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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 (The Affair of the Diamond Necklace)

정준극 2008. 2. 3. 06:50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

(The Affair of the Diamond Necklace)  - Affair of the Necklace

 

재제작한 다이아몬드 목걸이. 프랑스 Château de Breteuil 소장        

    

[왕비의 죽음을 부른 사건]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은 18세기 초, 루이16세와 마리 앙뚜아네트 시절에 파리에서 일어난 희대의 사기극이다. 그런데 이 사건은 보통 사기사건이 아니라 프랑스의 왕정을 무너트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개인적으로는 프랑스 사람들로 하여금 마치 열병에 걸린 것처럼 마리 앙뚜아네트에 대하여 증오심을 불태우게 만든 스캔들이었다. 오죽하면 나폴레옹도 “왕비(마리 앙뚜아네트)의 죽음은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으로부터 비롯되었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이 사건은 마리 앙뚜아네트에게 치명적인 사건이었다. 후대 역사학자들도 사기극의 주역인 라 모트(la Motte)백작부인이 남긴 비망록이 결국은 마리 앙뚜아네트의 목숨을 재촉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군주제의 몰락을 가져오게 한 가장 두드러진 요인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역사학자들은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이 마리 앙뚜아네트를 희생양으로 만든 잔인한 사건이라는 점도 언급했다. 실제로 잔느(Jeanne)라고도 하는 라 모트백작부인이 남긴 비망록은 이미 불이 붙어 있던 프랑스 시민들의 왕실에 대한 불만에 부채질을 하였고 이로써 결국은 프랑스 혁명이라는 대화재를 일으키게 하였다. 사건의 이야기는 복잡하고 길다. 그리고 치사하기도 하고 야비하기도 하다. 사기극의 주역인 라 모트백작부인이 썼다는 비망록도 여러 버전이 나와 있어서 어느 것이 가장 정확한 것인지 모른다. 사건의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와 원래의 스토리가 많이 변색되었다. 최근 제작된 할리우드 영화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은 라 모트백작부인의 비망록을 가장 근접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힐라리 스완크(Hilary Swank)가 라 모트백작부인의 역을 맡아 열연한 영화이다.

 

마리 앙뚜아네트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그린 삽화

 

[희대의 사기꾼 라 모트 백작부인]

라 모트백작부인이란 사람은 누구인가? 고급 사기꾼(con artist)이다. 원래 이름은 잔느 드 생-레미 드 발루아(Jeanne de Saint-Remy de Valois)이다. 간단히 잔느 드 발루아, 또는 잔느라고 부른다. 드 발루아(de Valois)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것을 보면 유명한 발루아 왕실가문의 사람이라고 생각할수 있다. 잔느 자신도 자기가 왕족의 후손임을 강조하고 다녔다. 잔느의 아버지는 프랑스 국왕이었던 앙리2세와 잠자리를 같이 한 어떤 창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앙리 드 생-레미(Henri de Saint-Remy: 1557-1621)의 후손이라고 한다. 잔느의 어머니는 전직이 창녀였다.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잔느도 닥치는 대로 뭇남자들과 잠자리를 같이 했다고 한다. 나중에 잔느는 드 라모트(de Lamotte)백작이라는 사람과 결혼했기 때문에 라 모트백작부인(La Motte라고 쓰기도 함)이라는 호칭을 가지게 되었다. 라모트 백작이라는 사람도 역시 사기성이 농후한 인물이었다. 잔느는 라 모트 백작과 결혼한지 얼마후 별거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혼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작부인이라는 호칭은 유지하였다. 잔느 드 발루아는 파리에서 국왕이 주선해준 연금으로 근근이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재산과 명예에 대한 강한 욕망을 이기지 못하여 세기적인 사기극을 벌이게 되었다. 사기극에는 전남편인 라 모트백작도 한통속이 되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사기극의 상대방이 다름 아닌 마리 앙뚜아네트 왕비였으니 사기극 치고는 대담하기가 이를데 없다.

 

[전함을 살수 있는 가격]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어떤 것인가? 파리 최고의 보석세공사인 뵈머(Boehmer)와 바쎈즈(Bassenge)가 몇년에 걸쳐 만든 목걸이이다. 가운데 줄에는 17개의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으며 다른 줄에는 사파이아가 박혀있는 것이다. 두 사람의 보석상들은 규모와 품질이 같은 17개의 다이아몬드를 구하기 위해 몇 년동안 힘든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값이 얼마인가? 당시 돈으로 1백 60만 리브르(livres)였다. 오늘날의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당시 약 2백만 리브르라고 하면 전함(戰艦) 한척을 살수 있는 액수였다고 한다. 옛날에는 전함이라고 해도 오늘날처럼 전자장비가 구비된 것이 아니고 목선이지만 아무튼 목걸이 하나 값이 전함 한척을 살수 있는 것이라니 대단히 고가의 목거리임에는 틀림없었다. 이 목걸이를 만들기 위해서 파리의 보석상들은 전재산을 털어 넣었으며 그래도 부족해서 은행에서 많은 돈을 빌렸다고 한다.

