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여제 마리아 테레자 (Maria Theresa)
1740-1780
마리아 테레자는 누구인가? 650년에 걸친 합스부르크 왕조의 역사에서 유일한 여군주였다. 마리아 테레자는 오스트리아를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대공비(Archducess)로서, 그리고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여왕(Königin)으로서 무려 50년을 군림한 여걸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제국의 실질적인 황제라는 의미에서 여제(女帝)라고 불렀다. 마리아 테레자는 남편 프란시스1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으므로 신성로마제국의 황비(Empress)라는 타이틀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남편 프란시스가 정사에는 관심이 없고 만고강산이었기 때문에 제국의 정사는 거의 모두 마리아 테레자가 맡아 처리했다. 마리아 테레자는 1736년, 19세 때에 프랑스 로레인 가문의 프란시스(Francis)와 결혼하였다. 마리아 테레자는 남편 프란시스와의 사이에서 1738부터 1756년까지 18년동안 무려 16명의 자녀를 두었다. 어떤 기록에는 15명의 자녀를 두었다고 하지만 딸 하나는 사산(死産)하였으므로 그런 뜻에서는 15명이라고 할수 있다. 마리아 테레자는 거의 매년 연년생을 생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사에 소홀함이 없었던 대군주였다. 마리아 테레자는 모든 11명에 이르는 딸들에게 마리아(또는 마리)로 시작하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예를 들면 마리아 엘리자베트, 마리아 안나, 마리아 카롤리네, 마리아 크리스티나, 마리 아말리에, 마리 앙뚜아네트(마리아 안토니아) 등이다. 프랑스의 루이 16세와 결혼했으나 나중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마리 앙뚜아네트는 마리아 테레자의 자녀들을 16명으로 계산하면 15번째가 된다. 마리아 테레자의 큰 아들 요셉(나중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요셉2세)은 아버지 프란시스1세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였으며 예에 의하여 오스트리아 대공, 헝가리-보헤미아의 왕으로도 즉위하였다. 그러나 말이 황제 및 대공 및 왕이었으며 어머니 마리아 테레자가 뒤에 버티고 있어서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요셉은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자와 함께 오스트리아의 섭정으로서 발령받아 근무하다가 마리마 테레자가 서거한 후에야 비로소 오스트리아의 대공이 되었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군주는 왕이라고 부르지 않고 대공(Archduke)이라고 불렀다. 마리아 테레자의 둘째 아들 레오폴드는 형 요셉이 두번이나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왕세자가 없이 세상을 떠나자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으며 아울러 오스트리아 대공 및 헝가리-보헤미아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마리아 테레자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유일한 여성 군주였을뿐만 아니라 가장 훌륭한 업적을 이룩한 합스부르크 왕조의 위대한 군주였다.
마리아 테레자 여제
마리아 테레자는 저 유명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The War of the Austrian Succession)의 주인공이었다. 오스트리아의 군주를 대공이 아니라 황제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마리아 테레자의 손자, 즉 둘째 아들 레오폴드의 아들인 프란시스2세때 부터였다. 합스부르크 왕조가 면면히 이어온 신성로마제국이 대단원의 막을 내린 것도 바로 프란시스2세 때였다. 또 한가지 마리아 테레자와 관련하여 중요한 사항이 있다. 마리아 테레자가 프랑스의 로렌인(Lorraine) 가문의 프란시스와 결혼함으로서 합스부르크-로렌인(독일어로는 로트링겐)가문이 시작된 것이다. 일반 사람들로서는 어떤 가문이 새로 시작되던 말던 별로 관심이 없겠지만 역사학자들에게는 그나마 대단히 중요한 사항이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쓴 마리아 테레자의 부군 프란시스1세
[아버지는 샤를르 6세]
마리아 테레자는 1717년 5월 13일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의 세례명은 마리아 테레자 �부르가 아말리아에 크리스티나(Maria Theresa Walburga Amaliae Christina)였다. 하지만 나중에는 간단히 마리아 테레자라고 부르게 되었다. 유럽의 왕실 역사에서 마리아 테레자라는 이름은 여럿 나온다. 오스트리아를 제국이라고 처음으로 부르기 시작한 프란시스2세(Francis II)의 왕비인 시실리의 마리아 테레자(Maria Teresa)도 있고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자도 있다. 혼돈이 된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합스부르크의 마리아 테레자만큼 위대한 여걸은 없었기 때문이다. 마리아 테레자의 아버지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샤를르6세(Charles IV: 1685-1745)였고 어머니는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Elisabeth Christine: 1691-1750)였다. 어머니는 브룬스뷔크-볼펜뷔텔(Brunswick-Wolfenbuttel)왕가의 공주였다. 유럽에는 작은 왕가들이 수도 없이 많기 때문에 그걸 다 기억하는 사람은 유럽 왕실을 연구하는 족보학자들 이외에는 없을 것 같다. 그러므로 그저 그런 가문과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 편하다. 마리아 테레자의 아버지 샤를르(카를)는 55세 쯤에 득병하여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더 이상 제국을 통치할수 없다고 생각했다. 샤를르에게는 큰 아들 레오폴드 요한(Leopold Johann)이 있었다. 그러나 레오폴드 요한은 어릴때에 요단강을 혼자서 건너 갔기 때문에 남아 있는 자녀라고는 두 딸 뿐이었다. 아버지 샤를르는 큰 딸 마리아 테레자의 사람됨과 그릇을 심히 미쁘게 보고 다음 황제로 삼는다는 과감한 칙령을 선포했다. 이른바 1740년의 독단조치(Pragmatic Sanction)라는 사항이었다. 이같은 조치는 결국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The War of the Austria Succession)이 일어나게 만든 것이었다. 8년 동안의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전사했는지 모른다.
