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합스부르크 사람들

영국-스페인 전쟁

정준극 2008. 2. 29. 22:48
영국-스페인 전쟁(영-서전쟁)

1585-1604

영국 엘리자베스1세와 스페인-합스부르크의 필립2세와의 전쟁


영국-스페인(영-서) 전쟁은 1585년에 시작되어 거의 20년 후인 1604년 런던조약으로 막을 내린 세계사의 한 단면이다. 이 전쟁은 일괄적으로 계속 진행된 전쟁이 아니라 가끔씩 전쟁을 하다가 쉬기도 하며 진행된 전쟁이므로 다른 전쟁과는 상황이 다르다. 뿐만아니라 전쟁이긴 하지만 자기가 싸우고 있는 상대방 국가가 왜 적국이 되었는지도 잘 모르는 전쟁이며 또한 공식적인 선전포고도 없는 이상한 전쟁이었다. 게다가 영-서 전쟁은 말이 영국과 스페인간의 전쟁이지 실제로 당사국들인 영국이나 스페인의 영토에서는 전투가 벌어진 일이 한번도 없는 전쟁이다. 대서양이 전쟁의 주무대였고 영국해협, 네덜란드와 벨기에 등 유럽의 저지대, 신대륙 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 서인도제도, 멕시코 등지에서 벌어진 전쟁이었다. 한편, 당사국인 영국과 스페인의 국토에서는 전투가 한번도 없었다고 했지만 스페인 해군 일부가 영국 남단의 콘월에 도착하여 잠시 머물다가 간 일이 있기는 하다. 이것을 영국 본토에서 일어난 영-서 전쟁의 한 파트라고 간주한다면 그럴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영-서 전쟁은 1585년 영국이 스페인 합스부르크에 항거하는 저지대 네덜란드(오늘날의 벨기에 지역)를 지원함으로서 시작되었다. 당시 스페인은 합스부르크에 속한 가족이었으며 또한 저지대의 한쪽에는 스페인령 네덜란드(더치)가 있어서 그러지 않아도 종교문제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있던 정통 로마 가톨릭의 스페인으로서 영국이 같은 개신교인 네덜란드를 지원하자 그냥 보고만 있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종교문제라는 것은 1517년 마르틴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 이후 독일을 비롯한 저지대 국가들, 그리고 북구에 이르기까지 개신교를 받아 들이는 바람에 정통 가톨릭인 신성로마제국으로서는 가만히 않아서 보기가 힘들게 되었던 것을 말한다. 신성로마제국은 합스부르크가 주관을 하고 있으며 스페인은 합스부르크의 가족이었다. 영국-스페인 전쟁의 교전 당사국으로서는 스페인 편에 포르투갈이 합세하였고 영국 편으로는 더치공화국(Dutch Republic)이 합류하였다. 영-스페인 전쟁의 스페인측 총사령관은 필립2세와  필립3세가 앞장을 섰으며 산타 크루즈(Santa Cruz)후작, 메디나 시도니아(Medina Sidonia) 공작, 파르마(Parma)공작 등이 지휘관으로 출전하였다. 영국측 총사령관은 엘리자베스1세 여왕이었으며 해적이었던 프란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 악명 높은 노예상인 존 호킨스(John Hawkins), 그리고 레이체스터(Leicester)경이 참전하였다. 간단히 말하여 결과는 스페인의 승리였고 공연히 콧대만 높았던 영국은 머리를 숙여야 했으며 이와 관련하여 런던조약이 체결되었다.

 

영국여왕 엘리자베스1세(헨리8세와 앤 볼레인의 딸)


[영-서 전쟁의 배경]

