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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트와 함께 숨진 비운의 조피 (Sophie)

정준극 2008. 1. 16. 09:00

페르디난트와 함께 숨진 비운의 조피 (Sophie) 대공비


남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함께 사라예보를 방문하였다가 보스니아 국수주의자들에 의해 살해당한 조피(Sophie) 대공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비가 될 운명이었으나 역사의 뒤안길에서 꿈을 접어야 했던 비운의 여인이다.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피살된후 제국의 황위 계승의 자리는 페르디난트의 조카인 카를에게 돌아갔고 1차 대전 중인 1916년 프란츠 요셉 황제가 서거하자 카를이 새로운 황제로 등극하였다. 그리고 카를의 부인인 치타(Zita)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비가 되었다. 페르니단트 대공의 부인인 조피의 공식 타이틀은 처음에 호엔베르크 공작부인(Fürstin von Hohenberg)이었으나 1909년 호엔베르크 대공비(Herzogin von Hohenberg)로 격상되었다. 호엔베르크는 조피가 태어난 슈투트가르트 부근의 성을 말한다. 유럽의 왕족들이나 한다하는 귀족들은 자기 가문이 소유하고 있는 궁성이나 저택의 명칭을 이름에 넣는 경우가 많다. 조피도 마찬가지였다. 조피의 결혼전 풀 네임은 조피 마리아 요제피네 알비나 호테크(Sophie Maria Josephine Albina Chotek) 백작부인이었다. 조피는 1868년 3월 1일 독일의 슈투트가르트의 호엔베르크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보헤미아의 명문 귀족가문 출신인 보후슬라브(Bohuslaw) 백작이며 어머니는 빌헬미네 킨스키(Wilhelmine Kinsky) 백작부인이었다. 조피는 이들의 네 번째 딸이었다. 조피는 처녀시절 테셴(Teschen) 공작령을 관할하는 프리드리히 대공의 부인인 이사벨라 대공비의 시녀생활을 하였다. 테셴은 당시에는 북부 실레지아에 있는 작은 공국이었다. 현재에는 폴란드와 체코 공화국 사이에 있는 지역이다. 


 

페르디난트 대공(1863-1914)과 부인 조피 대공비)1868-1914)


조피가 언제 페르디난트를 처음 만났는지는 확실치 않다. 프라하에서 열린 어떤 무도회라는 얘기가 있다. 조피와 페르디난트는 서로 사랑하는 관계를 몇 년동안 비밀 속에 묻어 두며 교제했다. 주위에서는 페르디난트가 이사벨라 대공비의 저택을 자주 방문하였기 때문에 이사벨라 대공비는 페르디난트가 큰 딸인 마리 크리스티네(Marie Christine)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에 페르디난트와 대공비의 시녀 조피와의 관계가 알려지자 그것은 황실의 일대 스캔들로 발전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페르디난트가 현재의 브라티슬라바에 있는 이사벨라 대공비의 저택에서 테니스를 친후 자기도 모르게 펜단트를 벗어 놓고 갔는데 펜단트에는 조피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이사벨라 대공비가 그 펜단트를 직접 열어 봄으로서 페르디난트와 조피와의 관계가 들어났다는 것이다. 이사벨라 대공비는 실망하였고 노황제 프란츠 요셉은 다음 황제 계승 서열에 있는 페르디난트에게 황족이 아닌 조피와는 결혼할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실 가족이 되려면 왕족이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조피는 유럽의 어느 나라를 통치하는 군주의 직계가족이 아니었다. 물론 조피 쪽의 먼 친척이 오래전에 리히텐슈타인, 바덴, 호엔졸러른-헤힝겐의 왕자들이었지만 그건 고려대상이 될수 없었다.


ferdinand thronfolger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페르디난트 대공과 조피 대공비 (1913). 세기의 러브 스토리. 두 사람의 서거를 추모하여서 발행한 엽서


그러나 사랑이 뭔지 페르디난트는 조피 이외의 어느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결국 ‘페르디난트 이외에 다른 사람이 황위를 계승하기는 어려우니 종사를 보존하소서!’라는 주위의 주청에 노황제의 주장이 꺾여 두 사람은 1900년 7월 1일 보헤미아의 라이히슈타트(Reichstadt: 현재의 Zakupy)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그 결혼에는 몇가지 조건이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페르디난트와 조피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절대로 다음 황제 계승을 할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조피는 남편 페르디난트와 지위, 타이틀등을 공유하지 못하도록 했다. 다시 말해서 조피는 남편 페르디난트가 제국의 황제가 되더라도 황비(Empress)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아버지가 백작이라고 해도 왕족이 아니기 때문에 평민으로 간주하여 차별을 받았던 것이 당시 유럽 왕실들의 관례였다. 아무튼 그렇게 하여 어렵게 결혼한 페르디난트와 조피는 슬하에 네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실은 마지막 아이가 사산되는 바람에 생존한 자녀는 3명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조피가 남편과 함께 피살당했을 때 다섯 번째 아이를 임신중이었다고 하지만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1908년 사산아를 낳은후 의사들은 조피에게 또 다시 임신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적극 권고했다고 한다.



