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카를로스5세 (Carlos V)
1500-1558 (재위 1516-1556)
[복잡한 가계]
스페인의 카를로스5세(샤를르5세)는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으로 16세기 초반에 유럽을 호령하던 막강한 인물이었다. 카를로스5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아라곤과 카스티야의 왕, 부르군디 공작, 브라반트 공작, 플란더스 백작, 룩셈부르크 공작, 네덜란드 영주, 밀라노 공작이라는 호칭을 가졌다. 역사적으로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아라곤의 왕, 카스티야(Castile)와 레온(Leon)의 왕, 오스트리아 대공, 부르군디(Brugundy) 공작, 합스부르크-네덜란드의 17개 속주(屬州)의 통치자라는 칭호를 가졌다. 간단히 말해서 카를로스5세는 합스부르크의 일원으로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으며 스페인의 국왕이었다. 카를로스5세는 1500년 2월 24일 플란더스의 헨트(Ghent)에서 태어나서 향년 58세로 1558년 9월 21일 스페인의 유스테(Yuste)라는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마드리드 북부에 있는 엘 에스코리알(El Escorial) 궁전의 성당에 안치되었다. 카를로스 5세의 아들이 철의 통치를 펼친 필립2세이며 필립2세의 아들이 비운의 돈 카를로스(Don Carlos)이다.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이탈리아에서는 Don Carlo)의 마지막 장면에서 돈 카를로가 할아버지인 카를로스5세의 혼령의 도움을 받아 사라진 곳은 엘 에스코리알 궁전의 성당이다.
마드리드 북부 약 50km 에 있는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 궁전. 카를로스5세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곳이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의 스페인은 카스티유와 아라곤이 중심세력으로서 장악하고 있었다. 카스티야는 호안나(Joanna)여왕이 통치하고 있었고 아라곤은 페르디난트2세가 통치하고 있었다. 카스티야의 호안나 여왕이 카를로스5세의 어머니였다. 호안나 여왕이 정신이상으로 더 이상 통치하기 어렵게 되자 카를로스5세는 드디어 카스티야의 통치권을 이양 받았다. 그러므로 카를로수5세는 카스티야와 아라곤이 통합된 스페인의 첫 국왕이라고 볼수 있다. 카를로스5세는 막시밀리안1세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으며 ‘핸섬한 필립’이라고 불리는 아버지 필립1세로부터 부르군디 네덜란드(Burgundian Netherlands)의 통치권까지 넘겨받았다. 카를로스5세는 19세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어 1556년 양위할 때까지 거의 40년을 황제의 자리에 있었다. 그는 세상 떠나기 2년전에 뜻한바 있어서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자리를 합스부르크의 페르디난트1세(실은 자기의 동생)에게 양위하였으며 스페인과 브루군디 네덜란드(저지대 네덜란드)만을 아들인 필립2세에게 양위하였다. 카를로스5세는 포르투갈의 이사벨라(Isabella)와 결혼하여 세자녀를 두었다. 큰 아들이 다음 왕위를 이어받은 필립2세이며 나머지는 딸들이다. 오스트리아의 요한(Johann: John)이라고 불리는 아들은 사생아였다.
카를로스 5세와 펠리페 2세
[결혼으로 통일을 이룬 스페인]
다시한번 복습하는 의미에서 카를로5세의 경력을 짚어본다. 카를로스5세는 유럽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네 왕조의 다음 왕위 후계자로 성장하였다. 유럽의 역사에서 그런 경우는 거의 없을 만큼 카를로스5세는 대단한 위치에 있었다. 카를로스5세는 어머니가 카스티야의 여왕이었으므로 당연히 카스티야의 다음 왕위 계승자였다. 카를로스5세는 또한 아라곤, 부르군디 공국,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의 다음 왕위 계승 서열에 있었다. 결과적으로 카를로스5세는 유럽의 중부, 남부, 서부에 걸친 막대한 영토를 통치하였고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와 아시아의 필리핀까지 관할하였다. 필리핀이라는 명칭은 카를로스5세의 아들인 필립(필리페)을 기념하여 붙인 이름이다. 카를로스5세는 1555년부터 역사상 처음으로 카스티야와 아라곤을 통합하여 통치했으므로 통일된 스페인의 최초의 국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를로스5세는 스페인 최초의 국왕이라는 견지에서는 카를로스1세라고 부른다. 카를로스5세는 양위할 때에 그의 대왕국을 둘로 나누어 아들 필립(필립2세)에게는 스페인과 부르군디 네덜란드를 통치토록 하고 동생 페르디난트에게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오스트리아의 세습 대공이 되도록 하였다. 아무튼 대단히 복잡한 양상이므로 독자제위께서는 주의를 단단히 기울일 필요가 있다.