마리아 테레자의 아버지 샤를르6세(카를6세)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샤를르6세가 1740년 독단적으로 큰딸 마리아를 다음 황제로 삼는다고 선포함으로서 야기되어 무려 8년을 끈 전쟁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여자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주장으로 일어난 전쟁이었다. 기독교에서 여자는 원죄의 원인제공자라는 인식이 강했으므로 기독교를 수호하는 신성로마제국으로서 여자를 황제로 삼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주장이었다. 각국에서의 반발이 거세자 마리아 테레자는 우선 자기는 헝가리 및 보헤미아의 여왕 겸 오스트리아의 대공비 겸 파르마(Parma)의 대공비로 즉위하고 남편인 프란시스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승계토록 하려고 시도했다. 그러자 신성로마제국의 제후들은 ‘그 사람 그거 뭐하는 사람이야! 프랑스 출신이 아니잖나?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어?’라면서 또 반발하였다. 그러던중 프러시아의 프레데릭2세가 1740년 12월 중순, ‘나는 샤를르 황제의 독단적인 조치(Pragmatic Sanction)에 무조건 반대한다!’면서 그 주장을 실력으로 보여주기 위해 합스부르크의 속령인 실레지아를 침공하였다. 여기에 바바리아와 프랑스가 동조하였다. 신성로마제국 측에서 ‘아니, 당신 뭔데 남의 영토를 공격하고 난리인가?’라고 항의하자 프레데릭은 ‘합스부르크 제국에 속하여 있는 여러 지역에서 영토에 따른 분규들을 산재하여 있는바 이를 본인이 먼저 해결코자 실레지아를 공격했다’고 하면서 누구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오르도록 할지 결정하기 전에 먼저 영토문제부터 단판을 짓자고 요구하였다. 프러시아의 프레데릭이 합스부르크에 대하여 영토문제를 내걸고 노골적으로 공격하자 바바리아의 샤를르 알베르(Charles Albert) 왕은 ‘나도 따지고 보면 합스부르크 왕조의 일원이다. 마리아 테레자는 여자이므로 군주로서의 자격이 없다. 내가 적임자다’라고 나섰다. 그렇게 하여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한 마리아 테레자 산하의 세력과 프러시아의 프레데릭를 지지하는 세력들 간의 전쟁이 무려 8년이나 지속되었다. 싸움은 서로 손해만 주었을 뿐 지지부진하였다.
