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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쟁의 주역 페르디난트 2세 (Ferdinand II)

정준극 2008. 2. 20. 11:11
 30년 전쟁의 주역 페르디난트 2세 (Ferdinand II)

1578-1637 (1619-1637)

 

[30년 전쟁의 와중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2세(Ferdinand II. 1578-1637)는 30년 전쟁의 한가운데 있었던 인물이다. 1619년 자칭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페르디난트 2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겸 보헤미아의 왕위에 오르자 그는 1617년까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활동했던 마티아스(Matthias)의 정신을 이어받아 신성로마제국내의 모든 국가들이 루터의 종교개혁에 의한 개신교를 배척하고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가톨릭을 신봉토록 압력을 가했다. 마티아스가 세상을 떠난 1617년부터 페르디난트2세가 새로운 제국의 황제로 오를 때까지 2년동안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자리는 공백이었지만 그는 이미 1617년부터 보헤미아의 왕으로 재위했었다. 형제는 용감한 로마 가톨릭이었다. 페르디난트2세는 우선 보헤미아 국민들에게 가톨릭 절대 신앙을 강요하고 마틴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의 추종을 박해했다. 그러자 페르디난트가 황제를 즉위하기 1년전인 1618년부터 보헤미아와 오스트리아의 개신교(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이 손을 잡고 신성로마제국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보헤미아와 오스트리아간의 종교분규로 시작된 갈등이었지만 점치 국가와 민족간의 이해관계로 얽혀 정치적인 투쟁으로 번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프랑스, 덴마크 그리고 신성로마제국 전체가 전쟁에 연루되었다.

 

전쟁은 1648년 베스트팔리아 강화조약의 체결로 끝을 맺었다. 조약에 따르면 모든 제후들이 자신들의 영토에서 어떤 종교를 따를 것인지 결정할수 있게 되었다. 이로서 루터교회는 물론, 가톨릭, 그리고 칼뱅파교회들도 모두 합법화되었다. 이 종교전쟁은 꼭 30년이나 끌었던 것이었기에 30년 전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자신들과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가차 없이 박해와 이단공세를 퍼붓는 시대적 상황이 간전접인 원인이었다. 30젼 전쟁은 신성로마제국을 지원하여 오스트리아, 바바리아, 스페인이 동참하였고 상대측은 스웨덴, 보헤미아,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공화국, 프랑스,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작소니 등이었다. 1648년의 렝(Lens)전투는 30년 전쟁을 마무리해준 대전투였다. 30년 전쟁은 페르디난트2세의 사후 거의 10년만에 겨우 마무리 되었다. 30년중 나머지 10년은 레오폴드1세의 몫이었다. 


 페르디난트2세


[페르디난트2세 집중분석]

페르디난트2세는 누구인가? 1578년 태어나 1637년 향년 59세로 세상을 떠난 합스부르크 왕조의 인물이다. 그는 1619년부터 1637년까지 18년동안 신성로마제국 황제, 슈티리아(현재 오스트리아의 슈티리아 지방: 당시에는 Further Austria라고 불렀다) 대공, 보헤미아 및 헝가리 왕이었다. 그의 생애는 영적인 일(신앙고백)과 세상적인 일(군사 활동)이 교차된 것이었다. 페르디난트2세는 1578년 7월 9일, 그라츠(Graz)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오스트리아의 카를1세(샤를르2세: 1540-1590)이며 어머니는 바바리아의 마리아 안나(Maria Anna: 151-1608)이었다. 페르디난트는 어려서부터 엄격한 예수회 교육을 받았다. 잉골슈타트(Ingolstadt)대학교에서 교육받은 것은 예수회 교육의 절정이었다. 1595년 잉골슈타트대학교를 마친 페르디난트는 그에게 배속된 세습영지들을 물려받았다. 페르디난트가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사촌형인 막시밀리안3세가 섭정으로서 영토를 다스렸다. 페르디난트는 스티리아(Styria) 대공으로부터 시작하여 보헤미아 왕, 헝가리 왕으로 즉위하였다. 사촌형인 막시밀리안3세는 약속대로 사촌동생인 페르디난트에게 군주의 자리를 내어주고 로마와 로레토(Loreto)등 성지순례에 나섰다. 페르디난의 개신교 박해는 1617년 보헤미아 왕으로 즉위한 이후부터 본격화되었다.  