헨트의 대성당(헨트는 카를로스5세가 태어난 곳이다)
[정말 복잡한 근친간 결혼]
카를로스5세의 어머니인 카스티야의 호안나(Joanna) 여왕은 합스부르크의 지나친 근친결혼의 영향으로 정신이상자가 되어(미친 여자로서) 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러므로 카를로스5세는 어릴 때에 이모인 마르가레트(Margaret)의 손에서 자라났다. 마르가레트는 친할머니인 부르군디의 메리의 딸이다. 어머니는 정신 나간 여자였지만 아버지는 핸섬하다고 인정을 받은 필립(Philip the Handsome)이었다. 아버지 ‘핸섬한 필립’에 대하여는 다음 순서에서 설명코자 한다. 뭐가 그리 핸섬한지? 카를로스5세의 외할아버지는 아라곤의 페르디난드2세이며 외할머니는 카스티야의 이사벨라였다. 두 사람의 결혼은 사실상 아라곤과 카스티야의 연합을 의미하는 것으로 현대 스페인의 발판을 마련해준 것이었다. 이 두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캐서린 공주가 영국 헨리8세의 첫 번째 부인인 ‘아라곤의 캐서린’이다. 아라곤의 캐서린은 영국 역사에서 잊지 못할 ‘블라디 메리’의 어머니이다. 그러므로 카를로스5세와 블라디 메리는 사촌간이며 나중에 부부가 된 카를로스5세의 아들 필립2세와 아라곤의 캐서린의 딸 블라디 메리는 숙모-조카 사이이다.
블라디 메리 영국여왕의 어머니인 아라곤의 캐서린. 카를로스5세의 아들인 필립2세의 장모.
카를로스5세는 합스부르크의 등록상표나 마찬가지인 주걱턱이었다. 훗날의 카를로스2세도 대단한 주걱턱을 보여주었다. 근친결혼의 후유증이라고 한다. 카를로스5세는 비정상적인 턱의 구조 때문에 음식물을 제대로 씹지 못했다. 그래서 자주 소화불량에 걸려 고생했다. 그리고 주로 혼자 식사를 했다. 카를로스5세는 심한 통풍(痛風)을 앓았다. 통증이 심하면 서서 걸어다니기도 어려웠다. 은퇴후 칩거한 성 유스테(St Yeste) 수도원에는 특별히 장애자용 램프를 만들어 카를로스5세가 휠체어를 타고 방에 들어가기 쉽도록 했다. 그는 또한 간질병을 가지고 있었다. 카를로스5세는 수많은 전쟁을 거치면서 수많은 끔찍한 장면을 모두 보았다. 그런 담대한 사람이었지만 쥐와 거미만 보면 놀래서 도망갔다. 카를로스5세는 시계에 대하여 취미가 많았다. 그러나 직접 시계를 만들거나 수리한 것은 아니었다. 시종들에게 명령하여 시계를 분해토록 하고 다시 조립하는 모습을 보기를 좋아한 것이다. 카를로스5세는 향이 타는 냄새를 무척 즐겨했다. 수도원의 제단에서 태우는 향냄새가 바람결에 밖으로 흘러나오면 그 냄새를 맡는 것이 최고로 기쁜 순간이었다고 한다.
액스-라-샤펠르 성당의 카를로스5세 관
[저 넘어 더 멀리]
‘저 넘어 더 멀리’라고 하면 무슨 탐험가들의 표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아니라 카를로스5세의 혈통과 관계된 표어이다. 카를로스5세는 합스부르크의 혈통과 부르군디 왕조의 혈통을 이어 받았으며 어머니 쪽으로는 스페인(카스티야)의 혈통을 물려받았다. 카를로스5세는 국경을 초월하고 민족을 초월하는 혈통을 지니고 태어났다. 그의 모토는 Plus Ultra(Further Beyond: 저 넘어 더 멀리)이었다. 다른 혈통과의 교류를 통해 더 넓은 영향력을 갖고자 하는 포부였다. 카를로스5세는 1500년 플랑드르(플란더스) 도시인 겐트(Ghent)에서 태어났다. 그러므로 탄생지부터가 다국적인 면모를 안고 있다. 유럽의 저지대에 속하는 부르군디의 문화와 풍속은 어린 카를로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카를로스5세는 5개국어를 말하였다. 플랑드르어(플라더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였다. 특히 프랑스어는 모국어나 마찬가지로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카를로스5세는 농담 삼아 ‘스페인어는 하나님께, 이탈리아어는 여인이게, 프랑스어는 남자들에게, 독일어는 나의 말에게 사용했다’고 말했다. 독일 사람들로서는 화를 낼만한 발언이었다.
