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합스부르크 사람들

전쟁으로 지샌 레오폴드1세(Leopold I)

정준극 2008. 2. 20. 10:48
 전쟁으로 지샌 레오폴드1세(Leopold I)

1640-1705 (재위 1655-1705)


[병약한 황제: 47년을 통치]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레오폴드1세(1640-1705)는 페르디난트3세(1608-1657) 황제와 스페인의 마리아 안나(Maria Anna: 1606-1646)의 둘째 아들이다. 그의 조부모는 스페인의 필립3세와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리타(Margarita)였다. 아버지 페르디난트3세는 페르디난트2세의 뒤를 이어 1637년부터 20년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다. 페르디난트3세의 장남은 헝가리의 페르디난트4세였다. 페르디난트4세는 아버지 페르디난트3세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어야 했으나 1654년 천연두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동생인 레오폴드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것이다. 레오폴드1세는 신체적으로 제대로 성장하지 못해 키가 작고 병약하였다. 더구나 합스부르크의 근친교배로 인하여 입술이 두터운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합스부르크 입술’(Habsburg lip)이라고 한다. 당시의 어떤 사람은 레오폴드에 대하여 ‘걸음걸이는 당당하지만 마치 언제나 무엇을 생각하는 듯 느렸다. 그의 얼굴은 시름에 잠긴것 같았으며 말씨는 서툴렀다. 행동은 천박하게 보였으며 인상은 차갑고 냉담하였다’고 말하였다. 

 

 레오폴드1세

 

[음모를 이기고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다]

레오폴드는 헝가리 왕이었던 형 페르디난트3세가 1654년 천연두로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에 형의 뒤를 이어 헝가리 왕으로 선정되었고 다음해인 1656년에는 보헤미아 왕, 1657년에는 크로아티아 왕의 지위도 차지하였다. 레오폴드의 아버지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3세는 1657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레오폴드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신성로마제국의 새로운 황제로 선임된 것은 그로부터 1년후인 1658년이었다. 왜냐하면 막강한 세력의 마자린(Mazarin) 추기경이 바바리아 선제후인 페르디난트 마리아(Ferdinand Maria: 1636-1679)를 신성로마제국의 새로운 황제로 만들려고 음모를 꾸몄기 때문이었다. 마자린 추기경은 바바리아 왕가 출신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삼음으로서 신성로마제국과 합스부르크의 연결고리를 끊으려 했다. 마자린 추기경의 음모는 비록 성사되지 않았지만 대신 마자린 추기경은 새로 황제가 된 레오폴드1세로부터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스페인을 더 이상 지원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당시 스페인은 합스부르크 왕조의 중요한 구성원이었다. 레오폴드1세가 스페인에 대한 지원을 중지한다는 것은 스페인-합스부르크와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간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대신, 레오폴드1세는 ‘라인연맹’(Leauge of the Rhine)이라고 불리는 독일 제후들의 연합에 합세하였다. 신성로마제국의 근거지는 역시 독일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레오폴드1세를 방해한 마지린 추기경

 

[오토만 제국과의 전쟁]

레오폴드1세는 47년이라는 장기간동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합스부르크를 이끌었다. 아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중에서 가장 오래 자리를 차지했던 황제일 것이다. 레오폴드1세의 오랜 통치는 유럽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커버하는 것이었다. 레오폴드1세의 가장 막강한 적수는 프랑스의 루이14세였다. 루이14세는 과연 대단한 인물이었다. 어떤 면에 있어서는 루이14세가 레오폴드1세를 능가하였다. 레오폴드1세는 전쟁에 진력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직접 참가한 일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전쟁을 준비하고 전쟁을 치루는 일로 소비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컬하다고 말할수 있다. 첫 번째 전쟁은 스웨덴과의 전쟁이었다. 당시 스웨덴 왕 샤를르10세(Charles X)는 헝가리의 기요르기 라코치(Gyorgy Rakoczi)와 연맹하여 레오폴드1세의 오스트리아를 공격하였다. 레오폴드1세는 헝가리왕을 겸임하고 있었으므로 헝가리로서는 왕위를 되찾아오고 싶었던 것이었다. 레오폴드1세는 폴란드와 군사동맹을 맺어 스웨덴과 헝가리 연합군을 물리쳤다. 한시름 놓았다고 생각했으나 더 위험한 적이 도사리고 있었다. 오토만 제국이었다. 오토만 제국은 신성로마제국의 영토이지만 분규가 끊이지 않는 트란실바니아의 내정에 간섭하고 신성로마제국에 대항하였다.1663년부터 오토만 제국과 신성로마제국간의 전쟁이 벌어지지 않을수 없었다. 레오폴드1세는 제국내의 여러 제후들과 연합하여 오토만 제국과의 전쟁을 수행하였다. 심지어 프랑스도 군대를 지원하였다. 이듬해인 1664년 8월, 제국의 위대한 장군인 라이몬도 몬테쿠콜리(Raimondo Montecuccoli)가 성고타르트(Saint Gottahrd)전투에서 오토만터키에 대승을 거두었다. 레오폴드1세는 오토만 제국의 술탄과 20년 휴전조약을 체결하였다. 오토만 제국은 더 이상 신성로마제국에 대하여 창칼을 겨누지 않게 되었다.