 

잉골슈타트 대학교가 있는 독일의 잉골슈타트 중심가
 

[프라하의 창문 내던지기 사건]

1617년, 페르디난트는 보헤미아의회에서 보헤미아 왕으로 선출되었다. 이와함께 그는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난 마티아스(Matthias)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다. 이에는 스페인-합스부르크의 지원이 컸다. 철두철미한 가톨릭인 페르디난트는 비가톨릭 국가들의 종교자유라는 권리를 침해하기 시작했다. 그는 종전에 루돌프2세 황제가 양해한 제국내에서의 종교자유권을 철저히 무시했다. 가톨릭이 뭐길래! 그는 또한 철저한 절대군주주의자였다. 그래서 귀족들의 세속적 권리도 제한하였다. 그러나 독일을 중심으로 한 제국의 여러 국가들은 개신교를 추종하였다. 특히 영향력 있는 귀족들이 그러했다. 때문에 페르디난트는 제후들과 귀족들로부터 지지를 얻지 못했다. 이들중 일부 페르디난트 반대세력들은 이른바 보헤미아의 반항(Bohemian Revolt)에 참여하였다. 1618년 5월, 프라하에서는 2명의 왕족 가톨릭 고관이 보헤미아 개신교도들에 의해 성의 창문에서 밖으로 내던져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프라하의 창문 내던지기 사건’(The Defenestration of Prague)라고 한다. 창밖으로 내던져진 가톨릭 왕족들은 다행히 중상을 입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보헤미아의 개신교는 괘씸죄에 걸려 심각한 탄압을 받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지렁이도 밟으면 굼틀 거린다고 보헤미아에서 페르디난트에 대한 반란이 전면 확대되었다. 이들은 내친 김에 페르디난트를 폐위하고 대신 ‘겨울왕’(Winter King)이라고 불리는 개신교인 팔라틴(Palatinate: 라인강 서부의 선제후령)의 선제후 프레데릭5세를 보헤미아의 왕으로 선출하였다.       

 

프라하 궁전에서 창문 내던지기 사건이 발생한 바로 그 창문

 

[봐이쎈버그 전투]

프라하에서 창문 내던지기 사건이 터진 이듬해인 1916년 3월, 마티아스 황제가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나자 약속대로 페르디난트가 새로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하였다. 새로 황제가 된 페르디난트는 가톨릭 연맹(Catholic League)인 폴란드, 스페인, 바라리아 등의 지원을 받아 팔라틴의 선제후 프레데릭5세가 담당하고 있는 보헤미아 왕위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페르디난트는 보헤미아의 개신교 반도들에 대하여 유감이 많았다. 1620년, 틸리(Tilly)백작이 지휘하는 가톨릭 군대는 개신교로서 보헤미아 왕위를 차지한 프레데릭5세의 군대와 일전을 벌였다. 이를 ‘봐이쎈버그 전투’(Battle of White Mountain)라고 부른다. 교전은 고작 두시간 진행되었다. 가톨릭 군대가 대승을 거두었다. 프레데릭5세는 보헤미아의 왕위에서 쫓겨나 황급이 네덜란드로 도피하였다. 가톨릭 연맹의 리더인 바바리아의 막시밀리안1세는 패왕(敗王) 프레데릭이 소유하고 있던 영지를 몰수하여 팔라틴에 흡수하였다. 보헤미아 왕으로 복귀한 페르디난트는 보헤미아에 가톨릭 교회를 강화하였고 과거 자기를 내친 의회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였다. 나아가 페르디난트는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의 상당수 개신교도들을 강제로 가톨릭으로 재개종토록 하였다.   

 

1620년의 봐이쎈버그전투. 봐이쎈버그는 우리식으로 번역하면 백두산이 된다.

 

그로부터 몇 년후, 페르디난트의 재정 상태는 스페인과 로마교황으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하여 상당히 어려운 형편에 놓이게 되었다. 특히 자기 자신의 군대를 일으키는데 필요한 재정이 없었다. 페르디난트는 할수 없이 보헤미아인들을 징집하여 자기의 군대로 만들었다. 다만, 지휘관은 보헤미아 사람으로 삼을수 없으므로 믿을수 있는 오스트리아의 알브레헤트 폰 발렌슈타인(Albrecht von Wallenstein)을 임명했다. 빌렌슈타인은 지휘관을 맡는 조건으로 군대 재정은 그가 직접 관장하며 전투에서 승리하면 그가 전리품과 전쟁배상금을  마음대로 배분 할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페르디난트로서는 들어주지 않을수 없었다. 곧이어 보헤미안 병사들로 3만의 군대가 조직되었다. 발렌슈타인은 가톨릭 연맹에 소속하여 개신교인 실레지아, 안할트(Anhalt), 덴마크와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페르디난트는 친가톨릭 정책을 널리 전파하는 한편, 이른바 ‘원상회복 칙령’(Edict of Restitution)을 선포하고 1552년 파싸우 평화(Peace of Passau)조약 이후 귀족이나 왕족에서 배분되었던 교회재산을 다시 교회로 환원조치하였다. 여기에서 교회라는 것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뜻하기도 한다. 결과는? 개신교인 스웨덴의 구스타부스 아돌푸스(Gustavus Adophus)가 페르디난트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프라하의 봘렌슈타인 궁전 