뮐버그 전투에 참가한 카를로스5세 스페인국왕 겸 신성로마제국 황제
[부르군디의 영향]
부르군디는 프랑스의 영향이 남아있는 지역이었다. 따지고 보면 카를로스5세는 프랑스의 왕들과 먼 인척관계에 있기도 했다. 그는 젊은 시절 당시 서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인 파리를 자주 방문하였다. 프랑스에 대한 일종의 향수 때문이었다. 그는 파리에 대하여 ‘파리는 도시가 아니다. 우주이다’(Lutetia non urbs, sed orbis)라고 말하기도 했다. Urbis(도시)라는 단어와 Orbis(우주)라는 단어를 잘 활용한 언급이었다. 카를로스의 족보를 살펴보면 그가 프랑스 발루아(Valois)왕조의 부르군디 혈통과 프랑스 왕실 혈통을 조금씩 이어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문제는 부르군디와 프랑스가 적대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스페인의 국왕으로 동시에 등극할 때에 순수 합수부르크가 아니라는 점에서 곤란을 겪었던 일이 있다. 그의 영토중에서 스페인은 핵심이지만 초기의 왕자 시절에 그는 스페인이 마치 외국처럼 생각했다. 사실 그는 비록 여러 언어를 능란하게 구사했지만 스페인어는 그다지 유창하게 말하지 못했다. 그래서 스페인을 더구나 외국처럼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페인에서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으며 말년은 스페인의 수도원에서(에스코리알) 지냈다. 청년시절, 그의 가정교사는 우트레헤트(Utrecht)의 아드리안(Adrian)이었다. 아드리안은 나중에 교황 아드리안6세(Adrian VI)가 된 사람이다.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의 박물관. 엘 그레코의 작품도 몇 점이나 남아 있다.
[결혼과 자녀]
1526년 3월, 카를로스는 26세 때에 포르투갈의 후안3세(Juan III: John III)의 여동생 이사벨라(Isbella)와 결혼하였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이사벨라 여왕이다. 두 사람은 세명의 자녀를 두었다. 아들이 나중에 필립2세(1527-1598)가 된 사람이며 딸 마리아(1528-1603)는 사촌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2세와 결혼하였다. 둘째 딸인 호안(Joan: 1535-1573)은 38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카를로스5세는 온갖 병치레는 다 하면서 정부(情婦) 및 숨겨놓은 애인이 많기로 유명했다. 그 중에서 두명이 특히 유명했다. 요한나 마리아(Johanna Maria)는 파르마의 마르가레트를 낳았고 바르바라 블롬버그(Barbara Blomberg)는 오스트리아의 요한을 낳았다. 세계적인 뉴스서비스로 유명한 블롬버그 집안은 그때부터 유명했다.
카를로스5세와 첫번째 왕비인 포르투갈의 이사벨라
[통치와 영토확장]
카를로스는 겨우 6세 때에 아버지 ‘핸섬한 필립’으로부터 부르군디 지역의 영토를 승계 받았다. 이른바 저지대 국가들과 프랑세-콩트(Franche-Comte)였다. 그러나 대부분 독일 제국의 봉토(封土)였고 그의 탄생지인 플란더스만이 서류상 아직 프랑스 봉토였다. 이렇듯 겉으로는 스페인의 영토이면서도 독일 제국과 프랑스의 봉토로 남아 있게 된 것은 백년전쟁의 잔재이다. 비록 카를로스가 아버지로부터 부르군디 등의 영토를 세습받았지만 아직 코흘리개 어린이였기 때문에 카를로스가 15세 될 때까지 고모인 마르가레트(Margaret)가 섭정으로서 이 지역을 통치하였다. 그 때 묘한 사건이 일어났다. 느닷없이 프랑스가 플란더스의 군주인 카를로스에게 조공을 바치고 충성을 보이라고 요청한 것이다. 프랑스는 카를로스의 아버지인 핸섬왕 필립1세(Philip I The Handsome)도 플란더스의 영주로서 그렇게 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섭정이던 마르가레트는 ‘웃기고 있네!’라면서 프랑스와 한판 전쟁을 벌였다. 하늘의 도움을 받아서인지 프랑스가 패배하였다. 결과, 프랑스는 1528년부터 하릴없이 주장해온 플란더스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였다.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 카를로스 5세의 라이발이었다.
