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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 프란시스 2세(Francis II)

정준극 2008. 1. 23. 09:25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 프란시스 2세(Francis II)

1792-1806 신성로마제국 황제

1804-1835 오스트리아제국 황제


[호프부르크의 프란시스 2세]

비엔나 중심지역에 있는 호프부르크 궁전은 알테 호프부르크(Alte Hofburg)와 노이에 부르크(Neue Burg)로 나뉘어져 있다. 알테 호프부르크의 내정(인너 호프) 한 가운데에 기념상이 하나 서있다. 프란시스 2세이다. 호프부르크 내정의 카페 호프부르크(Das Cafe Hofburg)와 기념품 상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광장이다. 레오폴드의 뒤를 이은 프란시스 2세(Francis II: 프란츠 2세)는 1792-1806의 14년간 신성로마제국 황제였으며 1804-1835년의 31년 동안은 오스트리아제국의 황제였다. 그의 풀 네임은 프란시스 요제프 샤를르(Francis Joseph Charles)였다. 프란시스 2세는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다. 프란시스 2세 때에 신성로마제국이 대미를 장식하고 해산되었기 때문에 그 이후의 합스부르크 군주들에게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는 호칭이 없다. 신성로마제국을 해체한 것은 유명한 오스털릿츠(Austerlitz) 전투에서 나폴레옹에게 패배한 후의 일이다. 대신, 프란시스 2세는 오스트리아를 제국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을 오스트리아제국의 첫 황제라는 의미에서 프란시스 1세라고 칭했다. 그 이전까지 오스트리아는 신성로마제국의 일원으로서 오스트리아의 군주는 대공(Archduke)이라고만 불렀다. 아무튼 프란시스 2세와 프란시스 1세는 같은 사람이다. 후세는 그를 2중 황제(Doppelkaiser)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오스트리아 제국을 수립한 1804년부터 신성로마제국이 종말을 고한 1806년까지의 2년동안 두 개의 황제 타이틀을 모두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성로마제국이란 간단히 말하여 지금의 독일과 오스트리아와 그 영향권에 들어 있는 나라들의 집합체이다. 그러므로 프란시스는 2년동안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통치하는 황제였던 것이다. 신성로마제국의 내막이 일견 복잡하게 보이지만 자꾸 읽어보면 윤곽을 잡을수 있고 역사적으로 재미가 있다.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은 로마가톨릭의 정통을 주장하는 제국이므로 가톨릭에 물들어 있는 유럽제국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호프부르크 내부광장에 있는 프란시스 2세 기념상.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서 그런지 로마인의 의상을 입고 있다.

 

[요셉플라츠의 프란시스 1세]

호프부르크에 연결되어 있는 국립도서관 앞 광장인 요제프스플라츠(Josefsplatz)에는 프란시스 1세의 기마상이 있다. 로마의 황제처럼 토가(Toga)를 입었으며  월계관을 쓰고 있는 모습이다. 오스트리아를 제국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프란시스 1세 황제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겸직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런 복장을 했다는 것이다. 프란시스 1세 오스트리아 황제는 오스털릿츠의 패배 이후에도 계속하여 나폴레옹 반대운동을 주도하였다. 대표적인 나폴레옹 반대활동은 이른바 ‘나폴레옹 전쟁’이었다. 오스트리아는 이 전쟁에서 패배의 고배를 마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란시스 1세는 프랑스와 심심하면 전투를 벌였으나 결과는 계속 굴욕적인 패배만 맛보는 것이었다. 가장 굴욕적인 일은 자기의 딸인 마리 루이제(Marie Louise)공주를 나폴레옹에게 마지못해 결혼시킨 것이다. 마리 루이제와 나폴레옹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이름을 ‘제국의 수도’(Reichstadt)라고 불렀다. 프란시스 1세의 아버지는 레오폴드 2세(Leopold II)였으며 어머니는 스페인의 카를로서 4세(Carlos III: Charles III: 1747-1792)의 딸인 마리아 루이자(Maria Luisa: 1745-1793)였다. 프란시스 1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1년후, 어머니도 세상을 떠난 것은 기억할만한 사항이다. 프란시스 1세는 어떤 인물이었는가? 그의 생애는 어떠했는가? 이제부터는 편의상 그의 이름을 프란시스라고만 표현토록한다.

