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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황태자의 부인 스테파니(Stephanie)

정준극 2008. 1. 16. 11:41

루돌프 황태자의 부인 스테파니(Stephanie) 황태자비


왕족이었기에 부모가 정해준대로 결혼하였으나 결혼생활은 평탄치 못했다. 시어머니와의 갈등, 남편과의 불화는 끝내 결혼 10년만에 별거에 들어가도록 했으며 모든 일에 자포자기한 남편은 새로 사귄 젊은 애인과 동반 자살을 하였다. 자살한 남편은 다음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가 될 루돌프 황태자였다. 남편인 루돌프 황태자가 죽자 스테파니 황태자비는 그렇게도 원했던 제국의 황비 자리에도 오르지 못하고 호프부르크 궁전을 떠나야 했다. 남편이 마이엘링에서 애인과 함께 자살할 당시에 남편 루돌프의 나이는 30세였으며 스테파니는 25세였다. 스테파니는 한많은 비엔나가 싫어서인지 또는 천성이 그래서인지 하여튼 남편 루돌프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1900)에 헝가리의 엘레머 로니아이(Elember Lonyay)백작과 재혼하였다. 스테파니는 루돌프와의 사이에서 딸 하나를 두었다. 엘리자베트 마리(Elisabeth Marie)였다. 애칭으로는 에르치(Erszi)라고 불렀다. 할머니의 이름을 따서 엘리자베트라는 이름이었다. 엘리자베트 마리는 아버지 루돌프가 세상을 떠난지 13년후인 1902년 오스트리아의 귀족 오토(Otto) 공자와 결혼하여 4자녀를 두었다. 할아버지인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손녀 엘리자베트와 오토 폰 빈디슈 그래츠와의 결혼을 못마땅해 했다. 왜냐하면 오토가 왕족이기는 하지만 수준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엘리자베트와 오토는 결혼을 하였지만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불행의 연속이었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 모두 혼외정사를 즐겼다. 두 사람의 이혼은 불가피했다. 하지만 당시의 법으로서는 이혼이 좀처럼 가능하지 못했다. 두 사람의 이혼이 성립된 것은 1924년에 합스부르크 왕조가 공식적으로 종료되고 나서였다. 이혼을 해서 남남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자녀들의 양육권을 가지고 더티할 정도로 대단한 법정 다툼을 벌여서 온천하의 핀잔을 받았다. 엘리자베트는 1963년 비엔나에서 향년 80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스테파니는 2차 대전이 끝나던 해인 1945년 헝가리의 판논할마(Pannonhalma)수도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1세였다. 

 

결혼 직후의 루돌프 황태자와 스테파니 황탸자비 (1881)


스테파니 클로틸데 루이제 에르미니 마리 샬로테(Stephanie Clotilde Louise Herminie Marie Charlotte)공주는 벨기에 왕 레오폴드 2세(Leopoled II)의 딸이다. 어머니는 오스트리아의 마리 앙리에트(Marie Heinriette) 대공비이다. 스테파니 공주는 1864년 5월 21일 벨기에의 래켄(Laeken)에 있는 왕실 소유의 궁전에서 태어났다. 스테파니의 할아버지는 벨기에 왕국의 초대 왕이었으며 숙모는 오스트리아 제국이 멕시코를 식민지로 가졌을 때 멕시코의 왕비였다. 이만하여 유럽 왕가들 사이에서는 무시못할 신부감이었다. 노년에 접어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셉 황제는 외아들 루돌프를 어서 속히 결혼토록 하여 제국의 후사를 다지고 싶어 했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부인인 엘리자베트(씨씨)와 의논하여 며느리감을 고르던중 오스트리아와도 무관하지 않은 벨기에의 공주 스테파니를 점찍었다. 아버지 프란츠 요셉 황제와 어머니 엘리자베트 왕비는 아들 루돌프에게 ‘얘야, 스테파니 말이야! 정말 혈통도 좋고 인물도 그만하며 됐고...그러니 어서 만나 결론은 맺어야 겠다’라며 매일같이 종용했다. 루돌프 황태자는 ‘어머니, 제발 그만 하세요,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께요!’라며 시큰둥 했지만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는 ‘스테파니라! 이름은 관찮은데! 그럼 어디 한번 만나 보기나 할까?’라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다. 1880년 날씨도 화창한 5월의 어느날, 루돌프는 벨기에의 브뤼셀에 도착하였다. 벨기에 왕실에서는 사위감이 왔다고 해서 난리도 아니게 환대하였다. 더구나 그 사위감이라는 것이 어디 보통 사위감인가? 합스부르크의 대를 이어갈 유일한 인물이 아니던가! 벨기에에 온 루돌프는 스테파니를 만나 오페라도 함께 보면서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루돌프는 ‘이 여자 정도면! 생긴 것은 별로이지만...’이라고 생각했다. 루돌프의 어머니인 엘리자베트 황비는 세계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미인이 아닌가? ‘아버지는 그런 미인과 결혼했으면서 왜 나는 그저 그렇게 생긴 스테파니와 결혼하란 말인가? 불공평해! 불공평!’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당시 루돌프는 22세였고 스테파니는 고작 16세였다.

