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합스부르크 사람들

사탄왕 카를로스2세 (Carlos II The Bewitched)

정준극 2008. 2. 20. 11:31

[사탄왕 카를로스2세] (Carlos II The Bewitched)

1661-1700 (재위 1665-1700)



카를로스 2세


돈 카를로스의 비참한 운명은 근친결혼 탓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스페인 왕실에서 또 한 사람의 괴물인 카를로스2세도 근친결혼의 결과라는 주장이다. 카를로스2세  역시 합스부르크 가문과 관계가 있다. 보통 ‘마법에 걸린 카를로스’라고 불리는 카를로스2세는 어떤 인물이었는지 살펴본다. 카를로스2세는 스페인 국왕 및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통치자로서 1665년부터 1700년까지 5년동안 군림하다가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인물이다. 선왕은 필립4세이며 후왕은 필립5세이다. 카를로스2세는 두 번 결혼했다. 오르레앙의 미라아 루이사(Maria Luisa)와 노이부르크의 마리아 안나(Maria Anna)와 결혼했다. 카를로스2세의 어머니는 합스부르크 혈통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Mariana)이다.


마드리드 왕궁


[합스부르크의 여파]

당시 스페인 국왕은 이베리아 반도의 스페인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있는 스페인의 영토, 즉 피에드몬트(Piedmont), 교황청 영토, 베니스 공국을 제외한 이탈리아 전역; 남부 저지대에 있는 스페인 영토(플란더스 등); 멕시코로부터 필리핀에 이르기까지 스페인의 해외 영토를 통치하는 군주였다. 카를로스2세도 마찬가지였다. 카를로스2세는 합스부르크 출신인 필립4세와 역시 합스부르크 출신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 여왕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중 유일하게 생존한 아들이다. 아버지 필립4세와 어머니 마리아나는 삼촌과 조카 사이이다. 카를로스2세의 탄생은 모든 스페인 국민들의 기쁨이었다. 왜냐하면 만일 필립4세가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나면 스페인은 또 다시 왕위계승의 분란에 휩싸이게 될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기쁨이었을까?

 

 카를로스2세의 첫번째 부인 오르레앙의 마리 루이스

 

[사탄의 권세에 빠진 사람]

카를로스2세는 스페인 역사에서 El Hechizado(사탄적인 사람)이라고 불린다. 자기가 무능하고 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은 사탄의 권세 때문이라고 주장했으며 나중에는 종교재판관의 모의에 빠져 무고한 사람들을 사탄으로 몰아 화형에 처한 일이 있기 때문에 그런 별명이 붙었다. 카를로스2세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무기력했다. 이에 대하여 카를로스2세 자신은 ‘나의 문제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근친결혼 때문이 아니라 마법(sorcery)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은 복잡한 영토를 유지하고 번영시키기 위해 근친간에 결혼토록 하여 혈연으로서 묶어 놓고자 했다. 특히 삼촌-조카간의 결혼은 보통이었다. 카를로스2세의 가까운 친척들 중에는 조카-삼촌간, 친사촌간, 조카와 이모간의 결혼이 유별나게 많았다. 카를로스2세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조카였다. 어머니 마리아나는 스페인의 마리아 아나(1604-46)와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페르디난트3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그러므로 마리아 아나는 카를로스2세의 숙모이면서 동시에 할머니가 된다. 증조부나 증조모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더 했다. 그중에는 완전히 미친 사람도 더러 있었다. 카를로스2세의 먼 할머니가 되는 호안나(Joanna)는 대표적이다. 아무튼 당시 왕실간의 결혼은 너무 복잡하다. 이를 제대로 파악하는 일은 족보학자들의 몫이다.

 

 

카를로스2세의 두번째 부인인 노이부르크의 마리아 안나  


[스페인-합스부르크의 마지막 인물]

카를로스2세는 스페인-합스부르크 왕조의 마지막 군주이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근친결혼에 의한 나쁜 점은 모두 이어 받았던것 같다. 신체적으로는 불구였고 정신적으로는 지체아였다. 몸의 모습도 기형에 가까웠다. 주걱턱은 합스부르크의 대표적인 유전인자이지만 카를로스2세의 경우에는 너무 심했다. 하다못해 음식을 씹지 못할 정도였다. 혀는 왜 또 그렇게 긴지! 그가 말하는 것을 제대로 알아듣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기형적인 턱과 입 모습 때문인지 침을 자주 흘렸다. 카를로스2세는 뼈대가 약했다. 오래 서있지를 못했다. 하지만 상체부분은 상대적으로 무겁고 컸다. 그는 10살 때까지 유모의 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냈다. 그러한 아이에게 교육을 시킨다는 것은 너무나 과중한 부담이었다. 카를로스2세는 전생애를 통하여 제대로의 교육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유일한 왕자가 아니던가? 웬만한 일이면 다 받아 주었다. 심지어 오래 동안 씻지 않고 지내도 그저 그런가보다 했다. 카를로스2세에게는 이복형이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요한(Johann: Juan)이었다. 필립4세의 사생아이다. 카를로스2세가 국왕이 되자 어머니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가 모든 권력을 쥐어 잡았다. 그러자 이를 보다 못한 이복형 요한이 마리아나 모후를 궁정으로부터 축출하고 권력을 잡았다. 요한이 카를로스2세에게 부탁한 것은 단 하나, ‘제발 머리 좀 빗고 나오세요!’라는 것이었다. 카를로스2세의 유일한 취미는 사격이었다. 마드리드 북서쪽에 있는 에스코리알(Escorial) 영지에 나가 사격으로 며칠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

