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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드 2세(Leopold II)

정준극 2008. 1. 23. 09:28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드 2세(Leopold II)

1790-1792


[2년간의 재임]

레오폴드(레오폴드 2세) 황제는 마리아 테레자 여제의 둘째 아들이다. 마리아 테레자가 세상을 떠난후 큰아들 요셉(요셉 2세)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요셉이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나자 다음 황제의 바톤은 마리아 테레자 여제의 둘째 아들인 레오폴드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레오폴드가 세상을 떠난후 다음 황제의 바톤은 레오폴드의 큰 아들인 프란시스(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란시스 2세 겸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 프란시스 1세)에게 돌아갔다. 1747년 태어난 레오폴드는 43세 때인 1790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겸 오스트리아 대공으로 즉위했으나 불행하게도 2년 동안만 황제의 자리에 있다가 1792년 세상을 떠났다. 향년 45세. 그나마 거의 1년동안은 병치레만 했기 때문에 실제 복무기간은 1년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레오폴드는 작고한 형 요셉과 마찬가지로 투스카니 대공, 독일 왕, 헝가리 왕, 크로아티아 및 슬라보니아 왕, 보헤미아 왕, 그리고 오스트리아 대공이라는 타이틀을 가졌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본거지는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이지만 당시 오스트리아는 신성로마제국의 제후국 형태였기 때문에 왕이라고 부르지 않고 대공(Archduke: Herzog)라고만 불렀다. 그러다가 레오폴드의 아들인 프란시스가 오스트리아를 제국으로 격상하고부터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레오폴드 2세

 

[요셉 황제의 동생]

레오폴드의 원래 풀 네임은 페터 레오폴드 요제프(Peter Leopold Joseph)였다. 1747년 5월 4일 비엔나 쇤브룬 궁전에서 태어났다. 레오폴드는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 황제 겸 투스카니의 대공이었다. 레오폴드는 형인 요셉이 ‘계몽전제주의의 옹호자’로서 확고한  위상을 지니고 있다고 하지만 그다지 적극적은 아니라고 평했다. 레오폴드는 마리아 테레자 여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 그는 성직자가 되라는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신학을 공부해야만 했다. 나중에 어릴 때의 이 경험은 레오폴드로 하여금 교회에 대하여 호의적이 아닌 사람으로 만든 것이었다. 원래 투스카니는 마이라 테레자의 남편인 프란시스가 명목상으로 통치토록 배려한 것이었으나 프란시스 사후, 마리아 테레자는 만일 프란시스가 세상을 떠나면 큰아들 요셉이 아니라 둘째 아들 레오폴드에게 투스카니를 통치토록 할 요량이었다. 큰아들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고 오스트리아를 통치하는 대공이 되지만 둘째 아들은 별로 받는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단 조건이 있었다. 레오폴드는 스페인의 카를로스 3세의 딸 마리아 루이자(Maira Louisa)와 결혼하는 것이다. 스페인과 합스부르크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레오폴드는 1764년 8월 5일 마리아 루이자와 결혼했다. 아버지 프란시스는 1년후인 1765년 8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프란시스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레오폴드가 투스카니 공국의 영주로 정식 취임했다. 그러나 레오폴드는 명목상의 영주일 뿐이었으며 실제로 투스카니는 어머니 마리아 테레자가 직접 임명한 자문관들이 통치했다. 레오폴드는 속이 상했다. 더구나 부인인 스페인의 공주 마리아 루이자가 ‘이게 뭐냐?’면서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자 레오폴드는 1770년 비엔나로 가서 어머니 마리아 테레자와 담판을 짓고 투스카니의 통치권을 전적으로 위임 받았다. 이로써 레오폴드는 더 이상 투스카니 공국의 명목상의 수호성인 역할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투스카니 대공시절의 레오폴드


 

[투스카니 공국에서의 생활]

