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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에게 양위한 페르디난트 1세 (Ferdinand I)

정준극 2008. 1. 23. 09:19

조카에게 양위한 페르디난트 1세 (Ferdinand I)

1835-1848


페르디난트 1세는 다른 군주들과는 달리 생전에 왕위를 조카에게 양위하였다. 그는 조카인 프란츠 요셉에게 양위를 한후 27년을 더 살았다. 그는 13년동안 재위에 있었으나 나중에는 무능하다는 소리와 함께 심한 간질 증세가 있어서 주위의 권고를 받아 들여 당시 18세의 젊은 조카 프란츠 요셉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페르디난트 1세는 사라예보에서 보스니아 국수주의자의 총탄에 맞아 숨진 그 페르디난트와는 다른 사람이다. 양위한 페르디난트는 사라예보의 페르디난트에게 촌수로 할아버지가 된다. 두 페르디난트를 구별하기 위해서 재임중 양위한 페르디난트는 페르디난트 1세라고 부르기로 하고 사라예보에서 죽은 페르디난트를 사라예보의 페르디난트라고 부르기로 한다. 페르디난트 1세는 마음이 여려 무슨 일이든지 제때에 결정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대제국의 통치자로서는 부적당 내지 무능했다는 평을 받았다. 그는 지성적이지도 못했다. 부모들이 평소에 ‘제발 공부좀 해라!’고 노래를 불렀지만 공부에는 정신이 없고 그저 하는 일 없이 지내는 데에만 취미가 있었다. 게다가 간질병까지 있어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그런 그에게도 장점은 있었다. 매일같이 일기를 또박또박 알기 쉽게 썼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끔씩은 반짝하는 위트도 있었다고 한다. 문제는 간질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심해져서 어느때는 하루에 거의 20번이나 발작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때마다 시종들은 물론, 가족들 까지도 죽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제국을 효과적으로 통치한다는 것은 아예 기대조차 할수 없는 노릇이었다. 제국의 수상인 펠릭스 슈봐르첸베르크(Felix Schwarzenberg)는 ‘제발 하야하사이다!’라고 노골적으로 간청까지 하였으나 발작을 일으키지 않으면 정신이 멀쩡하므로 신하들로서는 참으로 입장이 난처한 지경이었다. 그 즈음에 비엔나에서 자유혁명주의자들의 소요가 극심해지자 페르디난트를 비롯한 황실 사람들은 모라비아 지방의 올뮈츠(올로무츠)로 잠시 피난을 가게 되었다. 1848년이었다. 올뮈츠로 함께 갔던 사람들 중에는 다음 황제 계승자인 젊은 프란츠 요셉도 있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에 영향력이 큰 올뮈츠의 빈디슈그래츠(Windischgrätz) 장군은 페르디난트 1세에게 ‘폐하! 이제는 무거운 왕관을 그만 벗을 때입니다!’라고 과감하게 진언하여 그해 12월 초 페르디난트는 조카인 프란츠 요셉에게 역사적인 양위를 하였다.

 

페르디난트 1세


오스트리아의 황제 겸 헝가리 및 보헤미아의 왕 페르디난트 1세는 1793년 4월 19일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초대 황제로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까지 겸직한 프란시스 2세(Francis II)였고 어머니는 시실리의 마리아 테레자(Maria Teresa)공주였다. 마리아 테레자는 여걸 마리아 테제자가 아니고 시실리 왕가 출신의 여성이므로 혼돈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버지 프란시스 2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는 타이틀로 불릴 때에만 프란시스라고 부르고 오스트리아 왕(대공)으로서는 프란츠(Franz)라고 부르므로 역시 혼돈이 없기를 바란다. 프란시스이건 프란츠이건 같은 사람이다. 다만, 헝가리에서는 페렌크(Ferenc)라고 이상하게 부른다. 그리고 또 한가지 복잡한 사항이 있다. 페르디난트는 어린 시절에 페르디난트 1세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오스트리아 황제 및 헝가리 왕으로 등극하고 나서는 페르디난트 5세라는 호칭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페르디난트 5세라고 말하면 ‘그럼 페르디난트 4세, 3세, 2세 등등은 어디 있나?’라고 묻는 사람이 있을수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편의상 페르디난트 1세라고 단순하게 기술한다. 페르디난트 1세는 롬바르디-베네치아의 왕이라는 타이틀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디와 베네치아 공국은 오스트리아제국에 속한 영토였다.