그 기회를 이용하여 섭정인 마르가레트는 카를로스5세를 업고서 부르군디의 영토를 확장하였다. 투르나이(Tournai), 아르투아(Artois), 우트레헤트(Utrecht), 그로닝겐(Groningen), 굴더스(Guelders)를 부르군디에 합병했다. 저지대 국가(네덜란드 지역)들도 전통적으로 프랑스, 또는 신성로마제국의 봉토였다. 1549년, 카를로스5세는 특단의 조치(Pragmatic Sanction)를 통하여 앞으로 저지대국가들은 하나로 통합하며 통치권은 대대로 카를로스의 가족이 맡는다고 선포하였다. 저지대국가들은 스페인 제국에게 있어서 중요한 지역이었다. 카를로스5세 개인적으로 보면 그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었다. 또한 이 지역은 상업이 발달하고 부유하여 스페인 재정의 수입원이기도 했다.
카를로스5세를 신격화한 티티안의 그림 라 글로리아의 일부. 오른쪽 윗편 흰옷입은 사람이 카를로스5세.
[신대륙에서의 스페인]
카를로스는 16세 때인 1516년, 할아버지 페르디난드2세가 세상을 떠나자 아라곤 왕국을 인계받았다. 아라곤 왕국은 아라곤, 카탈로니아(Catalonia), 발렌시아(Valencia), 나폴리, 시실리, 사르디니아(Sardinia)로 구성되어 있었다. 카를로스는 또한 카스티야 왕국을 통치하는 어머니 호안나가 정신이상으로 더 이상 통치하기 어렵게 되자 어머니의 후견인으로서 카스티야 왕국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카를로스는 카스티야 왕국의 통치자가 됨으로서 신세계에 있는 스페인 식민지들을 모두 통치하게 되었다. 이로써 역사상 처음으로 한 사람이 카스티야와 아라곤을 통치하게 되었다. 아라곤은 카를로스의 외조부모인 페르디난드2세와 이사벨라가 공동 군주로서 통치하였으나 다만 어느 한 쪽이 군주가 아니면 다른 쪽도 군주가 될수 없다고 정해져 있었다. 그러므로 페르디난드2세가 세상을 떠나자 여왕이던 이사벨라도 군주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아우구스부르크 공의회. 1530년 6월 25일 카를로스 5세 황제 앞에서 고백을 하고 있는 장면
카를로스가 카스티야의 왕이 되기 위해서는 카스티야 의회(Cortes)와 몇가지 중요한 협상을 해야 했다. 마침내 카를로스는 다음과 같은 조건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카스티야어를 배울것, 궁정 관리로서는 카스티야인 이외의 외국인을 고용하지 않을 것, 카스티야로부터 귀중한 물품들을 반출하지 않을 것, 어머니인 호안나 여왕의 권리를 존중할 것 등이었다. 협상이 타결되자 카스티야의회 대표들은 저 멀리 스페인 중북부의 발라돌리드(Valladolid)에 가서 카를로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를 카스티야로 모셔왔다. 대관식은 1518년에 거행되었다. 이듬해에는 자라고자(Zaragoza)에서 소집된 아라곤의회 앞에서 아라곤의 국왕이 되는 대관식을 가졌고 그 이듬해에는 카탈로니아(Catalonia)의회에서 대관식을 가졌다. 비록 카를로스가 스페인의 군주로서 즉위하였지만 스페인 사람들은 그를 크게 환영하지는 않았다. 스페인에서는 전통적으로 군주가 백성들의 대표인 의회와 법적계약을 맺도록 되어 있다. 카를로스는 어머니인 호안나 여왕이 155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완전한 군주로서 행세하지 못하였다.
포르투갈의 이사벨 공주.
[과중한 세금]
얼마후 카를로스5세를 반대하는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과중한 세금 때문이었다. 카를로스5세는 외국과 전쟁을 치루기 위해서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였다. 카스티야로서는 자기들과 관계도 없는 전쟁에 허리가 부러지는 세금을 내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카를로스5세는 스페인과 아메리카의 고위 관리를 임명할 때에 카스티야 후보자들을 제쳐 놓고 플란더스(플랑드르) 사람들만을 기용코자 했다. 그건 카스티야의회와 합의한 처음 약속과 다른 것이었다. 플란더스는 현재의 벨기에 서부와 네덜란드 남서부, 그리고 프랑스 북부를 포함한 북해에 면한 지역이다. 카를로스5세의 중세(重稅)에 대한 저항은 ‘카스티유 전쟁’(Castillian War of the Communities)으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카를로스5세는 이를 무력으로 제압하였다. 그후 카스티야는 합수브루크 제국에 통합되었으며 제국의 군사력 유지를 위한 막대한 재원을 부담해야 했다.