 

세기의 사기꾼 잔느(라 모트 백작부인) 

                       

[뒤 바리부인을 위해 제작]

그런 귀중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왜 만들게 되었을까? 마리 앙뚜아네트의 시아버지인 루이15세는 정부(情婦)인 마담 뒤 바리(Madame du Barry)에게 너무나 빠져 있어서 물경 2백만 리브르에 해당하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선물로 주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1772년의 일이었다. 오스트리아의 마리 앙뚜아네트가 프랑스의 왕세자 루이 오귀스트(Louis Auguste: 훗날 루이16세)와 결혼한지 2년이 되는 때였다. 당시 마리 앙뚜아네트는 16세의 소녀티가 가시지 않은 새댁이었다. 그건 그렇고 루이15세는 파리에서 제일가는 보석상들인 뵈머와 바쎈즈를 불러 지금까지 볼수 없었던 화려하고 독특한 최고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런 대단한 목걸이를 만들려면 몇 년이라는 기간이 필요하고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두 사람의 보석상들은 전력을 다하여 돈을 구하였고 세계 각국을 다니며 보석을 마련했다. 똑같은 크기와 똑같은 품질의 다이아몬드 17개를 구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들은 마침내 보석들을 구하였고 곧이어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한 때에 공교롭게도 목걸이를 주문했던 루이15세가 천연두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목걸이 제작 작업은 계속되어 얼마후 드디어 화려하고 장엄한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완성되었다. 보석상들은 루이15세가 사겠다고 주문했던 목걸이였으므로 아들인 루이16세가 왕비 마리 앙뚜아네트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사면 된다고 생각했다. 보석상들은 줄을 대어서 루이 16세에게 목걸이에 대한 얘기를 그럴듯하게 전했다. 그런 얘기를 들은 루이16세는 왕비인 마리 앙뚜아네트에게 그런 목걸이가 있어서 선물로 사고자 하니 어떠냐고 물어 보았다. 왕비는 ‘그만한 목걸이를 살 돈이 있으면 나라를 위해 전함 한척을 사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하며 정중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루이15세 자신이 처음에는 정부아 아니라 왕비에게 사주려고 했다가 돈이 너무 많이 드는 바람에 마음을 바꾸어 살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다른 얘기에 따르면 왕비 마리 앙뚜아네트는 다른 여자를 위해 디자인한 목걸이를 자기의 목에 걸고 싶지 않기 때문에 싫다고 했다고 한다. 다른 여자라는 사람이 다름아닌 시아버지 루이15세의 정부로서 평소 자기를 얕잡아 보던 여인이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감정이 있어서 싫어했다는 것이다. 만일 마리 앙뚜아네트가 마담 뒤 바리를 위해 만든 목걸이를 샀다면 그 목걸이에 대하여 내용을 잘 알고 있는 궁정 여인들이 ‘왕비는 자존심도 없나봐! 호호호!’라고 경멸할 것이므로 그점도 고려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루이15세의 정부 마담 뒤 바리

                      

[마리 앙뚜아네트의 거절]

보석상들은 국왕과 왕비가 목걸이를 사지 않겠다고 하자 다른 나라의 왕실이나 대공들에게 팔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접촉하였다. 그러나 모두들 ‘당장은 돈이 없다' '디자인이 내 취향이 아니다’라면서 선뜻 나서지 않았다. 더구나 프랑스의 왕비도 너무 비싸다며 사지 않았는데 다른 나라의 왕비가 그걸 산다면 그나라 국민들로부터 괘씸죄에 걸릴 것 같아 모두들 조심하였다. 몇 년후 보석상들은 목걸이의 주인은 운명적으로 마리 앙뚜아네트 뿐이라고 믿고 1781년 다시 왕비에게 접촉하였다. 마침 그때 마리 앙뚜아네트는 첫 아들이며 다음 왕위 계승자인 루이-조셉을 낳은 직후였다. 보석상들은 국가적인 경사이므로 왕비가 마음을 돌려 흔쾌히 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왕비는 거절하였다. 일설에는 왕비가 거절하면서 못내 아쉬워했다고 하지만 근거는 없다. 이제 잔느(라 모트백작부인)가 등장할 차례이다. 바야흐로 세기적 사기사건의 막이 오르게 되었다.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의 희생양 마리 앙뚜아네트

                        

[잔느의 등장]        

라 모트(La Motte)백작부인이라고 하는 잔느(Jeanne)는 그 목걸이에 대한 소문을 듣자 그 목걸이를 이용하여 부를 거머쥐고 아울러 왕실의 후원을 받아 권세를 누릴 계획을 꾸몄다. 잔느는 라모트 백작(comte de Lamotte)과 결혼하여 백작부인이라는 호칭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겉보기와는 달리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돈이 절실하게 필요했고 남들처럼 궁정에서 멋있는 옷을 입고 재잘거리고 싶었다. 1784년, 잔느는 교묘한 방법으로 비엔나주재 대사를 지낸 로앙(Rohan)의 추기경 루이 르네 에두아르(Louis Rene Edouard)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 잔느는 남자사냥에 있어서 탁월한 재능이 있으므로 겉으로는 성직자인 루이 추기경을 유혹하여 그를 품에 안는 것은 식은죽 먹기였다. 추기경은 프랑스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부자였다. 추기경은 비엔나에서 프랑스대사로 있을 때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에게 마리 앙뚜아네트에 대한 몇가지 비난성 얘기를 의도적으로 발설한바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추기경으로부터 딸에 대한 좋지 않은 얘기를 듣자 당장 파리의 딸에게 어머니로서의 질책을 보냈다. 어머니로부터 꾸짖음을 받은 마리 앙뚜아네트는 기분이 몹시 상하여 도대체 누가 그런 비난을 시작했는지 은밀히 조사한 결과, 루이 르네 에두아르 추기경이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직접 비방의 얘기를 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를 비방하는 내용의 편지까지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보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후 마리 앙뚜아네트는 추기경을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비엔나에서 파리로 돌아온 추기경은 왕비가 자기를 서운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알고 걱정하였다. 그 때 추기경은 프랑스의 수상이 되려고 운동하고 있었다. 추기경은 사람들의 영혼에 대한 문제보다는 세상사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추기경은 왕비의 마음을 잡기 위해 무엇이든지 하고 싶은 상황이었다. 그는 새로 만든 정부인 잔느가 왕비와 가깝다는 소리를 듣고 잔느를 이용하여 왕비의 환심을 사고자 했다. 사기성이 짙은 잔느는 그때 이미 추기경으로부터 상당한 돈을 빌리고 갚지 않은 상태였다. 추기경이 왕비와의 중개를 부탁하자 잔느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추기경을 위해 무슨 일이든지 하겠다고 선선히 나섰다. 잔느는 추기경에게 자기는 ‘왕비의 귀’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까지 말하며 자랑했지만 물론 모두 거짓이었다. 그러므로 잔느로서도 추기경의 부탁을 들어주는 척 하면서 오히려 왕비와 가까워지려는 기회로 삼고자 했다. 그리하여 잔느의 음모가 서서히 피어나기 시작했다.