 

레오폴드1세를 괴롭힌 프랑스의 루이14세 
                                                           

[프랑스와의 전쟁]

프랑스와는 몇 년간 평화가 유지되었으나 불가피하게 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전쟁은 신성로마제국에 대한 루이14세의 공격적인 정책으로 인하여 불가피했다. 프랑스는 합스부르크가 스페인에 대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더구나 프랑스와 스페인은 영토문제 때문에 분규가 잦았다. 루이14세는 스페인을 위협했고 신성로마제국을 위협했다. 루이14세와 평화롭게 지내고 싶은 레오폴드는 루이14세와 협약을 맺고 신성로마제국은 스페인 문제에 대하여 관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14세는 신성로마제국의 독일쪽 영토에 대하여도 간섭하였다. 루이14세는 독일의 몇몇 제후들과 손을 잡고 신성로마제국을 위협하였던 것이다. 심지어는 터키까지 끌어들여 레오폴드의 신성로마제국을 괴롭혔다. 레오폴드가 황제로 재직하는 동안 주로 프랑스와의 갈등 및 분규는 너무나 복잡하여 차마 자세히 설명하기 힘들 정도이다. 전쟁도 많았고 협정도 많았다. 유럽은 마치 용광로처럼 들끓었다. 본 블로그에서 ‘합스부르크의 사람들’은 15세기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합스부르크 왕조에 어떤 사람들이 등장하여 통치하였는지를 소개하는 것이므로 세세한 역사상황까지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점을 본 블로그 방문자들은 크게 양해하여 주기 바란다. 결론적으로 프랑스와의 분규는 뜨거워졌다가 소강상태를 유지하다가 다시 뜨거원지는 등 곡절이 많았지만 유럽의 지도를 크게 다시 그리는 일은 없었다. 


[내우의 주역 헝가리]

레오폴드1세가 영토를 통치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골치 덩어리는 헝가리였다. 소요와 저항이 끊일 사이가 없었다. 사실 주요 원인제공자는 레오폴드1세 자신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제국내에서의 개신교를 분쇄코자 했기 때문이다. 헝가리는 1671년 신성로마제국의 로마가톨릭에 대하여 가장 큰 저항을 벌였다. 레오폴드1세는 자기가 무슨 로마 가톨릭의 성자나 된듯 개신교인 헝가리의 반항을 분쇄하고 이후 가혹할 정도로 헝가리를 탄압했다. 그로부터 10년쯤 지나서 헝가리에 대한 탄압정책은 완화되었고 갈등도 수그러지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헝가리의 저항운동 재발은 막을수 없었다. 1683년 오토만 제국의 술탄은 헝가리의 봉기가 성공할 것으로 믿어 대규모의 군대를 보내 오스트리아를 공격하였다. 오토만 제국의 병사들은 비엔나까지 거침없이 진군했다. 비엔나는 그해 7월부터 두달동안 오토만 터키의 공성으로 포위되어 있었다. 이것이 유명한 제2차 비엔나 공성이었다. 레오폴드1세는 파싸우(Passau)로 피신하였다. 사태가 이쯤되자 독일의 제후들은 잘못하다가는 자기들도 위험에 처할 것으로 생각하여, 그리고 겉으로는 신성로마제국을 이슬람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병력들을 보냈다. 독일연합군은 레오폴드1세의 처남인 로레인 공작 샤를르(Charles)가 지휘하였다. 샤를르는 오토만 터키를 비엔나에서 물리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샤를르공작의 기념상은 호프부르크 앞의 헬덴플라츠(영웅광장)에 우뚝 서있다. 또 한 사람의 최고 공로자가 있다. 폴란드의 얀 조비에스키(Jan Sobieski: 1629-1696)였다. 조비에스키의 폴란드 구원병은 비엔나 북쪽 칼렌버그(Kahlemberg)에 집결하여 비장한 각오로 전투를 벌인 결과 오토만 터키군을 일거에 물리쳤다. 그리하여 1683년 9월, 비엔나는 공성의 위협에서 벗어났다. 오늘날 칼렌버그 정상의 교회에는 당시 조비에스키의 공적이 명판에 적혀있다. 조비에스키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군주로서 어찌나 용맹하였던지 이후 오토만군은 조비에스키라는 이름만 들어도 혼비백산하여 도주하기에 바빴다고 한다. 그러나 비엔나 사람들은 구세주 조비에스키를 어떻게 대우하였나? 폴란드 돼지라면서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터키의 비엔나 공성을 물리친 폴란드의 얀 조비에스키


