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합스부르크 사람들

마지막 기사 막시밀리안1세 (Maximilian I)

정준극 2008. 2. 20. 11:34

마지막 기사 막시밀리안1세 (Maximilian I)

1459-1519 (재위 1508-1519)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1세(1459-1519)는 1508년부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다. 그는 합스부르크의 영향력을 전쟁을 통해서, 또는 결혼을 통해서 대폭 확장하였다. 그는 간혹 ‘마지막 기사(騎士)’(The Last Knight)라고 불린다. 전쟁을 통하여 훌륭한 지도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막스밀리안1세. 뒤러의 그림. 그의 상징인 석류를 들고 있다. 석류를 대단히 좋아했던 모양?

 

[비엔나 노이슈타트에서 탄생]

막시밀리안(막시밀리안1세)은 1459년 3월 22일 프레데릭3세 황제와 포르투갈의 엘레아노르(Eleanor)의 큰 아들로 비엔나 근교 노이슈타트(Neustadt)에서 태어났다. 그는 18세 때인 1477년, 부르군디의 군주 계승자인 메리(Mary: Maria)와 결혼하였다. 메리는 부르군디 공작 ‘무모한 샤를르’(Charles the Bold)의 딸이다. 이 결혼으로 막시밀리안은 부르군디에 속한 네덜란드 영토와 부르군디의 자유주(自由州: Free County)를 얻었다. 그러나 부인 메리가 세상을 떠나자 부르군디 공국을 프랑스에 양도해야 했다. 메리는 결혼 5년 후인 1482년에 세상을 떠났다. 1493년, 아버지 프레데릭3세가 세상을 떠나자 막시밀리안은 합스부르크에 남아 있는 모든 영토를 이양 받았고 이를 계기로 하나의 통일된 합스부르크 영토로 만들었다. 같은 해에 그는 밀라노 공작의 딸 비안카 마리아 스포르자(Bianca Maria Sforza)와 재혼하였다.   

 

 비너 노이슈타트에 있는 제국군사학교. 막시밀리안1세는 비너 노이슈타트에 궁전을 두었다.

 

 

[프랑스와의 다툼]

막시밀리안은 첫 번째 부인 메리가 넘겨준 저지대의 넓은 지역을 통치하였다. 막시밀리안은 메리가 세상을 떠나지 전에는 메리를 대신하여 프랑스의 루이11세와 영토문제로 전쟁을 수행하였다. 막시밀리안은 1477년, 메리의 아버지인 부르군디 공작이 세상을 떠나자 곧이어 메리와 결혼하였다. 프랑스는 메리가 아직 결혼하기 전에 부르군디에 대한 연고권을 내세우며 부르군디의 다음 군주는 메리가 아닌 프랑스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는 부르군디가 전에 프랑스 관할이었으며 아직도 프랑스의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고 있음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만일 현재의 부르군디 공작이 세상을 떠나면 여자는 영주나 군주의 자리를 계승할수 없다는 살리카 법(Salic Law)을 내세웠다. 프랑스는 루이11세의 왕세자(Dauphin)와 메리의 결혼을 은근히 강요했다. 그렇게 되면 부르군디는 살리카 전통에 따라 사실상 프랑스의 통치 아래에 들어가게 된다. 당시 20세였던 메리는 프랑스의 오만한 제안을 단연 거부하였다. 메리는 아버지 부르군디 공작이 세상을 떠나자 후계자 문제가 시끄러워질 것 같아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과 서둘러 결혼했다. 신성로마제국과 합스부르크라는 거대한 간판을 배경으로 삼은 메리는 프랑스에 대하여 점차 실력행사로서 맞섰다. 프랑스의 루이11세는 메리의 아버지인 부르군디 공작이 살아 있을 때 부르군디의 네덜란드 땅을 빼앗아 간 일이 있다. 메리는 프랑스로부터 우선 이 잃었던 땅부터 되찾아 왔다.

 

언제나 합스부르크의 라이발이었던 프랑스왕 루이11세. 참 희한하게도 생겼다. 특히 콧대가 높은 듯!

 

[네덜란드의 반기]  