 

 로앙의 추기경 루이 르네 에두아르


[의문의 편지]

추기경은 탐욕스러운 사람이었지만 남에게 속기 쉬운 사람이기도 했다. 잔느는 추기경과 왕비 사이의 불편한 관계를 해소할 연락을 맡아 하겠다고 나서며 우선 왕비에게 보내는 편지를 한 장 써 달라고 했다. 추기경은 잔느를 믿고 기쁜 마음으로 왕비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지만 당연히 전달되지 않았다. 며칠후 잔느는 추기경에게 왕비로부터 답신을 받아 왔다고 하면서 편지 한장을 보여주었다. 물론 위조편지였다. 잔느 자신이 썼다고도 하고 잔느의 남편이었던 라모트백작이 대신 써주었다고도 하며 또는 잔느의 비서가 썼다는 얘기도 있으나 가장 신빙성 있는 얘기는 잔느의 새로운 애인인 멋쟁이 르토 드 빌레트(Retaux de Villette)가 써주었다고 한다. 왕비가 추기경에게 보냈다는 답장은 아주 부드러운 말씨로 되어 있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왕비가 추기경을 은근히 사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내용이었다. 추기경은 왕비의 편지가 진짜인줄로 믿고 ‘야, 잘만하며 왕비의 침대에도 들어갈수 있겠네!’라며 흥분해 있었다. 아무튼 왕비의 편지에 감격한 추기경은 잔느에게 왕비와 직접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왕비로부터 막강한 신임을 얻고 있다는 잔느로서 왕비의 편지까지 가져다  주었는데 비밀 데이트는 주선하지 못하겠다고 주장할수는 없었다. 잔느의 주선에 의해 추기경와 왕비와의 밀회는 1784년 8월의 어느날 밤, 베르시아유 궁전 정원의 어떤 한적한 곳에서 이루어졌다. 잔느는 왕비와 모습이 비슷한 니콜 르구아이(Nicole Leguay)라는 창녀(일설에는 배우: Nicole le Guay d'Olivia라고도 함)를 왕비처럼 꾸며서 추기경을 만나도록 내보냈다. 추기경은 가짜 왕비인줄도 모르고 사모의 심정으로 장미꽃 한송이를 바쳤다. 가짜왕비는 추기경에게 지난 일은 다 용서하겠으니 앞으로 잘 지내자고 말하여 아주 친절하게 대했다. 추기경은 하늘로 올라간 듯한 심정이었다. 집에 돌아온 추기경은 잔느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치하하며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잔느의 애인 르토 드 빌레트


[사기행각의 전모]

이로써 잔느는 추기경의 확실한 신임을 얻는데 성공했다. 잔느는 이번에는 왕비가 주최하는 자선모임에 필요하다고 하면서 추기경으로부터 거금을 받아냈다. 물론 돈을 받아서는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 잔느는 이 돈으로 옷도 사입고 시종도 부리면서 사교계에 나가 고개를 들고 다녔다. 사교계에서는 왕비와 가까운 사이이며 추기경과는 막역한 사이라고 하는 잔느에 대하여 아무도 무시하지 못했다. 잔느가 단순히 사람들을 현혹하기 위해 왕비와 무척 가깝다는 소문을 내고 다녔는지 또는 왕비가 추기경을 파탄시키기 위해 비밀리에 고용한 사람인지는 아직도 미스터리이다. 어떤 경우이든 보석상인 뵈머와 바쎈즈는 잔느가 왕비와 가깝다는 것을 믿고 아직 팔리지 않은 목걸이를 잔느를 통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팔고자 했다. 바로 잔느가 원하던 바였다. 처음에 잔느는 ‘아니, 내가 그런 일을 어떻게 해요?’라면서 보석상들의 청탁을 거절하였으나 잠시 후에는 ‘여러분들이 그렇게 간청하시니...그리고 왕비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면..’이라면서 판매소개인이 되겠다고 승낙했다. 1785년 1월 21일, 잔느는 보석상들을 만나 ‘왕비께서 드디어 그 목걸이를 사시기로 하셨다’고 전하였다. 보석상들의 기쁨은 하늘 높은줄 몰랐다. 잔느는 보석상들에게 ‘왕비께서는 그 목걸이를 아무도 모르게 사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믿을 만한 사람을 구매 책임자로 임명하시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라고 덧붙여 말했다. 보석상들은 잔느의 말을 듣고 ‘아, 이제야 목걸이를 팔고 빚을 갚게 되는가 보다’라며 그저 감지덕지할 뿐이었다. 얼마후 추기경이 왕비의 구매 책임자라면서 보석상들을 만나러 나타났다. 물론 잔느가 시켜서 나타난 것이다. 보석상들로서는 지체 높은 추기경이 왕비를 위해  목걸이를 사러 왔으므로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추기경은 목걸이 값을 1백60만 리브르로 최종협상하고 대금은 할부로 갚는다고 약속했다. 그러면서 마리 앙뚜아네트의 친필이라는 계약서를 내보였다. 물론 잔느가 준비한 가짜 계약서였다. 이어 추기경은 잔느가 시킨대로 대금을 치루기 전에 왕비께서 최종적으로 다시한번 목걸이를 보고 싶어하신다는 뜻도 전했다. 보석상들로서는 왕비가 미리 보시겠다는데 거절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추기경은 목걸이를 건네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는 잔느와 함께 왕비의 시종이라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추기경은 목걸이를 그 시종이라는 사람에게 전달했다. 물론 잔느와 짜고 나온 가짜 시종이었다. 추기경은 잔느와 왕비의 시종이라는 사람을 완전히 믿었다.  이렇게 하여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잔느의 손에 들어갔다. 그 후의 소문에 따르면 잔느의 남편인 라모트백작이 런던에 나타나 목걸이에 달렸던 다이아몬드를 따로따로 떼어내어 팔려고 했다고 한다.  