 

스테파니의 친정 아버지 벨기에 왕 레오폴드 2세

 

루돌프는 브뤼셀에서 스테파니를 만난지 이틀만에 약혼하겠다고 발표하였다. 벨기에 왕실은 ‘경사났네!’라면서 기뻐했다. 멀리 비엔나의 호프부르크 궁전에 있던 루돌프의 아버지 프란츠 요셉 황제도 얼굴에 함박웃음을 띠었다. 약혼은 발표되었지만 결혼은 늦춰야 했다. 신부(新婦)가 아직 성년이 되지 않아서였다. 이듬해인 1881년 5월초, 스테파니는 며칠만 있으면 낭랑 17세가 되지만 그 며칠을 기다릴 필요 없이 5월 10일로 날짜를 잡아 비엔나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장소는 호프부르크에 연계되어 있는 아우구스틴 교회였다. 하객중에는 장차 영국의 에드워드 황태자(나중에 에드워드 7세가 됨), 루돌프의 사촌인 빌헬름(나중에 독일 왕 빌헬름 2세가 됨)도 포함되어 있었다. 세기의 결혼식이었다.

 

비엔나의 호프부르크 궁전에 연결되어 있는 황실 교회 아우구스틴 교회의 내부

 

그런데 사실 프란츠 요셉 황제와 엘리자베트(씨씨)왕비는 며느리 스테파니에 대하여 별로 호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 생긴 것은 둘째 치고라도 성격이 까탈스러워서 마땅치 못했다. 명랑하고 쾌활한 모습도 별로 찾아 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스테파니가 센스가 있고 지성이 있으며 남의 말을 귀담아 듣는 차분한 성격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스테파니는 합스부르크 궁정 생활을 엔조이했다. 궁정의 여러 공식 행사나 의식에 자주 참석했다. 시어머니인 엘리자베트(씨씨)가 그런 것을 경장히 싫어했던 것에 비하여 며느리 스테파니는 목에 힘주어서 그런 행사에 자주 참석하였다. 특히 엘리자베트가 자주 여행을 다녔기 때문에 부재중에 프란츠 요셉 황제의 파트너로서 공식행사에 많이 참석하였다. 그렇게 잘난체 하는 모습도 엘리자베트의 눈에는 달갑지 않게 보였다. 그리고 어머니 엘리자베트가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여서 외지로 떠돌고 있다고 믿는 아들 루돌프는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나서서 황비의 역할을 하는 스테파니가 점점 싫어졌다. 더구나 스테파니가 루돌프에게 말끝마다 ‘당신은 언제 황제가 되는 거야? 늙어 죽을 때가 되어야 황제가 되는 거야? 아이구 내 팔자야!’라면서 바가지를 수없이 긁어대자 더 싫어졌다. 바가지 좋아할 남자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는 속담이 있듯 루돌프는 집에는 들어가지 않고 밖으로 나돌아 다니며 따로 놀기 시작했다. 루돌프로 말하자면 지성적이고 인습에 얽매이지 않으며 간혹 즉흥적인 면도 있고 게다가 자유분방한 성격이었다. 그러므로 관습적이고 따지기 좋아하며 자로 잰듯 통박을 굴리는 스테파니와는 성격상의 차이가 컸다. 그런데 문제는 프란츠 요셉 황제가 며느리 스테파니를 아주 기특하게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부인인 엘리자베트가 보살펴 주지 못하는 사항들을 며느리가 잘 챙겨 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스테파니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루돌프 황태자의 애인인 마리아 베체라

                           


루돌프 황태자와 스테파니는 딸 하나를 두었다. 결혼 2년후, 스테파니가 19세때에 딸을 낳았다. 엘리자베트 마리(Elisabeth Marie)였다. 1883년 9월 2일 비엔나 근교의 락센부르크(Laxenburg) 성에서 태어났다. 루돌프가 태어난 바로 그 성이었다. 엘리자베트 마리는 가족들 사이에서 에르치(Erszi)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테파니는 시어머니로부터 적극적인 환영을 받지 못했다. 시어머니인 엘리자베트(씨씨)왕비는 일부러라도 스테파니와 만나는 것을 피했다. 엘리자베트왕비는 며느리 스테파니를 ‘미운 호박’(das h?ssliche Trampeltier), ‘못생긴 코끼리’, ‘정신적인 헤비웨이트’라고 대놓고 면박을 주었다. 어느때 바람둥이 루돌프가 스테파니에게 성병을 감염시켰을 때 스테파니는 너무 속상해서 이혼을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가톨릭에서 이혼은 금지사항이므로 어쩔수 없이 바가지만 더 긁어서 괴롭히기로 했다.