네덜란드를 지원한 영국은 처음에는 전황이 지지부진하였으나 2년후인 1587년 카디즈(Cadiz)전투에서 대승을 거둬 우세를 보였고 이어 1588년에는 무적함대라고 하는 스페인의 아르마다(Armada)를 격파함으로서 기세가 등등하게 되었다. 그러나 1589년에는 스페인이 전열을 가다듬어 새로 편성한 아르마다를 이끌고 대반격에 나서서 라 코르냐(La Corna)와 리스본(Lisbon) 해전에서 영국에게 커다란 손실을 입혔다. 스페인은 1589년의 해전에서 영국을 물리치자 이를 기회로 아예 영국해군을 초토화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대서양에 두 편대의 아르마다를 추가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험난한 날씨 때문에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스페인은 처음에 영국과의 해전에서 아르마다가 패전하자 그 충격에서 벗어나고자 국력을 기울여 해군력을 증강하였다. 결과, 아메리카로부터 스페인으로 황금과 보물을 운반하는데에는 거의 문제가 없었다. 물론 스페인의 보물을 빼앗으려는 영국 해적과 간헐적인 접전이  있었지만 영국으로서는 기껏 해적을 앞세운 해전이었기 때문에 정규 해군인 아르마다를 이겨내지는 못하였다. 영국과 스페인이 대서양에서 치고받고 하는 중에 이번에는 스페인이 브리타니(Brittany)와 아일랜드(Ireland)에서의 반영국 저항운동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영국으로서는 대단히 난처한 입장이었다. 그리하여 계속 전쟁만 하면 서로 이득이 무엇이겠느냐는 의견의 일치를 보아 결국 1604년 스페인의 필립3세와 새로 영국왕이 된 스코틀랜드 출신의 제임스1세 사이에 런던조약이 맺어졌다. 스페인과 영국은 아일랜드와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 무력행사를 중지하기로 합의하였으며 영국은 해상에서 해적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양국은 서로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보겠으나 실제로 양국은 소모적인 전쟁으로 국고가 고갈된 형편이었다.

 

 스페인의 필립2세

 

[종교문제가 발단]

그런데 실제로 두 나라의 전쟁에는 종교문제가 배경이 되어 있었다. 1560년대에 접어들어서 스페인의 필립2세는 종교를 문제로 삼아 영국의 왕위 계승 논쟁에 뛰어들었다. 물론 상업적인 문제도 컸었다. 가톨릭인 필립2세는 역시 철저한 가톨릭인 영국여왕 메리와 결혼하였었고 메리 여왕이 세상을 떠나자 영국의 왕위는 법적으로 남편인 자기에게 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영국은 메리 여왕의 후임으로 메리의 이복 여동생인 엘리자베스를 선택하였다. 메리 여왕은 헨리8세의 첫번 째 부인인 스페인(아라곤)의 캐서린에게서 태어난 딸이었으며 엘리자베스 여왕은 헨리8세의 두 번째 부인인 앤 볼레인에게서 태어난 딸이었다. 헨리8세가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볼레인과 결혼하기 위해 그때까지만 해도 로마 가톨릭이었던 영국의 종교를 성공회로 바꾼 것은 유명한 사건이다. 새로 여왕이 된 엘리자베스는 당연히 성공회였다.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은 영국이 가톨릭 국가로 남아 있기를 원했다. 하지만 새로 여왕이 된 엘리자베스는 로마 가톨릭에 반대하여 누구나 영국교회의 예배에 강제적으로 참석해야 하며 만일 가톨릭 미사에 참석한다면 처벌하겠다고 선포했다. 이와 함께 영국은 네덜란드에서의 개신교 활동을 지원하였다. 이는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에게 적대적인 행동이었다.

 

 이베리아 반도 서남단에 있는 카디즈(Cadiz)를 영국함정들과 스페인 함대가 격돌하였다.

 

[왕실의 비호를 받은 노예무역]

영국의 사략선(私掠船: 전시에 적의 상선을 나포할 수 있는 허가를 받은 민간 무장선. 실은 해적선)들이 대서양에서 스페인의 보물선을 공격하여 약탈하는 것은 스페인의 재정에 막대한 손실을 주는 것이었다. 한편, 1562년부터 시작된 노예상인 존 호킨스(John Hawkins)의 아프리카 노예무역은 영국 왕실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 그러자 스페인은 존 호킨스가 서인도제도와 노예를 무역하는 것을 밀수 행위라고 강력히 비난했다. 1568년 노예상인인 존 호킨스와 해적 프란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가 서인도제도에서 노예무역을 하려다가 멕시코의 베라크루즈 부근에서 스페인 함선의 급습을 받아 몇척의 영국측 선박이 침몰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써 스페인과 영국의 관계는 더구나 급랭의 물살을 타게 되었다. 이듬해에 영국은 스페인령 네덜란드에 군수물자를 운송하던 스페인 선박을 몇척이나 나포하였다. 노예상인 호킨스와 해적 드레이크는 대서양에서 스페인이 무역을 독점하는 것을 타파하기 위해 해적행위를 더욱 강화했다. 그나저나 영국 사람들, 겉으로는 신사인척 하지만 속으로는 불쌍한 아프리카 흑인들을 잡아다가 노예로 팔아먹는 일이나 하는 지독히 야비한 인간들인듯 싶다.          