1520-21년에 일어났던 카스티야 반란에서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하는 카를로스5세. 안토니오 기스베르트 작. 1860년. (Execution of the Comuneros of Castile: Guerra de las Comunidades de Gastilla)
[아메리카에서의 착취]
카를로스5세가 통일된 스페인을 통치하는 기간중에 스페인의 영토는 크게 확장되었다. 악명 높은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Hernan Cortes)와 프란체스코 피짜로(Francisco Pizarro)와 같은 인물들이 10년 남짓의 기간 동안 멕시코의 아즈텍(Aztec)과 페루의 인카(Inca) 제국들을 무력으로 무너트렸기 때문이다. 카를로스5세의 영토확장 사업은 1522년 포르투갈의 페르디난도 마젤란(Ferdinando Magellan: 1480-1521)에 의한 세계탐험에 크게 힘입었다. 철저 가톨릭인 카를로스5세는 영토 확장이 가톨릭을 세계에 전파하는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했다. 당시 서유럽은 이슬람으로부터 상당한 위협을 받고 있었다. 카를로스5세는 마치 이슬람과 경쟁이라도 하듯 신세계에 대한 기독교(가톨릭) 포교에 몰두하였다. 물론 신세계로부터 막대한 양의 금괴가 카를로스5세의 금고 속으로 들어와 제국의 재정을 튼튼하게 만들어 주는 것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정복자 베르날 디아즈(Bernal Diaz)가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폐하에게 봉사하기 위해, 그리고 부자가 되기 위해 신세계에 왔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신세계 정복의 목적을 분명히 알수 있다. 그러나 아메리카 대륙에서 십자가와 카를로스5세의 기치를 앞세운 스페인 정복자들이 저지른 만행은 차마 필설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에 카를로스5세는 일말의 양심을 느끼고 1550년 발라돌리드(Valladolid)에서 관련자 회의를 소집하고 신세계에서의 스페인 통치자들의 도덕성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기까지 했다. 오늘날 아메리카에서 스페인의 영향력은 중미 멕시코로부터 쿠바, 도미니카,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파나마, 컬럼비아, 베네수엘라, 페루, 칠레, 에콰도르, 아르헨티나에 이르기까지 실로 광범위하다. 브라질만이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다.
페루의 인카를 정복하고 있는 프란치스코 피짜로. 1846년 존 에버레트 밀레(John Everett Mllais) 작.
[신성로마제국]
카를로스5세가 카스티야에 이어 아라곤의 국왕이 되던 해인 1519년, 친할아버지인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황제가 세상을 떠났다. 카를로스5세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영토를 승계 받았다. 그해 6월, 카를로스5세는 유일한 경쟁자인 프랑스의 프란시스1세를 물리치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독일국가왕)로 선출되었다. 그로부터 11년후인 1530년, 카를로스5세는 마침내 이탈리아의 볼로냐에서 교황 클레멘트7세(Clement VII)로부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대관(戴冠)되었다. 카를로스5세는 교황으로부터 대관을 받는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다. 그 이후로는 교황의 대관없이 선제후들이 선출하여 대관식을 가졌다.
로마 교황은 스페인 국왕 및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대관식을 직접 주관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클레멘트 7세가 카를로스 5세의 대관식을 주재하고 있다.
카를로스5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신성로마제국에 속한 독일 국가들을 통치하는 권한이 있지만 실제로 독일 국가들은 각 제후들이 통치하였다. 그러한 와중에 독일 국가들은 개신교를 폭넓게 지원하였다. 카를로스5세는 다른 곳은 어쩔수 없다고 하더라도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만은 개신교가 세력을 잡지 못하게 해야 겠다고 결심했다. 그리하여 네덜란드에 종교재판소를 설치하여 이른바 이단자(개신교도)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개신교도들을 가톨릭 교회로부터 파문하는 것이 가장 큰 처벌이었다. 그러다가 1550년에는 이단자로 규정된 사람이면 누구를 막론하고 사형에 처하도록 했다. 정치적 재야운동도 강력한 제재를 받았다. 카를로스5세는 스페인에 대항하는 세력들을 무력으로 제압하기 시작했다. 특히 그가 태어난 곳인 헨트(Ghent)에서의 스페인 반대운동은 체면상 묵과할수 없었다. 카를로스5세는 1539년에 일어난 헨트 폭동(Revolt of Ghent)을 앞장서서 제압하여 무수한 인명을 살상하였다.
