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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를 옹호한 요셉 2세 (Joseph II)

정준극 2008. 1. 23. 09:31

계몽주의를 옹호한 요셉 2세 (Joseph II)

1765-1790


1765년부터 1790년까지 25년동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겸 오스트리아의 대공, 헝가리 왕-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 보헤미아 왕, 이탈리아 왕이라는 타이틀로 신성로마제국과 오스트리아를 통치한 요셉 2세는 일반적으로 계몽주의의 옹호자라고 불렸다. 볼테르의 영향을 받아 나라의 계몽운동을 크게 주도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 프란시스 1세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올랐으며 1780년부터는 어머니 마리아 테레자의 서거와 함께 명실공이 합스부르크 영토를 다스리는 군주가 되었다. 요셉은 두 번이나 결혼했다. 첫 부인은 파르마의 이사벨라 마리아(Isbella Maria)였다. 요셉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하기 2년전에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는 딸을 하나 두었으나 어릴 때에 세상을 떠났다. 두 번째 부인은 바바리아의 마리아 요제파(Maria Josepha)공주였다. 바바리아와의 관계를 위해 정략적으로 결혼하였다.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 자녀는 없었다. 그래서 동생 레오폴드가 신성로마제국 황제 겸 오스트리아 대공의 바톤을 이어 받았다. 사족이겠지만 요셉2세는 1741년 3월 13일 비엔나에서 태어나 1790년 2월 20일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요셉 2세

 

[어머니는 마리에 테레자]

요셉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의 시작된 와중에서 태어났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은 마리아 테레자를 신성로마제국의 여황제로 삼겠다는 마리아 테레자의 아버지 샤를르 6세의 독단적인 조치에 대하여 신성로마제국에 속하여 있는 열국들이 반기를 들어 일어난 8년동안의 전쟁이다. 그런 전력이 있는지라 요셉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자는 아들 요셉이 나중에 혹시라도 왕위 쟁탈전에 휩싸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려서부터 정치에 대하여는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했다. 대신, 자기 자신의 취미 개발에 중점 두는 교육을 받도록 했다. 그 결과 요셉은 수박 겉핥기 식의 교육밖에 받지 못했다. 하지만 요셉은 나이가 들면서부터 새로운 사조, 즉 계몽주의 사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특히 볼테르의 저서들을 통해 지금까지 접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사상을 습득하였다. 당시 처음 발간된 백과사전도 그의 지식 함양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미련한 생각이지만 당시에는 누구든지 공부를 많이 하여 지식을 많이 가지면 곤란하다는 이상한 생각이 높은 양반계급에서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요셉은 달랐다. 제국이 강국이 되려면 백성들의 지식 수준이 높아야 한다고 믿었다. 요셉은 뛰어난 지식인이었다. 많은 분야에서 조예가 깊었다. 특히 음악에 있어서는 스스로 작곡도 하고 악기도 연주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요셉플라츠(광장), 국립도서관 앞에 있는 요셉2세의 기념상.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임을 강조하기 위해 마르크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본따서 로마식 토가와 면류관을 썼다.

  

정치인으로서 요셉은 신성로마제국의회의 멤버로 활동했었다. 요셉이 주로 한 일은 어머니 마리아 테레자가 의회 또는 다른 정치적 회합에서 발표할 연설문을 작성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스피치 라이터(Speech Writer)였다. 요셉은 어머니를 위해 쓴 연설문에 자기의 정치사상을 은근히 표현하였다. 요셉이 쓴 연설문의 핵심은 나중에 그가 황제가 되고 나서 정치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요셉은 백성을 위하는 군주였다. 그는 교회의 지나친 권세를 경계하였으며 농노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도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하였다. 사실 농노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는 정책은 어머니 마리아 테레자도 무던히 노력하던 것이었으나 별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는 무역진흥을 위해 마치 우리나라 새정부의 인수위처럼 불필요한 규제들을 철폐했고 학문을 보급하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여러 기구들을 설치했다. 요셉은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대왕, 러시아의 카타리나 여제에 필적하는 계몽주의 성군이었다. 훗날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요셉과 대등하다고 할만한 군주는 그의 동생으로 황제가 된 레오폴드뿐이었다.

