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합스부르크 사람들

예술의 후원자 루돌프2세 (Rudolf II)

정준극 2008. 2. 20. 11:17
 

예술의 후원자 루돌프2세 (Rudolf II)

1552-1612 (1576-1612)


1576년, 24세의 젊은 나이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올라 1612년까지 무려 36년간 황제로 근무했던 루돌프2세(1552-1612)는 말년에 병들고 힘이 없기도 했지만 정치적으로 무리수를 두는 바람에 동생 마티아스에게 직위와 재산을 모두 넘겨준 인물이다. 루돌프(루돌프2세)는 예술을 깊이 사랑한 황제였다. 그는 특히 미술품 수집에 정성을 쏟았다. 그 중에서도 뒤러(Dürer)와 브뤼겔(Bruegel)의 작품은 가격을 관계치 않고 수집하였다. 그래서 그를 예술의 옹호자라고 부른다. 루돌프2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막시밀리안2세의 큰 아들로 1552년 7월 18일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스페인의 카를로스5세의 딸인 마리아였다. 루돌프2세는 1572년 헝가리 왕, 1575년 보헤미아 왕, 1576년 오스트리아 대공에 즉위했으며 오스트리아 대공으로 즉위한 같은 해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루돌프2세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평가는 세 가지이다. 첫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정치철학이 달라 30년 전쟁을 야기한 것, 둘째 르네상스 예술의 위대한 후원자였다는 것, 셋째 비록 초자연적인 비학(秘學)에 깊은 관심을 가졌지만 결과적으로는 르네상스의 과학발전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예술과 과학의 후원자 루돌프2세


[스페인에서의 황제 견습]

루돌프는 11살 때부터 8년간을 외가인 스페인에 가서 앞으로 군주가 될 예비수업을 받았다. 특히 외삼촌인 필립2세로부터 정치, 군사, 학문, 왕도(王道), 궁정 예법에 대한 지도를 받았다. 루돌프가 비엔나로 돌아오자 아버지 막시밀리안은 루돌프가 너무 딱딱하고 전통적인 궁중 예법만을 사용하기 때문에 조금은 실망했다. 당시 비엔나 궁정은 스페인에 비하여 보다 자유스럽고 덜 형식적이어서 편안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루돌프가 예의바르며 세련된데 대하여 만족해했다. 루돌프는 스페인에서의 전통적인 궁중 법도를 몸에 익혀서인지 평생 점잖고 예의 바르고 조용하였다. 다시 말하여 활달하지 못하고 수줍어했으며 혼자 있기를 좋아하여 일상 정무(政務)조차 소홀히 할 정도였다. 루돌프는 집안에만 있기를 좋아하여 여행을 가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렇게 혼자 지내다 보니 천문학이나 연금술등 초자연적이고도 비밀적인 학문에 깊은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새롭고 신비한 학문을 탐구하는 것은 르네상스 시기의 트렌드였다. 전통을 좋아하고 새로운 지식에 대한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가지다 보니 취미도 다양했다. 말에 대하여 관심이 깊었으며 시계, 희귀품 수집, 미술이 취미였다. 말에 대한 관심은 스페인 생활의 여파인것 같다. 루돌프는 간혹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우울증(멜랑콜리)은 합스부르크의 내력이었다. 실로 루돌프의 우울증과 절망감은 병적이어서 나이를 들수록 심해졌다. 루돌프는 세상사에 관심이 없었고 그저 조용히 혼자만 지내고 싶어 했다. 루돌프는 60세까지 살았지만 결혼은 하지 않았다. 대신, 고독하고 멜랑콜리한 사람들이 대체로 그런 것처럼 정부(情婦)들은 여러명 있었다. 그래서 궁중여인들과 관계를 맺어 생긴 아이들도 몇 명 있지만 모두 사생아였기에 거론할 처지가 아니었다. 미안하지만 가톨릭에서 사생아는 별로 환영을 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프라하로 수도를 이전]

루돌프2세는 합스부르크의 수도를 비엔나에서 프라하로 옮겼다. 수줍고 결단력이 부족한줄 알았더니 그런 큰 일을 추진했다. 루돌프2세는 미술품 수집에 열중하였다. 삼성의 사외이사였던 모양이다. 수집뿐아니라 감상에도 열중하였다. 새로 어떤 작품을 구입하면 바쁜 정사(政事)에도 불구하고 그림 앞에 앉아 몇시간이고 관계없이 바라보는 경우가 많았다. 루돌프2세는 걸작들을 구매하는데 돈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뒤러와 브뤼겔이었다. 오늘날 비엔나 미술사박물관(Kunsthistorische Museum)이 브뤼겔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것은 단연 루돌프2세의 기여 때문이다. 루돌프2세는 당시로서는 현대작가들을 후원하는 데에도 열심이었다. 예를 들� 바로토로메우스 슈프랑거(Bartholomeus Spranger), 한스 몬트(Hans Mont), 주세페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 한스 폰 아헨(Hans von Aachen), 아드리안 드 브리(Adreian de Vries) 등을 후원했다. 루돌프는 주세페 아르침볼도가 그린 베르툼누스(Vertumnus)를 특별히 사랑하였다. 베르툼누스는 로마신화에 나오는 계절의 신으로 아르침볼도의 작품에서는 루돌프를 베르툼누스로 표현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루돌프의 갤러리는 유럽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가장 인상적인 미술품의 보고였다. 특히 맨너리즘 작품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예술에 대한 몰입]

