위회복을 기도한다거나 또는 왕족의 신분을 버리고 평민이 되지 않는 한 오스트리아 영토에서 영원히 추방한다는 법을 통과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위스의 카를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에서의 합스부르크 왕권회복을 위해 은밀한 행동을 하였다. 카를은 특히 헝가리 국수주의자들의 지지를 업고 1921년 두 번에 걸쳐 헝가리 왕위의 복위를 정식으로 요구하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아쨋든 카를은 명목상이지만 헝가리 왕의 신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카를의 복귀 요청은 성사되지 못했다. 헝가리는 1919년(우리나라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힘입어 삼일 독립운동을 펼쳤던 해와 같은 해) 독립을 선포한 이래 공화제로 가지 못하고 새로운 체제로 가기 전까지 임시로 별도의 섭정왕을 두었다. 미클로스 호르티(Miklos Horthy)였다. 섭정왕 미클로스는 겉으로는 카를의 헝가리 왕위복권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행동은 그렇지 못했다. 카를의 왕위복권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미클로스의 지지를 받지 못한 것이었다. 카를은 황비 지타와 함께 헝가리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대서양의 고도 마데이라로 추방당했다. 훗날 왕당파들은 미클로스 호르티를 ‘반역자’라고 낙인찍었지만 이미 대세는 어찌할수 없었다. 헝가리의 바야(Baja)라는 작은 도시에 머물고 있던 카를은 헝가리를 영원히 떠날 수 밖에 없었다. 1921년 헝가리 의회는 급기야 카를을 정식으로 폐위하였다.
샤를르(카를)와 치타 왕비의 심장이 안치되어 있는 스위스의 무리 수도원
[카를의 죽음]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카를은 가족과 함께 대서양에 떠 있는 포르투갈 영 마데이라 섬에서 지내다가 1922년 4월 1일, 34세를 일기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기관지염이 악화되고 폐렴으로 인한 합병증 때문이었다. 이로써 수백년동안 대영화를 누리며 유럽의 거의 절반 이상을 호령하던 합스부르크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의 시신(심장)은 얼마후 스위스 바젤의 몬테성모성당에 속하여 있는 무리(Muri)수도원의 로레토(Loreto) 채플에 안치되었다. 카를은 마데이라 섬에 오기전 헝가리에 있을 때부터 이미 병약한 형편이었다. 더군다나 왕위복권 계획을 추진하다가 체포되어 추운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매우 쇠약해진 상태였다. 카를 가족의 마데이라에서의 생활은 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빈곤한 것이었다. 특별한 수입이 없었기 때문에 절약하며 살아야 했다. 겨울에 제대로 난방도 하지 못했다. 카를이 세상을 떠난후 한참 후에 그의 심장은 합스부르크의 관례에 따라 비엔나의 카이저그루프트(Kaisergruft)로 옮겨졌다. 나중에 왕비인 지타(Zita)의 심장도 이곳 남편의 심장을 보관하여 놓은 곳의 옆에 안치되었다. 카를은 비록 2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 영욕의 갈림길에서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 황제로서 지냈지만 매우 신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특히 가톨릭의 사회활동에 대하여 많은 기여를 했다. 카를은 여러 가톨릭사회단체를 창설하여 사회봉사와 기독교 교육 사업을 펼쳤다. 그중 어떤 단체는 아직까지도 활동하고 있다. 로마 교황청은 카를의 이같은 기여를 가상히 여겨 카를을 ‘가톨릭의 사회적 교사’라고 칭했다.
샤를르(카를) 황제
역사는 카를을 어떻게 평가하였는가? 오스트리아학술원의 역사학자 헬무트 룸플러(Helmut Rumpler)는 카를을 ‘나약하여 당면한 문제에 도전하기기 힘든 인물이었다. 그는 정치가가 아니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영국의 작가인 허버트 비비안(Herbert Vivian)은 ‘용감하고 명예를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황제와 왕으로서 세계 대전을 끝내려고 노력했던 인물이다.’라고 평가했다. 비비안은 ‘카를은 위대한 지도자였으며 평화의 왕자였다. 그는 전쟁으로부터 세계를 구하고자 했다. 그는 정치가로서 제국에 속하여 있는 여러 민족들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코자 했던 사람이다. 그는 백성을 사랑했고 외세에 굴복하지 않았으며 고귀한 영혼을 지닌 인물이었다.’라고 기록하였다. 프랑스 작가인 아나톨 프랑스(Anatole France)는 ‘세계 대전의 와중에서 오로지 평화를 위해 발 벗고 나섰던 훌륭한 사람이다. 그는 성자와 같은 인물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모두들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진정한 평화를 원했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굴욕을 당했다. 오늘의 세대가 그를 잃은 것은 커다란 불행이었다.’라고 말했다. 카를이 어렸을 때 교황 비오 10세를 만난 일이 있다. 교황은 ‘장차 오스트리아의 황제가 될 카를 대공은 나라와 백성들을 인도하는 훌륭한 지도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교황의 이 말은 카를의 서거 이후에야 비로소 정당한 평가를 받았다.