 

 요셉이 태어난 쇤브룬 궁전

 

[프랑스 혁명]

1765년 아버지 프란시스(프란시스 1세)가 세상을 떠나자 요셉(요셉 2세)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어머니 마리아 테레자의 그늘에서 벗어날수 없었다.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의 통치는 마리아 테레자가 공동섭정으로서 거의 전담하였고 요셉은 명색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겸 오스트리아의 대공이었지만 아무런 결정권도 없었다. 요셉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오른후 무려 15년동안이나 계속하여 어머니 마리아 테레자의 영향아래 있었다. 어쩔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것 같았다. 아버지 프란시스는 비록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올랐지만 정사(政事)를 거의 모두 부인인 마리아 테레자에게 맡기고 자기는 유유자적의 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요셉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기는 했지만 워낙 마리아 테레자의 영향력이 커서 명함도 못 내밀 형편이었다. 요셉은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일을 처리했다. 마리아 테레자는 세상을 떠나기 한두해 전인 1777년, 요셉에게 누이동생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만나보고 오라고 부탁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누이동생을 만나러 프랑스를 방문해야 하니 체면이 문제였다. 그러나 어머니 마리아 테레자의 분부를 듣지 않을수 없어서 궁리 끝에 팔켄슈타인(Falkenstein)백작이라는 가명으로 프랑스를 방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왕실은 팔켄슈타인백작이 누구인지 잘 알기 때문에 극진히 환대하였다. 이 때 프랑스의 지식인들은 요셉이 그들과 같은 계몽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는데 대하여 놀라움으로 찬사를 보냈다. 프랑스에서 요셉은 프랑스 왕조의 몰락을 예견하며 무척 걱정하였다. 누이동생인 마리 앙뚜아네트의 철모르는 사치생활을 보고 언젠가는 국민들의 손에 곤혹을 치룰 것을 예견했다. 만일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가 요셉의 걱정을 받아 들여 겸손하게 대책을 세웠다면 사정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결국 요셉의 누이동생 마리 앙투아네트는 1793년 길로틴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 때는 요셉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동생 레오폴드(역시 마리 앙뚜아네트의 오빠)가 황제로 있었다. 하지만 레오폴드로서도 프랑스의 내정문제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요셉 황제의 누이동생인 마리 앙뚜아네트 (12세 때 모습)


 [볼테르의 영향]

1780년 11월 27일 어머니 마리아 테레자가 드디어 세상을 떠나자 요셉은 이제 어떠한 구속도 받지 않게 되었다. 그는 즉시 정부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었다. 마치 오늘을 기다렸다는 듯 풀 스피드로 행정개혁업무를 추진하였다. 가장 중점을 둔 것은 계몽사회를 만드는 일이었다. 요셉은 만인을 위한 계몽사회를 만들기 위해 귀족들까지도 누를수 있는 전제군주, 즉 황제인 자신이 권위를 가지고 직접 업무를 추진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요셉은 황제로서 직접 모든 분야에서의 계몽사업을 추진하였다. 요셉은 어머니 마리아 테레자가 추진하려다 실패한 농노 해방을 과감히 추진하였다. 교육을 강화하고 교회에 속한 토지를 사회에 환원토록 했으며 성직자의 계급을 축소하였다. 이와 함께 예배의 자유를 보장하였고 독일어를 무조건 공용어로 사용토록 했다. 이같은 조치들은 18세기 계몽시대의 대표적인 것이었다. 신성로마제국에서 요셉이 로마 가톨릭에 불리한 반성직자적 조치를 취하고 이어 교회의 재정에 영향을 주자 로마에 있던 교황 비오 6세(Pius VI)는 요셉에게 잘 부탁한다고 말하기 위해 몸소 비엔나를 방문하였다. 요셉은 교황을 정성껏 영접했지만 그렇다고 가톨릭교회에 대하여 태도를 바꾼 것은 아니었다. 요셉은 가톨릭교회가 지나친 기득권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실로 요셉은 기성 기톨릭 교회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요셉은 프랑스에 갔을 때 지식의 보고라고 하는 소르본느 대학교의 도서관을 방문한 일이 있다. 도서관장이 요셉을 어떤 방으로 안내하였다. 종교서적들이 보관되어 있는 방인데 문을 열자 상당히 어두웠다. 도서관장은 요셉에게 ‘폐하, 어두워서 글씨를 읽을수 없으시니 송구하기 그지 없나이다!’라고 말했다. 요셉은 ‘아, 걱정 말아요! 종교라는게 원래 밝은 것과는 거리가 멀지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요셉은 어머니와는 달리 유태인에 대하여도 어느정도 긍정적인 정책을 유지하였다. 어머니 마리아 테레자는 유태인들을 싫어하여 프라하에 있는 유태인들을 추방했었다. 한편, 요셉은 프리메이슨(Freemason)이 자기의 계몽철학과 모순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묵시적인 지원을 보냈다. 하지만 요셉 자신은 프리메이슨에 가입하지는 않았다.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사 볼테르(24세 때의 모습)

 