투스카니를 실질적으로 통치하기 시작한 레오폴드는 1790년 형인 요셉 황제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년동안 투스카니의 행정을 개혁하면서 기반을 다졌다. 예를 들면 산업부흥, 개인자유 보장, 세제 개선, 하수도 시설 정비등 공공사업 수행, 그리고 군대 양성 등이었다. 특히 그는 세금의 전액을 투스카니의 발전만을 위하여 사용했다. 투스카니는 종전에 메디치(Medici)가문이 통치했었다. 레오폴드가 통치할 때에도 메디치의 영향력은 남아 있었다. 레오폴드가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하자 구습에 안주하던 귀족들이 반발을 했다. 레오폴드의 성격은 일견 냉정하고 융통성이 없는 것이었다. 그는 귀족들이 메디치 시대만 생각하고 권력을 남용하거나 부당한 혜택을 보는 꼴을 두고 보지 못했다. 하지만 레오폴드는 침착하고 꾸준하게, 그리고 지성적으로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결과, 몇 년 후에는 작은 공국인 투스카니가 풍요로운 공국으로 발전했다. 교회의 세력을 약화하는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다. 교회 재산을 축소하려 했으나 교황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사형제도는 폐지하였다. 1786년 11월 30일이었다. 레오폴드는 공국안에 있는 모든 사형관련 기구를 폐기토록 했다. 오늘날 11월 30일은 세계 3백개 도시에서 사형폐지일로 기념되고 있다. 또 한가지, 레오폴드는 투스카니를 통치하기 위해 비밀경찰 조직을 잘 활용하였다. 그래서 반발 세력의 움직임을 사전에 무마할수 있었다. 이러한 레오폴드의 비밀경찰 실적을 아들 페르디난트가 나중에 오스트리아 황제가 되었을 때 십분 활용하였다.

 

 레오폴드가 태어난 플로렌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

레오폴드의 투스카니 통치 마지막 몇 년 동안 독일과 헝가리에서는 합스부르크에 저항하는 소요가 점차 증대하였다. 레오폴드의 형인 요셉이 말년에 제국의 운영과 관련하여 고통을 겪었던 직접적인 이유도 바로 독일과 헝가리에서의 합스부르크 반대운동 때문이었다. 그런 문제 때문에 레오폴드와 요셉은 되도록 자주 만나 대책을 협의했다.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자 여제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더 자주 만났다. 레오폴드와 요셉은 성격적으로도 서로 비슷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동생 레오폴드의 마음이 두뇌로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레오폴드가 요셉보다 더 냉정했고 더 침착하여 더 사리를 따랐다는 것이다. 레오폴드는 형 요셉에게 후사가 없기 때문에 자기가 다음 황제에 올라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형처럼 별로 능력 없는 황제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요셉은 1789년, 즉 세상을 떠나기 2년전에 이미 자기가 죽을 것을 예상하고 투스카니에 있는 레오폴드에게 비엔나로 와서 섭정의 역할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레오폴드는 공연히 섭정을 맡아 오해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이 요청을 차갑게 회피하였다. 1790년 2월 20일 요셉이 세상을 떠날 때에도 레오폴드는 플로렌스에 있었다. 그가 투스카니 공국을 떠나 비엔나로 향한 것은 그로부터 열흘 후인 3월 3일이었다.

 


레오폴드 황제의 여동생 마리 앙뚜아네트 프랑스 왕비


[마리 앙뚜아네트의 간청을 거절]