마리아 테레자의 어머니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한편, 전쟁인 한창이던 1742년 바바리아와 프러시아는 서로 좋은게 좋은 것 아니냐면서 다른 제후들을 설득하여 바바리아의 왕세자 샤를르7세(1697-1745)를 새로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했다. 아직도 샤를르6세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그런 행동을 한 것이다. 병석에 누워 있던 샤를르6세로서는 '야, 그거 세상 참 무섭다'라고만 말했을 뿐 어서 속히 큰 딸 마리아 테레자의 군대가 못된 프러시아와 바바리아를 물리치기만을 기도하였다. 마리아 테레자는 아버지 샤를르6세가 ‘장녀 마리아 테레자를 제국의 다음 후계자로 삼겠다’고 칙령을 내리고 세상을 떠난 1740년부터 실질적으로 합스부르크를 대표하는 군주로서 활동하였지만 그렇다고 아버지의 타이틀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이어 받은 것은 아니었다. 전쟁 당사국들은 전쟁의 원인제공자인 샤를르6세가 저 세상으로 떠나자 더 이상 죽어라고 싸울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더군다나 자기들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새로 뽑은 샤를르7세가 한창 나이인 48세에 갑자기 황천으로 가게 되어 상황이 이상하게 되었다. 결과, 1748년 독일 아헨에서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 간에 이른바 액스-라-샤펠르 평화조약(Aix-la-Chapelle)이 맺어졌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오스트리아를 Status quo ante bellum, 즉 As thing were before the war(전쟁 이전의 원상대로) 존속키로 합의한 조약이었다. 이 말이 무엇인가하니 새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하자는 것이다.
마리아 테레자의 아버지 샤를르6세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3년동안 명목상 재직한
샤를르7세
그리하여 마리아 테레자의 남편인 프란시스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되어 왕관을 쓰게 되었다. 이와 함께 마리아 테레자 자신은 오스트리아 대공비 겸 헝가리 및 보헤미아의 여왕 겸 파르마의 여왕으로 공식 즉위하였다. 다만, 오스트리아는 혼 좀 나야 하므로 실레지아(Silesia)를 프러시아에게 넘겨야 했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의 여파는 이것뿐이 아니었다. 합스부르크라는 모자를 함께 쓰고 있던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이후 완전히 따로 놀게 되었다. 이것을 German Dualism(2원적 독일)이라고 한다. ‘우리는 한 민족, 한 언어, 한 나라’라는 생각이 전쟁후 ‘우리는 딴나라’로 바뀐 것이다. German Dualism은 훗날 독일 국수주의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나아가 독일 통일이라는 나치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오른 남편 프란시스는 정사(政事)의 거의 모두를 부인 마리아 테레자에게 일임하고 자기는 그저 놀러 다니며 편안한 생활만 했다. 그런데도 자식 농사는 열심히 지어서 결혼 생활 18년동안 15명(또는 16명)의 자녀를 두게 되었으니 감탄할 일이다.
11세 때의 마리아 테레자
[프러시아와의 대결]
와신상담은 마리아 테레자에게도 적용되는 사자성어(四字成語)였다. 프러시아와의 전쟁으로 피폐해진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자는 무엇보다 군대를 강화할 필요성을 크게 느꼈다. 마리아 테레자는 아버지 샤를르6세 시절에 비하여 제국의 군대를 배로 증강하는 목표를 세웠다. 그러자면 나라의 재정이 충실해야 했다. 마리아 테레자는 세금제도를 개혁하고 중앙에 전국의 세금을 총괄하는 부서를 두어 국가의 재정수입과 지출을 관장토록 했다. 마리아 테레자는 경제부흥에 힘을 쏟았고 교육을 개혁하여 국민의 수준을 높이도록 했으며 아울러 상공과 농사를 증진하였다. 이같은 일련의 개혁조치들은 오스트리아를 점점 부강한 나라로 만들었다. 황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기왕에 있던 초라한 궁전을 완전 개축하였다. 오늘날의 쇤브룬 궁전이다. 1756년, 마리아 테레자는 이만하면 프러시아와 전쟁을 벌여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에 앞서 마리아 테레자는 제국의 외교정책을 재편하였다. 우선 영국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대신 프랑스 및 러시아와 손을 잡았다. 이를 마리아 테레자의 외교혁명이라고 부른다. 이렇듯 마리아 테레자의 행보가 빨라지자 프러시아의 프레데릭은 ‘웃기네!’라며 선수를 쳐서 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인 작소니(Saxony)를 재빠르게 공격하였다. 이를 ‘7년 전쟁’이라고 부른다. 전쟁은 마리아 테레자에게 유리한듯 보였다. 그러나 프랑스가 제대로 역할을 해주지 못하여 지지부진해졌다. 프랑스는 당시 신대륙 미국에서 정착민들을 도와 영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어서 정신이 없었다. 1763년, 마리아 테레제는 수많은 전상자를 낸 7년 전쟁을 마감하지 않을수 없었다. 마리아 테레자와 프레데릭은 이른바 ‘유버투스베르크 조약’(Treaty of Jubertusberg)을 체결하였다. 쌍방은 모든 적대적인 행동을 중지하며 프러시아의 실레지아 소유를 다시 한번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실레지아는 오스트리아 영토였으나 10여년전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의 결과로 합스부르크가 프러시아에게 양보했던 곳이었다. 마리아 테레자는 이번에도 성공하지 못했으나 오스트리아의 국력이 전과 같지 않다는 점은 분명이 보여주었다.