[볼테르: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 원래 이름은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Francois-Marie Arouet). 볼테르(Voltaire)는 필명이다. 1694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1778년 프랑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작가, 수필가, 자연신주의자, 철학자, 음악가, 승마인이었다. 요셉 황제와는 거의 같은 시대를 살았으며 어쩌면 그렇게도 사고방식과 취미가 같은지 모른다. 볼테르는 억압받는 민중들의 해방을 주창했으며 종교의 자유, 그리고 공평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주장했다. 볼테르는 사회개혁의 역설하였으며 프리메이슨과 같은 자유주의 사상을 선도하였다. 그는 미국과 프랑스 혁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으며 합스부르크의 요셉 황제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벽에 막힌 개혁]

1781년 요셉은 마침내 농노제도를 폐지했다. 이어서 몇년후에는 소작농들도 노동의 댓가로 임금을 받아야 하며 임금은 반드시 현금으로 주어야 한다는 칙령을 내렸다. 여기에는 만만치 않은 반발이 있었다. 우선 봉건귀족들이 반대했지만 실제로 소작 농노들도 반대했다. 봉건귀족들로서는 임금을 줄만한 돈이 부족했으며 농노들로서는 그나마 소작농을 빼앗길 것 같아 반대했다. 1787년 요셉은 어머니 마리아 테레자의 영향을 받아 사형제도를 폐지하였고 신체의 일부, 즉 손을 절단하고 눈을 빼내며 혀를 자르는 등의 형벌을 금지했다. 사형제도는 요셉이 세상을 떠난지 몇 년후인 1795년 다시 부활하였지만 그 때까지 약 10년동안은 신성로마제국과 오스트리아에서 사형집행이 없었다. 요셉에게 커다란 부담을 준 사건은 1788년에 러시아와 협동하여 오토만 제국을 물리치자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었다. 요셉은 오스트리아군을 이끌고 오토만 제국과 대적하기 위해 진군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군은 전선에서 오토만 대군이 갑자기 기습해 오는줄 알고 겁이 나서 산산이 도망갔다. 이로써 요셉의 계획은 대실패로 돌아갔다. 그 해 가을, 요셉은 건강이 많이 악화되어 지친 몸으로 비엔나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거의 죽음을 목전에 둘만큼 위중하였다. 때를 같이하여 벨기에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오스트리아군이 동부의 오토만 전선으로 이동한 기회를 이용해서였다. 이와 함께 헝가리에서도 귀족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다른 지방에서도 농민들의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요셉은 외톨이가 되었다. 수상이라는 사람인 카우니츠(Kaunitz)는 2년동안 요셉을 문병하지 않았다. 동생인 레오폴드는 플로렌스에 남아 있으면서 오지 않았다. 결국 지치고 병약한 요셉은 자기의 계몽계획을 신하들이 이행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크게 절망하였다. 1790년 1월 30일, 비엔나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날 요셉은 추진중인 모든 개혁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한달도 되지 않은 2월 20일 불귀의 객이 되었다. 향년 49세. 요셉은 비엔나의 황실납골당(제국 영묘: Kaisergruft)에 안치되었다. 그는 죽기 전에 묘비에 이렇게 써 달라고 부탁했다. ‘여기 모든 일에 실패한 요셉 2세가 누워있다.’ 이 얼마나 겸손한 표현인가! 물론 요셉이 그렇게 써 달라고 해서 그대로 써넣을 동생이 아니었다.

 

 요셉 황제는 세상을 떠난후 어머니 마리아 테레자와 아버지 프란시스와 함께 카푸친교회 지하실의 황실납골당(Kaisergruft)에 안치되었다. 황실납골당 입구 앞에서의 필자. (2004. 7). 오스트리아의 역사적 기념물이라는 표지판 아래에 KAISERGRUFT 라고 써 있다. KAISERGRUFT는 오스트리아를 더 알기 위한 필수 코스이다.


[후사가 없이 작고]

요셉의 첫 부인은 파르마의 이사벨라 마리아(Isabella Maria)공주였다. 파르마 대공 필립의 딸이다. 요셉은 이사벨라 왕비를 무척 사랑하였다. 두 사람은 딸 둘을 두었다. 첫 딸의 이름은 존경하는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마리아 테레자(Maria Theresa)라고 했다. 불행하게도 아이는 어릴 때 세상을 떠났다. 둘째 딸은 첫째 딸은 낳은 다음해에 낳았다. 가장 친했던 시누이 마리 크리스틴(마리아 크리스티네)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그러나 태어난지 며칠 후에 세상을 떠났다. 그 여파 때문인지 이사벨라는 그 해에(1763년) 천연두로 세상을 떠났다. 22세의 한창 나이때였다. 이사벨라가 세상을 떠나자 요셉은 망연자실, 삶의 의욕을 잃을 정도였다. 황실에서는 바바리아의 마리아 요제파(Maria Josepha)공주와 정략적인 결혼을 하였다. 바바리아와의 관계를 생각해서 바바리아 선제후인 샤를르 알베르(Charles Albert)의 딸과 결혼했다. 샤를르 알베르는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테제자가 연관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에서 반대편에 서서 한 노릇 했던 사람이다. 요셉의 두 번째 부인인 마리아 요세파는 4년후인 1767년 세상을 떠났다. 요셉은 두 번째 부인인 마리아 요세파가 세상을 떠난후 29년이나 더 살다가 세상을 하직했다. 단 다시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서! 마리아 요제파와의 결혼은 대단히 불행했다. 거의 각방을 쓰지 않으며 지냈다. 마리아 요세파는 남편은 안중에도 없었고 요셉의 누이 동생인 카롤리네와 단짝이 되어 지냈다. 요셉과 마리아 요세파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그래서 요셉의 남동생인 레오폴드가 요셉2세의 뒤를 잇게 되었다. 

