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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에 호의적인 막시밀리안2세 (Maximilian II)

정준극 2008. 2. 20. 11:21

개신교에 호의적인 막시밀리안2세 (Maximilian II)

1527-1576 (1564-1576)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1517)이 일어난후 수십년동안 서유럽은 가톨릭과 개신교(특히 루터교)간의 종교 분규가 끊이지 않았다.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한 신성로마제국은 로마가톨릭의 전통을 고수하기 위해 비가톨릭 국가들과 생존을 위한 힘겨운 경쟁을 해야 했다. 그러한 분규와 경쟁의 초반에 막시밀리안2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제국의 존속을 위해 개신교에 호의적일 수밖에 없었던 인물이었다. 막시밀리안2세가 순전한 가톨릭이면서도 의도적으로 개신교에 호의적이었는지, 또는 진정으로 개신교에 호의를 가지고 그들을 이해하려 했었는지는 섣불리 판단할수 없다. 하지만 신성로마제국의 주요 구성분자인 독일의 제후국들이 개신교로 돌아서는 일이 많자 개신교를 핍박함으로서 이들을 공연히 분노케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만큼은 틀림 없을것 같다.

 

막시밀리안2세

 

1527년 7월 31일 비엔나에서 태어난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막시밀리안2세)은 35세 때인 1562년 보헤미아의 왕에 올랐으며 이듬해인 1563년에는 헝가리의 왕이 되면서 동시에 아버지 페르디난트1세(Ferdinand I)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어 13년동안 신성로마제국을 통치하였으며 1576년, 신성로마제국의 중심도시인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에서 폴란드 침공을 계획하다가 49세의 비교적 한창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막시밀리안의 어머니는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인 라드슬라우스2세(Ladislaus II)의 딸인 안느(Anne)였다. 막시밀리안은 21세 때인 1548년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삼촌 샤를르5세의 딸인 스페인의 마리아(Maria)와 결혼하였다. 그러므로 막시밀리안과 마리아는 친사촌간이다. 막시밀리안과 마리아는 자녀를 16명이나 생산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유아 사망률이 극히 높아서 4명의 자녀가 생후 1년만에 세상을 떠났으며 또 다른 아이는 사산하였다. 늦게까지 생존한 자녀들 중 큰 아들인 루돌프가 저 유명한 예술의 수호자 루돌프2세로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고 셋째 아들인 마티아스는 형 루돌프에게 후사가 없고 또한 루돌프가 통치 말년에 개신교에 대한 정책을 온당하게 추진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루돌프로부터 황제의 자리를 강제로 물려받았다. 그 내용은 루돌프1세 편을 보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막시밀리안2세와 결혼한 스페인의 마리아 공주

 

[스페인에서의 군주 수업]

막시밀리안은 기본적으로 스페인에서 앞으로 군주가 되는 교육을 받았다. 주로군사교육을 받았다. 전쟁에 대한 경험도 쌓았다. 삼촌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샤를르5세(카를로스5세)를 도와 프랑스와의 전쟁 등 몇차례의 전쟁에 직접 참여하였다. 샤를르5세를 도운 공로 때문이었는지 또는 미리부터 계획되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막시밀리안은 샤를르5세를 도와 프랑스와의 전쟁에 참여한지 몇 년후인 1548년 샤를르5세의 딸인 마리아와 결혼했다. 막시밀리안은 결혼후 2년동안 샤를르5세 황제의 대리인으로서 스페인에 머물렀다. 스페인이야 소시적에 살던 곳이라서 전혀 생소하지 않았다. 나중에 막시밀리안이 자기의 큰 아들 루돌프2세를 어린 시절에 스페인에 보내 장차 군주로서의 교육을 받도록 한것도 스페인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다. 스페인에 있던 막시밀리안은 제국황제의 계승권문제가 불거지자 독일로 급히 돌아왔다.


막시밀리안2세의 가족 

 

[스페인합-오스트리아합으로 분열]