 

카를로스 2세가 사냥을 자주 나갔던 엘 에스코리알 영지(사진은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


[쇠퇴일로의 스페인]

카를로스2세의 시대는 스페인으로서 고난의 시대였다. 경제는 침체되고 전국에서는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들이 줄을 이었다. 스페인 영토에 대한 군주로서의 통치력은 대단히 약화되었다. 카를로스2세의 무능력하한 통치는 공공연하게 논란되었으며 이 틈을 타서 프랑스의 영향력이 물밀듯 밀려 들어왔다. 카를로스2세의 통치기간중 그의 어머니가 섭정으로서 정사를 주물렀다. 카를로스2세의 이복형제인 요한이 섭정을 축출하고 권력을 잡았지만 1679년 요한에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 마리아나는 다시 궁정으로 돌아와 행세하였다.

 

카를로스2세의 이복형제인 오스트리아의 요한(후안 호세) 

 

[1680년의 종교재판 사건]

카를로스2세는 1680년의 역사적으로 유명한 스페인 종교재판(Spanigh Inquisition)사건의 사실상 주관자였다. 카를로스2세는 교회가 종교재판을 빙자하여 120명을 체포하여 종교재판을 받도록 했고 그중 21명은 사탄이라고 하여 화형에 처하는 일을 묵인하였다. 카를로스2세는 임기 말년에 귀족들의 압력을 받아 1680년의 종교재판에 대한 진상파악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위원회가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저주받아 마땅할 종교재판소(Holy Office라고 불렀음)가 아무것도 모르는 카를로스2세를 부추켜 죄도 없는 사람들을 무서운 화형으로 처벌토록 위임받았다는 것이다. 결국 무능한 국왕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카를로스2세의 아들 필립5세가 국왕이 되자 그는 그래도 아버지를 생각한다고 이 보고서를 모두 회수하여 소각했다. 그래서 당시의 진상을 정확하게 적은 보고서는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1680년의 종교재판의 한 장면. 두명의 신부(왼쪽)가 이단이라고 하여 고문받고 있는 사람에게 고백을 강요하고 있는 장면.

 

[결실 없는 결혼]

1679년, 18세의 카를로스2세는 오를레앙의 마리 루이스(Marie Lousie: 1662-1689)와 결혼하였다. 마리 루이스는 오를레앙 공작 필립1세의 큰 딸로서 루이14세와는 유일한 남매간 이다. 마리 루이스는 사랑스런 여자였다. 그런데 카를로스2세가 성기능장애지인지 자녀가 없었다. 마리 루이스는 후사를 생산하지 못한 절망감에 결혼 10년후인 1689년, 2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8세의 카를로스2세는 대단히 상심하였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상심속에 빠져 있을수는 없었다. 후사를 보아야 했다. 카를로스2세는 23세의 마리아 아나(Maria Ana)와 결혼했다. 팔라티네이트(Palatinate)선제후인 필립 윌리엄의 딸이었다. 마리아 아나는 신성로마제국의 레오폴드1세 황제의 처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두 번째 결혼도 첫 번째 결혼과 마찬가지로 그렇게도 갈망하는 후사를 생산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카를로스2세는 나이가 들수록 점치 이상하게 행동했으며 무슨 일에나 과민반응을 보였다. 어느때는 선조들의 유해를 모두 관에서 꺼내어 보아야겠다며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카를로스2세는 첫 번째 부인 마리 루이스의 묘소에 자주 가서 우는 일이 많았다.


스페인의 종교재판으로 인한 화형장면

 

[부르봉 왕조의 시작]

1700년 카를로스2세가 38세로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나자 스페인-합스부르크의 명맥은 끊어졌다. 임종하기 전 카를로스2세는 조카의 아들인 필립(Philippe)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당주(d'Anjou)공작인 필립은 루이14세와 카를로스2세의 이복여동생인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의 손자이다. 이로써 스페인은 합스부르크에서 떨어지고 대신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한편, 카를로스2세는 만일 필립이 왕위를 승계하기 어렵게 되면 대안으로 친사촌인 샤를르를 지명하였다. 오스트리아의 샤를르는 합스부르크 혈통이다. 이로 인하여 저 유명한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1702-1713)이 일어나 전세계를 피로 물들였다. 전쟁의 결론은 부르봉 왕조가 스페인의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다. 필립5세에 의해 시작된 스페인의 부로봉 왕조의 혈통은 1975년부터 국왕으로 있는 후안 카를로스1세(Juan Carlos I)에 이르기 까지 이어져 왔다.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에 대하여는 별도 항목을 참조하시기 바람!


카를로스 2세의 뒤를 이어 스페인왕에 오른 필립 5세 


[기타 사항]

벨기에의 샬르루아(Charleroi)는 카를로스2세의 이름을 따서 붙인 지명이다. 카를로스2세의 재임기간 중인 1666년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총독 나무르(Namur)백작이 세운 도시이다. 태평양상의 카롤린 군도(Caroline Islands)는 1686년 스페인 해군제독 프란시스코 라제아노(Francisco Lazeano)가 카를로스2세를 기념하여 붙인 명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