 

 프란시스1세 오스트리아제국 황제

 

[플로렌스의 왕자]

프란시스는 1768년 2월 12일 이탈리아 투스카니의 수도인 플로렌스(Florence: Firenze)에서 태어났다. 당시 투스카니 공국은 합스부르크의 속령이었다(1765-1790). 합스부르크 왕조의 일원인 프란시스의 아버지 레오폴드는 대공은 투스카니 공국의 대공으로서 재직하고 있었다. 레오폴드는 저 유명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女帝)의 둘째 아들이며 마리 앙뚜아네트의 오빠이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세상을 떠난후 진작부터 정사에 관여하고 있던 큰 아들 요셉이 마리아 테레지아의 뒤를 이어 제국을 다스렸다. 요셉은 두 번이나 결혼했지만 자녀가 없었다. 따라서 요셉 황제의 다음 타자는 프란시스의 아버지 레오폴드였으며 이와 함께 프란시스도 왕위 계승 2순위가 되었다. 프란시스에게는 동생들이 여럿 있었다. 플로렌스에서 동생들과 지낸 세월은 즐거운 것이었다. 그러나 황제 계승 순위 2위로 윤곽이 들어나자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장래 황제로서의 교육을 받아야 했으므로 ‘사람은 낳아서 한양으로 보낸다’는 말과 같이 16세 때에 플로렌스로부터 삼촌 요셉이 황제로 있는 비엔나로 보내졌다. 프란시스는 비엔나의 궁정에서 황제인 삼촌 요셉의 지도아래 엄격한 교육훈련을 받았다. 요셉황제는 프란시스를 강하고 능력있는 황제로 만들기 위해 거의 매일 직접 훈육하였다. 제대로 못하면 잘 할 때까지 반복 훈련을 했으며 어떤 때는 ‘엎드려뻗쳐!’까지 할 정도로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요셉 황제는 비엔나에 올라온 프란시스를 처음 보고 ‘뭐 이런 형편없는 아이가 있단 말인가?’라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만큼 차기 황제 계승자로서 기본이 안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생 레오폴드(프란시스의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어 ‘아니, 무슨 아이를 이렇게 키웠다는 말이냐? 도대체 못마땅하다. 행동이 민첩하지도 못하고 생각하는 것도 어설프다. 엄마의 치마폭에만 휩싸여 자란 형편없는 아이와 같다. 게다가 자기만 제일로 알고 있고 남을 생각하는 자세가 부족하다.’고 썼다.


[아버지 레오폴드의 죽음]

프란시스는 요셉 황제의 교육을 무척 두려워했다. 지나치게 엄격하고 철저했기 때문이었다. 프란시스는 너무나 교육이 힘들어서 시간만 있으면 혼자 지내기를 좋아했다. 그런 프란시스를 보고 요셉 황제는 ‘야, 이놈아, 그러니까 더 자기만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는 거야! 얼른 나오지 못해!’라며 꾸지람을 주었다. 요셉 황제는 프란시스가 자기 자신을 억제할줄 모르고 자기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제국의 장래를 위해서는 걱정스러운 일이었다. 이후 요셉 황제는 교육 방법을 바꾸어 프란시스를 차분하게 지도하였다. 나중에 프란시스는 삼촌인 요셉 황제를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존경하고 숭배한다고 말했다. 프란시스는 비엔나 왕궁에서의 교육이 끝나자 헝가리에 있는 제국의 연대에 보내졌다. 그는 이곳에서 군인으로서 훌륭하게 적응하였다. 삼촌인 요셉 황제의 교육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프란시스가 플로렌스에서 비엔나로 온지 6년후, 요셉 황제가 세상을 떠났다. 예정대로 프란시스의 아버지 레오폴드가 황제에 올랐다. 레오폴드는 형인 요셉 황제가 세상을 떠나기 두어해전부터 비엔나에 자주 와서 요셉 황제를 위해 제국의 정치에 관여했었다. 새로 황제가 된 레오폴드는 형님 폐하가 구상했던 제국의 영광회복을 위해 그야말로 불철주야 노력했다. 결과는? 극심한 피로가 겹쳐 건강이 악화되었다. 레로폴드는 새로 황제가 된지 1년후 병에 걸려 고생하다가 그 다음해인 1792년 3월 1일 오후 요단강을 건넜다. 그때 레오폴드의 나이는 44세였다. 그리하여 이제 막 24세 생일을 보낸 프란시스가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합스부르크 제국이라고 하는 커다란 다민족 공동체를 통치하는 프란시스에게 나폴레옹의 자유와 평등 주장은 위협이었다. 프란시스는 프랑스와 여러 가지로 부담이 되는 관계에 있었다. 프란시스가 황제가 된지 얼마 안되어 고모(姑母)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에서 길로틴에 목이 잘리는 비참한 일이 생겼다. 프란시스가 마리 앙투아네트를 만난 일은 없다. 그리고 아버지 레오폴드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남매간이지만 그다지 친밀하게 지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 앙투아네트의 길로틴 사건은 오스트리아 황제로서 대단히 불쾌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실은 프랑스 혁명정부의 대장인 조르즈 당통(Georges Danton)이 체포되어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석방을 위해 프란시스와 협상을 하려 했던 일도 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석방하겠으니 대신 저쪽 독일에 있는 영토를 내 놓으라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프란시스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석방시키는 대가로 제국에 손해가 되는 어떠한 양보도 하고 싶지 않았다. 훗날 프란시스는 프랑스 혁명전쟁에 오스트리아군을 파견하여 왕정을 지원코자 했으나 나폴레옹군에게 패배하였다. 결과, 캄포 포르미오(Campo Formio)조약이 체결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라인강 좌안지대를 프랑스에게 양도하였고 대신 베니스와 달마티아(Dalmatia)를 소유한다는 조약이었다. 프란시스는 제2차 및 제3차 연립기간 중 또다시 프랑스에 대하여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연합군이 오스털릿츠에서 대패하자 프란시스는 프레스부르크(Pressburg)조약을 받아들이지 않을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신성로마제국은 붕괴되어 독일은 나폴레옹의 입김에 따라 현재의 구도로 재구성되었으며 한편 오스트리아의 위세는 크게 약화되었다.     

