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소프라노

콜로라투라의 파가니니 Adelina Patti (아델리나 패티)

정준극 2008. 2. 26. 16:01
 ▒ 콜로라투라의 파가니니 Adelina Patti (아델리나 패티)

 

 

19세기로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의 소프라노로서 아델리나 패티만큼 전설적인 인물은 없을 것이다. 패티는 전설을 창조하고 전설을 몰고 다닌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였다. 이탈리아계 미국인 소프라노인 패티는 1843년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모두 이탈리아인이었다. 그러나 어릴 때 뉴욕으로 건너왔기 때문에 미국의 소프라노로 간주되고 있다. 패티는 어릴때부터 전문적인 소프라노로서 훈련을 받았다. 패티가 콘서트 연주회에 처음 출연한 것은 겨우 7세 때 뉴욕에서였다. 그만큼 노래에 대한 놀라운 재능이 있었다. 패티의 첫 오페라 데뷔는 16세 때인 1859년 뉴욕의 음악아카데미(Academy of Music)에서 루치아였다. 이어서 가진 런던 데뷔는 연소자인 패티를 당대의 최고 소프라노로 인정한 탁월한 것이었다. 패티의 음성은 대단히 폭이 넓으며 아름답고 순수했다. 음색은 마치 종소리와 같으며 음정은 정확하고 표현에 있어서는 변화가 다양했다. 그의 수잔나는 역사상 최고의 역할이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의 카덴짜는 유명하였다. 신이 내린 목소리가 아니면 그런 카덴짜를 창조해 낼수 없다는 평을 받을 정도였다. 패티는 ‘콜로라투라의 파가니니’라는 별명을 들었다. 패티의 음성은 신의 음성이었지만 무대에 있어서 뛰어난 연기자는 아니었다는 아쉬움을 남겼다. 패티의 레퍼토리는 30개 역할이 넘는다. 특히 벨리니, 도니제티, 로시니, 베르디 등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뛰어났다. 최근 비엔나의 콜로라투라인 에바 린드(Eva Lind: 1966년 인스부르크 출생)가 아델리나 패티를 존경하여 패티를 계승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은 특기사항이다.

 

 

패티는 공식적으로 53세 때인 1906년 무대에서 은퇴하였으나 실제로 마지막 공연은 1914년 그가 71세 때였다. 그는 60세 초반에도 레코드를 취입할 정도로 변함없는 재능을 보여주었다. 당시는 경제가 어려웠던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티의 레코드는 날개가 달린듯 팔렸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패티라는 이름을 사용한 가수가 나왔나?). 물론 환갑이 지난 시절에 음반에 담은 패티의 노래는 한창 젊은 날의 것과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대단한 감명을 주는 것이었다. 완벽한 트릴, 우아한 음성, 놀랄만한 작품해석이었다. 그는 1898년 영국 시민으로 귀화하였다. 그리고 1919년 웨일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유해는 파리의 Pére Lachaise에 영원히 잠들어 있다.


 

제니 린드(1820-1882)는 아델리나 패티에 대하여 ‘세상에 나이아가라 폭포가 하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델리나 패티도 한명 밖에 없다’고 말하며 극찬했다. 제니 린드가 왜 하필이면 패티를 나이아가라 폭포에 비유했는지는 잘 모르는 일이다. 패티는 수많은 작곡가로부터 찬사를 받은 인물이지만 유럽의 왕족으로부터도 대단한 흠모를 받았다. 작곡가로서는 로시니, 오버(Auber), 마이에르베르, 베를리오즈, 그리고 베르디가 찬사를 보냈다. 베르디는 ‘천부적인 예술가이다. 너무나 완벽하다. 그러므로 다시는 그에 버금가는 인물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7세때에 뉴욕에서 첫 무대에 등장했던 패티는 63년 후에 런던의 알버트 홀에서 마지막 공연을 가졌다. 거의 60년에 이르는 그의 연주 생활을 통하여 패티는 유럽, 러시아, 북미, 남미에 걸쳐 수백만명의 음악 팬들에게 놀라운 감동을 주었다. 패티의 찬미자 중에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프랑스의 나폴레옹3세와 유제니 왕비, 영국의 에드워드 7세, 러시아의 알렉산더 2세 등이 있다. 레오 톨스토이는 그의 명작 ‘안나 카레니나’를 패티에게 증정하였으며 버나드 쇼는 음악평론가로서 패티의 영광에 넘친 노래를 극찬하였다. 아마도 패티를 가장 정확하게 소개한 것은 패티가 세상을 떠난 다음해에 나온 ‘마음의 여왕’(Queen of Hearts)이라는 책자일 것이다. 존 프레데릭 콘(John Frederick Cone)이라는 전기작가가 쓴 패티의 일대기이다. 이 책은 1993년 패티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여 재판되었다. 수많은 작곡가들이 패티를 위해 음악을 작곡했지만 이탈리아의 작곡가 겸 지휘자인 루이지 아르디티(Luigi Arditi)는 패티의 열렬한 찬미자로서 많은 곡을 헌정하였으며 미국에서 함께 공연한 일이 많았다.

 

아델리나 패티(1869년 이전)


패티는 성악가로서 비범한 재능을 지니고 있지만 여인으로서 참으로 매력에 넘친 인물이었다. 세계 음악사상 오페라 아티스트로서도 비길수 없이 뛰어난 인물이지만 개인생활에 있어서도 수많은 로맨스를 뿌린 매혹적인 여인이었다. 그리고 음악 역사에 있어서 가장 높은 출연료를 받았던 소프라노였다. 출연료도 많이 받았지만 결혼을 잘해서(?) 헤어질 때는 위자료 명목으로 상당한 재산을 받았다. 부유한 패티는 당시 여성으로서 모험심도 강했다. 모험심이 많다고 해서 이집트 유물 발굴작업이나 아프리카 밀림을 찾아다녔다는 것이 아니라 로맨스에 모험심이 많았던 것이다. 패티는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어쩌면 영원히 환상적인 성격을 가진 여인이었다고 할수있다. 그러므로 패티의 모든 생활은 일반대중의 커다란 관심꺼리였다. 가장 유명한 센세이션은 1868년 그가 25세 때에 프랑스의 귀족인 드 꺼(De Caux)후작과 결혼한 것이었다. 결혼 몇 년후 패티는 드 꺼 후작과 별거하였다. 그리고 결혼하여 아이까지 있는 어떤 유명한 테너와 밀회를 가졌다. 얼마후 두 사람은 결혼했지만 프랑스의 신문들은 패티와 지금은 잊혀진 그 테너와의 연애와 결혼을 19세기 최대의 스테이지 로맨스라고 불렀다.