루돌프2세의 수집 취미는 정말 대단했다. 미술이나 조각 작품 수집보다 훨씬 대단했다. 그는 궁전에 장식할수 있는 귀하고 이상한 물건이 있으면 무조건 사들였다. 특히 기계장치로 만든 장식품을 좋아했다. 의식용(儀式用) 칼들, 각종 악기, 시계, 각종 장식용 분수(噴水), 천체관측기, 나침반, 망원경 등을 수집했다. 대부분 소장품들은 당대의 뛰어난 장인(匠人)들이 루돌프2세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것들이었다. 오늘날 노이에 호프부르크의 고전악기박물관, 헤렌가쎄에 있는 시계박물관, 비엔나시립역사박물관 등에는 루돌프2세의 수집품들이 찬란하게 전시되어 있다. 루돌프2세가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한 왕관은 그후 오스트리아제국의 전통왕관으로 사용되었다. 루돌프2세는 자연과학자 및 철학자들을 후원하였다. 예를 들어 식물학자인 샤를르 드 레클루스(Charles de l'Ecluse), 천체학자인 요한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등은 수시로 루돌프2세와 만나 얘기를 나누었다. 그는 희귀 동식물들을 수입하여 동물원과 식물원에서 관리토록 하는 일에도 열심을 보였다. 오늘날 프라하의 동물원과 식물원(팔멘하우스)이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것은 루돌프의 영향 때문이다.

 

 

프라하 왕궁에 있는 루돌프의 ‘예술실(진기명품실 : Kunstkammer: Cabinet of Curiosities)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보헤미아(체코)의 특이하고 진기한 물품을 수집해 놓은 대규모 전시실로 유명하다. 특히 광물표본수집이 유명하다. 수집한 광물 표본중에는 값으로 따질수 없는 세계최대의 보석원석도 있다. 광물표본은 유명한 지질학자인 안젤무스 뵈티우스 드 부트(Anselmus Boetius de Boodt)의 공로로 수집되었다. 그는 진귀한 표본을 구하기 위해 독일, 보헤미아, 실레지아 등의 광산을 누비며 다녔다. 그는 수집한 표본들을 백과사전식으로 정리하였다. 그는 루돌프의 협조로 수집한 광물표본을 정리하여 1609년 Gemmarum et Lapidum이라는 책을 펴냈다. 17세기 광물학의 최고 명저이다. ‘예술실(진기명풍실)’은 1587년부터 거의 20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왕족이나 귀족들이 예술작품을 수집해 놓은 것은 개인만이 감상할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애호가들에게 오픈하여 연구할수 있도록 하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예술실’도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공개되어 사랑을 받았다. 오늘날 비엔나 미술사박물관 산하의 ‘왕실보물박물관’(Schatzkammer)에도 루돌프2세의 손길이 머문 소장품들이 더러 있다.



[프라하궁전의 예술실]

열심을 다해서 이루어 놓으면 무관심으로 망쳐놓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루돌프의 후계자들은 유감스럽게도 ‘예술실’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았다. 전쟁과 정치에 열중해야 했기 때문인것 같다. 그리하여 ‘예술실’은 점차 거미줄이 쳐지는 장소가 되었다. ‘예술실’이 생긴지 50년정도 지나서는 대부분 전시품들을 나무 상자에 포장하여 비엔나로 옮겨졌다. 프라하에 남아 있던 전시품들은 30년전쟁 당시 스웨덴 병사들이 약탈해 갔다. 1782년, 마리아 테레자의 아들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요셉2세는 비엔나로 옮겨온 전시품의 상당량을 개인들에게 팔았다. 요셉2세는 예술애호가였으므로 미술품들만은 팔지 않았다. 스웨덴 병사들이 약탈해간 골동품등은 주로 영국이 많이 사갔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존경을 받다]   

천문학과 연금술은 르네상스를 맞이한 프라하의 주요 관심사항이었다. 루돌프는 천문학과 연금술학의 신봉자였다. 루돌프의 평생 소원은 ‘철학자의 돌’(Philosopher's Stone)을 찾는 것이었다. 루돌프는 유럽의 내노라 하는 연금술사들을 프라하 궁전으로 초청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경비가 아깝지 않았다. 에드워드 켈리(Edward Kelly)와 존 디(John Dee)는 루돌프가 특별히 초청한 연금술사였다. 루돌프는 왕궁에 개인 연구실을 만들어 놓고 직접 실험을 했다. 그 개인 연구실은 나중에 ‘연금술사 연맹’사무실로 사용되어 각국의 연금술사들이 수시로 찾아오는 명소가 되었다.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s)는 루돌프를 존경했다. 그는 루돌프를 위해 점성용 천궁도(天宮圖)를 작성하여 헌정하기 까지 했다.