황제 샤를르5세는 자기 아들 필립(나중에 스페인 왕이 됨)을 차기 황제로 생각하고 있었다. 문제는 샤를르의 동생 페르디난트였다. 페르디난트는 이미 오래전부터 샤를르5세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는 것으로 지명되어 있었다. 그래서 막시밀리안은 아버지 페르디난트의 편에 서서 샤를르5세의 필립지원계획에 반대를 표명했다. 오랜 분규 끝에 친샤측(친샤를르계열)과 친페측(친페르디난트계열)간에 타협이 되었다. 페르디난트가 차기 황제가 되는 대신 필립이 페르디난트의 현재 직위를 계승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필립이 오스트리아 대공, 헝가리 및 보헤미아 왕위를 차지토록 하지만 다만, 로마왕은 필립이 재직기간 중에만 막시밀리안이 맡는 것으로 결정을 보았다. 상당히 복잡한 조건들이어서 실현성이 의문시 되는 결정이었다. 과연! 타협안은 무산되었다. 그러나 뜻하지 아니한 성과도 있었다. 이로부터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와 스페인-합스부르크의 분열이 막을 열게 된 것이다. 1552년의 사건은 이러한 분열에 도화선 역할을 한 것이었다. 1552년, 막시밀리안은 갑자기 몸이 아파 겨의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얼마후 회복은 되었지만 의심의 화살은 필립쪽으로 겨냥되었다. 필립이 막시밀리안을 제거하기 위해 독약을 마시도록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물론 근거 없는 주장이었지만 막시밀리안 계파와 필립 계파는 서로 죽어라고 미워한 나머지 ‘갈라서자!’고 소리쳤던 것이다. 나중에 필립은 스페인왕이 되었고 막시밀리안은 오스트리아 대공, 헝가리 및 보헤미아 왕, 그리고 끝내는 영광스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독살음모 사건이 있은 직후 막시밀리안은 독일 레겐스부르크에서 비엔나로 거처를 옮기고 오스트리아 역내(域內)통치에 만전을 기하는 한편, 터키의 침공에 대한 방어준비를 열심히 하였다. 합스부르크로서는 오나가나 터키가 두통 및 소화불량의 원이이었다.


막시밀리안2세의 어머니 보헤미아와 헝가리 왕 블라디슬라우스의 딸 안나 

 

[루터주의자 파우저]

막시밀리안은 보헤미아의 왕으로서 종교관이 명확치 않았다. 오스트리아의 대공으로서는 당연히 가톨릭을 따랐다. 하지만 개신교운동이 활발한 보헤미아에 대하여는 가톨릭만을 강력하게 주장할수 없었고 그렇다고 개신교를 지나치게 두둔할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막시밀리안이 개신교에 호의적인 것은 그가 청년 시절 루터주의에 대하여 공부를 했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고 한편으로는 삼촌 샤를르5세와 아버지 페르디난트 사이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계승에 대한 분규가 일어났을 때 독일에 있는 개신교 제후들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루터교에 대하여 호의적이라는 주장이 있다. 아무튼 막시밀리안의 친개신교 성향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라기 보다는 개인적인 관계 때문이라는 주장이 컸다. 그러는중 막시밀리안은 비엔나에 있을 때 루터주의자로 유명한 세바스치난 파우저(Sebastian Pfauser)와 매우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심지어는 막시밀리안이 가톨릭을 떠나 개신교가 되려고 한다는 소문까지 나돌 정도였다. 얼마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아버지 페르디난트는 아들 막시밀리안의 이같은 바람직 못한 상태를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부자간의 관계는 점점 소원해졌다. 아버지 페르디난트는 아들 막시밀리안을 없는 자식으로 치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교황 바오로4세(Paul IV)에게  만일 막시밀리안이 차기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될 예정이면 절대로 계승하지 못하도록 해달라고 부탁까지 하려했다. 그런데 일이 잘 풀리려고 그랬는지 무슨 생각에서인지 막시밀리안이 가톨릭으로 되돌아오고 개신교에 대하여는 중립을 지키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획기적인 조치는 궁정설교자로서 루터주의자인 파우저(Pfauser)를 해임한 것이었다. 그런 이후 막시밀리안은 가톨릭 성당에서의 미사에 비교적 열심히 참석하여 가톨릭 사제들을 기쁘게 해주었다. 

 

1571년의 레판토 해전 

 

1562년 막시밀리안은 프랑크푸르트에서 독일왕(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으로 선출되었다. 막시밀리안은 독일왕으로서의 대관식을 가지기 전에 가톨릭 제후들에게 가톨릭 신앙에 충성한다는 것을 확약했다. 교황청도 그의 가톨릭 신앙심을 높이 평가하여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임을 추인해주었다(독일왕이라는 호칭은 신성로마황제가 로마교황에 의한 대관식을 가지지 않았을 경우에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막시밀리안은 한편으로 루터주의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인지 개신교 제후들에게 ‘만일 소생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다고 해도 신앙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방향으로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약속했다. 1563년 막시밀리안은 헝가리 왕에 올랐으며 이듬해인 1564년에는 아버지 페르디난트의 죽음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고 이어 헝가리 및 보헤미아의 왕으로 정식 출발하였다.