비록 발렌슈타인은 성공을 거두었지만 페르디난트의 자문관들은 머지 많아 페르디난트에게 정치적 위협이 다가올 것으로 예상하여 크게 염려하고 있었다. 지나친 친가톨릭 정책, 지나친 영토 소유, 수많은 타이틀 유지, 그리고 황제의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지나친 탈법적 조치들이 걱정꺼리였다. 이에 대하여 페르디난트는 황제의 군대를 전권을 가지고 관리하고 있는 발렌슈타인을 직위해제하였다. 일단 미봉책으로 발렌슈타인을 직위해제 하였지만 지휘관 없는 군대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페르디난트는 가톨릭 연맹군에 다시 의존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가톨릭 연맹의 리더인 틸리(Tilly)백작은 1632년, 스웨덴 군대와의 전투를 이겨내지 못하고 전사했다. 페르디난트는 퇴역한 봘렌슈타인을 다시 초청할 수밖에 없었다.   

 

 봘렌슈타인 백작의 죽음

 

1632년 봄, 발렌슈타인은 고작 1주일만에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고 보헤미아로부터 개신교 군대를 몰아냈다. 그러나 그해 11월에 있은 뤼첸 전투(Battle of Lützen)에서는 가톨릭 군대가 대파하였다. 하지만 뤼첸 전투에서 스웨덴의 구스타부스 아돌푸스 왕은 전사했다. 왜들 이러나! 발렌슈타인의 군대는 막대한 손실을 입고 전략적인 보헤미아의 겨울 진영에서 철수해야 했지만 개신교 군대가 입은 손실은 더 컸다. 전선은 교착상태였다. �렌슈타인은 그가 지휘하는 군대가 페르디난트에게 충성하기 보다는 자기에게 충성한다고 믿었다. �렌슈타인은 적군이 개신교 군대와 은밀하게 협상을 진행하여 더 이상 전투를 하지 않기로 합의를 보았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인솔하는 군대를 이용하여 독자노선을 걸을 생각을 하였다. 즉, 페르디난트에게 반기를 들고 보헤미아의 왕으로 올라설 생각을 했던 것이다. 이 음모를 알아차린 페르디난트2세는 발렌슈타인이 반역을 획책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급기야는 에거(Eger)에서 발렌슈타인을 살해하였다. 화무십일홍. 일설에는 발렌슈타인이 휘하 장군들의 간청을 들어 보헤미아의 왕으로 선포했다고도 한다.

 

뤼첸 전투

 

황제의 군대는 비록 발렌슈타인을 잃었지만 그래도 용맹스럽게 싸워 레겐스부르크(Regensburg)를 점령하였고 이어 뇌르들링겐 전투(Battle of Nördlingen)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스웨덴의 전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프랑스가 개신교 편에 서서 전쟁에 참여하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합스부르크의 지배권 확대를 염려해서였다. 프랑스는 참 이상한 나라였다. 자기들도 가톨릭 국가이면서 순수 가톨릭인 신성로마제국 산하의 독일과 스페인을 견제한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혼자의 힘으로 막강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을 상대하기에는 버거웠다. 프랑스의 재상 리슐르(Richelieu)의 외교적 활약은 대단했다. 가톨릭 추기경이기도 했던 그는 개신교에 기운 네덜란드와 스웨덴을 동맹국으로 끌어 들였다. 프랑스는 1635년의 프라하 평화협정에 대하여 대단히 불만이었다. 프라하 평화협정은 페르디난트가 재임중 마지막으로 맺은 협정이다. 1637년 페르디난트2세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페르디난트3세가 전쟁에 찌들린 제국을 이어 받았다.

 

뇌르들링겐 전투


[페르디난트2세의 아들은 페르디난트3세]

1600년, 페르디난트2세는 22세 때에 4년 연상인 바바리아 국왕 빌헬름5세(윌리엄5세)의 딸 마리아 안나(Maria Anna: 1574-1616)와 결혼하였다. 일곱명의 자녀를 생산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신생아 사망율이 매우 높은 때여서 첫째 딸과 첫째 아들은 모두 태어난지 며칠 가지 못해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페르디난트2세의 뒤를 이은 페르디난트3세는 아들로서는 세 번째가 된다. 페르디난트는 바바리아의 마리아 안나가 42세로 요단강을 건너가자 중전의 자리를 한시라도 비워 둘수 없어서 마투아 공작 빈센초1세의 딸 엘에오노레(Elenore: 1698-1655)와 인스부르크에서 재혼하였다. 그때 페르디난트2세는 당시로서는 양노원에 가야 할 64세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엘레오노레 왕비는 페르디난트가 세상을 떠난후 18년이나 더 살다가 요단강을 건너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