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를 이은 30년 전쟁의 주역 페르디난트3세 (Ferdinand III)
1608-1657 (재위 1637-1657)
페르디난트3세는 108년 오스트리아의 그라츠(Graz)에서 태어나 1657년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페르디난트3세(Ferdinand III: 1608-1657)는 아버지 페르디난트2세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및 합스부르크의 수장(首長)으로 있으면서 아버지 대에 시작된 ‘30년 전쟁’을 마무리해야 했던 인물이다. 페르디난트3세는 29세 때인 1637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올라 세상 떠날 때까지 20년동안 황제로서 재임했다. ‘30년 전쟁’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9년전에 마무리 되었다. 페르디난트3세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오른 사람이 레오폴드1세이다.
페르디난트 3세
‘30년 전쟁’의 명장 중 한사람인 �렌슈타인(Wallenstein)장군이 전쟁이 와중에 있던 1634년 세상을 떠나자 페르디난트3세는 명목상이기는 하지만 제국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페르디난트는 아무리 명목상이지만 전쟁에 참가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사촌인 추기경 후계자의 군대에 합류하여 뇌르딩겐(Nördingen)에서 스웨덴 군대를 물리쳤다. 페르디난트의 명성은 높아졌다. 당시 ‘30년 전쟁’의 양측은 모두 지쳐서 어서 전쟁을 끝내고 싶었다. 프라하 평화조약을 위한 협상에 들어갔다. 페르디난트는 신성로마제국 측의 대표를 맡았다. 페르디난트는 개신교와의 협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635년 프라하 평화협정이 체결된지 2년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페르디난트2세가 세상을 떠났다. 페르디난트2세의 아들인 페르디난트3세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황제가 된 페르디난트는 상대국인 프랑스 및 스웨덴과의 평화를 위해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그후로도 11년이나 끌었다. 드디어 1648년 양측은 베스트팔리아(Westphalia)조약으로 전쟁에 종지부를 찍기로 합의했다. 베스트팔리아 조약이란 것은 프랑스와 맺은 뮌스터(Münster)조약과 스웨덴과 맺은 오스나브뤼크(Osnabrück)조약을 통합한 조약이다.
첫번째 부인 스페인의 마리아 안나
페르디난트3세는 ‘30년 전쟁’의 막바지에 종전을 이끌어내기 위해 모든 독일 국가들이 스스로 외교정책을 추진할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그렇게 하여 더 많은 국가들을 신성로마제국의 동맹국으로 만들 수 있었으며 이로써 프랑스 및 스웨덴과의 평화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수 있었다. 하지만 이같은 조치는 상대적으로 신성로마제국의 권한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페르디난트3세가 군주로서 통치권을 행사할수 있었던 국가들은 독일, 헝가리, 보헤미아, 달마티아(Dalmatia),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오스트리아, 부르군디, 브라반트, 스티리아(Styria), 카린티아(Carinthia), 카르니올라(Carniola), 모라비아(Moravia), 룩셈부르크, 남부 실레지아, 뷔르템부르크, 테크(Teck), 슈봐비아(Swabia), 티롤, 키부르크(Kyburg), 고리티아(Goritia), 부르고비아(Burgovia), 루사스(Lusae), 나온(Naon), 살리네스(Salines) 등이었다. 그러므로 아직도 합스부르크의 신성로마제국은 유럽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17세기의 유럽, 특히 독일과 오스트리아 지역은 여러 개의 작은 국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페르디난트3세의 딸 마리아나 공주
[결혼과 자녀들]
1631년, 페르디난트3세는 스페인의 마리아 안나(Maria Anna)와 결혼하였다. 첫 번째 부인이었다. 마리아 안나의 아버지는 스페인의 필립3세 국왕이며 어머니는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의 마르가레트(Margaret)이었다. 페르다난트3세와 마리아 안나는 친사촌간이었다. 마리아 안나의 어머니인 마르가레트가 아버지 페르디난트2세의 누이동생이었기 때문이다. 페르디난트3세와 마리아 안나는 6명의 자녀를 두었다. 큰아들 페리드닌트4세(1633-1654)는 헝가리 왕이 되었으나 2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큰 딸 마리아나(Mariana: 1634-1696)는 외삼촌인 스페인의 필립4세와 결혼하였다. 마리아나와 필립4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카를로스2세(샤를르2세)로서 스페인 국왕으로서 합스부르크의 마지막 인물이었다. 둘째 아들 필립 아우구스트(Philip August): 1637-1639)는 오스트리아의 대공(실질적인 군주)로 임명되었으나 태어난지 2년후에 세상을 떠났다. 셋째 아들 막시밀리안 토마스(Maximilian Thomas: 1638-1639) 역시 바로 위의 형 필립 아우구스트가 죽자 오스트리아의 대공으로 임명되었으나 단명하여 1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넷째 아들은 레오폴드1세(Leoplod I: 1640-1705)로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레오폴드1세는 비교적 장수하여 65세까지 살았다. 마지막 자녀는 마리아(Maria)였으나 태어난지 며칠후 세상을 떠났다. 일반적으로 합스부르크 혈통의 군주들은 자녀를 많이 두었으나 근친결혼 때문인지 또는 당시 신생아 사망률이 높아서인지 상당수 자녀들은 단명하였다.
두번째 부인 마리아 레오폴디네
페르디난트는 첫째 부인인 마리아 안나가 세상을 떠나자 1648년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레오폴디네(Maria Leopoline)와 결혼하였다. 마리아 레오폴디네의 부모는 오스트리아 대공인 레오폴드5세와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의 클라우디아(Claudia)이다. 페르디난트3세와 마리아 레오폴디네는 6촌(從姪)간이다. 페르디난트3세는 두 번째 결혼에서 아들 하나를 두었다. 카를 요셉(Karl Josef: 1649-1664)로서 1662년부터 세상 떠날 때까지 독일기사단(Teutonic Knights)의 수장(首長)이었다. 1651년 페르디난트는 이탈리아 만투아 공국의 엘레오노라(Eleonora)와 세 번째로 결혼하였다. 슬하에는 1남3여를 두었다. 큰 딸은 생후 1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둘째 딸 엘에오노라 마리아 요세파(Eleonora Maria Jodefa: 1653-1697)는 처음에 폴란드 왕 미칼 비스니오비키(Michal Wisniowiecki)의 왕비였으며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로레인 공작 샤를르5세와 재혼하였다. 아들은 태어난지 1년후에 세상을 떠났다.
세번째 부인 엘레오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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