 

1809년 프란시스는 다시한번 프랑스를 공격하였으나 또 패배하였다. 이번에는 어쩔수 없이 프랑스와 손을 잡았고 라인강 좌안에 있는 합스부르크 영토의 상당부분을 프랑스에 양보하였다. 나폴레옹이 비엔나에 입성하여 쇤브룬궁전에 기거하던 것도 이때였으며 프란시스가 패전국으로서 딸 마리-루이제(Marie-Louise)를 나폴레옹에게 시집보내야 했던 것도 이때였다. 이로써 프란시스는 기본적으로 나폴레옹 제국에 속하는 영주의 형태가 되었다. 이후 일어난 나폴레옹 전쟁으로 오스트리아는 말할수 없이 쇠약해져서 그때까지 독일의 주인으로 행사하던 신성로마제국의 권리를 포기하고 새로 등장한 프러시아 제국에 모든 것을 양보해야했다. 치욕이었다. 프랑스에 대한 프란시스의 대항은 다시 솟아났다. 이번에는 영국, 러시아, 프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나폴레옹에 대항하였다. 마침내 프란시스를 주축으로한 연합국은 프랑스를 완전히 무릎 꿇게 하는데 성공했다. 유명한 트라팔가 해전은 이때의 전투였다. 이로서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 이후, 유럽의 판도를 재편성하는 주역을 맡게 되었다. 프란시스는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Clemens von Metternich) 재상을 대표로하는 비엔나 회의(Congress of Vienna)를 주관하였다. ‘회의는 춤춘다.’(Die Kongress tanzt)라는 말은 이때에 나온 유명한 말이다. 1815년 ‘비엔나 회의’는 독일 연맹을 수립하였다. 신성로마제국에서 살아남은 나라들의 연합이었다. ‘비엔나 회의’는 프란시스의 개인적인 승리일 뿐이라고 할수 있다. 왜냐하면 그 후에 러시아의 알렉산더 황제와 프러시아의 빌헬름 황제가 프란시스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루이18세를 프랑스의 왕으로 삼는다는 비밀협상을 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 당시 바스티유를 공격하는 시민군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은 프란시스의 마음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프란시스는 어떤 형태이든 급진주의(Radicalism)를 불신했다. 1794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군부에서 프랑스의 쟈코뱅(Jacobin)과 같은 과격공화주의 음모가 적발되었다. 당시 주모자는 체포되어 처형되었지만 이들은 실은 그 음모의 일각에 불과했다. 당시 헝가리 영주였던 프란시스의 동생 알렉산더 레오폴드(Alexander Leopold)는 프란시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여러 명의 가담자를 체포하였지만 아직도 배후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한 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프란시스는 다시 명령을 내려 음모에 가담했던 여러 명의 장교들을 체포하고 그 중 두명은 교수형에 처한후 이들의 시신을 광장에 전시하였고 나머지는 투옥하였다. 투옥된 장교들중 대부분은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하여 목숨을 잃었다. 프란시스는 기본적으로 남을 믿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제국의 요소요소에 비밀경찰 네트워크를 만들어 반체제 인사들을 감시하였다. 비밀경찰 얘기가 나왔으니까 말이지만 프란시스의 아버지인 레오폴드는 투스카니 공국을 통치할 때에 유럽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비밀경찰 네트워크를 운영한바 있다. 하기야 자기 나라가 아닌 이탈리아에서 통치하자면 비밀경찰을 운영하지 않을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프란시스도 아버지의 비밀경찰 운영에 대한 영향을 받았던 것 같았다. 프란시스의 비밀감시 대상은 자기의 형제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예를 들어 동생들인 카를과 요한이 무슨 회의에 참가하고 무슨 활동을 했는지는 당장 프란시스에게 보고되었다. 검열도 강화되었다. 신문이나 연극에 대한 내용은 거의 모두 검열을 받아야 했다. 유명한 극작가인 프란츠 그릴파르처(Franz Grillparzer)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때 그의 연극이 공연취소 된 일이 있다. 그릴파르처는 검열 당국에 이유를 물어 보았다. 대답은 ‘우리들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런 공안정국임에도 불구하고 프란시스는 자신이 대단히 공개적이고 누구와도 편하게 대화를 나눌수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래서 1주일에 두 번씩 매일 아침 신하들과 공개모임을 통해 제국의 정치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참석자는 황실에서 지위 고하를 고려하지 않고 무작위로 선정하였다. 하지만 프란시스의 말 한마디는 그대로 법이었다. 그러므로 아침 공개모임 참석자들은 한국의 공무원들처럼 복지부동하던지 또는 ‘잘 알겠습니다! 폐하! 어찌하여 우리는 폐하와 같은 생각을 하지 못하는가요?’라면서 아첨을 떨던지 해야 했다. 그러던중 1804년 프란시스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자격으로 자기 자신을 오스트리아 황제에 임명하였음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2년후인 1806년에는 빈사상태에 이른 신성로마제국을 개인적으로 마감한다고 선언했다. 이 두가지 조치는 헌법에 위배되는 것이었지만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요제프스플라츠에 있는 요제프 2세의 기마상