 

루돌프 황태자와 스테파니의 딸 엘리자베트 마리(애칭 에르치)

 

루돌프가 자살하기 2년전인 1887년 스테파니는 갈리시아(Galicia)를 여행하였다. 갈리시아는 오늘날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있는 지역이다. 스테파니는 이곳에서 폴란드의 멋쟁이 백작 한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로부터 루돌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스테파니는 이 백작과 노골적으로 애정을 표현하며 서로 연락을 계속하였다. 이 사실을 루돌프가 모를리 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차가워졌다. 스테파니를 찬미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천문학자 요한 팔리자(Johann Palisa)는 목성과 토성 사이에 떠 있는 소혹성을 발견하고 스테파니의 이름을 따서 소혹성 스테파니 220호라고 명명했다.

 

루돌프 황태자가 세상을 떠나기 전 스테파니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

(마이엘링 교회 한쪽의 전시장에 스테파니의 사진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1889년 루돌프는 마이엘링에서 17세의 마리아와 동반자살을 하였다. 루돌프의 죽음으로 제국의 왕비가 되려던 스테파니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오스트리아 궁전에서 스테파니의 위치는 이상하게 되었다. 특히 시어머니 엘리자베트는 아들의 죽음에 너무 상심하여 어쩔줄 몰라 했으며 원인제공의 화살을 스테파니에게 돌렸다. 게다가 스테파니는 친정 아버지인 벨기에의 레오폴드 왕과도 극도로 사이가 나빠졌다. 재산 및 타이틀 상속 문제로 아버지 측과 법정에서 다투기까지 하였다. 스테파니는 ‘에라 될대로 되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스테파니는 호프부르크 궁전에 남아 있기가 싫었다. 기회만 있으면 여행을 다녔다. 여행중에 혹시 스테파니라는 신분이 밝혀지면 귀찮으므로 여러 가명을 사용했다. 라크로마 백작부인, 에판, 심지어는 본슈르(Bonchurch)부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루돌프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900년 3월 22일 스테파니는 이탈리아의 미라마레(Miramare)에 머물던중 헝가리의 몰락한 귀족인 엘레머 로니야이(Elemer Lonyay)백작과 급히 재혼하였다. 이 사실을 안 친정 아버지 레오폴드는 화가 치밀어서 ‘내 딸이 아니다’라고 선언할 정도였다. 그러나 시아버지인 프란츠 요셉은 그나마 며느리 스테파니를 동정하였다. 그래서 스테파니의 새 남편인 로니야이 백작의 타이틀을 대공(Fuerstin)으로 격상시켜 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황제가 노망이 들었다고 비웃었다.

 

 스테파니가 재혼한 남편 엘레머 노니야이 백작


스테파니는 새 남편 노니야이와 헝가리 서부 오로츠바르(Oroszvar)에 있는 남편의 성에 살림을 차렸다. 그러나 얼마후 적군(赤軍)이 ‘브루조아 타도!’라면서 쫓아내는 바람에 헝가리의 기외르첸트마르톤(Gyorszentmarton)에 있는 판논할마(Pannonhalma) 베네딕트 수도원에 은신할 거처를 잡았다. 1935년 스테파니는 과거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지내며 경험한 내용을 적은 비망록을 책으로 출판코자 했다. 그러나 만일 이상한 내용들이 쏟아져 나오면 국제적으로 큰 스캔들이 될것이므로 법원은 책자 발간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스테파니의 비망록은 '나는 왕비가 되었어야 했다‘(Ich Sollte Kaiserin Werden)이라는 타이틀로 발간되었다. 스테파니는 2차대전이 종식된지 얼마후인 1945년 8월 23일 판논할마 수도원에서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유일한 딸 엘리자베트 마리는 오토(Otto)라고 하는 독일의 왕족과 결혼하여 4자녀를 두었다.

 

스테파니가 여생을 보낸 헝가리의 판논할마 수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