 

 문제의 다이아몬드 목걸이


[쿠 드 테아트르]

보석상들은 추기경이 목걸이를 가져간후 대금을 지불할 날짜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얘기가 없자 잔느를 찾아가 만나서 어떻게 된 것이냐고 채근하였다. 잔느는 왕비께서 왕세자 일 때문에 무척 바쁘시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했다. 보석상들은 어서 대금을 받아서 빚을 갚아야 하는 입장이었지만 국왕과 왕비를 믿고 조금 더 기다리기로 했다. 보석상들은 은행에 이자와 함께 갚을 빚이 많아서 곤란하니 제발 빨리 대금을 받도록 해 달라며 잔느에게도 섭섭지 않게 사례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소식이 없자 보석상들은 왕비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어 ‘제발 약속을 지켜주사이다’라고 하소연했다. 보석상들로부터 편지를 받은 왕비는 깜짝 놀라며 ‘나는 목걸이를 받지도 않았고 더구나 사겠다고 말하지도 않았다’고 말하며 오히려 의아해 했다. 보석상들은 왕비에게 다시 편지를 보내 가격 협상에서부터 물건을 전달할 때까지의 상황을 설명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후 극적인 전환(Coup de theatre: 쿠 드 테아트르)이 일어났다. 1785년 8월 15일, 이날은 성모 몽소승천(夢召昇天)기념일이었다. 베르사이유 성당에서의 미사 집전은 바로 추기경이 맡게 되었다. 모두들 국왕과 왕비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국왕과 왕비는 왕실장관을 비롯한 궁정신하들을 이끌고 예정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하였다. 미사가 시작되기까지 조금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추기경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국왕에게 마리 앙뚜아네트가 목걸이 대금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한 계약서를 보여주며 계약금은 자기가 냈으니 계약금과 함께 잔액을 조속히 선처해 줄것을 간청키로 생각했다. 추기경은 국왕도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믿었다. 드디어 추기경이 가짜 계약서를 국왕에게 주고 읽어 보라고 했다. 무슨 내용인지 모르는 루이16세는 추기경이 보여준 서류를 들고 짐짓 큰 소리로 읽었다. 목걸이 대금으로 1백60만 리브르를 지불할 것이며 다만, 할부로 나누어 지불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서한에는 마리 앙뚜아네트의 서명이 되어 있었다. 루이16세는 크게 놀랐다. 그리고 당장 그 서한이 위조라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Marie Antoinett de France라고 서명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de France라고 말은 국왕만 사용할수 있는 것이다. 왕비를 비롯한 그 누구도 de France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루이16세는 추기경과 같은 훌륭한 사람이 어찌하여 그런 위조편지 하나 분간하지 못하고 속았는지 이해할수 없다고 하며 추기경을 국왕과 왕비를 모욕한 죄로 당장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추기경은 바스티유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추기경은 잠시 집에 들려 전에 왕비로부터 받은 편지를 없앨수 있었다. 위조임에 틀림없는 그 편지마저 발각된다면 더 할수 없는 처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서둘러 없앤 것이다. 잔느는 당장 체포되지 않았다. 잔느는 자기가 꾸민 사기극이 곧 탄로날것으로 생각하여 그동안의 서류들을 미리 모두 없앴다. 잔느는 3일후인 8월 18일 체포되었다.


추기경이 루이17세에게 가짜 편지를 보여주고 체포된 베르사이유 궁전 채플 


[사기극의 종말]

경찰은 공범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다. 왕비로 가장했던 창녀 니콜 르구아이(Nicole Leguay)와 잔느의 새로운 애인인 르토 드 빌레트(Retaux de Villette)도 체포되었다. 르토 드 빌레트는 자기가 왕비의 필체로 추기경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고 서명까지 했다고 자백했다. 유명한 협잡꾼인 칼리오스트로(Cagliostro)백작도  목걸이 사기극에 연루된 것으로 밝혀져 체포되었다. 칼리오스트로백작은 당대의 협잡꾼이었다. 겉으로는 연금술사 및 질병 치료사로 알려졌지만 실은 사람들을 미혹시켜 돈을 뜯어내는 협잡꾼이었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추기경과 친교를 맺게 되었다. 칼리오스트로는 미래를 예언할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추기경이 자기의 예언자적 능력을 믿도록 하기 위해 미리 어떤 농부와 각본을 짜고 그 농부가 미래에 대한 환영(幻影)을 본 것처럼 꾸몄다. 미욱한 추기경은 칼리오스트로가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있다고 믿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후로 추기경은 무슨 일이든지 칼리오스트로와 협의하고 자문을 구하였다. 추기경은 왕비로부터 만나자는 편지를 받은후 칼리오스트로에게 앞으로 왕비와 자기의 관계가 어떻게 될것인지 보아 달라고 부탁했다. 칼리오스트로는 잔느와 한통속이었다. 칼리오스트로는 추기경이 왕비의 총애를 받으며 정부에서 대단한 고위직에 오르는 환영을 보았다고 말했다. 사람이 어떻게 미래의 환영을 볼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추기경은 칼리오스트로의 말을 듣고 무척 기뻐했다. 왕비의 사랑을 받으며 총리에 임명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 추기경이 다시 한번 칼리오스트로와 잔느의 협잡에 놀아난 일이 있다. 추기경은 잔느로부터 보석상들을 찾아가 왕비를 대신하여 목걸이를 흥정하도록 부탁받았다. 추기경은 보석상들을 만나기에 앞서 칼리오스트로에게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될지 다시한번 환영을 보아 달라고 부탁했다. 칼리오스트로는 추기경이 막대한 보상을 받고 정부의 고위직으로 임명될 것이라고 말했다. 추기경은 그 말에 자신을 얻어 보석상들을 찾아가 가격협상을 수행했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목걸이를 가지고 와서 잔느에게 전달했다.    


