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이 대관한 마지막 황제 프레데릭3세 (Frederick III)
1415-1493 (1440-1493)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레데릭3세는 로마교황이 마지막으로 대관식을 주관한 황제이다. 프레데릭3세는 1452년 로마에서 교황 니콜라스5세(Nicholas V)에 의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대관식을 가졌다. 사실 프레데릭3세는 어렵게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독일의 선거인단이 합스부르크가 아닌 다른 황제를 선출코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프레데릭3세는 그런 어려운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제국의 개혁을 반대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한편, 프레데릭3세는 자기에게 적이 될만한 사람들을 제거코자 노력했다. 우선 조카인 어린 라디슬라우스 포스트쿠스(Ladislaus Posthumus)를 구금하고 영원히 그의 후견인이 되어 오스트리아 공국과 헝가리 및 보헤미아의 통치권을 장악하려 했다. 라디슬라우스는 남부 오스트리아 공국과 헝가리 및 보헤미아의 군주였다. 구금되었던 라디슬라우스는 1452년 프레데릭3세가 교황에 의해 황제로서 대관식을 갖던 해에 석방되었다. 라디슬라우스는 당시 12세였다. 프레데릭3세는 또 다른 조카로서 티롤의 군주인 지기스문트(Sigismund)에게도 같은 방법으로 압력을 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레데릭3세는 헝가리와 보헤미아에 대한 통치권을 확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1485년에는 헝가리 왕 마티아스 코르비누스(Matthias Corvinus)에게 패배하여 비엔나로부터 도피해야 했다. 그는 비엔나에서 세상 떠날 때까지 5년을 살았다. 결과적으로 프레데릭은 그의 정적들보다 오래 살아 여러 분규를 극복할수 있었다. 그는 1457년 조카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Ladislaus Posthumus)로부터 남부 오스트리아(Lower Austria)를 얻었으며 그의 형제인 알베르트6세(Albert VI)로부터는 상부 오스트리아(Upper Austria)를 승계 받았다. 이런 저런 문제 때문에 프레데릭은 린츠(Linz), 그라츠(Graz), 비너 노이슈타트(Wiener Neustadt) 등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살아야 했다.
프레데릭3세
그런데도 어떤 면에서는 놀랄만큼 성공적인 정치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예를 들면 그는 부르군디의 샤를르(Charles the Bold)에게 압력을 가하여 샤를르의 딸인 메리(부르군디의 마리아)를 자기의 아들 막시밀리안과 결혼토록 한 것이다. 이 결혼으로 막시밀리안이 부르군디를 통치하게 됨으로서 결국 합스부르크는 유럽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프레데릭의 딸 쿠니군데(Kunigunde)를 바바리아의 알베르트4세(Albert IV)와 결혼토록 한 것은 또 다른 정치적 승리였다. 실상 알베르트는 신성로마제국에 속해 있는 몇몇 영지(fief)를 불법으로 차지하고서는 이 영지들을 지참금으로 줄테니 프레데릭의 딸 쿠네군데와 결혼케 해달라고 요청했다. 프레데릭은 처음에 이 제안을 수락했다. 그러나 알베르트가 또 다른 영지인 레겐스부르크(Regensburg)를 강압적으로 차지하자 이 제안을 취소했다. 하지만 당시 아버지 프레데릭과 떨어져서 인스부르크에 살고 있던 쿠네군데는 아버지 프레데릭이 결혼을 취소하였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고 알베르트와 결혼하였다. 분개한 프레데릭이 알베르트와 일전을 겨루고자 했으나 전쟁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는 프레데릭의 아들 막시밀리안의 중재로 일단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전쟁이나 해라. 그러나 행복한 오스트리아는 결혼만 하면 된다’라는 유명한 말은 프레데릭의 말이다.
프레데릭3세와 엘레오노르공주의 결혼식
합스부르크 레오폴드 가계의 에른스트(Ernst)공작의 아들로 1415년 인스부르크에서 태어난 프레데릭3세는 1424년 프레데릭5세로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스티리아, 카린티아, 카르니올라(Carniola)로 구성된 내지 오스트리아(Inner Austria)를 통치하는 공작이 되었으며 1440년에는 프레데릭4세로서 알베르트2세의 뒤를 이어 독일왕으로 선출되었고 1452년에는 프레데릭3세로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선출되었다. 프레데릭은 1452년 37세 때에 18세의 포르투갈 엘레오노르(Eleonor)공주와 결혼하였다. 프레데릭은 신부가 가져온 지참금으로 그동안 이곳저곳에서 빚진 것을 갚도 나아가 자기의 권력을 굳건히 만들게 되었다. 프레데릭은 1446년 비엔나 콘코르다트(Concordat)에 교황청(Holy See)과 함께 가입하여 합스부르크 왕조 및 교황청과의 유대를 강화하였다. 프레데릭은 로마에서 교황 니콜라스5세(Nikolas V)에 의해 대관식을 가진 마지막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바 있다.
프레데릭은 1493년 향년 77세로 린츠에서 세상을 떠났다. 왼쪽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이 잘못되어 세상을 떠났다. 프레데릭의 관은 비엔나의 성슈테판성당에 있다. 중세에서 가장 중요한 조각 작품이다. 절단한 다리는 그와 함께 안치되었다. 비엔나와 비너 노이슈타트에 추기경 교구를 설치한 것은 프레데릭의 또 다른 업적이다. 그 때까지 교황청과 협상하여 비엔나와 비너 노이슈타트에 추기경 교구를 설치코자 했으나 이루지 못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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