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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를 오스트리아의 수도로 삼은 하인리히2세(야소미어고트)

정준극 2008. 3. 27. 21:41

비엔나를 오스트리아의 수도로 삼은 하인리히2세

슈테판 대성당 완성자 - 야소미어고트

 

 비엔나 쇼텐슈티프트(아일랜드 수도원)의 정면 벽에 있는 하인리히2세 모습

 

비엔나를 처음으로 오스트리아의 수도로 삼은 사람은? 바벤버거 왕조의 하인리히2세이다. 비엔나의 상징인 성슈테판 대성당을 완성하여 봉헌한 사람은? 바벤버거 왕조의 하인리히2세이다. 오스트리아를 신성로마제국 변방의 분봉령(Margrave)에서 공작령(Duchy)이 되게 한 사람은? 비엔나에 처음으로 궁전을 지은 사람은?  비엔나에 아일랜드 수도승들을 초청하여 가톨릭 교회를 부흥시키고자 했던 사람은? 바벤버거의 하인리히2세이다. 하인리히2세는 야소미어고트(Jasomirgott)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비엔나는 그를 기리기 위해 슈테판성당에서 페터스키르헤(베드로 성당)로 뻗어 있는 그라벤 다음의 길을 야소미어고트 슈트라쎄(Jasomirgott Strasse)라고 이름 붙였다. 야소미어고트는 바벤버거 왕조의 궁전인 암 호프(Am Hof)를 건설하여 오스트리아 공국의 본부로 삼았다. 야소미어고트는 아일랜드 수도승들을 위해 쇼텐슈티프츠(Schottenstift)를 건설하였다. 쇼텐이라는 말은 스코틀랜드를 뜻하지만 실은 아일랜드를 말한다. 라틴어에서 아일랜드를 Scotia Major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알수 있다. 야소미어고트 때문에 비엔나는 오스트리아에서 클로스텐부르크(Klostenburg), 크렘스(Krems), 멜크(Melk)를 능가하는 대도시로 발전하였고 이후 합스부르크에 의한 신성로마제국, 오스트리아 공국, 헝가리 및 보헤미아 왕국의 본산이 되었다. 이렇듯 야소미어고트의 기여가 다대하므로 비록 본란(本欄)에서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인물들을 주축으로 소개하기로 했지만 바벤버거의 사람들도 한두명 소개코가 하는 바이다. 

 

비엔나 시청앞 공원에 있는 야소미어고트의 기념상

 

야소미어고트라고 하는 하인리히2세는 아버지 레오폴드3세에 버금할 만큼 신앙이 독실하였다. 하인리히2세는 제2차 십자군 전쟁에 주도적으로 참가하여 성지에까지 갔다 왔다. 그는 무슨 일이든지 겸손하게 '주님의 뜻'을 내세우며 하나님이 돌보아 주심을 간구하였다. 그래서 매사에 입버릇 처럼 Ja so mir Gott helfe(주님께서 나를 도우시도다)라고 말하였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아예 Jasomirgott 대공이라고 불렀다. 야소미어고트라는 용어가 기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14세기였다. 기록에는 Jochsamergott라고 되어 있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는 아직도 확실한 설명이 없다. 일부에서는 아랍어라는 설명도 있다. 십자군 전쟁으로부터 얻은 표현이라는 것이다. 나중에 어떤 유명한 언어학자가 '아, 그건 Ja so mor Gott helfe라는 뜻이야!'라고 주장했다. 영어로 번역하면 Yes, God willing(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라고 할수 있다. 야소미어고트의 아버지 레오폴드3세의 신앙심도 세상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독실한 것이었다. 그의 치세 때에 성슈테판 성당의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었음은 재론할 여지가 없는 사항이다. 그래서 성슈테판 대성당의 한 쪽에는 지금도 레오폴드3세를 기리는 채플(예배처)가 있다. 이곳에 레오폴드3세의 초상화가 마치 성화(聖화)처럼 장식되어 있다. 레오폴드3세는 '성스러운 레오폴드'라는 별명이 있다.

 

 

야소미어고트가 지은 쇼텐슈티프트(아일랜드 수도원) - 비엔나 중심지역의 암 호프 옆에 있다.

 

바벤버거 왕조의 공자인 하인리히2세(1107-1177)의 직함은 처음에는 라인 팔라틴 분봉백작(1140-1141), 오스트리아 분봉영주(1141-1156), 바바리아 공작(1141-1156), 오스트리아 대공(1156-1177)이었다. 아버지인 레오폴드3세는 처음에는 라인 팔라틴 백작령의 영주였을 뿐이었다. 아버지인 레오폴드3세가 세상을 떠나자 큰 아들인 레오폴드4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팔라틴 백작령의 영주가 되었다. 그러나 레오폴드4세가 뜻하지 아니하게 일찍 세상을 떠나자 팔라탄 백작령은 레오폴드4세의 동생인 하인리히2세에게 돌아갔다. 마침 그 때에 신성로마제국에서는 벨펜(Welfen) 왕조와 슈타우펜(Staufen) 왕조사이에 영토 분쟁이 있었다. 슈타우펜 왕조의 편에 서 있던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바바리아를 통치하는 벨펜 왕조의 '자만심 많은 하인리히' 편을 들어주지 않고 바바리아를 떼내어 바벤버거에게 주었다. 이로써 하인리히2세는 운좋게도 바바리아를 손에 넣게 되었다. 얼마후 프레데릭1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자 벨펜 왕조에 미안한 감을 이기지 못하여 바바리아를 '자만심 많은 하인리히'의 아들인 '사자왕 하인리히'에게 넘겨 주었다. 이렇게 되자 바벤버거 측에서 '아니, 왜 줬다가 뺏느냐?'면서 항의를 했다. 프레데릭1세 황제는 바벤버거의 불만을 완화하기 위해 변방의 분봉 백작령에 불과한 오스트리아를 일약 공국으로 승격시키고 바바리아에서 완전 독립시켰다. 그리하여 하인리히2세는 최초의 오스트리아 대공이 되었다. 이같은 조치를 위한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칙령이 이른바 Privilegium Minus이다.

 

성슈테판 대성당의 레오폴드3세 채플

 

하인리히2세는 오스트리아 대공으로 격상되자 아버지대부터 줄곳 살아온 클로스터노이부르크(Klosterneuburg)에서 1145년 비엔나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비엔나 중심지에 암 호프(Am Hof) 궁전을 지었다. 이와 함께 1155년에는 성슈테판 대성당이 완공되어 하나님께 봉헌되었다. 하인리히2세가 언제 첫 결혼을 했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다만, 로타르2세(Lothar II)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딸인 게르트루트(Gertrud)와 결혼하여 1143년까지 살았다는 기록은 있다. 5년후인 1148년, 하인리히2세는 비잔틴 제국의 마누엘1세(Manuel I)황제의 조카딸인 테오도라 콤네나(Theodora Comnena)와 결혼하였다. 이렇듯 하인리히2세가 유명 가문과 결혼으로 맺어진 것은 바벤버거 왕조의 위상을 크게 높여주는 것이었다. 하인리히2세의 동생은 프라이징(Freising)의 추기경이 된 오토(Otto)이다. 오토는 역사학자로서 유명하며 특히 왕가의 족보 전문가였다.

 

야소미어고트의 동생인 프라이징(Freising)의 추기경 오토 (독일 프라이징 대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