자칭 성자인 협잡꾼 칼리오스트로 백작 


[왕비의 분노]

왕비 마리 앙뚜아네트는 보석상들로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막대한 금액을 청구하는 서한을 받자마자 모종의 사기극이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장 무슨 조치를 취할 형편은 아니었다. 새로 태어난 왕세자를 위해 신경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그보다도 가뜩이나 왕실 사람들이 자기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는 때에 공연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조용히 처리하고 싶었다. 그러다가 추기경이 물색모르고 목걸이 계약서를 국왕에게 보여주고 조속히 돈을 갚아 달라고 하는 바람에 모든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시민들이 알게 되었고 신문이 알게 되었다. 왕비는 자기와는 관계가 없으며 또한 직접 피해를 본 것이 아니므로 더 이상 물의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지만 왕비와 추기경간에 모종의 섹스 관계가 있었다는 것처럼 소문이 나자 도무지 가만히 있을수 없었다. 왕비를 싫어하는 무리들은 이 소문을 눈덩이처럼 불려서 야단법석을 떨었다. 결론적으로 왕비 마리 앙뚜아네트는 도덕적으로 대단히 해이한 여자라는 소문이 날개 돋힌 듯이 퍼졌다. 왕비는 도저히 참을수 없어서 체포된 관련자 모두를 조속히 재판에 회부하여 자기가 이 사건에서 무관함을 어서 밝히고 싶었다. 그래서 남편인 국왕에게 속히 재판을 열어 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였다.

 

[센세이션 재판]

재판은 커다란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명목상으로는 추기경의 죄과에 대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왕비의 명예에 관한 재판이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왕비에 대한 별별 얘기가 다 쏟아져 나왔고 이런 얘기는 신문들을 통해서 곧바로 시민들의 귀에 전달되었다. 얘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어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와 같은 흥미진진한 스토리로 발전하였다. 왕비가 아무리 아무런 혐의가 없다고 해도 한번 떨어진 명예는 다시 회복하기가 어려웠다. 왕비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는 포화상태에 이를 지경이었다. 잔느의 변호사는 유명한 메트르 두아요(Maitre Doillot)였다. 재판에서 패배한 일이 없다는 대단한 변호사였다. 두아요 변호사는 잔느보다 한수 위였다. 변호사는 잔느와 비밀 협상을 했다고 한다. 목적이야 뻔했다. 돈과 섹스였다. 변호사는 잔느가 목걸이를 빼 돌렸기 때문에 거금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한편으로는 잔느와 잠자리를 같이 하는 조건도 내걸었다고 한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언제라도 그런 협상을 할수 있었고 그런 협상을 제안 받는 사람들도(이 경우에는 잔느) 언제라도 응할 태세가 되어있는 것이 세태였다. 소문에 따르면 변호사는 잔느와 잠자리를 함께 했지만 돈은 받지 못했다고 한다. 아직 목걸이의 다이아몬드가 팔리지 않아서였다는 것이다. 거금을 기대했었지만 받지 못한 변호사는 결국 잔느를 변호하지 않았다. 재판관은 잔느의 탄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녀로 분장한 잔느의 살페트리에르 수용소 탈출

 

추기경은 선의의 피해자이지만 국왕과 왕비를 농락한 죄과는 중대하므로 추기경의 직위를 박탈당하고 셰스-디유(Chaise-Dieu)수도원으로 추방되었다. 사기극의 주역인 잔느는 유죄판결을 받아 채찍형과 함께 이마에 죄인이라는 낙인을 찍도록 했다. 사기극에 가담한 살페트리에르 정신병자 감옥에서 무기징역을 살도록 했다. 잔느의 전남편 라모트백작은 런던에 있었기 때문에 화를 피할수 있었다. 자칭 성자(聖者)라는 칼리오스트로는 프랑스로부터 추방당했다. 이탈리아로 간 그는 1795년 프리메이슨 의식(儀式)으로 사람들을 미혹(迷惑)한다는 죄목으로 다시 체포되어 이탈리아의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죽었다. 잔느는 어떻게 되었는가? 채찍질은 형식적으로만 받았다. 아마 형리중에도 잔느와 관계를 맺었던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잔느의 남자관계에 대한 재능은 바스티유 감옥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감옥소장과 그렇고 그런 관계를 맺으면서 놀아났다. 그렇게 놀아나는 것도 모두 계획된 각본이었다. 잔느는 감옥소장과의 친분을 십분 활용하여 바스티유를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잔느는 재판을 받을 때부터 반-앙뚜아네트 분자들의 우상이 되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반-앙뚜아네트 운동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었다. 잔느는 반-앙뚜아네트 분자들의 도움을 받아 하녀로 변장하여 정신병자 수용소를 빠져나와 보트를 타고 세느강을 거슬러 올라가 탈출에 성공했다. 그후 남편 라 모트(La Motte)백작과 함께 런던으로 건너간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전통적인 견원지간이었다. 영국은 프랑스에서 왕실의 미움을 받아 피난 오는 사람들이라면 무조건 환영했다. 감옥소장은 어떻게 되었는가? 몇 달후 폭도들의 손에 붙잡혀 목을 잃었다.