 

[말년의 프란시스]

그런 프란시스는 의외로 가정을 중시한 사람이었다. 프란시스는 자기의 뒤를 이어 황제를 계승할 아들 페르디난트에게 정치 강좌를 하면서 ‘가화만사성이다. 가정이 잘 운영되어야 나라도 잘 운영되는 것이다.’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말해 주었다. 그래서인지 프란시스의 초상화를 보면 일부러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족들에 둘러싸여 있는 그림이 많다. 1835년 3월 2일, 프란시스는 갑자기 열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다. 향년 67세였다. 동원될수 있는 가족들은 모두 프란시스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장례식은 대단했다. 시신은 3일 동안 성슈테판성당에 안치되어 만조백관들이 끊임없이 조문하였다. 프란시스는 관례에 따라 합스부르크의 황실납골당(Kaisergruft)인 카푸친교회 지하에 안치되었다. 황비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았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프란시스는 네 번이나 결혼했다. 첫 부인은 프란시스가 20세 때 결혼한 독일 뷔르템베르크(Würtemberg)의 엘리자베트 공주였다. 엘리자베트는 2년후 원자 아기씨를 생산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두 번째 부인은 프란시스가 22세 때에 결혼한 시실리의 마리아 테레자(Maria Theresa) 공주였다.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프란시스의 뒤를 이어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가 된 페르디난트이다. 시실리의 마리아 테레자와는 17년동안 함께 살았다. 세 번째 부인은 프란시스가 38세 때에 결혼한 오스트리아-에스테(Austria-Este)의 마리아 루도비카(Maria Ludovika)공주였다. 1816년까지 8년동안을 함께 살았다. 마지막 부인은 1816년부터 1835년 프란시스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함께 살았던 바바리아의 카롤리나 아우구스타(Carolina Augusta) 공주였다. 프란시스는 이상 네명의 부인으로부터 7명의 자녀를 두었다. 큰 딸 마리 루이제(Marie Louise)는 세기의 영웅이라고 하는 나폴레옹의 두번째 부인으로 시집간 사람이다. 다음이 아들로서 프란시스의 뒤를 이어 오스트리아 황제가 된 페르디난트이다. 베토벤은 프란시스 황제 시대에 비엔나에서 활동하였다. 교향곡 제3번 영웅(Eroica)은 나폴레옹을 찬미하려고 작곡했지만 그가 황제에 오른다는 소식을 듣고 제목을 지웠다는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는 작품이다. 가곡의 왕 슈베르트도 프란시스 황제 시절에 비엔나에서 활동했다.

 

프란시스 2세의 딸 마리 루이스와 나폴레옹 사이에서 태어난 나폴레옹 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