카이저그루프트의 마리아 테레자와 부군 프란시스1세의 기념상
[카이저그루프트에서 다시 만나다]
마리아 테레제는 ‘합스부르크는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바바리아의 왕위계승문제에 개입하여 ‘바바리아 왕위계승전쟁’을 지원하였다. 지난날 오스트리아 왕위계승문제 때문에 열국으로부터 곤혹을 받은 기억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때문이었다. 바바리아 왕위계승전쟁은 오스트리아에게 별다른 소득도 없이 끝났다. 하지만 적어도 합스부르크에 마리아 테레자가 있다는 것을 크게 인식시켜준 것이었다. 오스트리아는 점차 유럽의 강호로 부상하게 되었다. ‘7년 전쟁’이 끝난지 2년후인 1765년, 마리아 테레자의 남편 프란시스가 세상을 떠났다. 일설에는 너무 방탕한 생활을 해서 명을 단축했다는 얘기가 있다. 아무튼 프란시스의 죽음으로 마리아 테레자는 큰아들 요셉(Joseph)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만들었다. 이번에는 아무도 반발하지 않았다. 마리아 테레자는 남편 프란시스가 바람깨나 피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무척 사랑했다. 마리아 테레자는 남편의 사후 178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15년 동안 검은 상복만 입었다. 프란시스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전용납골당인 카이저그루프트(Kaisergruft)에 안치되었다. 마리아 테레자는 마치 정조대왕처럼 시간만 있으면 남편의 묘소를 찾았다. 말년에 비대해진 마리아 테레자의 빈번한 납골당 방문을 위해 전용 엘리베이터까지 설치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에피소드이다. 나중에 마리아 테레자는 미리 만들어 놓은 관에 남편과 합장되었다. 카이저그루프트에 있는 마리아 테레자와 프란시스의 관은 대단히 화려하다. 두 사람의 실물대 모습이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관(棺) 위에 설치되어 있다. 마치 부활한 두 사람이 다시 만나는 모습을 보는 것과 같다.
미술사박물관과 자연사박물관 중간에 있는 마리아 테레자 광장의 기념상
마리아 테레자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후 '날더러 어찌 살라고 먼저 가시었나이까?'라면서 매사에 의욕을 잃었다. 물론 계속 개혁을 주도했지만 전과 같지는 않았다. 그는 실지(失地)인 실레지아를 다시 찾으려고 무던히도 노력했지만 남편 프란시스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저 평화를 유지하는 외교정책을 채택했다. 마리아 테레자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8년 및 프러시아와의 7년전쟁 등 실로 15년에 이르는 전쟁을 치루었다. 결과는 무엇인가? 별로 없다. 그는 성공하지 못하는 전쟁에 더 이상 관련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마리아 테레자는 큰 아들 요셉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만든후 이어 요셉을 오스트리아의 섭정으로 임명하여 장래에 대비하였다. 요셉은 기본적으로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자와 달랐다. 서로 의견이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계몽적 개혁의 방법에 있어서 그러했다. 마리아 테레자는 아들 요셉의 활동이 점점 활발해지고 자기는 점점 쇠약해지자 양위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세상 떠날 때까지 양위하지 않았다. 대신, 아들 요셉에게 보다 많은 권력을 주었다.
