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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의 종교자유를 보장한 마티아스(Matthias)

정준극 2008. 2. 20. 11:15
 

헝가리의 종교자유를 보장한 마티아스(Matthias)

1557-1619 (1611-1617)



[형 루돌프를 내어몰다]

합스부르크의 마티아스(Matthias: 매튜: Matthew: 마태)는 1608-1619년 헝가리 왕이었으며 1611-1617년에는 보헤미아 왕이었고 1612-1619년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다. 마티아스는 1557년 2월 24일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막시밀리안2세(Maximilian II)였으며 어머니는 스페인의 마리아(Maria) 공주였다. 마티아스는 삼촌 페르디난트2세의 딸, 즉 조카인 안나(Anna)공주(대공비)와 결혼하였다. 두 사람은 자녀를 생산하지 못하였다. 1593년, 마티아스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형 루돌프2세의 뒤를 이어 오스트리아 총독(Governor)이 되었다. 마티아스는 비엔나에서 유명한 멜키오르 클레슬(Melchior Klesl)추기경과 밀접한 친분을 쌓으며 지냈다. 멜키오르는 나중에 마티아스의 최고 자문관으로 활약했다. 1605년쯤헤서 마티아스의 형인 루돌프2세는 병마와 싸우게 되었다. 마침 헝가리 개신교들이 신성로마제국에 저항하여 봉기했다. 마티아스는 형에게 이들을 제압하도록 전권을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마티아스는 헝가리의 개신교도들을 제압하지 못했다. 결과, 1606년 ‘비엔나 평화(Peace of Vienna)협정이 맺어졌다. 헝가리에서의 종교자유를 보장한다는 내용이었다. 형 루돌프2세의 병환은 깊어만 갔다. 마티아스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수장(首長)이 되며 장차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는 것으로 인정받았다. 1608년, 마티아스는 형 루돌프2세에게 자녀가 없으므로 그가 통치하던 헝가리, 오스트리아, 모라비아를 정식으로 자기에게 양도하도록 권고하였다. 말이 권고였지 실제로는 몰아낸 것이었다. 그로부터 3년후인 1611년 루돌프2세는 프라하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35세. 병들고 힘없으면 그저 죽어야 하나보다.     

 

마티아스 황제


 

[클리슬 추기경의 영향력]

마티아스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취임한 후부터 그의 정책은 클레슬 추기경이 주관했다. 추기경의 정책은 제국을 강화하기 위해 제국 내에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타협을 이룩하는 것이었다. 이보다 앞서 마티아스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모라비아에서 개신교들이 종교의 자유를 가지고 예배볼수 있게 양보하였다. 형 루돌프에게 대항하기 위해서는 개신교의 지지가 불가결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타협적인 정책인 합스부르크 내 강경 가톨릭의 저항을 받았다. 특히 동생 막시밀리안대공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막시밀리안은 나중에 마티아스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조카 페르디난트2세의 위치를 확고히 만들기 위해 개신교와 타협하는 마티아스를 반대하였다. 페르디난트2세는 루돌프, 마티아스, 막시밀리안 등의 삼촌인 카를의 아들이다. 막시밀리안과 페르디난트2세는 철두철미 가톨릭이었다. 가톨릭이 뭐 길래! 막시밀리안은 형 마티아스가 클레슬만 끼고 도는 것을 도저히 볼수 없었다. 마티아스가 제국의 황제가 된지 5년이 지난 1816년, 보헤미아에서 개신교들이 봉기했다. 이에 막시밀리안은 클레슬 추기경을 체포하여 구금하고 그의 종교정책을 수정하였다. 이제 60세가 되어 나이 들고 병약해진 마티아스는 막시밀리안을 당해내기가 어려웠다. 마티아스는 자기가 형 루돌프를 강제로 퇴위시킨 것이나 마찬가지로 동생 막시밀리안에 의해 조카 페르디난트2세에게 양위하도록 강요를 받았다. 당시 페르디난트2세는 이미 보헤미아의 왕, 헝가리의 왕이었다. 그리하여 페르다난트2세는 1619년, 마티아스가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나자 마티아스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마티아스의 향년은 62세.

 

 마티아스와 결혼한 안나공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