 

추기경이 추방생활을 한 셰스-디우 수도원 전경 

                    

[치졸한 복수]

희대의 사기극을 벌인 잔느는 런던에 오자마자 왕비가 자기의 모든 계획을 망쳤다고 믿어 왕비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다. 그렇게 하여 나온 것이 유명한 Momoires Justificatifs de la Comtesse de Valois de la Motte(라 모트 발루아 백작부인의 무고함에 대한 비망록)이다. 비망록에는 자기의 힘들었던 삶,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 추기경과 왕비 사이에 오고갔다고 하는 약 30통의 서한들을 담았다. 대부분 내용이 역사적으로 증거가 빈약한 것이었으며 자기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는 대단히 편협된 시각으로 적어 놓았다고 한다. 잔느는 5천부의 프랑스어판 비망록과 3천부의 영어판 비망록을 발간했다. 대단한 파급영향을 끼쳤다. 내용의 진위는 상관하지 않고 모두들 사치한 왕비와 무능한 국왕에 대한 비난적인 감정을 키우기 위해 책을 사서 읽었다. 결과적으로 잔느의 비망록은 프랑스에서 군주제를 없애는 데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얼마나 영향을 주었는가? 시인 미라보(Mirabeau)는 “마담 드 라 모트(잔느)의 음성은 7월 14일과 10월 5일의 성난 군중들의 두려운 외침을 일으키게 해준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훗날 역사학자들의 잔느의 비망록을 ‘치졸한 복수’라고 비난했다. 잔느의 비망록으로 인한 긍정적인 영향도 있었다. 루이16세가 비로소 마리 앙뚜아네트를 동정하는 마음으로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런던에서 출판된 잔느의 비망록 (초판에서는 잔느가 자기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창녀인 르 구아이 돌리바의 이름을 사용했다.)


[잔느의 최후]

1791년 잔느의 또 하나 책자인 ‘나의 삶에 대한 스토리’(Story of My Life)가 발간될 예정이었다. 1791년이라고 하면 비엔나에서는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해이다. 하지만 잔느는 결과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해 6월초 런던의 신문은 잔느의 죽음을 간단히 보도하였다. 6월초의 어느날 집달리(執達吏)들이 그의 거처에 나타나 세간을 차압코자 했다. 쌓인 빚을 갚지 않았기 때문에 채권자가 법원에 고소했던 것이다. 잔느는 집달리들이 집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막아서며 항거했다. 그러나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을 언제까지 막고 있을수는 없었다. 일설에 의하면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를 옹호하는 오를레앙공작(duc d'Orleans)이 잔느의 입을 막기 위해 비밀리에 보낸 사람들이었다고도 한다. 적어도 잔느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집달리들이 집안으로 들어오자 잔느는 3층으로 올라가서 창문을 통해 지붕으로 피하려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잔느는 큰 부상을 입었다. 그해 여름은 여느 해보다 찌는 듯이 더웠다. 잔느는 거의 두달동안 병상에서 꼼짝도 못하고 지내다가 8월 23일 세상을 떠났다. 잔느의 시신은 며칠후 램베스(Lambeth)의 성모(St Mary)교회 묘지에 매장되었다. 잔느가 그렇게도 비방하고 모략중상을 퍼부은 왕비 마리 앙뚜아네트는 잔느가 죽은후 2년 1개월 23일 더 살다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픽션 속의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

마리 앙뚜아네트와 관련된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은 수많은 작가와 영화제작자, 배우들의 깊은 관심을 끌었다.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 1795-1861)은 1837년 ‘다이아몬드 목걸이’(Diamond Necklace)라는 소설을 펴냈다. 프랑스의 알렉산더 뒤마(Alexandre Dumas: 아버지)는 1848년 ‘여왕의 목걸이’(The Queen's Necklace)라는 제목의 소설을 내놓았다. 아르센 루팽(Arsen Lupin)스토리로 유명한 추리작가 모리스 르블랑(Maurice Leblanc)은 1905년 ‘여왕의 목걸이’(The Queen's Necklace)라는 추리소설을 내놓았다. 일본의 리요코 이케다(Riyoko Ikeda)는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에서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을 다루었다. 이삭 아시모프(Isaac Asimov)는 1986년 ‘노르비와 여왕의 목걸이’(Norby and the Queen's Necklace)라는 소설을 펴냈다. 힐라리 스완크(Hilary Swank)가 잔느의 역할을 맡은 영화 ‘목걸이 사건’(The Affair of the Necklace)이 2001년에 나와 인기를 끌었다. 최근에는 ‘왕비의 목걸이’(Le collier de la roine: Das Halsband der Koenigin)라는 컴퓨터 게임이 나왔다. 보석판매상들은 팔려고 하고 왕비는 사지 않으려고 하는 게임이다.   


 영화 속의 잔느 (힐라리 스완크)

                     

[잔느 드 발루아 집중탐구]

잔느는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의 주역이었다. 라 모트 백작부인(Comtesse de la Motte)으로 알려진 잔느 드 발루아(Jeanne de Valois)는 1756년 태어났으므로 마리 앙뚜아네트보다 한 살 아래이다. 하지만 1791년 35세로 세상을 떠났으므로 마리 앙뚜아네트보다 2년 먼저 황천길로 떠난 셈이다.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은 프랑스 혁명을 이끌고 결국 프랑스 군주제를 파괴하는데 기여한 여러 스캔들중 가장 유명한 것이었다.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에 대한 스토리는 여러 버전이 있으므로 설명하는 사람에 따라 내용이 약간씩 다를수가 있다.