헨트 폭동(봉기). 창문에 목매달아 죽인 사람이 보이고 사람들을 죽여서 데머강으로 처넣는 장면들을 볼수 있다.
[해묵은 분쟁]
카를로스5세의 대부분 통치기간은 실로 프랑스와의 분규로 점철되었다. 특히 이탈리아를 놓고 벌인 영토다툼은 지칠줄 모르는 것이었다. 카를로스5세의 상대역은 불구대천의 원수인 프란시스1세였다. 첫 번째 전쟁은 1521년에 일어났다. 프란시스1세는 베니스공국과 손을 잡고 카를로스5세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카를로스5세는 영국과 교황 레오10세(Leo X)와 동맹하여 대항했다. 카를로스5세의 대승이었다. 프랑스군을 밀라노에서 쫓아냈으며 1525년의 파비아 전투(Battle of Pavia)에서는 숙적 프란시스1세를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1526년의 마드리드조약은 프랑스에게 모욕적인 것이었다. 프랑스는 프란시스1세를 석방하는 조건으로 부르군디를 카를로스5세에게 양도해야만 했다.
카를로스 5세가 직접 참여한 파비아 전트. 프란시스1세를 생포하였다. 16세기 브뤼셀의 타페스트리.
석방된 프란시스1세는 프랑스로 돌아와 프랑스의회에게 마드리드 조약을 거부토록 했다. 자기가 구금된 상태에서 다른 프랑스의 대표가 카를로스5세와 맺은 조약이기 때문에 무효라는 주장이었다. 얼마후 유럽의 정세는 이상하게 변하였다. 교황 클레멘트7세(Clement VII)가 영국의 헨리8세, 이탈리아의 베니스공국, 플로렌스공국, 밀라노공국과 연맹을 맺어 신성로마제국(스페인 왕국 포함)이 이탈리아를 점거한데 대하여 항거하였다. 카를로스5세는 군대를 이끌고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수 없었다. 마드리드 조약이 체결된지 이듬해인 1527년, 카를로스5세의 군대는 로마를 포위하고 교황 클레멘트7세를 사실상 구금하였다. 마침 당시 영국왕 헨리8세는 첫째 부인인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코자 했으며 교황은 이를 허락할 기세였다. 아라곤의 캐서린은 카를로스5세에게 숙모가 된다. 철저 가톨릭인 카를로스5세는 교황이 헨리8세의 이혼을 허락하는 것을 좌시할수 없었다. 그러나 그후의 전쟁은 소모적으로 지지부진하여 무언가 단안을 내려야 할 입장이 되었다. 1529년 캄브라이 조약(Treaty of Cambrai)가 맺어졌다. 이 조약은 ‘숙녀분들의 평화조약'(Ladies' Peace)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카를로스5세가 어릴때 그를 양육한 부르군디의 고모와 프란시스1세의 어머니가 ‘좋은 것이 좋은 것 아니냐? 왜 싸우냐?’면서 협상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협상의 결과, 프란시스는 이탈리아에서의 주장을 포기했으며 대신 카를로스5세에게 양도키로 한 부르군디를 계속 통치토록 했다.
캄브라이 조약. 프란시스 1세의 어머니인 사보이의 루이스가 조약에 서명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호버 이 카사노바 작.