 

스페인의 무적함대 아르마다(Armada) 


[엘리자베스 여왕의 용단]

그로부터 거의 20년이 지난 1585년에 전쟁이 터졌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해적 드레이크를 불러 해적행위를 눈감아 주겠으니 그저 스페인 함대를 산산조각으로 만들어 달라고 당부했다. 드레이크는 여왕이 자기를 해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해군사령관 쯤으로 인정해주자 충성을 다하겠다고 엎드려 절하였다. 드레이크는 해적선을 이끌고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가서 산토 도밍고(Santo Domingo), 카르타제나(Cartegena), 플로리다(Florida)의 산아우구스틴(San Augustin)을 포위하고 스페인 보물선들이 일체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당시 영국은 네덜란드에서 ‘침묵자 윌리엄’(William the Silent)이 일으킨 스페인 항전을 지원하고 있었다. 네덜란드의 대스페인 항전은 80년이나 끄는 기나긴 전쟁이었다. 그러자 스페인의 필립2세는 ‘영국! 저들을 그대로 놓아두었다가는 참으로 안되겠다!’라고 생각하고 대함대를 이끌고 영국을 침공코자 했다. 스페인의 대함대는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카디즈(Cadiz)에 정박하여 영국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1587년 4월 드레이크가 이끄는 이른바 영국해군(실은 해적선단)이 카디즈를 급습하여 37척의 스페인 함선을 불태웠다. 바로 그 해 2월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사촌인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메리 1세)을 처형하는 사건이 있었다.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엘리자베스 여왕의 직전 여왕이었던 영국의 메리가 아님)은 전통 가톨릭이었다. 이로 인하여 유럽의 가톨릭 군주들은 분노하였고 그들대로 회합을 하여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를 폐위하고 대신 스페인의 필립2세를 영국 왕으로 임명하였다. 그해 7월, 필립2세는 로마 교황으로부터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를 폐위시켜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로마 교황청으로서는 영국의 성공회가 눈의 가시였다. 그래서 그 전에 교황 비오5세(Pius V)는 로마 가톨릭을 극진히 핍박하는 엘리자베스를 파문까지 한바 있다. 이와 함께 교황은 열국의 군주들에게 자기가 영국 왕을 선택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스페인의 필립2세를 영국 왕으로 선택하였다. 아무튼 이처럼 복잡한 사건은 아마 유럽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일이었다. (필립 2세의 아들은 돈 카를로스는 필립 2세가 자기와 결혼하기로 약속되어 있던 프랑스의 엘이사베스 드 발루아 공주와 결혼하자 번민하던 중에 네덜란드가 스페인에 반기를 들고 독립을 쟁취코자 하자 이들을 후원하려다가 실패한 사건이 있었다. 이 이야기는 프리드리히 쉴러가 '돈 카를로스'라는 희곡으로 썼고 그것을 바탕으로 베르디다 '돈 카를로'라는 제목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스페인의 무적함대. 영어로는 Invincible 이라고 불렀다. 패배를 모르는 무적이라는 뜻이다.


[해적 드레이크의 전공]