 

 호프부르크의 요세프르플라츠에 있는 요셉2세 기념상


페르디난트 1세는 ‘과인이 무능하여 정사(政事)를 볼 능력이 없으므로...’라고 선포한바가 없고 황실의 어느 누구도 그런 내용을 발표한 일이 없다. 하지만 모두들 묵시적으로 페르디난트가 무능 및 질병 등의 이유로 정사수행불능의 처지에 있다는 인식을 함께 하고 섭정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섭정위원회는 유명한 재상 메테르니히(Prince Klemens von Metternich)가 주역을 맡아했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메테르니히가 국정을 운영하였다. 페르디난트 1세는 사르디니아 공주 마리아 안나(Maria Anna: 1803-1884)와 결혼하였으나 자녀는 없다. 사실 그 결혼도 이루어질수 없었다. 신랑이 이상한 성격이며 무슨 병까지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르디니아는 오스트리아 대제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수 없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결혼을 추진하였다. 페르디난트 1세는 부인 이외의 다른 어는 누구와도 이상한 관계를 갖지 않았다고 한다. 적어도 황제라면 기분도 그렇지 않고 하여서 이 여인 저 여인과 스캔들을 뿌리기 마련이지만 페르디난트 1세는 그럴 능력도 없었던 것 같았다. 장하다! 하지만 먹는 데에는 전문가였다. 페르디난트 1세는 언젠가 식사 때에 갑자기 군만두를 먹고 싶은 생각이 들어 황실의 주방장에게 ‘여보게 주방장! 과인은 지금 아프리코트를 넣은 군만두를 먹고 싶으니 어떻게 안될까요?’라고 요청하였다. 주방장이 ‘폐하, 지금은 아프리코트 철이 아니올시다!’라고 대답하자 페르디난트 1세는 갑자기 화를 내며 ‘무슨 소리야? 난 황제란 말이야! 만두를 달란 말이야!(Inch bin der Kaiser und will Knödel)’라고 호통을 쳤다는 것은 잘 알려진 에피소드이다. 1848년 비엔나에도 혁명이 불어 닥쳐 혁명주의자들이 궁전으로 몰려왔을 때 페르디난트 1세는 메테르니히 수상에게 밖이 왜 저렇게 소란스러우냐고 물었다. 메테르니히는 혁명주의자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페르디난트 1세는 ‘아니? 허락이나 받고 저러는가?’(비엔나 방언으로 Ja, dürfen's denn des?)라고 오히려 물어보았다고 한다. 혁명주의자들이 황제로부터 허락을 받고 시위를 할 리가 없었다.


메테르니히 수상은 1848년의 자유혁명으로 입장이 곤란해져서 외국으로 도망갔다. 새로운 수상으로 펠릭스 슈봐르첸베르크 공작이 임명되었다. 슈봐르첸베르크 수상은 올페르디난트 1세에게 ‘이젠 제발 양위하소서!’라고 넌지시 간청하였다. 페르디난트 1세는 사태를 눈치채고 그렇게 하자고 대답했다. 페르디난트 1세에게는 아들이건 딸이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다음 타자는 남동생 프란츠 카를(Franz Karl)의 순서였다. 그러나 프란츠 카를은 ‘저는요, 황제 노릇 할 마음이 도무지 없습니다!’라며 완곡히 사양했다. 결국 프란츠 카를의 아들, 즉 페르디난트 1세의 조카인 프란츠 요셉에게 황제의 바톤이 넘겨져 이후 68년이나 제국의 황제자리를 지켰다. 페르디난트 1세는 올뮈츠에서 빈디슈그래츠 장군의 직접적인 주장에 의해 양위한 사건에 대하여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양위가 대단히 복잡한 것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간단히 끝났다. (새로운 황제인) 젊은 조카가 무릎을 꿇고 (늙은 황제인) 나에게 축복을 요청했다. 나는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붙잡고 성호를 그어주었다. 그런 후에 그를 껴안고 키스를 했다. 조카이지만 나의 새로운 군주가 아니던가? 그후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갔다. 잠시후 나와 나의 사랑하는 부인은 다른 방에서 축복 미사를 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나의 사랑하는 부인은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프란시스의 뒤를 이어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가 된 프란츠 요셉

 

페르디난트 1세는 합스부르크이 군주로서 보헤미아에서 대관식을 가진 마지막 왕이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오스트리아제국의 황제는 보헤미아의 왕도 겸직하므로 보헤미아에서 대관식을 별도로 가져왔는데 다음 타자인 프란츠 요셉 황제부터는 그런 대관식을 갖지 않았으므로 페르디난트 1세가 그런 의미에서 보헤미아에서 대관식을 가진 마지막 왕이라는 얘기다. 그래서인지 페르디난트 1세는 보헤미아에 대하여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퇴위 이후 프라하에서 여생을 보냈다. 보헤미아 사람들은 그런 그에게 체코어로 ‘착한 페르디난트 5세’(Ferdinand Dobrotivy)라는 별명을 주었다. 오스트리아에서도 무능 및 멍청 황제이지만  ‘자비로운 페르디난트’(Ferdinand der Gütige)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그렇지만 Gütinand der Fertige(막을 내린 바보)라고 놀리기도 했다. Ferdinand der Gütige와 Gütinand der Fertige는 재치 있는 재담이다. 페르디난트 1세는 프라하성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유해는 관례에 따라 비엔나의 황실납골당(Kaisergruft)에 안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