 

  

 요셉의 첫 부인 이사벨라 마리아 (1741-1763: 왼쪽)와 두번째 부인 마리아 요제파(1739-1767)


[예술을 애호한 요셉]

18세기 계몽시대의 군주들이 대개 그러했듯, 요셉도 예술의 옹호자 겸 후원자였다. 요셉은 모든 예술 활동이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일적인 방향에서 이루어지기를 희망하였다. 요셉은 특히 ‘음악 황제’이라고 불릴 정도로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모차르트에게 독일어 오페라를 작곡토록 의뢰한 것은 요셉이었다. 요셉은 베토벤에게 자기를 위한 장송 칸타타를 작곡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베토벤의 장송 칸타타는 너무나 연주하기가 어려워 연주되지 못했다. 피터 셰이퍼(Peter Shaffer)의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요셉은 살리에리의 말에 좌우되는 줏대 없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셰이퍼는 아마데우스의 내용이 픽션일 뿐이며 역사적인 사실대로만 표현되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요셉 2세 시대에는 하이든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차르트의 바로 뒤에 서 있는 하얀 가발의 키큰 양반이 요셉 황제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요셉 황제의 첫 부인 마리아 이사벨라]

요셉 황제의 첫 부인인 마리아 이사벨라는 파르마 대공 필립의 딸로서 어린 시절은 마드리드의 필립 5세 궁전에서 지냈다. 그후 아버지가 파르마 대공으로 부임하자 이탈리아 북부의 파르마로 가서 생활했다. 이사벨라는 바이올린을 잘 연주했고 철학과 신학 서적을 읽기를 좋아했다. 이사벨라는 지성적인 여인이었다. 이사벨라는 1760년 10월 6일 요셉 황제와 결혼했다. 이사벨라가 18세, 요셉이 19세 때였다. 요셉은 이사벨라의 지성과 착한 마음씨를 무척 사랑했다. 공부를 많이 한 이사벨라는 어려운 수학문제도 척척 풀었다. 이사벨라는 아름다움과 지성으로 비엔나 궁정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이사벨라와 요셉의 여동생 마리아 크리스티나(마리 크리스틴)은 제일 친한 친구가 되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도 예술에 조예가 깊었으며 특히 그림 그리기에 재주가 있어서 아래의 초상화는 직접 그린 것이다. 두 사람이 얼마나 친했냐하면 매일 만나 얘기를 나누고 차도 마셨지만 서로 편지를 주고 받은 것을 보면 잘 알수 있다. 실로 이사벨라는 마리아 크리스티나를 깊이 사랑하였다. 어느날 이사벨라가 마리아 크리스티나에게 편지의 한 구절을 보면 '하루는 하나님과 함께 시작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사랑하는 당신을 생각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라고 했다. 이사벨라는 요셉과의 사이에서 딸 둘을 두었다. 결혼한지 2년후인 1762년에 낳은 딸은 할머니의 이름을 따서 마리아 테레자라고 했다. 이듬해에 낳은 둘째 딸의 이름은 사랑하는 시누이의 이름을 따서 마리아 크리스티나라고 했다. 하지만 둘째 딸은 낳은지 얼마 되지 않아 세사을 떠났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이사벨라 자신도 천연두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큰 딸 마리아 테레자는 여덟살 되던 때인 1770년 폐렴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요셉에게는 후사가 없다. 이사벨라는 비엔나 시내에 있는 제국영묘(Kaisergruft)의 마리아 테레자 관 옆에 안치되었다.

 

요셉 황제의 누이동생 마리아 크리스티나(1742-1798). 요셉의 첫 부인인 이사벨라 마리아와 각별한 관계로 지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이사벨라보다 한살 어리다.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애칭은 미미(Mimi)이다. 이 초상화는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그린 자화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