레오폴드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및 오스트리아 대공 겸 헝가리 및 보헤미아의 왕으로 즉위한지 2년후에 세상을 떠났다. 고작 45세에 세상을 떠났다. 병명은 잘 모른다. 신경쇠약이라는 얘기가 있다. 만일 더 오래 동안 통치했으면 유럽의 역사가 이대로는 아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레오폴드가 통치 할 때에는 동쪽의 헝가리와 보헤미아는 물론이고 서쪽의 프랑스, 벨기에, 독일 까지도 합스부르크 왕조를 위협하고 있었다. 특히 프랑스 혁명세력은 누이동생인 마리 앙뚜아네트의 생명을 계속하여 위태롭게 만들고 있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레오폴드에게 편지를 보내어 제발 도와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만일 레오폴드가 마리 앙뚜아네트와 루이16세를 프랑스로부터 빼돌린다면 프랑스 혁명군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프랑스 혁명정부는 프랑스에 인접한 합스부르크의 영토까지고 넘보고 있었다. 레오폴드는 어떻게 손을 쓸수 없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레오폴드가 세상을 떠난 다음해인 1793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러시아의 카타리나 2세


[러시아의 카타리나 2세]

사람들은 발칸 반도를 유럽의 화약고라고 부르지만 실은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가 유럽의 화약고였다. 레오폴드 시대에 러시아의 캐서린 2세(Catherine II: 카타리나 2세)는 서쪽 오스트리아 속령들(폴란드, 보헤미아, 헝가리 등)을 침공할 생각으로 있었다. 캐서린 여제는 똑똑했다. 혁명으로 왕정을 무너트린 프랑스 혁명정부가 인접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위협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신성로마제국과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의 왕정타도 운동이 자기들에게도 영향을 끼칠 것 같아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캐서린 여제는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가 연맹하여 프랑스 혁명을 타도할 십자군을 출범시킬 것을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그러한 판에 프러시아는 프러시아대로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겠다고 오스트리아를 위협하고 있었다. 레오폴드는 죽을 맛이었다. 이처럼 라인강 서쪽에서 열국들이 제각기 영토보전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에 러시아는 그 틈을 타서 폴란드의 일부를 합병하였고 오토만 제국에 속하여 있는 지역을 탈환하여 영토확장을 이룩하였다. 사실 레오폴드는 러시아의 이러한 간계를 간파하였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레오폴드의 시대는 그야말로 유럽의 판도가 매일 아침 달라지는 불투명의 시대였다. 나라와 나라간의 적대와 병합과 평화협정이 반복되는 시기였다. 레오폴드는 이러한 시기에 신성로마제국과 오스트리아 및 헝가리를 합스부르크의 지배하에 유지하느라고 여간 노력을 기울인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 그는 제국의 황제로서 위엄을 보이기 위해 산하의 국가들에서 대관식을 차례로 가지고 싶었다. 그리하여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대관식을 가졌고 보헤미아의 왕으로서는 프라하에서 대관식을 가졌다. 그리고 1790년 11월 11일에는 헝가리 왕으로서 대관식을 가졌다. 이러한 영광의 뒤안길에는 서서히 저물어가는 제국의 모습이 있었다. 모차르트가 레오폴드의 관심을 사려고 프랑크푸르트의 대관식에 찾아가 유명한 피아노협주곡 대관식을 연주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레오폴드의 큰 아들로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프란시스 2세의 기념상. 호프부르크.

 

[큰 아들 프란시스가 계승]

레오폴드는 1792년 3월 1일 집권 2년만에 비엔나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레오폴드는 자기의 형제자매가 16명이나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토털 16명의 자녀를 두었다. 레오폴드의 뒤를 이어 큰아들 프란시스(Francis)가 새로운 황제로 등극하였다. 프란시스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프란시스 2세라고 명명했다. 둘째 아들 페르디난트는 투스카니 공국의 대공이 되었다. 다른 동생인 샤를르(Charles: 카를)는 오스트리아군의 유명한 장군이 되었다. 동생 요한(Johann) 대공 역시 오스트리아군의 장군이었고 요셉(Joseph) 대공은 헝가리의 봉분왕(팔라틴 백작)이었으며 라이너(Rainer)대공은 롬바르디-베네치아의 총독이었다. 레오폴드가 세상을 떠나기 1년전에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났으며 당시 하이든은 한창 에스터하지궁전에서 활동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