세 번째 전쟁은 1535년 일어났다. 밀라노공국의 군주가 세상을 떠나자 카를로스5세는 프란시스1세의 소유권 주장에도 불구하고 아들 필립(필립2세)을 밀라노공국의 통치자로 임명하였다. 프랑스와 스페인간에 또 다시 전쟁이 불붙었으나 전세는 쌍방간 역시 지지부진했다. 프란시스1세는 밀라노를 정복하지 못했으나 대신 카를로스5세의 동맹인 사보이 공작의 영토 상당부분을 점령했다. 그 중에는 중심지인 토리노(Torino: Turin)도 포함되었다. 1538년 니스에서 휴전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휴전은 오래가지 못했다. 니스의 휴전협정으로부터 4년 후인 1542년 다시 전쟁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프란시스1세가 오토만 터키의 술탄인 술레이만(Suleiman)과 손을 잡았으며 반면 카를로스5세는 영국의 헨리8세와 동맹했다. 실상 유럽제국들은 오토만 터키의 서진(西進)을 무척 우려하였다. 오토만 터키는 지중해 연한에 군대를 포진하고 지중해를 통한 스페인 등의 무역을 위협하였다. 그리고 급기야 1529년에는 비엔나까지 진격하여 공성하였다. 카를로스5세는 북아프리카의 오토만 터키 세력과도 전투를 벌여야 했다. 그리하여 1535년에는 튜니스에서 이슬람을 몰아내는 승리를 거두기까지 했다. 이듬해인 1536년 프란시스1세가 오토만 제국의 술레이만과 손을 잡고 카를로스5세에게 대항한 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카를로스 5세와 오토만 제국의 술레이만
프랑스-오토만제국의 함대가 니스를 점령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은 밀라노로 진격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카를로스5세가 직접 지휘한 영국-스페인의 대규모 연합군이 이번에는 프랑스 북부를 공략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영국-스페인 연합군은 처음에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후로는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기본적으로 헨리8세는 골수 로마가톨릭을 싫어하였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오토만 터키와의 전쟁이 시작된 후로 카를로스5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제국의 국가들에게 전쟁비용을 부담토록 요청했다. 이같은 요청은 간혹 제국의회에서 부결되기도 했다. 개신교의 독일 국가들은 오토만 터키가 가톨릭을 견제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굳이 카를로스5세를 지원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1554년 또 다른 평화조약이 맺어졌다. 모든 것을 원위치 한다는 내용이었다. 프랑스와 스페인간의 마지막 전쟁은 1551년 프란시스1세의 대를 이어 프랑스의 앙리2세가 일으켰다. 처음에는 로레인(Lorraine)에서 승리를 거두는 등 성공적이었으나 프랑스군은 이탈리아 전선에서 계속 패배하여 어려움을 겪었다. 이 전쟁은 몇 년을 지나면서 지속되었다. 카를로스5세는 아직도 전쟁중인 1556년 아들 필립에게 양위를 하였고 동생 페르디난트1세에게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술레이만의 비엔나 공성. 술레이만은 오토만 제국의 군주이면서 시인이었고 군사개혁자였으며 금세공장인이었다. 그는 오토만제국의 법률, 문학,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종교개혁의 와중에서]
마틴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은 카를로스5세가 17세 때인 1517년 일어났다. 카를로스5세가 스페인 왕으로 등극한 다음해였다. 카를로스5세는 1519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으므로 마틴 루터 문제가 한창이던 때였다. 1521년, 카를로스5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마틴 루터를 봄스(Worms)의회에 출석하여 토론케 하였다. 카를로스5세는 마틴 루터가 참석만 한다면 안전은 책임지겠다고 약속하였다. 카를로스5세는 기본적으로 마틴 루터의 개혁 아이디어에 대하여 수도승들 간의 논쟁일 뿐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나중에 카를로스5세는 마틴 루터와 그 추종자들의 자격을 정지하고 그들의 주장을 불법이라고 선언하였으나 다른 대외적인 일 때문에 개신교에 대한 후속조치를 하지는 못했다. 그러는 와중에 독일에서는 1524-26년 농민봉기(Peasants' Revolt)가 있었고 이어 1531년에는 루터를 중심으로한 슈말칼딕 동맹(Schmalkaldic League)이 형성되었다. 카를로스5세는 북부 유럽에서 개신교의 세력이 증가하고 있었지만 독일에 대한 문제는 동생 페르디난드에게 위임하고 자기는 아메리카등 해외의 일에만 전념하였다. 페르디난드는 카를로스5세의 양위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봄스(Worms)공의회에 참석하여 설명하는 마르틴 루터. 에밀 야콥작.
1545년, 트렌트 공회(Council of Trent)가 열려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에 카를로스5세는 루터주의자들의 슈말칼딕 동맹을 불법으로 몰아 해산토록 하였다. 슈말칼딕 동맹은 독일 국가 중에서 일부 가톨릭 영토를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를로스5세의 신성로마제국 군대는 독일 남부에서 슈말칼딕 동맹군을 물리쳤으며 이듬해인 1547년에는 루터주의 리그의 맹주인 작소니 선제후인 요한 프레데릭(Johann Frederick)을 물리치고 헤쎄(Hesse)의 필립을 포로로 잡았다. 그리하여 카를로스5세는 1548년 이른바 아우구스부르크 잠정조치(Augusburg Interim)를 만들어 ‘서로 물고 뜯고 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조금 진정하자’라며 개신교를 어느 정도 인정해 주었다. 그러나 개신교 제후들은 카를로스5세가 골수 가톨릭인 것을 알고 있는지라 공공연히 카를로스5세의 하는 일을 반대하였고 심지어는 1552년 프랑스의 앙리2세와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로 인하여 결과적으로 카를로스5세는 2선으로 후퇴할 생각을 갖게 되었다.