영국은 해적 드레이크가 스페인의 무적함대인 아르마다를 무찌르자 ‘그래, 그거야! 아르마다 좋아하네. 해적 전법이 제일이야~!’라면서 전통적인 해전방식을 해적 스타일로 과감히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국으로서는 대서양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스페인을 물리쳐야 했다. 영국은 스페인의 보물선을 계속 노략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네덜란드와 프랑스에 있는 스페인 저항 세력을 지원했다. 그러나 영국이 스페인의 아르마다를 패배시킨 것은 별로 중요한 전투가 아니었다. 스페인의 선박 수십척에 불을 질러 타격을 주었을 뿐이었다. 영국으로서는 더 확실하게 스페인 해군이 힘을 쓰지 못하도록 해야 했다. 1589년 영국은 대서양에 있는 스페인 함대를 바다 속으로 빠트리기 위해 드레이크가 지휘하는 ‘영국판 아르마다’를 대서양에 파견했다. 드레이크의 목적은 스페인의 보물선을 공격하여 아메리카에서 스페인으로 가는 황금과 은을 가로채는 일, 1580년부터 필립2세가 통치하고 있는 포르투갈에서 스페인을 몰아내어 포르투갈에 합스부르크가 아닌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게 함으로서 스페인을 견제토록 하는 일 등이었다. 그런데 드레이크의 해군은 정예해군이라기 보다는 해적들이 주축을 이룬 것이어서 조직적이지 못했다. 결국 드레이크의 영국 해군은 스페인의 정규 아르마다와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막대한 손실을 입고 퇴각해야 했다. 물론 리스본을 점령하지도 못했다. 드레이크의 영국 해군은 설상가상으로 선상에 질병이 크게 번져 그나마 남아 있던 병사들이 계속 죽어가는 불운을 겪었다. 게다가 아소레스(Azores)로 행하던 영국해군은 기상악화로 선박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바람에 난파를 당하는 등 또 다른 피해를 보았다. 결국 드레이크의 활동에 국가 재정을 쏟아 부었던 엘리자베스는 심각한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영국의 공격으로 스페인도 대단한 피해를 입기는 입었다. 만일 드레이크의 영국 해군이 목적을 이루었다면 스페인은 영국에 굴복하고 평화를 구했을 것이다.

 

대해전이 벌어졌던 아소레스 섬(오늘날의 모습) - 포르투갈에서 가까운 대서양 섬. 아름다운 풍광으로 유명하다

 

[열두사도의 위력]

한편, 스페인은 영국의 끈질기고도 계속되는 공격에 더 이상 당하고만 있을수 없어서 해군을 혁신적으로 개편하고 강화하였다. 결과, 스페인은 종전의 아르마다보다 훨씬 규모가 큰 대함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새로운 함대의 이름은 ‘열두 사도’(Twelve Apostles)였다. 뿐만아니라 대함대를 호송하는 소함대를 두어 신속한 대응체제를 마련하였으며 첩보 시스템도 대폭 강화하였다. 그로 인하여 1590년대에는 영국 노략선들이 더 이상 스페인의 보물선을 건드리지 못했다. 1591년 어느날은 영국으로서 최악의 상태였다. 스페인이 아소레스 부근에서의 전투에서 영국 기함(旗艦)인 리벤지(Revenge: 복수)를 나포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때 스페인은 며칠전의 허리케인으로 여러 척의 전함을 잃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함대를 용감하게 공격하여 막대한 손실을 입히고 기함까지 나포하였던 것이다. 레벤지호의 선장인 리챠드 그렌빌(Richard Grenville)경이 끝까지 스페인의 ‘열두 사도’에 대응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음은 역사에 남는 일이었다. 스페인이 ‘열두 사도’에 호송선단을 배치한 덕분에 스페인은 아메리카로부터 과거에 비하여 3배에 이르는 황금과 은과 각종 보물을 본국으로 운송할수 있었다. 한편, 영국의 영웅이라고 하는 프란시스 드레이크(Sir Francis Drake)와 존 호킨스(John Hawkins)는 1595-96년에 푸에르토리코, 파나마등지에서 스페인과의 해전을 벌이던 중 모두 전사했다. 이 2년간의 전투로 영국은 거의 재기불능 정도에 까지 이르렀다. 또한 1595년에는 스페인의 일개 부대가 우연히 영국 서남부의 콘월(Cornwall)에 도착하여 영국 해군의 보급기지를 장악하고 펜잔스(Penzance)에 있는 해적선들을 불태웠으며 마을에 들어가 교회에서 가톨릭 미사를 드린후 군수품들을 가지고 무사히 빠져 나온 일이 있었다. 그것도 영-서 전쟁의 한 파트였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프란시스 드레이크에게 작위를 수여하고 있다.