메리와 결혼한 막시밀리안은 사랑하는 메리와 처가의 나라인 부르군디 공국을 위해 솔선하여 봉사하였다. 막시밀리안은 프랑스와 부르군디간의 국경분규를 잠재웠으며 혼란한 네덜란드의 정세를 안정시켰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일부 지방들은 프랑스에 대한 미련으로 막시밀리안에 대하여 반기를 들었다. 1482년 메리가 뜻하지 아니하게 세상을 떠나자 네덜란드의 반브루군디 세력들은 프랑스의 루이와 비밀조약을 체결하고 부르군디 소속의 프랑세 콤트(Franche Comte)와 아르투아(Artois)를 루이에게 돌려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483년, 이번에는 문제의 루이11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후계자는 어린 샤를르8세(Charles VIII)였다. 샤를르8세의 어머니인 안느(Anne)가 섭정이 되었다. 안느는 우선 내정에 힘써야 하므로 부르군디와의 분규를 중단시켰다. 한편, 브루군디 공국은 메리의 서거후 아들 필립(핸섬왕 필립)이 후임이 되었으나 아직 어리므로 아버지인 막시밀리안이 당분간 섭정으로서 부르군디를 통치하였다. 필립이 15세가 되어 더 이상 섭정이 필요없게 되자 막시밀리안은 섭정에서 물러나면서 프랑스의 샤를르8세와 세닐스조약(Treaty of Senlis: 1493)을 체결하고 서로 영토를 교환키로 했다. 프랑스는 프랑세 콤트와 아르투아를 소유하게 되었고 브루군디는 부르군디 지역에서 프랑스에 속해있던 땅과 피카르디(Picardy)를 갖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네덜란드의 대부분 영토는 합스부르크의 소유가 되었다. 

 

 부르군디에 속한 자유국인 프랑세-콤크의 수도 베상송(Besancon) 전경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

1485년 막시밀리안은 로마왕(King of the Romans)로 선출되었다. 로마왕이란 앞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될 사람으로 선출된 사람에게 주는 타이틀이다. 관례에 따르면 신성로마제국의 선제후가 선출한 로마왕은 교황에 의해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루어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고 불렀다. 로마왕으로 선출된 막시밀리안은 1493년 그의 아버지인 프레데릭3세가 세상을 떠나자 정식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이금해인 1494년, 막시밀리안은 밀라노 공작의 딸 비안카 마리아 스포르짜(Bianca Maria Sforza)와 결혼하였고 이를 계기로 이탈리아 지역으로 신성로마제국의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러자 프랑스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막시밀리안의 이탈리아 진출은 결국 프랑스와 이탈리아 전쟁(Italian War)으로 대결하게 되었다. 막시밀리안은 패배하였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후에는 다시 이탈리아에서의 새력을 되찾았다. 막시밀리안은 스위스를 합스부르크의 속령으로 만들고자 했으나 프랑스의 간섭으로 실패를 맛보았다. 막시밀리안은 스위스의 독립을 허용하지 않을수 없었다. 지금도 제네바를 중심으로한 지역이 프랑스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은 그때로부터였다.

 

막시밀리안1세와 결혼한 밀라노공국의 비안카 마리아 스포르짜 공주. 긴머리 공주라는 별명이 있었을 듯.


막시밀리안은 1495년 봄스(Worms)에서 제국의회(Reichstag)를 주관하였다. 막시밀리안은 제국의회를 통하여 이른바 ‘제국개혁’(Reichsreform)을 이룩하였다. 신성로마제국에 속한 여러 영토를 통합하여 새로운 모습의 제국을 만든 개혁이었다. 다만, 스위스가 문제였다. 막시밀리안의 신성로마제국은 도르나하(Dornach)전투의 결과 스위스를 제국으로부터 분리하여 독립된 연방으로 인정하였다. 1508년 막시밀리안은 교황 율리우스2세(Julius II)의 동의를 얻어 ‘로마 황제 당선인’(Erwählter Römischer Kaiser: Elected Roman Emperor)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이로써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교황이 대관해야 한다는 백년 전통은 끝을 맺었다.

 

봄스(Worms)에서 열린 제국의회(라이히스타크)


[결혼 정책] - 그대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 

스위스를 가운데 두고 치룬 프랑스-오스트리아의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가 패배한 결과, 막시밀리안은 그의 세 살된 딸 마르가레트(Margaret)를 프랑스의 샤를르 왕자(훗날 샤를르8세)와 결혼시켰다. 샤를르 왕자는 적대적 관계에 있던 루이11세(Luis XI)의 아들이었다. 돌이켜보건대 루이11세는 마르가레트 공주의 어머니, 즉 막시밀리안의 첫째 부인인 부르군디의 메리와 자기 아들 샤를르를 결혼시키고자 했었다. 인생유전! 이제는 그 왕자가 메리의 딸과 결혼하게 되었던 것이다. 프랑스의 샤를르 왕자와 막시밀리안의 딸인 마르가레트의 결혼 조건도 막시밀리안에게 굴욕적인 것이었다. 어린 마르가레트를 프랑스 궁정에 데려가 양육한후 결혼식을 올리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어린 딸을 원수나 마찬가지인 루이11세의 장막으로 보내야하는 막시밀리안은 눈물을 삼켰을 것이다. 어린 마르가레트는 물설고 낯설은 프랑스로 떠났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마르가레트가 파리에 도착한지 얼마후 마르가레트를 파리로 데려온 장본인인 루이11세가 세상을 떠났다. 어린 마르가레트는 고향 앞으로 가지 못하고 그대로 프랑스의 궁정에 머물렀다. 루이11세가 세상을 떠나자 어린 왕자 샤를르가 샤를르8세로서 프랑스 왕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 군주로서 어리기 때문에 그의 누이인 앤느(Anne)가 섭정으로 활약했다. 앤느는 로레인(Lorraine) 공작과 약혼한 사이였다. 그러나 로레인 공작은 부르군디의 메리(막시밀리안의 첫 부인)에게 충성하느라고 앤느와의 약혼을 파기하였다. 다행중 불행으로 로레인 공작에 얼마후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두 사람의 약혼은 없던 일이 되었다. 그러나 앤느는 부르군디의 메리, 즉 샤를로와 약혼하여 현재 프랑스 궁정에 머물고 있는 마르가레트의 어머니에 대하여 매우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다.