페르디난트와 조피의 자녀들 (호엔버그의 조피 공주, 호엔버그의 에른스트 왕자, 호엔베르크 공작 막시밀리안). 자녀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다음 황위 계승자가 되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페르디난트 대공은 황태자(Kornprinz)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못하고 황위계승자(Thronfolger)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1914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오스트리아 지방을 관할하는 총독 오스카르 포티오레크(Oskar Potiorek)장군은 페르디난트와 조피를 사라예보에서의 제국군사 훈련에 참관토록 초청하였다. 포티오레크  총독으로서는 다음번 황제가 될 페르디난트에게 무언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페르디난트는 그 방문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상당수 주민들이 오스트리아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있으며 세르비아 연맹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그런 군사훈련과 같은 공식 방문에는 조피가 남편과 동행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페르디난트가 노황제에게 결혼 14주년 기념이니 제발 함께 여행하도록 간청하여서 허락을 받았다. 며칠후면 결혼기념일인 7월 1일이 되기 때문이다. 조피는 그렇게 신경써주는 남편이 고마웠고 모처럼 남편과 함께 비엔나를 떠나 멀리 여행하는데 대하여 가벼운 흥분감마저 갖고 있었다. 완고한 비엔나로부터의 탈출! 

 

사라예보에서의 암살 장면

 

오전 10시 10분, 페르디난트와 조피는 총독의 안내를 받아 중앙경찰서 앞에 도열한 제국 군대에 대한 사열을 시작하였다. 그 때 네드옐코 카브리노비치(Nedjelko Cabrinovic)라는 청년이 대공 부부가 탄 승용차에 수류탄을 던졌다. 다행이 운전사가 승용차를 향해 무슨 물건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급히 차를 몰아 앞으로 빠져 나갔기 때문에 수류탄은 따라오던 뒷차의 바퀴 밑에서 터졌다. 그로 인하여 뒷차에 타고 있던 두 사람(에릭 폰 메리찌와 부스데크 백작)이 중상을 입었으며 부근에 있던 관람자들 10여명도 수류탄 파편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페르디난트 부부는 사열을 중지하고 곧바로 시청 청사로 돌아왔다. 시청에서는 페르디난트를 환영하는 공식 리셉션이 준비되어 있었다. 페르디난트는 리셉션에서 부상당한 사람들의 상태를 물어보며 걱정을 표명했다. 몇 사람이 중상을 입어 병원에서 치료중이지만 상태가 나쁘다는 보고를 받았다. 페르디난트는 당장이라도 병원을 찾아가 보겠다고 말했다. 보좌관인 모르자이(Morsey)남작은 아직도 위험하니 방문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진언하였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사라예보 총독 오스카르 포티오레크는 ‘아니, 그럼 사라예보에는 암살자들만 득실거린단 말이요?’라며 이견을 내세웠다. 결국 페르디난트만 병원을 방문하고 조피는 시청에 남아 있도록 하는 선에서 의견이 조율되었다. 그러나 그런 결정을 들은 조피는 시청에 남아 있기를 거절하며 ‘대공께서(페르디난트)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에 제가 없다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요, 대공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라도 함께 가겠어요!’라고 말했다. 포티오레크 총독은 대공부부가 탄 승용차가 되도록이면 빨리 병원에 도착하기를 바랬다. 그래서 원래의 병원행 루트를 가장 단거리로 바꾸기로 했다. 그러나 총독은 이런 변경사항을 운전사에게 미리 얘기해주는 것을 잊었다. 운전사의 이름은 프란츠 우르반(Franz Urban)이었다. 우르반은 원래 루트대로 라틴교(Latin Brücke)를 거처 프란츠 요셉 거리(Franz Josef Strasse)로 꺾어 들었다. 거리 모퉁이에 암살자 가브릴로 프린시프가 기다리고 있었다. 포티오레크 총독은 승용차가 변경된 루트로 가는 것이 아님을 즉각 알아차리고 운전사에게 ‘이게 뭐야? 길이 틀리잖아? 아펠 부두(Appel Quay) 쪽으로 가야한단 말이야!’라고 소리쳤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니더외스터라이히주의 봐하우 계곡에 있는 아르트슈테텐 성. 페르디난트와 조피가 안치된 곳이다. 동화의 성이라는 별명이 있다.

 

운전사는 급히 브레이크를 밟고 승용차를 돌려 다른 길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승용차를 돌린다는 것이 오히려 암살자가 기다리던 쪽으로 가게 되었다. 벽에 기대어 있던 암살자가 앞으로 나와 총을 뽑아 들고 승용차를 향해 쏘기 시작했다. 5피트 밖에 되지 않는 거리였다. 조피는 복부에 총알을 맞았고 페르디난트는 목에 맞았다. 두 사람은 한시간도 되지 않아 모두 절명했다. 페르디난트 부부가 탔던 승용차와 당시 페르디난트가 입었던 의상은 현재 비엔나의 증앙역 부근에 있는 군사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가 차를 타고 출발하려던 장면


조피와 페르디난트를 위한 합동 장례미사가 올려졌다. 합스부르크는 황위 계승자였던 루돌프의 자살 이후 또 한번의 비운을 맞이해야 했다. 페르디난트와 조피는 황실 시골 별장인 아르트슈테텐성에 안치되었다. 현재 아르트슈테텐성은 페르디난트 기념관으로 일반에게 공개되어 있다. 한편, 처음에는 조피의 관은 페르디난트보다 18인치 아래로 놓아졌었다고 한다. 조피가 왕족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왕실내에서는 '자기가 뭔데 사라예보에 따라가기는 왜 따라가?'라며 조피에 대하여 못마땅한 분위기였다. 결혼 당시의 조건대로 페르디난트와 조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은 어느 누구도 다음번 황제 계승자로 지명되지 않았다. 대신 페르디난트의 조카 카를이 황제 계승자로 지명되었다.

 

페르디난트 대공과 조피 대공비

슐로쓰 아르트슈테텐에 안치되어 있는 페르디난트와 조피의 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