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청사에 빛나는 샤를르 대공 (Archduke Charles)]
레오폴드2세의 아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
1771-1847
오스트리아의 샤를르 대공(카를 대공: Erzherzog Karl von Österreich)은 오스트리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이다. 샤를르 대공은 레오폴드2세 황제의 아들이며 프란시스2세 황제의 동생이고 어머니는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자(Maria Luisa)공주이다. 육군 대원수인 샤를르 대공은 합스부르크의 유전적 영향 때문인지 간질병이 있었지만 육군 사령관으로서 나폴레옹과의 전투에서 빛나는 전승을 거두었으며 한편 오스트리아 군대의 개혁을 위해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아스페른-에쓸링과 봐그람 전투에서 막강한 나폴레옹군을 격파하여 오스트리아에 위기에서 구해 낸 것이었다.
1809년 5월 아스페른-에쓸링 전투에서의 샤를르 대공
샤를르는 1771년 9월 5일 이탈리아의 플로렌스(피렌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프란시스는 아들 샤를르의 교육을 위해 제번 자란 아들을 비엔나로 보내 자녀가 없이 남편 테셴 공작 알베르트와 살고 있는 숙모 마리 크리스티네(Marie Christine)의 보살핌을 받았다. 나중에 테셴 공작(Herzog von Teschen)으로 임명된 것은 그같은 사연 때문이었다. 샤를르는 어린 시절을 이탈리아의 투스카니 지방에서 보냈으며 청년시절은 비엔나에서 보냈고 군인으로서의 경력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에서 쌓았다. 그가 군인생활을 시작하던 때는 마침 프랑스혁명이 시작되던 때였다. 샤를르는 여러번의 전투 경험을 통하여 얼마 후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1795년에는 라인지역의 오스트리아군 사령관으로 서 복무했다. 그는 라인지역에서도 몇차례의 전투를 거치면서 유럽 최고의 사령관으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샤를르 대공
1797년, 샤를르는 이탈리아까지 진군하여 승승장구하고 있던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을 대적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샤를르는 오스트리아군의 전세가 우세할 때에 신속하게 퇴각하여 손실을 최대한으로 하는 전법을 구사하였다. 반면, 나폴레옹군은 큰 손실을 입었다. 그는 궁지에 몰린 적군을 계속 공격하는 것은 손실을 가져 올수 있다고 믿어 이탈리아에서 나폴레옹군을 더 이상 추격하지 않고 군대를 돌려 이번에는 스위스를 공략하여 대승을 거두었고 이어 독일로 진격하여 라인지역에서 프랑스군을 모두 격퇴하였다. 그후 건강이 악화되어 잠시 보헤미아에서 요양생활을 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비엔나로 진격하자 다시 부름을 받았다. 호엔린덴(Hohenlinden)전투의 결과는 샤를르에게 실망을 안겨준 것이었다. 샤를르는 프랑스군과 휴전을 맺지 않을수 없었다. 하지만 신성로마제국 의회는 샤를르의 업적을 기려 기념상을 세우고 그에게 오스트리아의 ‘구원자’(savior)라는 타이틀을 주기로 결의했다. 샤를르는 두가지 제안을 모두 정중하게 거절하였다.
1806년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시스1세(당시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겸임)는 샤를르 대공을 오스트리아군 최고사령관 겸 전쟁위원장으로 임명했다. 그 전해인 1805년, 샤를르 대공은 프랑스와의 전투에서 처음에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칼디에로(Caldiero)전투에서 패배를 경험하였다. 이후 그는 오스트리아 육군의 재편에 착수하여 1809년의 전투에서는 빛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는 군대의 조직뿐만 아니라 전술에서도 전통적인 방법을 타파하고 새로운 공격전술을 창안하였다. 샤를르 대공은 유럽에서는 나폴레옹의 전술에 맞서 대응할수 있는 유일한 장군으로 추앙을 받았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다른 지역에서 오스트리아군이 나폴레옹군에게 패배를 당하고 그 결과 비엔나를 나폴레옹에게 내주게 되자 샤를르 대공은 잔여병력을 재편성하여 아스페른-에쓸링(Aspern-Essling)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어 그는 유명한 봐그람(Wagram)전투에서 나폴레옹에게 치명적인 손실을 안겨주었다. 이 두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5만명 이상의 병력을 잃었다. 결과적으로 나폴레옹은 재기할수 없을 만큼 큰 타격을 입었고 유럽은 나폴레옹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샤를르 대공은 건강상의 문제 등으로 나폴레옹과의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를 구원한 후 은퇴하였다. 샤를르의 뒤를 이어 오스트리아-보헤미아 동맹군의 사령관은 슈봐르첸버스(Schwarzenberg)장군이 맡았다. 샤를르는 말년을 조용하게 은퇴생활을 했다. 다만, 1815년 마인츠(Mainz)요새 군사총독으로 잠시 직책을 맡은 일은 있었다. 1822년 그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공로로 작센-테셴(Saxe-Teschen) 공국을 이어 받았다. 그로부터 샤를르 대공은 테셴공작(Karl von Oesterreich-Teschen)이라고 불렸다. 테셴은 상부 실레지아(Silesia)에 있는 자치공국이다.
샤를르 대공과 부인 헨리에타 공주와 자녀들
1815년 샤를르 대공은 나싸우-봐일부르크(Nassau-Weilburg)의 프레데릭 윌리엄(Frederick Willaim) 공작의 딸 헨리에타(Henrietta: 1797-1829)공주와 결혼하였다. 샤를르 대공은 1847년 4월 30일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비엔나 황실납골당(Kaisergruft)에 안치되었다. 호프부르크 앞 영웅광장(Heldenplatz)에는 그의 기마상이 우뚝 서있다. 1860년에 세운 것이다. 영웅광장의 노이에 호프부르크(Neue Hofburg) 쪽에 있는 기마상은 사보이의 오이겐 공자의 기마상이다. 19세기 초반, 유럽에서 샤를르 대공에 필적할만한 장군은 영국의 웰링턴(Wellington)뿐이었다고 한다. 웰링턴 장군은 1815년 나폴레옹을 워털루전투에서 대패시킨 주역이었다.
비엔나 중심가 영웅광장(헬덴플라츠)에 우뚝 서 있는 샤를르 대공 기마상
세계에서 공학적으로 가장 훌륭한 기마상이다.
'합스부르크 > 합스부르크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30년 전쟁의 주역 페르디난트 2세 (Ferdinand II) (0) | 2008.02.20 |
---|---|
대를 이은 30년 전쟁의 주역 페르디난트3세 (Ferdinand III) (0) | 2008.02.20 |
사보이의 오이겐 공자 (Prinz Eugen) (0) | 2008.02.20 |
전쟁으로 지샌 레오폴드1세(Leopold I) (0) | 2008.02.20 |
마리아 테레지아의 삼촌 요셉1세 (Joseph I) (0) | 2008.0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