헝가리왕으로 대관식을 가진 카를(샤를르 4세)과 치타 황비, 그리고 오스트리아제국의 황태자 겸 헝거리왕국의 왕세자인 오토
[복자로 시복]
카를은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복자로 시복을 받았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1차 대전중 카를이 보여준 평화에 대한 노력을 높이 치하하였다. 2004년 10월 3일의 시복 미사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다음과 같이 강론했다. ‘신자들에게 맡겨진 사명은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추구하고 인정하며 수행하는 것이다. 기독교 정신으로 나라를 통치한 오스트리아의 카를은 매일과 같이 어려운 도전에 직면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해결 방법을 추구하고 각기 처해진 상황을 파악하였으며 주어진 직무를 수행하였다. 카를은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도였다.’ 카를이 황제시절 집무실을 예배처로 삼아 모든 일에 우선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던 일은 유명하다. 후세가 카를을 ‘축복받은 황제’라고 불렀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카를의 축일을 10월 21일로 선포하였다. 1911년 지타(Zita)공주와 결혼한 날이다. 한편 일부에서는 카를이 복자로 시복된데 대하여 강한 반발을 보이기도 했다. 이들은 카를이 1차대전중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에게 독가스의 사용을 승인했음을 지적하고 대량 살상무기를 사용한 사람을 가톨릭의 복자로 선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나중에 밝혀진 사실로는 세계의 지도자중 유일하게 카를만이 독가스의 사용을 반대 했다고 한다.
카를과 치타 왕비
[여덟 자녀들]
카를 황제는 황비 지타(Zita)와의 사이에 8남매를 두었다. 5남 3녀이다. 결혼생활 11년 동안 부지런히 생산한 자녀들이었다.
- 오토 황태자(1912-2011)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마지막 대표자였다. 작손-마니닝겐의 레기나(Regina)공주와 결혼하여 7명의 자녀를 두었다. 독일의 푀킹이라는 곳에서 별세했고 비엔나의 슈테판대성당에서 장례식을 치룬후 예에 의하여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묘인 비엔나의 카이저그루프트에 안치되었다. 오토에 대하여는 별도로 소개코자 한다.
- 아델하이트(Aldeheit)대공비(1940-1971)는 독신으로 지내가다 세상을 떠났다.
- 로베르트(Robert)대공(1915-1996)은 사보이의 마르게리타(Margueritta) 공주와 결혼하여 5명의 자녀를 두었다.
- 펠릭스(Felix)대공(1916- )은 아렌베르크의 안나-유제니(Anna-Eugenie)공주와 결혼하여 7명의 자녀를 두었다.
- 칼 루드비히(Karl Ludwig)대공(1918- )은 리느(Ligne)의 욜란데(Yolande) 공주와 결혼하여 4명의 자녀를 두었다.
- 루돌프(Rudolf)대공(1919- )는 세니아(Xenia)백작부인과 결혼하여 4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이혼한후 브레데의 안나(Anna)공주와 재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다.
- 샬로테(Charlotte)대공비(1921-1989)는 메크렌부르크의 게오르그(Georg)공작과 결혼하였다.
- 엘리자베트(Elisabeth)대공비(1922-1993)는 리히텐슈타인의 하인리히(Heinrich)왕자와 결혼하여 5명의 자녀를 두었다.
지타와 여덟 자녀 (가운데 하얀 옷의 샬로테는 카를이 세상을 떠난 후에 태어났다)
[기나긴 호칭]
교회와 황실 의식에서 카를 1세를 공식적으로 호칭할 경우, 또는 문서에 기록할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호칭을 사용한다. 이같은 칭호들은 그저 참고로 나열해 보았을 뿐이다.
- 오스트리아의 황제
- 헝가리의 사도적 왕
- 보헤미아, 달마티아(Dalmatia), 크로아티아(Croatia), 슬라보니아(Slavonia), 갈리시아(Galicia), 로도메리아(Lodomeria), 일리리아(Illyria)의 왕
- 예루살렘의 왕
- 오스트리아 대공
- 투스카니(Tuscany)와 크라코우(Cracow)의 대공
- 로렌인(Lorraine)과 잘츠부르크(Salzburg), 스티리아(Styria), 카린티아(Carinthia), 카르니올라(Carniola), 부코비나(Bukhovina)의 공작
- 트란실바니아의 대공
- 마르그레이브(Margrave)와 모라비아(Moravia)의 대공
- 상하 실레지아(Silesia), 모데르나(Moderna), 파르마(Parma), 피아첸자(Piacenza), 과스탈라(Guastala), 아우슈비츠, 자토르(Zator), 체첸, 프리울리(Friuli), 라구사(Ragusa), 자라(Zara)의 공작
- 합스부르크와 티롤, 키부르트(Kyburg), 고리지아(Gorizia), 그라디스카(Gradisca)의 대공 백작
- 트렌트(Trent)와 브릭센(Brixen)의 왕자
- 상하 루사티아(Lusatia) 및 이스트리아(Istria)의 후작(Margrave)
- 호에넴스(Hohenems), 펠트키르흐(Feldkirch), 브레겐츠(Bregenz), 존넨베르크(Sonnenberg)의 백작
- 트리에스테(Trieste), 카타로(Cattaro), 벤디슈(Bendish)의 영주(Lord)
- 세르비아(Serbia) 공작령의 대공(Grand Voivode)
스위스 무리 수도원교회에 안치되어 있는 샤를르(카를)의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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