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섬왕 필립1세 (Philip the Handsome)
1478-1506 (재위 1482-1506)
‘핸섬왕’(Philipp der Schoene: Philippe le Beau)이라고 불리는 필립1세는 스페인의 위상을 세계에 떨치게 해준 카를로서5세의 아버지이며 필립2세의 할아버지이다. 카를로스5세는 40년동안 스페인을 통치하였으며 필립2세는 42년동안 통치했다. 필립2세의 이름은 할아버지 필립1세를 존경하여서 붙인 이름이다. 핸섬왕 필립2세는 24년동안 스페인(카스티야)을 통치했다. 그러므로 필립1세-카를로스5세-필립2세의 3대가 스페인을 1백년 이상이나 통치했다. 핸섬왕 필립1세는 합스부르크 출신으로 아버지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1세(1459-1519)이며 어머니는 ‘부유한 마리아’(Mary the Rich: 1457-1482)라고 불리는 부르군디(Brugundy)의 마리아였다.
젊은 시절의 필립 더 핸섬
[합스부르크의 혈통]
핸섬왕 필립1세는 1478년 7월 22일 플란더스(플랑드르: 현재의 벨기에)의 브루제(Bruges)에서 태어났다. 당시 어머니 마리아는 브루군디의 여왕이었다. 1482년, 필립1세가 4살 때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어린 필립은 브루군디 공작으로서 명목상이지만 브루군디의 군주가 되었다. 어린 필립에게는 아르투아(Artois)백작, 샬로레(Charolais) 영주, 플란더스 군주, 에이노(Hainault) 군주, 브루군디 소속 팔라타인(Palatine) 백작이라는 타이틀도 함께 붙여졌다. 그러다가 카스티야의 공주 호안나(Joanna)와 결혼하여 1504년 필립1세로서 카스티야의 국왕으로 대관되었다. 부인인 카스티야의 호안나는 정신질환자여서 보통 ‘미친 호안나’(Joanna the Mad)라고 불리는 사람이었다. 아무튼 필립1세는 비록 28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 2년 동안만 카스티야 국왕으로서 통치했지만 이후 스페인제국의 통일이라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필립1세는 합스부르크 혈통으로서 처음으로 스페인의 군주가 된 인물이다. 필립1세를 핸섬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합스부르크 왕조의 인물 중에서 그나마 멀끔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합스부르크 사람들은 지나친 근친결혼으로 정신이상자, 기형아, 중환자 등이 많았다. 소화불량, 중풍, 간질, 천연두 등 지독한 질병들은 타고나기가 일수였다. 그중에서 가장 문제는 정신질환이었다. 합스부르크의 여러 사람들이 이른바 ‘미친 사람’들이었다. 그런 미친 사람들이 나라를 통치하니 백성들이 받아야 하는 고통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합스부르크의 사람들은 얼굴 모습에서도 특색이 있다. 눈이 조금 튀어나왔으며 턱은 주걱턱이다. 그래서 금방 알아볼수 있다. 그러나 필립1세는 그런 모든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비록 28세라는 한창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불쌍하게도 정신이상자라고 생각되는 여자와 결혼했지만 그 밖에는 모두 온전했다. 필립1세는 정신이상자인 부인 호안나와의 사이에 여섯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중에서 둘째 아들이 유명한 카를로스5세이다. 그러나 필립을 핸섬왕이라고 부르는 진짜 이유는 그가 돈 후안이나 카사노바에 버금하는 대단한 레이디 킬러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젊은 친구가 할일도 되게 없었나보다.
필립의 어머니 부르군디의 마리아(메리)
[어린 시절]
필립이라는 이름은 그의 증조할아버지 ‘선한 필립’(Philip the Good)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이다. 마찬가지로 필립의 이름은 손자인 필립2세에게 전해졌다. 필립은 1842년 ‘무모한 샤를르’(Charles the Bold)의 딸로서 어머니인 부르군디의 메리(마리: 마리아)가 세상을 떠나자 어린 필립은 어머니의 뒤를 이어 부르군디 군주가 되었다. 다만, 너무 어리기 때문에 아버지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1세가 후견인으로서 정사를 도왔다. 당시 플랑드르(플란더스)지방에서는 자치를 원하는 측과 막시밀리안 황제에게 충성하는 측으로 분열되어 분쟁이 끊일 사이가 없었다. 특히 겐트(Ghent)와 브루제(Bruges)와 같은 대도시에서 그러했다. 어느 해에는 필립이 브루제에서 독립분자들에게 연금되어 고초를 겪은 일도 있었다. 두 측의 분쟁은 1493년 이른바 센리스(Senlis) 평화협정으로 진정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로부터 필립은 부르군디의 군주로서 독자적으로 행동해야했다. 필립이 15세 때였다. 물론 중요한 정사(政事)는 부르군디 귀족의회가 필립을 자문하였다.