 

잔느 드 발루아 (라 모트 백작부인)

                                                    

잔느는 1756년 프랑스 동북부 바르-쉬르-오브(Bar-sur-Aube) 부근 퐁네트(Fonette)라는 곳에서 매우 가난한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잔느의 아버지는 왕족인 발루아(Valois) 가문의 혈통을 이어 받았다고 한다. 앙리 드 생-레미(Henri de Saint-Remy: 1557-1621)의 후손이라고 한다. 앙리 드 생-레미는 앙리2세 왕과 그의 정부(情婦) 니콜 드 사비니(Nicole de Savigny)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다. 그러므로 잔느도 어떤 면에서 왕족의 혈통을 이어 받았다고 할수 있다. 잔느의 아버지는 별로 하는 일이 없이 임시변통으로 사는 한량이었으며 어머니는 창녀였다. 잔느에게는 오빠와 여동생이 하나씩 있었다. 자크(Jacques)와 마리-안느(Marie-Anne)였다. 아이들은 먹을 것을 구걸하러 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걸식이나 하며 살던 아이들을 랑그레(Langres) 수도원장이 불쌍히 생각하여 거두어 주었다고 한다. 다른 소스에 따르면 아버지를 잃은 잔느의 가족은 파리 부근의 불로느(Boulogne)에 있는 어떤 신부(神父)를 소개받아 그곳으로 이사 갔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교구신부와 교구의 부유한 신도인 마담 드 불랭비예르(Madame de Boulainvillers)의 보살핌을 받았다.


교구의 신부는 약간의 허영과 욕망이 있는 사람이었다. 잔느의 가족이 왕족의 혈통을 이어 받았다고 하니까 친절하게도 관련 족보를 조사하여 뿌리를 확인해 주었다. 훗날 무슨 덕을 볼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그 때 신부가 만들어준 족보서류는 나중에 잔느가 사기극에도 이용한 소도구였다. 당시 정부에는 가난한 왕족들의 생활을 돕기 위한 별도의 예산이 있었다. 장성한 잔느의 오빠 자크는 정부로부터 매년 1천 파운드의 연금을 받게 되었으며 사관학교에 입학하는 특전을 받았다. 잔느와 어린 동생 마리-안느는 파씨(Passy)에 있는 기숙학교에 들어갔으며 매년 900파운드의 연금을 받았다. 대단한 돈은 아니었지만 생활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는 것이었다. 잔느와 마리-안느는 기숙학교를 졸업하고 롱샹(Longchamps)수도원의 수녀가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잔느와 마리-안느는 수도원으로 가는 대신 고향 바르-쉬르-오브로 돌아가 먼 친척이 되는 쉬로몽(Surmont)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기거하였다. 1780년, 잔느는 24세 때에 쉬르몽의 조카인 안투안-니콜라 드 라 모트(Antoine-Nicolas de la Motte: 1755-1831)와 결혼하였다. 드 라 모트의 집안은 확실치는 않지만 귀족 출신이라고 했다. 그래서 신혼부부인 안투안-니콜라tm와 잔느는 라 모트 발루아(La Motte Valois)백작과 백작부인이라는 양가합동의 호칭을 사용했으며 사람들도 잔느가 왕족 혈통을 이어 받았다고 내세우는 바람에 자칭 백작부인이라는 호칭에 아무런 이의를 달지 않았다. 잔느의 3형제중 잔느만이 역사에 길이 남는 대단한 인물이 되었으며 군인이 된 오빠 자크는 생-루이(Saint-Louis)섬에서 복무중 세상을 떠났고 여동생 마리-안느는 끝내 수녀원에 들어가 여생을 지냈다. 세 사람 모두 자녀가 한명도 없었다.


잔느는 신랑 니콜라스(안투안-니콜라스)가 백작의 자손이므로 재산이 좀 있는줄 알았다. 그러나 생활비를 대기에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잔느는 몰락한 왕족에게 주는 연금을 올려 달라고 요청했다. 이를 위해 잔느는 베르사이유에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마리 앙뚜아네트를 먼발치에서나마 처음 본것도 베르사이유에서였다. 잔느는 왕비의 눈에 띠고자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당시에는 일반 시민이라고 해도 적당히 옷을 차려 입었으면 베르사이유 궁전의 정원에 들어와 산책할수 있었다. 시민들이 베르사이유를 찾아오는 이유 중의 하나는 잘만하면 왕실 가족들을 만나볼수 있기 때문이었다. 잔느는 아는 사람의 주선으로 왕비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왕비는 잔느가 이른바 왕족으로서 품위 있는 생활을 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듣고 만나지 않았다.  


잔느의 결혼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잔느의 분방한 생활이었다. 두 사람은 정식으로 헤어지지는 않았지만 계속 함께 살았다. 그러는 사이에 잔느는 새로운 애인을 만들었다. 르토 드 빌레트(Retaux de Villette)이다. 그렇고 그런 제비 겸 기둥서방이었다. 1783년경, 잔느는 프랑스의 추기경으로 로앙(Rohan)의 공자인 루이(Louis)를 만났다. 잔느는 추기경이 프랑스에서 알아주는 부자이면서도 왕실로부터 재정적인 도움을 바라고 있으며 또한 왕비와 친밀하게 되고 싶어 한다는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반면, 왕비는 왕세자비로 있을 때에 추기경이 비엔나 대사로 있으면서 왕비에 대하여 나쁜 소문을 냈고 때문에 왕비가 추기경을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이 정도의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당시 귀족사회에서는 커다란 재산이었다.