반개혁 운동을 결의한 트렌트 공의회
[말년의 생활]
카를로스5세는 1556년 각종 지위를 모두 양위하였다. 아들 필립에게는 스페인 제국을 주었다. 스페인 제국은 스페인, 네덜란드, 나폴리, 그리고 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를 말한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타이틀과 오스트리아에 있는 영토는 동생 페르디난드에게 넘겨주었다. 카를로스5세는 은퇴후 엑스트레마두라(Extremadura)에 있는 유스테(Yuste)수도원에서 지냈다. 그는 심한 통풍(痛風)에 걸려 고생했다. 은퇴 2년후인 1558년 9월 21일 카를로스5세는 향년 58세로 세상을 떠났다. 26년후 그의 유해는 엘 에스코리알에 있는 산 로렌조(San Lorenzo)수도원의 왕실 판테옹으로 이장되었다.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의 왕실 판테옹. 관들이 차곡차곡 진열되어 있다.
[문학속의 카를로스5세]
- 바이런 경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송가’(Ode de Napoleon Buonaparte)에서 카를로스5세를 단순히 The Spaniard로 표현했다.
- 샤를르 드 코스터(Charles de Coster)의 걸작 Thyl Ulenspiegel(1867)에서는 카를로스5세가 사후 연옥에 가서 그가 생전에 종교재판을 통해 고통을 준 사람들의 고통을 그대로 경험하는 벌을 받는 얘기가 들어 있다.
- 작곡가 에른스트 크레네크(Ernst Krenek)의 오페라 ‘카를5세’(Karl V: 1930)는 카를로스5세의 생애를 플래쉬백(Flashback: 과거 회상장면)으로 처리하였다.
-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에르나니(Ernani)의 제3막에서는 카를로스5세(돈 카를로)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대관식을 갖는 장면이 소개된다. 오페라에서는 돈 카를로가 샬레만뉴의 무덤 앞에서 기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돈 카를로는 연적이며 반도의 지휘자인 에르나니를 용서한다고 선언한다. 오페라 ‘에르나니’는 빅토르 위고의 원작을 기본으로 한 작품이다. 빅토르 위고의 원작에서는 카를로(카를로스5세)가 경직되고 시니컬한 사람이었으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된 후에는 관용적이고 책임 있는 황제가 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 말타의 매(The Maltase Falcon)는 말타가 처음으로 카를로스5세에게 선물한 것이다.
- 카를로스5세가 플랑드르에서 청년시절을 지낼때 어느 주점에서 맛있는 맥주를 대접받은 일이 있다. 이로부터 카를로스5세는 와인보다 맥주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오늘날 네덜란드의 하흐트(Haacht) 맥주회사는 카를로스5세를 기념하여 Charles Quint라는 맥주를 생산하고 있으며 헤트 앙커(Het Anker)맥주회사는 Gouden Carlolus라는 맥주를 생산하고 있다. 이 맥주는 1년에 한번, 카를로스5세의 생일에 양조한다.
- The Simpsons에서 헨리8세(Homer Simpson)는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이혼과 관련하여 ‘내가 캐서린의 목을 자르지 못하는 것은 캐서린의 아버지인 카를로스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캐서린의 아버지는 아라곤의 페르디난드2세이며 스페인의 왕인 카를로스5세가 아니다. 캐서린은 카를로스5세의 숙모가 된다. 어쨌든 헨리8세가 캐서린을 처형하지 못한 것은 페르디난드2세 때문이 아니라 카를로스5세 때문이었다고 한다.
- 2003년도 영화인 Luther에서는 토번 리브레헤트(Torben Liebrecht)가 카를로스5세의 역할을 맡아했다.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의 한 장면. 돈 카를로스는 카를로스5세의 손자이며 필립2세의 아들이다. 돈 카를로스는 프랑스의 엘리자베스 드 발루아 공주와 사랑하는 사이였으나 나중에 정치적인 문제로 인하여 엘리자베스 드 발루아는 돈 카를로의 아버지인 필립2세와 결혼하였다. 그로 인하여 번민에 빠진 돈 카를로스는 아버지 필립2세의 철권통치에 대하여 반항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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