필립이 태어난 브루제(Burges: Brugge) 오늘날의 시청앞 광장
[결혼 정책]
1494년, 필립의 아버지인 막시밀리안1세는 공식으로 필립의 후견인으로서의 위치를 사퇴하였다. 플랑드르의 자치권을 요구하는 측과 막시밀리안을 지지하는 측간에 맺은 센리스 평화협정에 의해서였다. 당시 프랑스의 세력은 점차 확대되어 가고 있었다. 프랑스는 심지어 플랑드르의 자치운동을 측면지원하기도 했다. 부르군디와 신성로마제국으로서는 프랑스가 위협이 아닐수 없었다. 프랑스의 확장정책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합스부르크와 스페인 왕조인 트라스타마라(Trastamara)간의 결혼동맹 작전이 필요했다. 그런 결혼동맹은 프랑스의 샤를르8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함으로서 급박한 과제로 대두되었다. 샤를르8세의 이탈리아 침공을 제1차 반도전쟁(First Peninsular War)라고 한다. 필립은 22세 때에니 1496년, 아라곤의 후아나(Juana) 공주와 결혼하였다. 후아나는 아라곤의 공주이면서 동시에 카스티야의 공주도 된다. 왜냐하면 아버지 페르디난드는 아라곤의 왕이지만 어머니 이사벨라는 카스티야의 공주였기 때문이다. 필립과 후아나의 결혼식은 벨기에의 리어(Lier)에서 거행되었다. 이 결혼은 합스부르크와 트라스타마라간에 인척관계를 맺어 프랑스에 대적하기 위한 것이었다.
필립과 결혼한 카스티야의 후아나 공주 (정신이상자로 간주되었다.)
합스부르크의 결혼작전은 계속 진행되었다. 필립의 여동생 마르가레트(Margaret)는 아라곤의 페르디난드의 유일한 아들인 돈 후안(Don Juan) 왕자와 결혼했다. 결국 겹사돈이 된 셈이었다. 돈 후안은 앞으로 이루어질 카스티야와 아라곤 연합의 왕위 계승자였다. 카스티야의 왕위까지 계승하게 된 것은 카스티야에 후사가 없기 때문이며 카스티야의 공주인 어머니 이사벨라가 유일한 라인이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부르군디의 마르가레트를 스페인(카스티야 + 아라곤)의 왕위 계승자와 결혼토록 한 것은 스페인을 합스부르크에 통째로 넘겨주지 않겠다는 의도에서였다. 필립과 후아나는 결혼 몇 년후 아들을 낳았다. 훗날의 카를로스5세(샤를르5세)이다. 그 때쯤해서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후계자 문제가 일대 혼란에 빠지는 일이 일어났다. 왕위 계승자인 돈 후안이 마르가레트와 결혼한 직후인 1497년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왕위 계승권은 돈 후안의 여동생인 이사벨라(Isbella)에게 돌아갔다. 이사벨라는 필립과 결혼한 후아나(Juana)의 언니였다. 이사벨라는 포르투갈의 마누엘1세(Manuel I)와 결혼한바 있다. 그런데 일이 이상하게 되느라고 그랬는지 이사벨라도 오빠 돈 후안이 작고한 다음해에 첫 아이를 출산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아이는 다행히 살았다. 미구엘(Miguel)이었다. 그러므로 카스티야와 아라곤과 포르투갈의 다음 왕위 계승권은 당연히 어린 미구엘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이 무슨 변고인지 미구엘은 두 살 때인 1500년 여름, 병에 걸려 죽었다.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다음 왕위는 페르디난드 왕의 셋째 딸인 후아나에게 돌아갔다. 후아나에게 왕위가 돌아간다는 것은 남편 필립에게도 돌아간다는 것과 같다. 그러나 아라곤의 의회가 후아나의 왕위 계승권을 반대하고 나섰다. 아직 페르디난드 왕과 이사벨라 여왕이 자녀를 생산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미리 후계자를 결정하는 것은 안된다는 주장이었다.
카스티야의 필립이라고도 부르는 필립1세
아라곤에서는 그렇다고 해도 카스티야에서는 어떠한가? 카스티야 의회는 필립과 결혼한 카스티야의 후아나 다음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는 데에 이의가 없었다. 카스티야에서는 여자가 왕위를 상속해서는 안된다는 이른바 살리카법(Salic Law)을 적용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후아나의 상태가 문제였다. 카스티야 의회(Cortez)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후아나를 군주로 삼는다면 정치적으로 대단히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카스티야의 궁정에는 이미 부르군디의 영향력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므로 카스티야 의회는 필립에 대하여 대단히 호의적이었다. 카스티야는 필립을 군주로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502년 필립과 후아나 부부는 대규모 부르군디 궁정 조신들을 이끌고 카스티야를 방문하였다. 사전 탐사가 목적이었다. 카스티야 의회는 필립을 마치 새로운 왕으로 간주하여 크게 환영했다. 한동안 마드리드에 머물던 필립은 이듬해 부르군디로 돌아왔다. 그러나 임신중인 후아나는 마드리드에 남아 있었다. 며칠후 후아나는 페르디난드를 낳았다. 나중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페르디난드였다.