[터키와 헝가리에 대한 성공]

사보이의 오이겐(Eugen) 공자의 활약에 대하여도 언급하지 않을수 없다. 오이겐 공자는 제국의 군대를 이끌고 오토만 터키와 헝가리 연합군을 여러 전투에서 완전히 물리쳐 다시는 합스부르크의 영토를 넘보지 못하도록 했다. 오이겐 공자는 1687년의 모하츠(Mohacz)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이래 1697년의 젠타(Zenta)전투에 이르기까지 10년동안 헝가리의 저항을 잠재우고 오토만 터키의 세력을 헝가리에서 몰아내는 전공을 세웠다. 오이겐 공자는 신성로마제국과 오스트리아의 안전을 확고하게 보장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레오폴드1세는 샤를르 공작의 기념상과 함께 오이겐 공자의 기념상을 비엔나의 헬덴플라스(영웅광장)에 세웠다. 오이겐 공자의 활약으로 1699년 오토만 제국의 술탄은 레오폴드1세와 칼로비츠(Karlowitz)조약을 맺었다. 합스부르크가 헝가리 전체 지역에서 확실한 통치권을 가진다는 내용이었다. 한편, 레오폴드1세는 전쟁을 종료하기 직전, 헝가리에 대한 합스부르크의 위상을 강화하였다. 브라티슬라바(Bratislava: 당시에는 Pressburg)에서 열린 헝가리 의회는 헌법을 개정하여 앞으로 헝가리는 국왕을 선거하지 않으며 대신, 합스부르크 왕조의 사람이 당연히 맡는 것으로 만들었다. 이에 따라 레오폴드1세의 큰 아들 요셉1세가 헝가리의 세습국왕으로서 대관식을 가졌다.

 사보이의 오이겐 공자. 오스트리아를 위해 헌신한 명장


 

[쇠약해지는 신성로마제국]

레오폴드1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있는 동안 제국의 실체는 점차 허약해지고 중앙적인 권력은 분산되기 시작했다. 여기에도 역시 프랑스의 원인제공이 있었다. 레오폴드1세는 프랑스와의 전쟁이 불가피해지자 제후들의 지원을 받기 위해 우선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의 선제후(선거후: Elector)에게 왕이라는 타이틀을 수여했다. 이는 상대적으로 황제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조치였다. 따라서 황제는 신성로마제국의 통치자라기보다는 오스트리아 대공과 헝가리 및 보헤미아의 군주로서 그나마 실권을 갖게 되었다. 레오폴드1세의 재임중 제국헌법의 주요조항이 개정된 것도 제국의 쇠약에 일조한 것이었다. 1663년 제국의회는 해산되고 대신 레겐스부르크(Regensburg) 회의(Session)라는 기구가 되었다. 황제의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이와 함께 하노버(Hanover) 공작이 선제후가 되어 황제 선거인단의 멤머로 격상되었다. 하노버 공국의 영향력이 커진 것은 그만큼 합스부르크의 영향력이 위축되었다는 것과 같다. 레오폴드1세는 그제서야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인식하였지만 어쩔수 없이 변화에 적응해야 했다.