마리아 테레자의 부군 프란시스1세 신성로마제국 황제
마리아 테레자는 합스부르크의 다른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다. 어린 시절의 교육도 예수회(Jesuits)로부터 받았다. 그래서인지 상당히 보수적이고 검소했다. 우선 옷차림부터가 그러했다.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옷차림이었다. 파리로 시집간 막내딸 마리 앙뚜아네트가 허랑방탕한 생활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나 한심스러워서 계속 '사치하지 말라, 노름하지 말라'면서 질타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더구나 남편 프란시스의 사후에는 무려 15년동안 검은 상복만 입었다. 상복은 아무리 잘 입어도 상복일 뿐이었다. 걸레는 아무리 잘 빨아도 걸레라는 것 처럼! 마리아 테레자는 보수적이기 때문에 다른 종교에 대하여는 배타적인 면이 있었다. 마리아 테레자는 아버지 샤를르6세가 세상을 떠나고 대권을 잡은 이듬해인 1741년 프라하에서 유태인을 추방하였다. 마리아 테레자에게는 유태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장본인들이라는 생각이 남아 있었다. 그보다도 유태인들이 경제를 잡고 제국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생각도 크게 작용했다. 영국과의 동맹을 철회한 것도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마리아 테레자는 헨리8세가 주창한 영국교회(성공회)를 개신교의 이단이라고 간주했다. 그러므로 영국을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종교문제를 떠나서 다른 면에서는 여러 업적을 남겨 놓았다. 마리아 테레자는 1752년 ‘테레지아 군사아카데미’를 설립했다. 훌륭한 장교들을 생산하기 위해서였다. ‘테레지아 군사아카데미’는 사관학교로서는 세계 최초였다. 이어 1754년에는 비엔나공과대학을 설립하였다. 그는 이미 운영되고 있는 비엔나대학교에 의과대학을 신설하여 의술의 보급에도 노력하였다. 세계적인 비엔나 미술사박물관과 자연사박물관도 마리아 테레자의 업적중 하나이다.
제국의 영화를 보여주는 비엔나 미술사박물관 앞 광장의 마리아 테레자 기념상
[천연두와의 전쟁]
1760년대에는 천연두가 창궐하였고 황실 가족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리아 테레자도 천연두에 감염되었다. 그는 1767년 이제 얼마 살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여 마지막 성사(聖事)를 받았다. 다행히 그는 얼마후 회복되었다. 이후, 마리아 테레자는 예방접종(牛痘)을 크게 지원하여 자녀들 모두가 우두를 맞도록 했다. 말년에 이른 마리에 테레자는 국가의 중요한 법규를 정비하는 일에 많은 정성을 쏟았다. 1771년, 마리아 테레지아는 요셉과 함께 로봇특허(Robot Patent)라는 개혁안을 내놓았다. 농노는 지주에게 노동을 제공하는 대신 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법안은 기득권의 반발로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농노들에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또 다른 법안은 마녀사냥과 고문을 금지한 것이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역사상 처음으로 참수형 제도를 금지했다. 대신 중죄인은 강제노역에 종사토록 했다. 1774년에는 의무교육을 도입하였다. 공무원들을 교육받은 사람들로 임용한다는 의도에서였다. 그전까지는 혈연, 지연 등이 중심이 되어 공무원들이 특채되었다. 마리아 테레자의 또하나 새로운 제도는 전국 도시, 특히 비엔나에서의 순찰을 강화한 것이다. 야간에 거리에서 수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심문토록 한 것이다. 이 제도로 거리질서가 많이 확립되었다. 특히 매춘행위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체포한 창녀들은 동부의 오지(奧地) 도시로 보냈다. 당시 어떤 작가가 ‘동부에 미인들이 특별히 많이 사는 마을이 있다’고 기록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마리아 테레자로서는 바람직한 일이었다. 일각에서는 이 제도가 바람기 많은 남편 프란시스를 가정으로 돌아오게 하는 역할도 했다고 평가했다.
비엔나의 명소 마리아 테레자 기념상 앞에서의 필자 (2005. 9)
기념상 아래의 기마상들은 마리아 테레자의 유명한 장군들
[합스부르크 왕조의 구원자]
마리아 테레자는 1780년 11월 29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68세. 훗날 역사학자들은 마리아 테레자를 합스부르크 왕조의 구원자(savior)라고 평가했다. 마리아 테레자는 합스부르크 왕조를 근대에 이르기까지 존속토록 굳건한 반석을 마련해 준 인물로 평가받았다. 마리아 테레자에 대한 수많은 호칭 중에서 다음 네가지는 역사적으로 의미를 갖는다.
- Her Royal Highness Archduchess Maria Theresa of Austria(오스트리아 대공비 전하): 1717. 5. 13 - 1740. 10. 20
- Her Majesty The Queen of Hungary and Bohemia(헝가리 및 보헤미아 여왕 폐하): 1740. 10. 20 - 1745. 9. 13
- Her Imperial Majesty The Holy Roman Empress(신성로마제국 황비 폐하): 1745. 9. 13 - 1765. 8. 18
- Her Imperial Majesty The Dowager Holy Roman Empress(신성로마제국 황대비 폐하): 1765. 8. 18 - 1780. 11. 29
마리아 테레자는 헝가리의 여왕으로 등극했지만 실제로는 왕(König)이었다. 그러나 호칭에서는 여왕(Königin)이라고 부른다.