바로 그러한 때에 잔느는 보석상인 샤를르 오거스트 뵈머(Charles Auguste Boehmer)가 대단히 화려하면서도 고가(高價)인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임자만 있으면 팔려고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원래 그 목걸이는 루이15세가 정부(情婦)인 마담 뒤 바리에게 선물하려 했던 것이지만 루이15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팔지 못하고 있던 것이었다. 보석상 뵈머는 이 목걸이를 만드느라고 모든 재산을 투입했다. 그러므로 만일 속히 팔지 못하면 파산을 면치 못할 딱한 신세였다. 보석상 뵈머는 이곳저곳 목걸이를 살만한 사람들을 접촉했지만 헛수고였다. 뵈머는 오직 국왕만이 목걸이를 살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래서 국왕과 왕비에게 접촉했지만 두 사람 모두 목걸이를 사지 않겠다고 말했다.


잔느는 남편 니콜라스와 애인인 빌레트의 도움을 받아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자기들 것으로 만드는 음모를 꾸몄다. 기둥서방 빌레트는 위조 전문가였다. 그는 왕비가 잔느에게 보내는 편지를 위조했다. 편지의 내용은 왕비가 그 목걸이를 갖고 싶지만 현재의 왕실 재정형편상 국왕이 선뜻 대금을 지불하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라는 것이었다. 계속하여 프랑스에서 유명한 부자인 추기경이라면 왕비에게 돈을 빌려 줄수 있을 것이라며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추기경이 원하는 새로운 직위를 얻을수도 있을 것이라고 썼다. 편지의 말미에는 잔느를 왕비의 대리인으로 임명한다고 적었다. 추기경은 이 편지를 진짜 왕비의 편지로 믿고 목걸이를 대신 사겠다고 약속했다. 잔느는 추기경과 왕비와의 한밤중 랑데부(rendezvous)를 주선했다. 잔느는 니콜 르 게 돌리비아(Nicole le Guay d'Olivia)라는 창녀(또는 배우)를 왕비 대신 내보내 추기경을 만나도록 했다. 가짜 왕비는 추기경에게 지난날의 일들은 모두 용서하겠다고 말했다. 왕비까지 직접 만났던 추기경은 보석상들을 만나 최종 협상을 하고 물건을 샀으며 그 목걸이를 받아 왔다.

 

추기경은 목걸이를 잔느에게 주어 왕비에게 전달토록 했다. 잔느의 남편인 라 모트백작은 목걸이에 붙어 있는 다이아몬드를 떼어내어 파리와 런던에서 팔기 시작했다. 사기극의 전모가 밝혀진 것은 추기경이 체포되고서였다. 잔느, 기둥서방인 빌레트, 왕비노릇을 했던 창녀 니콜 돌리비아, 그리고 자칭 성자(聖者)로서 잔느와 한통속이 되어 추기경이 목걸이를 사는데 일조를 한 칼리오스트로백작 모두 체포되었다. 잔나의 남편 라 모트백작은 런던에 있는 바람에 체포되지 않았다. 국왕과 왕비는 이들의 죄상을 명명백백하게 밝히기 위해 공개재판을 주장했다. 국왕과 왕비는 목걸이를 실제로 사지 않았으므로 당사자가 아니어서 관심을 둘 필요가 없었지만 왕비와 잔느가 동성연애를 하고 있다는 말도 안되는 세간의 소문에 대하여는 공개재판을 통해 사실이 아님이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사건의 전말이 왕비와 잔느의 특별한 관계 때문에 벌어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왕비가 레스비안(동성연애자)이라고 믿고 있었다. 당시로서 동성연애는 사회적 죄악이었다. 특히 가톨릭 국가에서는 동성연애가 하나님의 창조이념을 부인하는 죄악이었다. 왕비에 대한 프랑스 국민들의 인기는 점차 스러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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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극에 휘말린 추기경

 

재판은 국왕과 왕비가 원하는 방향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오히려 엉뚱한 효과를 초래하였다. 왕비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은 부정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누가 뭐라고 해도 왕비에게 불리하였다. 왕비의 명예는 파괴되었다. 추기경은 죄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하지만 추기경의 지위를 박탈당했다. 국왕은 그를 곧 추방하였다. 잔느의 기둥서방 빌레트는 문서위조죄로 추방당했다. 창녀 니콜 돌리비아는 무죄석방되었다. 왕비를 모욕하는 행동을 했는데도 무죄석방되었다. 자칭 성자라고 하는 칼리오스트로백작은 프랑스에서 추방당했다. 잔느는 유죄가 확정되어 채찍형과 함께 이마에 죄인이라는 낙인을 찍고 정신병자 수용소로도 사용되는 살페트리에르(Salpetriere)에 수감되었다. 백성들은 잔느를 동정하였다. 반앙뚜아네트 분자들이 잔느를 수용소에서 탈출시켰다. 잔느는 런던으로 도피하였다. 런던에서 그는 비망록(momoirs)을 발간하였다. 그는 비망록에서 왕비와 자기가 동성연얘를 했다는 것은 거짓이었다고 밝혔다.  


추기경은 혁명의 와중에서도 살아남아 나머지 생애를 수도원에서 추방생활을 하며 지냈다. 잔느의 기둥서방으로 위조 전문가였던 빌레트는 이탈리아로 추방당한후 그곳에서 새상을 떠났다. 창녀 겸 배우인 니콜 돌리비아는 재판후 어디론가 종적을 감추었으나 28세로 세상을 떠난후 신분이 밝혀졌다. 자칭 성자인 칼리오스트로 백작은 이탈리아의 종교재판 와중에서 감옥에 갇힌후 세상을 떠났다. 잔느의 남편인 니콜라스는 혁명후 파리로 돌아왔다. 잔느는 런던의 숙소 창문에서 떨어져 죽었다. 어떤 사람들은 잔느가 왕정주의자들의 손에 살해되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빚에 쪼들린 나머지 집달리들을 피하려다가 3층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다이아몬드 스캔들을 다룬 당시의 파리의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