[반개혁운동 지원]

개혁운동은 간단히 말하여 종교개혁(Reformation)에 따른 개신교(Protestant)운동이다. 반개혁(Counter-reformation)운동은 종교개혁을 반대하는 운동이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로마가톨릭의 옹호자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종교개혁을 반대해야했다. 레오폴드1세는 반개혁운동의 앞에 선 예수회(Jesuits)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레오폴드1세는 반개혁운동의 철두철미한 옹호자였다. 레오폴드1세는 선왕들인 페르디난트2세와 마티아스로부터 이어진 30년전쟁의 후반후 10년을 치루어야 했다. 30년 전쟁은 페르디단트2세가 보헤미아의 개신교를 핍박함으로서 시작된 전쟁이었다. 레오폴드1세는 전제군주제를 적극 지지하였다. 황제로서의 권력을 최대한 활용코자 했다. 물론 말년에는 황제의 권위가 무척 쇠약해져 속이 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루이14세를 상대한 인물은 자기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레오폴드1세는 근면하며 공부하는 황제였다.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공무를 보며 공무원들을 지휘하였다. 그는 말년에 이르러 국제정치적 역량까지도 훌륭하게 보여주었다. 그는 군인생활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외부에 나가서 활동하는 것은 무척 좋아했다. 예를 들면 사냥과 승마였다. 레오폴드1세는 음악에 대하여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자기가 직접 오라토리오들과 무용조곡들을 작곡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레오폴드의 음악 애호는 후대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면 손녀인 마리아 테레자, 증손자인 요셉2세 등은 모두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비엔나의 제2구인 레오폴드슈타트(Leopoldstadt)는 레오폴드1세 황제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헝가리에서는 레오폴드는 리포트(Lipot)라고 부른다.

      

[세번 결혼에 10명의 자녀]

레오폴드1세의 얼굴은 합스부르크 남자들의 전형이었다. 특히 턱이 그러했다. 레오폴드의 별명은 ‘돼지주둥이’였다. 이것 역시 합스부르크의 특징이었다. 그는 세 번 결혼했다. 1666년, 그는 조카딸인 마르가레트 테레사(Margaret Theresa: 1651-1673)와 결혼했다 스페인의 필립4세 왕의 딸이었다. 마르가레트 테레사는 금발머리로 유명했다. 화가 디에고 벨라즈케즈(Diego Velazquez)의 걸작 Las Meninas(메니나스)는 금발머리의 마르가레트 테레사를 모델로 한 것이다. 벨라즈케즈는 마드리드의 궁정화가로 있으면서 마르가레트 테레사 공주의 어린 시절부터 아름다운 소녀시절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림으로 그렸다. 스페인 왕실은 이 그림들을 비엔나의 레오폴드에게 보냈다. 약혼자(피앙세)의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아름다운 마르가레트 테레사 공주는 15세 때에 레오폴드와 결혼했다. 레오폴드가 26세 때였다. 마르가레트 테레사 공주는 네명의 자녀를 남긴 채 2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레오폴드의 상심은 무척 컸다. 진정으로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네 자녀중 큰 아들 페르디난트 벤첼(Ferdinand Wenzel: 1667-1668)은 태어난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둘째인 딸 마리아 안토니아는 바바리아의 선제후 막시밀리안1세 엠마누엘(Maximilian II Emanuel)과 결혼했지만 2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셋째인 아들과 넷째인 딸은  태어나자마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레오폴드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마르가레트 테레사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중 아무도 레오폴드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지 못했다.

 

디에고 벨라즈케즈의 '라스 메니나스'. 가운데에 있는 금발의 소녀이다.

 

상처(喪妻)한 레오폴드는 티롤공국의 후계자인 클라우디아 펠리시타스(Claudia Felicitas)와 두 번째 결혼을 하였다. 당시 티롤지방은 합스부르크의 영향 아래에 있었지만 하나의 독립된 공국으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클라우디아 펠리시타스 대공비는 1676년, 2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두 딸을 두었지만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다. 클라우디아 펠리시타스는 비엔나 도미니크 교회의 성도미니크 채플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다. 세 번째 부인은 팔라티네이트(Palatinate)분봉국의 공주인 엘레오노레(Eleonore)였다. 무려 10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중 첫째 아들이 요셉(Joseph: 1678-1711)으로 레오폴드1세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오른 요셉1세이다. 요셉1세가 적당한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나자 다음으로 생존한 동생인 샤를르(카를: 1685-1740)가 요셉1세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이 샤를르가 마리아 테레자의 아버지이다. 그러므로 레오폴드1세 때문에 마리아 테레자가 역사에 등장하게 되었으며 마리 앙뚜아네트도 생겨났다고 할수 있다. 

 

 

비엔나의 마리아 테레지아 플라츠에 있는 마리아 테레자 기념상. 미술사박물관과 자연사박물관의 중간에 있다. 레오폴드1세는 마리아 테레자 여제의 할아버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