 

막시밀리안1세와 가족. 왜 모두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모두 딴 생각들 때문?


막시밀리안과 부르군디의 메리의 딸인 마르가레트가 프랑스의 샤를르8세와 약혼한 사이이고 더구나 마르가레트가 프랑스의 궁정에서 지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샤를르8세의 섭정인  앤느는 샤를르8세를 브리타니(Brittany)의 앤느(Anne)공주와 결혼시키려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왜냐하면 프랑스는 브리타니를 소유할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일이 묘하게 되느라고 그랬는지 브리타니의 앤느는 1482년(프랑스의 루이11세가 죽기 전해) 부르군디의 메리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혼자가 된 막시밀리안과 결혼키로 되어 있는 사이였다. 프랑스의 앤느는 그 사실을 알고서도 10대 중반의 샤를르와 브리타니의 앤느를 결혼시키려고 공작을 꾸몄던 것이다. 아마 막시밀리안에 대하여 ‘어디 한번 엿 먹어 봐라!’고 했던 것 같았다. 막시밀리안과 브리타니의 앤느는 1491년 위임결혼(Marriage by proxy)을 하여 사실상 결혼한 상태였다. 프랑스의 앤느에 의한 이 모든 공작의 결과, 샤를르8세는 마르가레트와의 결혼은 거부하고 브리타니를 침공하여 브리타니의 앤느와 거의 강압적으로 결혼하였다. 샤를르8세와 브리타니의 앤느는 4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모두 어릴 때 세상을 떠났다. 그후 브리타니의 앤느는 샤를르8세가 죽자 그의 뒤를 이어 프랑스의 왕에 오른 루이12세와 결혼하였다. 루이12세는 루이11세의 사촌이다. 막시밀리안의 딸인 마르가레트는 어찌 되었는가? 샤를르8로부터 결혼약속을 거부당한 마르가레트는 샤를르8세가 브리타니의 앤느와 결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고향인 부르군디에 가지 않고 2-3년 동안 프랑스에 더 남아 있다가 막시밀리안에게 돌아갔다. 마르가레트는 두 번이나 결혼하였다.

 

브리타니의 앤느 공주 . 초상화를 그린 화가에게 정말 잘 보였나 보다.


막시밀리안의 프랑스에 대한 감정은 수그러들 수 없었다. 그가 밀라노 공작의 딸 비안카 마리아 스포르자와 결혼을 서두른 것도 이탈리아에 대한 프랑스에 진출을 견제키 위한 방책이었다. 나아가 막시밀리안은 자기 자녀들이 이탈리아 왕족들과 결혼하는 것을 적극 추진하였다. 16세기에 들어와서는 손자들의 결혼에 포커스를 두었다. 그리고 프랑스 쪽으로는 진출하기 어려우므로 동쪽으로 시야를 뻗었다. 그로부터 합스부르크는 폴란드, 보헤미아(체코), 헝가리, 루마니아 일부 등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려움도 많았다. 프랑스와 러시아가 합스부르크에 서서히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막시밀리안은 최소한 보헤미아와 헝가리만은 합스부르크를 위해 보전하고 싶었다. 막시밀리안은 1515년 헝가리 왕 라디슬라우스2세(Ladislaus II)와 폴란드 왕 지기스문트1세(Sigismund I)를 비엔나에서 만났다. 결혼전략이 추진되었다. 막시밀리안의 손녀딸인 메리와 라디슬라우스2세의 아들 루이스(Louis)와의 결혼이 주선되었으며 루이스의 여동생인 안네(Anne)는 막시밀리안의 손자인 페르디난트(Ferdinand)와 결혼토록 주선되었다. 막시밀리안의 손자-손녀는 핸섬왕 필립의 자녀들이었다. 이로써 합스부르크의 헝가리 및 보헤미아에 대한 영향력은 강화되었다. 특히 헝가리 왕 라디슬라우스2세가 세상을 떠나자 라디슬라우스의 자녀인 안네와 루이스는 모두 막시밀리안의 양자, 양녀가 되었다. 이러한 결혼전략은 다음과 같은 라틴어로 요약된다. "Bella gerant alii, tu felix Austria nube, Nam quae Mars aliis, dat tibi regna Venus." 이 말을 굳이 번역하면 ‘모두들 누가 전쟁에서 이길지 내기를 걸라! 그러나 너 오스트리아는 결혼을 계속하라. 전쟁의 신 마르스(Mars)는 다른 왕국들의 몫이며 사랑의 여신 비너스는 오스트리아의 것이기 때문이니라!’이다.