[카디즈 공략]

1596년에는 영국이 더치(Dutch)와 함께 카디즈를 공략하여 항구에 정박하여 있던 스페인의 함대를 상당히 파괴하였으며 이어 카디즈를 점령하여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아무튼 도시를 불태워 버린 일이 있었다. 얼마후에는 스페인 군대가 프랑스의 북부 브리타니를 침공하여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을 몰아내고 칼레(Calais)까지 점거하였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2만 군대를 프랑스로 보내어 스페인과 대전토록 했다. 영국군은 아소레스(Azores)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또 다시 실패를 맛보아야 했다. 마침내 1598년 프랑스와 스페인은 베르뱅(Vervins)평화조약을 맺고 상호 군사행동을 중지키로 합의했다. 이로써 영국과 스페인간의 종교문제로 인한 전쟁은 일단 마무리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스페인 합스부르크는 치사하지만 영국과 더치 선박에 대하여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였다.

 

영국의 노예상인 존 호킨스. 해군사령관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 누가 영국을 신사의 나라라고 불렀나요?

 

[아일랜드의 9년 전쟁]

1595년, 영국은 스페인과의 전쟁이 어쨋든 마무리되지 이번에는 아일랜드에서 ‘9년 전쟁’(Nine Years War)을 시작되었다. 그 이전에 아일랜드의 얼스터(Ulster)영주들인 휴 오닐(Hugh O'Neill)과 레드 휴 오도넬(Red Hugh O'Donnell)은 영국의 강압적인 통치에 항거하여 봉기한 일이 있었다. 이에 스페인은 아일랜드의 그러한 봉기를 지원하였다. 영국이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 스페인에 대항하는 봉기가 일어났을 때 군사를 지원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스페인은 1596년에 아르마다 1개 함대를 아일랜드에 파견하였으나 가는 도중에 북부 스페인 해안에서 폭풍을 만나 거의 난파지경이 되었다. 스페인은 이듬해인 1597년에도 아르마다 함대를 다시 파견하였으나 영국 해안에 당도하였을 때 또 다시 날씨 때문에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은 아일랜드의 반도들이 섬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바다를 봉쇄하는 등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는 사이에 1598년 필립2세가 세상을 떠나고 필립3세가 스페인 왕이 되어 전쟁을 계속하였으나 전처럼 죽기 아니면 살기로 덤벼 들지는 않았다.

 

불타는 스페인의 아르마다


[영-서 평화조약]

전쟁은 평화조약으로 마무리 되었으나 스페인은 1601년 다시 아일랜드 반군을 지원하기 위해 아르마다를 아일랜드에 파견하였다. 스페인 군대 3천명은 킨세일(Kinsale)에 상륙하였지만 불행하게도 즉각 영국군에 포위되었다. 아일랜드 반군이 달려와 영국군을 에워쌌으나 스페인군과의 연락이 부실하여 영국군에게 대패를 당하였다. 그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킨세일 전투(Battle of Kinsale)이다. 스페인군은 영국군에게 항복하고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아일랜드 반군은 계속 항쟁하다가 1603년에 끝내 항복하였다.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세상을 떠난 직후였다. 스코틀랜드의 제임스1세가 새로 영국왕이 되자 우선적으로 스페인과 평화협상을 추진하였다. 스페인과 영국은 1604년 런던조약을 체결하고 이제 그만 싸우기로 합희했다.

 

런던의 소머셋 하우스(Somerset House)에서 열린 1604년의 런던조약


[스페인의 중남미 독점]

영국은 사실상 전쟁에 여러차례 실패를 거듭하여 결국 영국이 북미에 식민지를 정착시키는 일이 지연되었다. 그러나 스페인은 이 틈을 이용하여 대서양 항로를 독점하고 중남미를 장악하여 이후 2백여년동안 신대륙을 착취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한편, 영국은 비록 스페인과의 전쟁이 종교문제로 비롯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가톨릭에 반기를 드는 혁명을 계속 추진하였다. 스페인은 17세기에 유럽에서 주도적인 입장이 되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스페인은 프랑스와의 30년 전쟁으로 지나치게 국력을 소비했고 더구나 더치의 해군력 강화로 북유럽 해상에서 더 이상 주도권을 잡지 못하게 되어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영국은 점차 대서양에서의 패권을 장악하게 되어 아메리카에 대한 식민지 사업을 적극 추진하였다.

 

스페인 보물선 함대. 중남미에서 본국으로 보낼 보물을 운반하고 있다. 불쌍한 중남미 백성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