필립1세가 서거한 부르고스에는 스페인의 구국영웅 엘 시드의 기념상이 있다.
멋쟁이 필립은 돈 후안의 기질이 있었다. 그의 품에 안겼던 여자가 몇 명이나 되는지 모를 정도이다. 자연히 부인 후아나와의 사이는 불행했다. 원래부터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언 후아나는 남편의 불륜 때문에 질투의 화신이 되었고 결국 나중에는 정신이상이 되었다. 후아나는 자주 발작을 일으켰다. 남편 필립에 대한 질투 때문에 분노가 치밀어서였다. 후아나는 잔혹할만한 폭력도 행사했다.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는 명함도 내밀지 못할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 예를 들면 어떤 때는 필립과 관계했던 궁정의 시녀를 잔혹하게 처벌하기도 했다. 1504년 후아나의 친정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후아나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정신이상자가 되었다. 이후로 필립과 후아나는 죽을 때까지 별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섯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중 큰 아들은 저 유명한 카를로스5세이다.
[스페인 권력 투쟁]
카스티야의 공주로서 아라곤의 왕비가 된 이사벨라가 세상을 떠나자 이사벨리의 남편으로 아라곤의 왕인 페르디난드가 자기가 카스티야의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카스티야의 의회는 페르디난드의 주장을 거부했다. 페르디난드의 폭정을 펼것 같아 두려워해서였다. 스페인이면 스페인이지 아라곤 왕국은 무엇이고 카스티야 왕국은 무엇이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스페인 땅 덩어리보다 훨씬 작은 우리나라에서도 옛날에 신라, 백제, 고구려의 3국이 있었으며 가야도 있었음을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카스티야는 필립을 왕으로 결정하여 속히 오라고 했다. 1506년, 필립은 수많은 수행원들과 독일 용병들을 거느리고 위풍당당하게 카스티야에 도착했다. 그때쯤하여 아라곤의 페르디난드와 사위인 필립의 관계는 서먹한 정도를 지나 적대적이기까지 했다. 페르디난드로서는 죽 쑤어서 개주는 격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카스티야의 추기경 시스네로스(Cisneros)가 중재에 나서서 겨우 악수는 했지만 서로간의 앙금은 완전히 걷히지 않았다. 한바탕 다툼이 있기도 했다. 페르디난드는 비록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사위인 필립이 딸 후아나를 감금하다시피 하고 있는 것을 심히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두고보자!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으냐?’면서 이를 갈았다. 페르디난드의 아라곤과 필립의 카스티야는 전쟁 일촉즉발의 상태까지 갔었다. 그러나 이 무슨 변고인지? 필립은 카스티야 왕위에 오른 바로 그해(1506)에 장질부사에 걸려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필립이 카스티야의 군주로서 보여준 것은 무능뿐이었다. 남편 필립에 대하여 원한이 깊었던 후아나는 필립의 시신을 카스티야에 매장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합스부르크의 관례에 따라 심장 등 장기를 떼내어 별도 보관하는 일도 못하게 했다. 물론 시간이 지난후 필립의 유해는 마드리드에 안치되었다. 돈 후안의 말로!
핸섬왕 필립은 부르고스에서 서거했다. 사진은 부르고스의 성모 대성당
[6명의 자녀]
필립과 후아나의 사이는 불행 그 자체였지만 용하게도 자녀들은 6명이나 두었다. 큰딸 엘레아노르(Elanor: 1498-1558)는 포르투갈의 마누엘1세와 결혼하여 포르투갈의 왕비가 되었다가 마누엘1세가 죽자 프랑스의 프란시스1세와 결혼하여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 프란시스1세는 카를로스5세의 숙적이었다. 큰 아들 카를로스(1500-1558)는 통일된 스페인의 첫 국왕으로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지내기도 했다. 둘째 딸 이사벨라(Isbella: 1501-1525)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2세와 결혼하여 덴마크 왕비가 되었다. 둘째 아들 페르디난드1세(1503-1564)는 카를로스5세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셋째 딸 메리(Mary: Maria: 1505-1558)는 헝가리 및 보헤미아 왕인 루이2세와 결혼하여 왕비가 되었다. 막내딸 캐서린(Catherine: 1507-1578)은 포르투갈의 존3세(John III: Juan III)와 결혼하여 포르투갈 왕비가 되었다. 대단하다.
핸섬왕 필립의 아들 카를로스5세(샤를르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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