[르네상스에 기여]

역사학자들은 루돌프의 예술과 수집취미에 대하여 지나친 몰두라고 비판했다. 결국 제국통치에 소홀하게 되어 정치적인 재난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역사학자들은 루돌프의 예술에 대한 후원과 비학(秘學)등에 대한 연구는 르네상스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했다. 루돌프는 정치에 있어서 개신교와 가톨릭간의 연합을 추구하였으나 이는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위상을 훼손하는 것으로 평가하였다. 루돌프는 가톨릭인 삼촌의 스페인궁정에서 자랐지만 개신교는 물론 유태교에 대하여도 관용적이었다. 그는 실제로 가톨릭 교리와 의식에 대하여도 집착하지 않았다. 심지어 임종에 있어서도 마지막 병자성사(病者聖事)를 거부하였다. 그렇다고 개신교를 적극 옹호한 것도 아니었다. 교황의 지나친 개신교 탄압정책에 어느 정도 반대하였을 뿐이었다. 루돌프는 종교분쟁이 있으면 이를 인본주의에 입각하여 평화적으로 화해하는데 주력하였다. 교황청에서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을 추진하라고 은밀히 압력을 가하였을 때에도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로 인하여 정치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내란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기나긴 전쟁]

오토만 터키와의 분규는 루돌프는 막바지 궁지로 몰아넣은 원인이었다. 그는 오토만 터키와 절대 타협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고집스럽게도 기독교 국가들을 연합하여 마치 새로운 십자군운동을 펼칠 기세였다. 그리하여 터키와 오래도록 지지부진하는 어려운 전쟁을 시작해야 했다. 1593년 시작된 터키와의 전쟁은 1606년까지 무려 13년을 끌었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기나긴 전쟁’(The Long War)이었다. 터키와의 전쟁이 10년이 넘게 교착상태의 소모전으로 진전되자 1604년 헝가리의 귀족들과 장군들이 너무나 지친나머지 반란을 일으켰다. 헝가리 반란의 지도자는 유명한 스테픈 보츠카이(Stenphen Bocskay)였다. 헝가리에서 반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1605년 왕실 사람들은 루돌프에게 헝가리 통치권을 동생 마티아스(Matthias)에게 이양하라고 요구했다. 마티아스는 헝가리 반란세력과 어렵사리 비엔나 평화(Peace of Vienna)협정을 맺었으며 이와 함께 터키와 치트바토로크 평화(Peace of Zsitvatorok)협정을 체결하여 오랜 전쟁을 마무리했다. 루돌프는 동생 마티아스가 나중에 권력을 잡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양보했다고 보고 대단히 분노했다. 그래서 루돌프는 터키와의 평화협정을 무시하고 새로 군대를 규합하여 터키와의 전쟁을 준비했다. 그러자 마티아스가 헝가리의 추종세력을 규합하여 형 루돌프에게 헝가리, 오스트리아, 모라비아의 왕관을 내놓으라고 강요했다. 이처럼 왕실에서 분규가 일자 이 기회를 이용하여 보헤미아의 개신교들은 신성로마제국의 허약함을 보고 종교자유를 요구하였다. 1609년 루돌프는 ‘폐하의 교서’(Letter of Majesty)로서 보헤미아의 요구를 허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헤미아는 종교의 자유가 확실하게 보장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더 구체적인 조치를 요구하였다. 이에 루돌프는 군대를 동원하여 이들을 억압코자 했다. 보헤미아의 개신교도들은 마티아스에게 도움을 호소하였다. 마티아스의 군대가 루돌프를 강제로 체포하여 1611년까지 프라하성에 감금하였다. 이후 루돌프는 동생 마티아스의 강요에 이기지 못하여 보헤미아의 왕관을 내놓았다.



[30년 전쟁의 발발]

루돌프는 1612년 1월 20일 차가운 프라하성에서 세상을 떠났다. 동생 마티아스로부터 모든 권력을 빼앗긴지 9개월만이었다. 다만,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자리는 마티아스로서도 당장 어떻게 할수 없었다. 마티아스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까지 된것은 형 루돌프가 세상을 떠난지 5개월 후였다. 루돌프가 세상을 떠난지 6년후, 프라하에서는 이른바 ‘프라하의 창밖으로 내던지기’(Defenestration of Prague)사건이 일어났다. 보헤미아의 개신교들이 마티아스가 보낸 두명의 가톨릭 귀족들을 프라하성의 창밖으로 내던진 사건이었다. 보헤미아의 개신교도들은 루돌프가 Letter of Majesty로 약속한 종교자유의 권한을 수호하기 위해 ‘30년 전쟁’(1618-1648)을 시작하였다. 30년 전쟁은 형 루돌프를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마티아스의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