 

막시밀리안1세의 손녀(핸섬왕 필립의 딸) 메리. 헝가리의 블라디슬라우스의 아들과 정략 결혼함. 우리 같으면 하라고 해도 안할텐데!


 

[죽음과 전설]

막시밀리안은 1519년, 향년 59세로 비엔나 북쪽 상부 오스트리아의 벨스(Wels)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들 필립(핸섬왕 필립)이 막시밀리안보다 13년 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손자인 카를로스5세(샤를르5세)가 할아버지 막시밀리안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막시밀리안은 비엔나 노이슈타트성 채플에 안치되었다. 인스부르크의 궁정교회(Hofkirche)에는 막시밀리안을 기념하는 묘소가 만들어졌다. 막시밀리안은 예술과 과학을 매우 숭상하여 여러모로 후원했다. 그의 주위에는 항상 당대의 유명한 학자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요하힘 바디안(Joachim Vadian), 안드레아스 슈토베를(Andreas Stoberl)등이다. 막시밀리안은 저명 학자들을 궁정의 고위직으로 임명하였다. 독일의 르네상스는 막시밀리안의 치세에서 처음 싹이 텄다. 막시밀리안은 프랑스의 샤를르 왕자와 결혼하기 위해 파리에서 지내다가 결혼이 파기되는 바람에 집으로 돌아온 딸 마르가레트를 손자들인 샤를르(카를로스5세)와 페르디난트(페르디난트1세)의 교육을 맡으며 나아가 후견인이 되도록 했다. 마르가레트는 부여된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였다. 막시밀리안은 결혼정책과 전쟁정책을 병행하여 합스부르크의 영향력을 네덜란드, 스페인, 보헤미아, 헝가리, 폴란드, 이탈이아까지 확대하였다. 이러한 영향력은 거의 1백년을 지속하여 유럽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

 

 막시밀리안1세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비너 노이슈타트 대성당


[참고사항]

로마 왕 (King of the Romans: Rex Romanorum)


로마 왕이란 타이틀은 신성로마제국의 경우에만 사용하던 것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으나(Imperator futurus: Emperor to-be) 정식 대관식을 가져 황제로 등극하지 못한 사람, 특히 황제로 선출되었으나 로마 교황에 의한 대관식을 아직 가지지 못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로마 왕’이라고 불렀다. 훗날 '로마 왕‘이라는 타이틀은 현재의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후계자에게도 사용되었다. 즉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생존하여 있을 때에 차기 황제로 선출된 사람에게 ‘로마 왕’이라는 타이틀을 주었다. ‘로마 왕’이라는 타이틀은 11세기의 헨리4세에게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헨리4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통치하였으나 교황에 의한 대관식을 올리지 못했다.


신성로마제국은 독일 왕국을 기반으로 하였다. 독일 왕국의 왕은 전통적으로 로마에 가서 교황으로부터 대관을 받아야 했다. 교황에 의한 대관식을 가지지 못한 독일 왕을 Rex Teutonicorum(독일 왕), 또는 Rex Francorum(프랑크 왕)이라고 불렀다. 독일 왕(Rex Romanorum)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군왕은 헨리2세였다. 그는 새로 출범한 신성로마제국이 로마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비잔틴 제국과는 다르다는 것을 내세우기 위해 ‘로마 왕’이라는 타이틀을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헨리4세로부터 표준 타이틀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헨리4세가 ‘로마 왕’(Rex Romanorum)이라는 타이틀을 사용하자 당시 교황인 그레고리7세(Gregory VII)는 ‘로마 왕 좋아하네! 튜톤 왕(독일 왕: Rex Teutonicorum)이라고 쓰는 것이 옳지!’라면서 반대했다. 그러나 교황 알기를 약간 우습게 알던 헨리4세는 ‘로마 왕(Rex Romanorum) 오케이! 더 이상 논란 끝!’이라면서 처음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헨리4세의 후계자들은 로마 교황으로부터 대관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는 Rex Romanorum(로마 왕)이라고 불렀으며 대관식 후부터는 Imperator Romanorum(로마 황제)이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