 

 황금양털 기사단의 체인

 

[술탄과의 이상한 휴전 조건]

신임 황제는 일찍부터 가톨릭교회의 개혁이 필요함을 깊이 느끼고 있었다. 우선 교회성직자의 결혼을 허용하는 문제를 해결코자 했다. 사도 베드로로 결혼하여 부인을 거느렸는데 어찌하여 가톨릭 성직자들은 결혼할수 없느냐는 생각에서였다. 교황 비오4세(Pius IV)가 이 제안을 거절했다. 다음으로 시도한 것은 평신도(平信徒)의 성사 참여였다. 성만찬을 비롯한 여러 성사를 수행할 때에 주관하는 신부가 부족하거나 아예 없다면 평신도가 주례신부를 돕도록 하던지 또는 주관할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병사에게 병자성사 또는 고해성사를 시행할 때에 신부가 없으면 다른 사람이 대행할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성사되지 못하였다. 성찬을 시행하는 것은 교회가 인정한 사제의 특권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와 함께 막시밀리안은 우선 오스트리아의 루터교 귀족과 기사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였으며 가톨릭이 요청한 트렌트공의회(Council of Trent)의 포고령을 발간하는 일을 거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아우구스부르크 의회(Diet of Augusburg)에 참석하였다. 아우구스부르크 의회는 열렬 개신교도들을 억합해야 하는 일련의 조치들을 채택하였지만 막시밀리안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그의 종교정책은 결단성이 없는 우유부단한 것이었다. 터키와의 전쟁도 그러했다. 막시밀리안은 터키군의 침공을 막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고 위세 좋게 행군하여 터키군과 대치하였지만 어떠한 교전도 하지 않았다. 반면에 1568년 휴전조약을 체결했다. 막시밀리안은 휴전의 조건으로 헝가리 서북부 영토를 보전 받았으며 그 대가로 술탄에게 조공을 바치기로 했다. 그런데 헝가리의 서북부 영토는 실제로 합스부르크가 콘트롤하는 지역이어서 술탄의 양도를 받지 않아도 좋을 곳이었다. 사람들은 ‘무슨 휴전조약이 이래?’라면서 이해를 하지 못했다.

 

막시밀리안2세가 서거한 레겐스부르크 

 

[돈 카를로]

그러는 와중에 견원지간이나 마찬가지였던 스페인의 필립과의 관계가 개선되었다. 다행한 일이었다. 필립과 막시밀리안은 합스부르크 왕조를 위해서 서로 힘을 합하여 노력하자고 다짐하였다. 필립(필립2세)가 누구인가? 대단한 군주였다. 철권 전제정치로 플란더스의 독립을 봉쇄한 사람이다. 늙은 필립은 프랑스 발루아(Valolis) 왕가의 젊은 엘리사베스(엘리사베타)와 결혼하였다. 그런데 필립이 첫 부인에게서 낳은 카를로스 왕자(Don Carlos)는 우연한 기회에 프랑스에서 엘리사베스 공주를 만나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지만 엘리사베스는 프랑스와 스페인간의 조약으로 인하여 돈 카를로의 아버지인 필립과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돈 카를로의 번민! 그는 스페인의 통치아래에 있는 플란더스의 독립을 지원함으로서 가정번민에서 탈출하려고 했다. 플란더스는 개신교가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로마교황청은 스페인에게 플란더스를 더욱 압박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러한 때에 돈 카를로 왕자가 플란더스를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필립은 막후에서 개신교를 지원하는 막시밀리안이 돈 카를로에 의한 플란더스 독립운동을 조정하였다고 생각했다. 얼마후 돈 카를로가 죽었고(혹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함) 이어 엘리사베스도 세상을 떠나자 필립은 아무런 후사가 없이 다시 홀아비가 되었다. 막시밀리안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자기의 딸 안나(Anna)를 필립의 네 번째 부인으로 시집보냈다. 얼마후 필립마저 세상을 떠나자 막시밀리안의 아들중 하나가 스페인의 왕좌를 차지하게 되었다. 스페인의 왕자 돈 카를로와 프랑스의 엘리자베스 드 발루아 공주와의 사랑과 스페인 왕 필립과의 갈등, 그리고 플란더스(네덜란드)의 봉기에 대한 스토리는 프리드리히 쉴러가 Don Carlo(Don Carlos)라는 타이틀의 소설로 만들었으며 이를 오페라의 황제 베르디가 불후의 오페라로 작곡하였다.


막시밀리안2세의 유해가 안치된 프라하의 성비투스(St Vitus)대성당 

 

이렇듯 서유럽에서 종교문제로 사태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막시밀리안의 종교문제에 대한 자세는 아직도 우유부단했다. 이는 양측 모두의 불만을 자초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오스트리아에서도 개신교와 가톨릭간에 평화를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막시밀리안의 권세는 자꾸 한정되었다. 막시밀리안은 문제를 해결코자 하는 의향이 없다기보다는 무능력했다. 제국의 동북부가 다시 터키의 위협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시밀리안는 불활성기체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1575년 막시밀리안은 폴란드 왕으로선출되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까지 통치토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폴란드-리투아니아 개신교의 저항을 잠재우지 못하여 결국 폴란드를 떠나야 했다. 막시밀리안은 폴란드를 재침공코자 준비중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에서 세상을 떠났다. 1576년 10월 12일이었다. 막시밀리안은 1569년 비엔나 교외의 쇤브룬 부지를 구입하여 궁전을 짓고 황실 사냥터로 사용했으며 그의 아들 루돌프2세가 이 궁전을 확장하여 오늘날의 쇤브룬에 대한 기반을 만들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