마리아 테레자 전성기의 합스부르크 제국(괄호안은 수도)
1. 보헤미아(프라하) 2. 부코비나(체르노비츠) 3. 카린티아(클라겐푸르트) 4. 카르니올라(라이바흐) 5. 달마티아(스팔라토) 6. 갈리치아(렘베르크) 7. 쿠스텐란트(트리에스트) 8. 남부 오스트리아(비엔나) 9. 모라비아(브륀) 10. 잘츠부르크(잘츠부르크) 11. 실레지아(트로파우) 12. 스티리아(그라츠) 13. 티롤(인스부르크) 14. 북부 오스트리아(린츠) 15. 포라를베르크(Vorarlberg: 브레겐츠) - 트란스라이타니아 16. 헝가리(부다페스트) 17. 크로아티아 및 슬라보니아(아그람) 18. 보스니아 및 헤르체고비나(사라예보)
[마리아 테레자와 유일한 동생 마리아 안나는 겹사돈]
마리아 테레자에게는 여동생이 하나 있었다. 마리아 안나(Maria Anna)였다. 1718년 9월 18일 비엔나에서 태어나 1744년 12월 16일 향년 26세의 젊은 나이로 브뤼셀에서 세상을 떠났다. 언니 마리아 테레자와는 한살 차이이다. 마리아 안나는 1744년 1월 7일 비엔나의 아우구스틴 교회에서 샤를르 알렉산더(Charles Alexander: 1712-1780)와 결혼식을 올렸다. 샤를르 알렉산더가 누구냐 하면 바로 언니 마리아 테레자의 남편, 즉 마리아 안나의 형부인 프란시스 스테픈의 남동생이다. 로레인 가문의 형제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자매와 결혼한 것이다. 마리아 안나와 샤를르 알렉산더가 언제 어떻게 만나 사랑에 빠졌는지는 잘 모른다. 아마 언니 마리아 테레자와 혼담이 진행될 때에 알게되었고 그후 거의 10년 동안 남들 몰래 사랑을 속삭여 왔던 것 같다. 처음에 마리아 안나가 아버지인 샤를르6세에게 형부의 동생과 결혼하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펄쩍 뛰면서 결사반대를 외쳤다. 아버지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가지 전에는 안된다'면서 막무가내 했다. 아버지로서는 둘째 딸 마리아 안나를 제국을 위해 정치적으로 좀 더 유용한 곳에 시집보내려 했다. 아버지가 1740년 세상을 떠나자 마리아 안나는 가문의 총수가 된 언니 마리아 테레자에게 하소연했다. 마리아 안나가 언니에게 '사랑에 무슨 국경이 있고 무슨 촌수가 필요합니까?'라며 줄곧 읍소하자 결국 바위처럼 단단한 언니의 마음도 봄눈처럼 녹았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결혼에 골인하였다. 마리아 테레자가 로레인의 프란시스 스테픈과 결혼한지 9년후, 아버지 샤를르 6세가 세상 떠난지 4년후였다.
마리아 안나
결혼후 마리아 안나와 남편 샤를르 알렉산더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브뤼셀로 떠났다. 그 이전까지 총독으로 있던 숙모(아버지 샤를르6세의 여동생) 마리아 엘리자베트가 1741년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후임이 공석으로 있었던 터였다. 마침 그 때에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 간의 전쟁이 일어났다. 샤를르 알렉산더는 오스트리아를 위해 용감하게 전선으로 나갔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의 조국인 오스트리아를 위해 빛나는 전공을 세웠다. 그는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대왕을 유일하게 패배시킨 장군이었다. 전쟁중 마리아 안나는 브뤼셀에 남아 있었다. 임신중이었다. 그해 12월 16일 마리아 안나는 출산하다가 아이와 함께 세상을 떠났다. 거의 10년동안 사랑을 위해 난관을 헤쳐나가서 겨우 결혼했는데 1년도 넘기지 못하고 사랑하는 두 사람은 영원한 작별을 해야 했다. 더구나 두 사람의 사랑의 결실인 아이까지 하나님이 데려갔다. 마리아 안나의 유해는 비엔나로 옮겨저 황실납골당(Kaisergruft)에 안치되었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12월 말이었다. 그후 남편 샤를르 알렉산더는 세상 떠날 때까지 36년동안 아내를 추모하며 재혼하지 않고 지냈다. 세기의 사랑이었다.
로레인의 샤를르 알렉산더 왕자. 세기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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